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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소경이 눈을 떠서 생긴 논란
타인의 무지나 착각, 오해는 쉽게 발견하면서 자신의 무지나 오해나 착각은 좀처럼 알아채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이란 타인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존재이기 때문일까요? 혹시 인간은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전하는 데 요한복음 9장 전체가 할애되어 있습니다. 이는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사건을 전하는 데 복음서 한 장 전체가 할애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양(量)과 중요성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사건을 전하는 데 복음서 한 장 전체가 할애됐다면 그 사건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이 사건은 단순히 소경 한 사람을 고쳐준 사건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사건이 신앙의 중요한 본질을 보여준다고 보았기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매우 ‘원시적’이었기에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그 침으로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른 후에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자 소경은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여러 병자들을 고치셨는데 대부분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끝나기는커녕 이제 시작됐다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동네사람들 간에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눈을 뜬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 하며 동네사람들이 논란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소경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동네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그에게 “당신을 고쳐준 사람은 어디 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분이 지금 어디 계신지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난 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동네를 떠나지 않고 일의 추이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을 당시에 종교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라고 해서 이 놀라운 일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긴 소경으로 태어나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데 그것이 쉽게 믿어지겠습니까?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다른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더욱 믿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위급하지 않은 환자를 고치는 일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불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위급한 환자라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친 일은 불법이었고 그런 일을 행한 자는 안식일 법을 어긴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 중에도 죄인이 어떻게 그런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소수 의견이었으므로 다수 의견에 묻혀버리긴 했지만 말입니다.
논쟁은 감정을 상하게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쟁은 결국 감정싸움으로 비화하고 말았습니다. 소경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은 똑같은 얘기를 여러 번 반복하게 만드니까 드디어 화를 냈습니다. “왜 똑같은 얘기를 자꾸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 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이는, 바리새인들이 자기 설명을 믿지 않고 반복해서 묻고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보니 자기를 고쳐준 분이 누군지 알아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그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은 분이지만 그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자’라고 지칭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왔을 리 없다는 불신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소경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이상하네요. 분명 그분은 내 눈을 뜨게 해줬는데 그분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다니... 하나님은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당신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지 않소? 소경으로 태어났다가 눈을 뜬 사람 얘기를 여러분은 들어본 적 있소? 그분이 하나님이 보낸 분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소?”
그러자 유대인들은 드디어 화를 참지 못하고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회당에서 내쫓았습니다. ‘회당에서 내쫓다’는 말은 단순히 회당 건물에서 쫓아냈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출교처분을 내렸다는 뜻입니다. 곧 그 마을의 유대교 공동체에서 내쫓아버렸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눈이 멀었단 말이요?”
오늘 읽은 요한복음 9장 35절 이하는 이 일이 일어난 후에 예수님이 눈을 뜬 사람을 다시 만나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확인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시력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을 소경으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은유로 읽어야 합니다. 이 사실은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의 반응에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바리새인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도 눈이 멀었던 말이요?”라고 말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들 역시 이 말씀을 은유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 말씀이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때까지의 이들의 언행을 보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들은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이나 그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자신 있게 ‘죄인’으로 몰아붙였으니 말입니다. 좌우간 이들은 그렇게 물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기대했던 대답은 그렇다거나 아니라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이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가혹했습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저는 이 얘기를 읽을 때마다 ‘득도’(得道)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득도’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도를 얻는다, 도를 깨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말이지만 다른 종교, 특히 불교에서는 널리 쓰이고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처럼 불교에서는 이 말이 궁극적인 목표를 가리킵니다. 수도승들은 득도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때로는 수 백 일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득도하기 위해서 홀로 노력합니다. 그 중에는 득도한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득도했다고 해서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모를 뿐’을 득도의 경지라고 표현한 스님도 계십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스스로 기독교를 ‘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득도하기 위해서 불교의 수도승처럼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거저’ 또는 ‘공짜로’ 얻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지만 바로 그 희생 덕분에 우리는 공짜 열차를 탔다고 믿고 있습니다. 결국은 ‘거저’라는 겁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기독교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도 그렇고 비기독교인도 그렇습니다. 모두 기독교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해서는 ‘더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모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유치원생은 미적분을 모릅니다. 그들에게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뭔가를 모를 때는 반드시 그것이 어렵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알 필요가 없는 까닭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것은 시간이 지나고 내가 성장하면 저절로 쉬워지고 결국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으므로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문제입니다. 성장할수록 더욱 더 그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때까지 내가 나의 신앙과 삶을 바라보고 이해해왔던 방식과 틀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럴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입니다. 첫째로, 일어난 일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을 리 없다거나 그를 고친 사람이 안식일 법을 어겼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일 수 없다는 등이 바로 이것입니다. 둘째로, 내 신앙과 삶을 바라보고 이해해왔던 틀과 방식을 바꾸는 길입니다.
저는 ‘득도’가 틀과 방식을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변합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더 알 필요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본다고 생각하면, 안다고 생각하면 내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제 우리 교우들은 벨리에 있는 셔먼옥스 공원으로 노숙자 선교를 나갔습니다. 어른 아이들 해서 모두 21명이 음식과 음료수를 준비해서 다녀왔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어제 처음으로 노숙자들과 손을 맞잡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가 시작할 때 시편 46편의 말씀을 읽고 대표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노숙자 여러 명이 음식을 먹으면서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어달라고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해달라고도 했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유독 제 관심을 끈 분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한참 성경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이 분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한참동안 제가 그분의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그저 아는 척 하며 고개만 끄덕이다가 나중에 그분의 어투가 귀에 익어오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 사람은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는 엘리사의 제자들이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는데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꺾어 연못에 띄우자 도끼가 물위로 떠오른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얘기를 한참 하기에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제가 웃으면서 “그럼 당신은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는가? 만일 당신 도끼가 물에 빠졌는데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띄운다면 쇠도끼가 떠오르리라고 믿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그럼, 물론이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웃고 말았습니다.
저는 어제 저녁에 이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 그런 일이 다시 반복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를 확인해보기 위해서 쇠도끼를 물속에 빠뜨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어떻게 그렇게 믿고 있을까가 궁금해졌습니다. 무식해서도 아니고 단순히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노숙자가 그런 강박감을 가질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 ‘사건’(제게는 ‘사건’이었습니다)이 제 신앙의 틀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이 본다고 하니 여전히 소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본다고 하면 여전히 소경으로 남습니다. 다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거기서 한 치도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다만 일시적일 뿐이고 우리는 궁극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를 뿐’임을 깨달을 때 역설적으로 우리 믿음은 한 치 깊어질 것입니다. ♣
소경이 눈을 떠서 생긴 논란
타인의 무지나 착각, 오해는 쉽게 발견하면서 자신의 무지나 오해나 착각은 좀처럼 알아채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이란 타인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존재이기 때문일까요? 혹시 인간은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전하는 데 요한복음 9장 전체가 할애되어 있습니다. 이는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사건을 전하는 데 복음서 한 장 전체가 할애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양(量)과 중요성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사건을 전하는 데 복음서 한 장 전체가 할애됐다면 그 사건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이 사건은 단순히 소경 한 사람을 고쳐준 사건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사건이 신앙의 중요한 본질을 보여준다고 보았기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매우 ‘원시적’이었기에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그 침으로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른 후에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자 소경은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여러 병자들을 고치셨는데 대부분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끝나기는커녕 이제 시작됐다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동네사람들 간에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눈을 뜬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 하며 동네사람들이 논란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소경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동네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그에게 “당신을 고쳐준 사람은 어디 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분이 지금 어디 계신지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난 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동네를 떠나지 않고 일의 추이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을 당시에 종교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라고 해서 이 놀라운 일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긴 소경으로 태어나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데 그것이 쉽게 믿어지겠습니까?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다른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더욱 믿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위급하지 않은 환자를 고치는 일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불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위급한 환자라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친 일은 불법이었고 그런 일을 행한 자는 안식일 법을 어긴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 중에도 죄인이 어떻게 그런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소수 의견이었으므로 다수 의견에 묻혀버리긴 했지만 말입니다.
논쟁은 감정을 상하게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쟁은 결국 감정싸움으로 비화하고 말았습니다. 소경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은 똑같은 얘기를 여러 번 반복하게 만드니까 드디어 화를 냈습니다. “왜 똑같은 얘기를 자꾸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 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이는, 바리새인들이 자기 설명을 믿지 않고 반복해서 묻고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보니 자기를 고쳐준 분이 누군지 알아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그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은 분이지만 그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자’라고 지칭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왔을 리 없다는 불신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소경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이상하네요. 분명 그분은 내 눈을 뜨게 해줬는데 그분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다니... 하나님은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당신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지 않소? 소경으로 태어났다가 눈을 뜬 사람 얘기를 여러분은 들어본 적 있소? 그분이 하나님이 보낸 분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소?”
그러자 유대인들은 드디어 화를 참지 못하고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회당에서 내쫓았습니다. ‘회당에서 내쫓다’는 말은 단순히 회당 건물에서 쫓아냈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출교처분을 내렸다는 뜻입니다. 곧 그 마을의 유대교 공동체에서 내쫓아버렸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눈이 멀었단 말이요?”
오늘 읽은 요한복음 9장 35절 이하는 이 일이 일어난 후에 예수님이 눈을 뜬 사람을 다시 만나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확인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시력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을 소경으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은유로 읽어야 합니다. 이 사실은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의 반응에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바리새인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도 눈이 멀었던 말이요?”라고 말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들 역시 이 말씀을 은유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 말씀이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때까지의 이들의 언행을 보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들은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이나 그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자신 있게 ‘죄인’으로 몰아붙였으니 말입니다. 좌우간 이들은 그렇게 물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기대했던 대답은 그렇다거나 아니라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이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가혹했습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저는 이 얘기를 읽을 때마다 ‘득도’(得道)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득도’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도를 얻는다, 도를 깨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말이지만 다른 종교, 특히 불교에서는 널리 쓰이고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처럼 불교에서는 이 말이 궁극적인 목표를 가리킵니다. 수도승들은 득도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때로는 수 백 일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득도하기 위해서 홀로 노력합니다. 그 중에는 득도한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득도했다고 해서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모를 뿐’을 득도의 경지라고 표현한 스님도 계십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스스로 기독교를 ‘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득도하기 위해서 불교의 수도승처럼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거저’ 또는 ‘공짜로’ 얻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지만 바로 그 희생 덕분에 우리는 공짜 열차를 탔다고 믿고 있습니다. 결국은 ‘거저’라는 겁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기독교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도 그렇고 비기독교인도 그렇습니다. 모두 기독교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해서는 ‘더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모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유치원생은 미적분을 모릅니다. 그들에게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뭔가를 모를 때는 반드시 그것이 어렵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알 필요가 없는 까닭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것은 시간이 지나고 내가 성장하면 저절로 쉬워지고 결국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으므로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문제입니다. 성장할수록 더욱 더 그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때까지 내가 나의 신앙과 삶을 바라보고 이해해왔던 방식과 틀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럴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입니다. 첫째로, 일어난 일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을 리 없다거나 그를 고친 사람이 안식일 법을 어겼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일 수 없다는 등이 바로 이것입니다. 둘째로, 내 신앙과 삶을 바라보고 이해해왔던 틀과 방식을 바꾸는 길입니다.
저는 ‘득도’가 틀과 방식을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변합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더 알 필요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본다고 생각하면, 안다고 생각하면 내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제 우리 교우들은 벨리에 있는 셔먼옥스 공원으로 노숙자 선교를 나갔습니다. 어른 아이들 해서 모두 21명이 음식과 음료수를 준비해서 다녀왔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어제 처음으로 노숙자들과 손을 맞잡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가 시작할 때 시편 46편의 말씀을 읽고 대표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노숙자 여러 명이 음식을 먹으면서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어달라고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해달라고도 했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유독 제 관심을 끈 분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한참 성경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이 분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한참동안 제가 그분의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그저 아는 척 하며 고개만 끄덕이다가 나중에 그분의 어투가 귀에 익어오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 사람은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는 엘리사의 제자들이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는데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꺾어 연못에 띄우자 도끼가 물위로 떠오른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얘기를 한참 하기에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제가 웃으면서 “그럼 당신은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는가? 만일 당신 도끼가 물에 빠졌는데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띄운다면 쇠도끼가 떠오르리라고 믿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그럼, 물론이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웃고 말았습니다.
저는 어제 저녁에 이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 그런 일이 다시 반복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를 확인해보기 위해서 쇠도끼를 물속에 빠뜨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어떻게 그렇게 믿고 있을까가 궁금해졌습니다. 무식해서도 아니고 단순히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노숙자가 그런 강박감을 가질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 ‘사건’(제게는 ‘사건’이었습니다)이 제 신앙의 틀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이 본다고 하니 여전히 소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본다고 하면 여전히 소경으로 남습니다. 다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거기서 한 치도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다만 일시적일 뿐이고 우리는 궁극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를 뿐’임을 깨달을 때 역설적으로 우리 믿음은 한 치 깊어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