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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목사 (와싱턴한인교회)
1.
팔일 동안 예루살렘 성을 들끓게 했던 초막절이 끝나고, 순례객들은 하나씩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 주민들도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잠시 동안 올리브산 즉 예루살렘 성전을 에워싸고 있던 산으로 물러가시어, 홀로 기도하시면서 분주했던 나날을 정리하십니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 예수님은 다시 성전에 나타나십니다. 아직 남아있던 순례객들이 그분 주변에 몰려듭니다. 축제의 흥분이 가라앉은 때였으므로 가르치기에도, 배우기에도 매우 좋은 환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떼의 사람들이 흐트러진 옷차림의 여인을 끌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돌진해 옵니다. 그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는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조언을 해 주던 법률자문관 같은 사람이었고,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교인들 중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 열성을 보였던 종파에 소속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심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분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유대교에도 위협이 되고, 하나님께도 욕이 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 예수님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그들의 계획이 악해 보이지만, 그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잘 하는 일이요, 선한 일이요, 바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뭔가에 속아넘어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라고 해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처럼 속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을 리 없고, 성경에 대한 지식에 있어 우리보다 못했을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지식과 믿음이 그들을 속지 않도록 보호해주지 못했다면, 우리야 얼마나 더 쉽게 속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더 쉽게 악을 선으로, 죄를 의로 착각하겠습니까?
해리 에머슨 프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제 정신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음을 항상 겸손하게 인정한다”(All intelligent faith in God has behind it a background of humble agnosticism)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사상가 블레즈 빠스깔(Pascal)은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 보여주는 대담성에 경악한다”(I am astonished at the boldness with which people undertake to speak of God)고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부름 등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두 사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좋은 신앙인은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 기도하며 반성하고 질문하고 확인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속아 넘어가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간음의 현장에서 잡아온 여인을 예수님 앞에 피고처럼 세워 놓았습니다. 그들이 왜 여자만 잡아 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남자가 재빨리 달아났기 때문에 못 잡아왔을 수도 있고, 당시 사회적 통념에 따라 남자의 행위를 너그럽게 취급하고 여자의 행위만을 문제 삼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자를 무리 한 가운데 세워 놓은 후, 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모세의 율법은 레위기 20장 10절이나 신명기 22장 22-24절과 같은 규정을 가리킵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간음한 것이 드러날 경우, 남자와 여자를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약혼한 여인이 결혼 전에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하면 ‘투석형’이라는, 가장 잔인한 형벌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약혼한 상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잘 보아야 합니다. 지금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초점은 간음한 이 여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 여인이 죽든 살든, 그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 질문으로써 예수님을 꼼짝 달짝 할 수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모세의 법대로 돌로 쳐 죽여라!”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로마 정부에 예수님을 고발할 빌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 땅 안에서 로마 정부의 허락 없이 누구를 처형한다는 것은 곧 반역죄에 해당하는 중대 과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이 “그 여자를 풀어주어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위반한 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유대 민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제거할 구실을 얻게 되는 셈입니다.
영문도 모르는 군중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말에 자극되어 일제히 돌을 들어 그 여자를 내려 칠 준비를 합니다. 초막절 직후였으므로,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최고조에 올라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 여인의 죄를 더욱 가증스럽게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돌을 내려 칠 기세로 무리들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무릎을 구부려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남겨진 기록으로 볼 때,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쓰신 것이 이번 한 번 뿐이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참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 없습니다.
옛날에 성경을 손으로 베껴 썼던 한 사람은 이 궁금증을 덜어주기 위해 “그들 각자의 죄목을 쓰셨다”고 본문에 첨가해 넣었습니다. 그 사람의 추측이기 때문에 믿을 필요야 없지만, 그럴 듯한 추측이라고 생각합니다. 둘러 서 있던 무리들이 그 글씨를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이 범할 수 있는 다른 죄들을 하나씩 쓰는 것은 상황 전개에 매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금 간음죄를 범한 여자를 보고 흥분해 있습니다. 그러나 흥분한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남의 것을 훔친 죄를 숨기고 있는 사람도, 근거 없는 중상모략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인 사람도, 억울하게 다른 사람에게 피눈물 나게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 순간, 자신들의 ‘숨겨진 죄’를 망각하고 다른 사람의 ‘드러난 죄’를 향해 돌을 집어 들고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이렇게 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자신을 알라!”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십계명을 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냥 끄적거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은 자유입니다만, 분명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쓰셨는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의도는 쓰신 글의 ‘내용’보다는 몸을 낮추어 글을 쓰시는 ‘행동’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흥분하여 폭발 직전에 있을 때, 예수님은 몸을 낮추셨습니다. 겁이 나서 낮추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리들이 대답을 재촉하고 있을 때, 그분은 글을 쓰시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이 곤란한 지경에서 어떤 대답으로 빠져나갈까를 궁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감정이 어느 정도 누그러져 그들의 이성이 회복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
예수님께서 몸을 낮추시어 글씨를 쓰시면서 시간을 끌자, 무리들이 재촉합니다. 얼마 지난 후, 예수님은 몸을 일으켜 그들을 돌아보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을 하신 다음, 다시 몸을 굽혀 계속 쓰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말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주 이 말을 사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이 말씀을 이용하다 보니, 그 뜻이 왜곡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가령, 이런 경우입니다. 제가 어릴 적, 제 부모님께서 다니시던 교회에서 어느 장로님이 아주 부덕한 일을 하셨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런 일들이 그리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그 일을 매우 큰 수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징계를 하기로 했습니다. 불과 80명 정도 모이는 작은 시골 교회였는데, 최종적으로 교인 총회에서 그 장로님이 공개적으로 회개를 하고, 그 회개 정도에 따라 징계 정도를 정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그 장로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당신들은 얼마나 깨끗한데 나를 정죄하느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분과 교회는 결국 화해를 하지 못했고, 그분은 가족들을 데리고 나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까지 갔습니다.
저는 상상해 봅니다. 만일 이 여인이 이 말을 듣고, “그래요, 맞아요. 당신들이나 나나 다를 게 뭔데 그러는거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봤어?”하고 항변했다면, 예수님은 아마도 준엄한 표정으로 그 여인을 향해 다시 꿇어 앉으라고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어차피 다 같은 죄인들인데 따질 게 뭐 있느냐? 좋은 게 좋은 거니, 그냥 덮어두고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 여인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먼저 살펴 보도록 요청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너 자신을 살펴 보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문제를 덮어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생각을 정확히 담아낸 말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죄의 문제를 가볍게 보라는 뜻도 아니고, 죄를 지은 사람을 두둔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죄가 죄인 것을 분명히 알되,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정죄하거나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우리 인간이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이자 미국 복음주의권 기독교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리차드 마우(Richard Mouw) 박사는 그의 책 <무례한 기독교> (Uncommon Decency)에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극악무도한 혹은 경멸스러운 죄를 지은 사람을 대할 때 꼭 기억할 세 가지 사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첫째, 나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의 ‘질’과 죄의 ‘양’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그 차이로 인해 ‘덜 죄인’과 ‘더 죄인’으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죄인은 죄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진리입니다. 아무리 철두철미 죄인이라 해도, 하나님은 그에 대한 희망을 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은 사람을 우리가 포기하거나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언제든지 회복되어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적인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그 어떤 죄인도 새로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설사 어떤 사람이 극악무도한 혹은 경멸받아 마땅한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를 향해 돌을 집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에게 임하여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4.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다시 몸을 구부려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몇 분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릅니다. 무서운 기세로 돌을 들어 들었던 사람들의 손에 서서히 힘이 빠집니다.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돌을 그 자리에 두고 돌아서 가버립니다.
여기서 ‘나이가 많은 이’라는 말이 ‘노인’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인 자치 기구의 멤버였던 ‘공회원’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쓰인 헬라어가 두 가지 의미로 다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 먼저 시작하고 미숙한 사람들이 뒤따랐다는 뜻이 됩니다. ‘공회원’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예수님을 고발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부터 떠났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걸어넣어 제거하려던 그들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난 후, 흩어져 나뒹구는 돌들을 보며,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그러자 여자가 대답합니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뜻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죄를 덮어두려거나 모른체 하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분은 죄의 문제에 대해 그분의 전 생애를 바쳐 헌신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의 문제 때문에 오셨고,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셨고, 그렇게 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받았다는 말은 죄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나서 죄는 더 분명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면, 그 전에 죄로 보이지 않던 것들도 죄로 보입니다. 죄가 더 많아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의 세력 앞에서 너무도 약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찾아오시어 구원해 주십니다. 그분을 만나고 나면 죄가 더 분명해지고 더 많아지지만, 그리고 그분을 만나 사귐을 가지는 중에도 때때로 죄의 힘에 굴복하지만, 그 때마다 그분은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씻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는 죄의 힘에 넘어질 때마다, 우리를 찾아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시면서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회복시켜 다시 일어나게 하고, 그 사랑이 충만한만큼 우리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5.
여러분, 누가 죄 없다 하겠습니까? 누가 죄를 하찮다고 합니까? 누가, ‘죄’라는 단어는 더 이상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용어라고 말합니까? 이 시대 풍조입니다. Boston College의 정치학 교수인 앨런 월프(Alan Wolfe) 박사는 그의 저서 Moral Freedom에서, 미국 사회가 정치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구현한 다음, 이제는 도덕적 자유까지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미국민들이 추구하는 ‘도덕적 자유’란 어떤 도덕률에도 매이지 않고 자기 좋은대로 선택하고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 풍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 풍조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킴으로 절대선도 없고 절대악도 없는 것처럼 우리를 호도합니다. 동시에 이 시대 풍조는 모든 죄를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간음’을 ‘로맨스’로, ‘탐욕’을 ‘비전’으로, ‘이기심’을 ‘개인의 권리’로, ‘파괴’를 ‘개발’로, ‘음란’을 ‘문화’로, ‘술수’를 ‘전략’으로 미화시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방어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속지 마십시다. 그 어떤 말로 미화를 해도 죄는 죄입니다. 그 어떤 주장을 해도, 불변하는 진리가 있는 것이고,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며, 옳고 그른 것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이 불변의 진리 앞에서 서서 우리 자신을 늘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말씀을 거울에 비유합니다(약 1:23).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출 때, 자신의 참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빗나감이 보입니다. 그것을 보고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합리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오, 저는 죄인입니다.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용서하시고 회복하시고 힘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를 늘 기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에 빠져 있을 때, 주님처럼 우리도 그 사람을 찾아가 손을 뻗어 사랑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가는 이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선명하게 죄를 죄로 폭로해야 합니다만, 그럴수록 더욱 뜨겁게 죄인들을 찾아가 그들을 회복시키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반복하게 됩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통나무는 문제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만을 문제삼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덮어두고 ‘죄 권하는 사회’로 타락해 가는 것을 몹시 안타까와하십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불꽃같은 눈을 치켜뜨고 마치 ‘하나님의 감찰관’이라도 되는 듯 주변을 살피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깨어 있으면서,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고 도와줌으로 “복음 안에서 거룩함을 향해 함께 자라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용서하시고, 위로하시며, 새 힘을 주시어, 거룩함을 향해 자라가게 하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분의 은혜를 힘 입으심으로, 죄를 벗어나 의로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 이웃에게도 알게 하십시다. 다들, 틀켜 쥐었던 돌을 버리고 떠나갈 때, 우리는 주님 곁에 남아, 그분과 함께, 죄에 빠진 사람들으로 도와주도록 힘쓰십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돕는 길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이 분명합니다.
1.
팔일 동안 예루살렘 성을 들끓게 했던 초막절이 끝나고, 순례객들은 하나씩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 주민들도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잠시 동안 올리브산 즉 예루살렘 성전을 에워싸고 있던 산으로 물러가시어, 홀로 기도하시면서 분주했던 나날을 정리하십니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 예수님은 다시 성전에 나타나십니다. 아직 남아있던 순례객들이 그분 주변에 몰려듭니다. 축제의 흥분이 가라앉은 때였으므로 가르치기에도, 배우기에도 매우 좋은 환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떼의 사람들이 흐트러진 옷차림의 여인을 끌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돌진해 옵니다. 그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는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조언을 해 주던 법률자문관 같은 사람이었고,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교인들 중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 열성을 보였던 종파에 소속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심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분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유대교에도 위협이 되고, 하나님께도 욕이 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 예수님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그들의 계획이 악해 보이지만, 그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잘 하는 일이요, 선한 일이요, 바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뭔가에 속아넘어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라고 해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처럼 속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을 리 없고, 성경에 대한 지식에 있어 우리보다 못했을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지식과 믿음이 그들을 속지 않도록 보호해주지 못했다면, 우리야 얼마나 더 쉽게 속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더 쉽게 악을 선으로, 죄를 의로 착각하겠습니까?
해리 에머슨 프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제 정신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음을 항상 겸손하게 인정한다”(All intelligent faith in God has behind it a background of humble agnosticism)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사상가 블레즈 빠스깔(Pascal)은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 보여주는 대담성에 경악한다”(I am astonished at the boldness with which people undertake to speak of God)고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부름 등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두 사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좋은 신앙인은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 기도하며 반성하고 질문하고 확인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속아 넘어가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간음의 현장에서 잡아온 여인을 예수님 앞에 피고처럼 세워 놓았습니다. 그들이 왜 여자만 잡아 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남자가 재빨리 달아났기 때문에 못 잡아왔을 수도 있고, 당시 사회적 통념에 따라 남자의 행위를 너그럽게 취급하고 여자의 행위만을 문제 삼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자를 무리 한 가운데 세워 놓은 후, 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모세의 율법은 레위기 20장 10절이나 신명기 22장 22-24절과 같은 규정을 가리킵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간음한 것이 드러날 경우, 남자와 여자를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약혼한 여인이 결혼 전에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하면 ‘투석형’이라는, 가장 잔인한 형벌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약혼한 상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잘 보아야 합니다. 지금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초점은 간음한 이 여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 여인이 죽든 살든, 그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 질문으로써 예수님을 꼼짝 달짝 할 수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모세의 법대로 돌로 쳐 죽여라!”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로마 정부에 예수님을 고발할 빌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 땅 안에서 로마 정부의 허락 없이 누구를 처형한다는 것은 곧 반역죄에 해당하는 중대 과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이 “그 여자를 풀어주어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위반한 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유대 민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제거할 구실을 얻게 되는 셈입니다.
영문도 모르는 군중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말에 자극되어 일제히 돌을 들어 그 여자를 내려 칠 준비를 합니다. 초막절 직후였으므로,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최고조에 올라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 여인의 죄를 더욱 가증스럽게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돌을 내려 칠 기세로 무리들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무릎을 구부려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남겨진 기록으로 볼 때,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쓰신 것이 이번 한 번 뿐이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참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 없습니다.
옛날에 성경을 손으로 베껴 썼던 한 사람은 이 궁금증을 덜어주기 위해 “그들 각자의 죄목을 쓰셨다”고 본문에 첨가해 넣었습니다. 그 사람의 추측이기 때문에 믿을 필요야 없지만, 그럴 듯한 추측이라고 생각합니다. 둘러 서 있던 무리들이 그 글씨를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이 범할 수 있는 다른 죄들을 하나씩 쓰는 것은 상황 전개에 매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금 간음죄를 범한 여자를 보고 흥분해 있습니다. 그러나 흥분한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남의 것을 훔친 죄를 숨기고 있는 사람도, 근거 없는 중상모략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인 사람도, 억울하게 다른 사람에게 피눈물 나게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 순간, 자신들의 ‘숨겨진 죄’를 망각하고 다른 사람의 ‘드러난 죄’를 향해 돌을 집어 들고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이렇게 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자신을 알라!”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십계명을 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냥 끄적거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은 자유입니다만, 분명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쓰셨는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의도는 쓰신 글의 ‘내용’보다는 몸을 낮추어 글을 쓰시는 ‘행동’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흥분하여 폭발 직전에 있을 때, 예수님은 몸을 낮추셨습니다. 겁이 나서 낮추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리들이 대답을 재촉하고 있을 때, 그분은 글을 쓰시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이 곤란한 지경에서 어떤 대답으로 빠져나갈까를 궁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감정이 어느 정도 누그러져 그들의 이성이 회복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
예수님께서 몸을 낮추시어 글씨를 쓰시면서 시간을 끌자, 무리들이 재촉합니다. 얼마 지난 후, 예수님은 몸을 일으켜 그들을 돌아보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을 하신 다음, 다시 몸을 굽혀 계속 쓰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말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주 이 말을 사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이 말씀을 이용하다 보니, 그 뜻이 왜곡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가령, 이런 경우입니다. 제가 어릴 적, 제 부모님께서 다니시던 교회에서 어느 장로님이 아주 부덕한 일을 하셨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런 일들이 그리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그 일을 매우 큰 수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징계를 하기로 했습니다. 불과 80명 정도 모이는 작은 시골 교회였는데, 최종적으로 교인 총회에서 그 장로님이 공개적으로 회개를 하고, 그 회개 정도에 따라 징계 정도를 정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그 장로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당신들은 얼마나 깨끗한데 나를 정죄하느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분과 교회는 결국 화해를 하지 못했고, 그분은 가족들을 데리고 나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까지 갔습니다.
저는 상상해 봅니다. 만일 이 여인이 이 말을 듣고, “그래요, 맞아요. 당신들이나 나나 다를 게 뭔데 그러는거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봤어?”하고 항변했다면, 예수님은 아마도 준엄한 표정으로 그 여인을 향해 다시 꿇어 앉으라고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어차피 다 같은 죄인들인데 따질 게 뭐 있느냐? 좋은 게 좋은 거니, 그냥 덮어두고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 여인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먼저 살펴 보도록 요청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너 자신을 살펴 보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문제를 덮어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생각을 정확히 담아낸 말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죄의 문제를 가볍게 보라는 뜻도 아니고, 죄를 지은 사람을 두둔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죄가 죄인 것을 분명히 알되,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정죄하거나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우리 인간이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이자 미국 복음주의권 기독교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리차드 마우(Richard Mouw) 박사는 그의 책 <무례한 기독교> (Uncommon Decency)에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극악무도한 혹은 경멸스러운 죄를 지은 사람을 대할 때 꼭 기억할 세 가지 사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첫째, 나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의 ‘질’과 죄의 ‘양’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그 차이로 인해 ‘덜 죄인’과 ‘더 죄인’으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죄인은 죄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진리입니다. 아무리 철두철미 죄인이라 해도, 하나님은 그에 대한 희망을 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은 사람을 우리가 포기하거나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언제든지 회복되어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적인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그 어떤 죄인도 새로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설사 어떤 사람이 극악무도한 혹은 경멸받아 마땅한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를 향해 돌을 집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에게 임하여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4.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다시 몸을 구부려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몇 분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릅니다. 무서운 기세로 돌을 들어 들었던 사람들의 손에 서서히 힘이 빠집니다.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돌을 그 자리에 두고 돌아서 가버립니다.
여기서 ‘나이가 많은 이’라는 말이 ‘노인’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인 자치 기구의 멤버였던 ‘공회원’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쓰인 헬라어가 두 가지 의미로 다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 먼저 시작하고 미숙한 사람들이 뒤따랐다는 뜻이 됩니다. ‘공회원’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예수님을 고발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부터 떠났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걸어넣어 제거하려던 그들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난 후, 흩어져 나뒹구는 돌들을 보며,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그러자 여자가 대답합니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뜻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죄를 덮어두려거나 모른체 하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분은 죄의 문제에 대해 그분의 전 생애를 바쳐 헌신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의 문제 때문에 오셨고,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셨고, 그렇게 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받았다는 말은 죄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나서 죄는 더 분명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면, 그 전에 죄로 보이지 않던 것들도 죄로 보입니다. 죄가 더 많아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의 세력 앞에서 너무도 약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찾아오시어 구원해 주십니다. 그분을 만나고 나면 죄가 더 분명해지고 더 많아지지만, 그리고 그분을 만나 사귐을 가지는 중에도 때때로 죄의 힘에 굴복하지만, 그 때마다 그분은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씻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는 죄의 힘에 넘어질 때마다, 우리를 찾아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시면서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회복시켜 다시 일어나게 하고, 그 사랑이 충만한만큼 우리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5.
여러분, 누가 죄 없다 하겠습니까? 누가 죄를 하찮다고 합니까? 누가, ‘죄’라는 단어는 더 이상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용어라고 말합니까? 이 시대 풍조입니다. Boston College의 정치학 교수인 앨런 월프(Alan Wolfe) 박사는 그의 저서 Moral Freedom에서, 미국 사회가 정치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구현한 다음, 이제는 도덕적 자유까지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미국민들이 추구하는 ‘도덕적 자유’란 어떤 도덕률에도 매이지 않고 자기 좋은대로 선택하고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 풍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 풍조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킴으로 절대선도 없고 절대악도 없는 것처럼 우리를 호도합니다. 동시에 이 시대 풍조는 모든 죄를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간음’을 ‘로맨스’로, ‘탐욕’을 ‘비전’으로, ‘이기심’을 ‘개인의 권리’로, ‘파괴’를 ‘개발’로, ‘음란’을 ‘문화’로, ‘술수’를 ‘전략’으로 미화시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방어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속지 마십시다. 그 어떤 말로 미화를 해도 죄는 죄입니다. 그 어떤 주장을 해도, 불변하는 진리가 있는 것이고,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며, 옳고 그른 것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이 불변의 진리 앞에서 서서 우리 자신을 늘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말씀을 거울에 비유합니다(약 1:23).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출 때, 자신의 참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빗나감이 보입니다. 그것을 보고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합리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오, 저는 죄인입니다.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용서하시고 회복하시고 힘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를 늘 기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에 빠져 있을 때, 주님처럼 우리도 그 사람을 찾아가 손을 뻗어 사랑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가는 이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선명하게 죄를 죄로 폭로해야 합니다만, 그럴수록 더욱 뜨겁게 죄인들을 찾아가 그들을 회복시키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반복하게 됩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통나무는 문제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만을 문제삼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덮어두고 ‘죄 권하는 사회’로 타락해 가는 것을 몹시 안타까와하십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불꽃같은 눈을 치켜뜨고 마치 ‘하나님의 감찰관’이라도 되는 듯 주변을 살피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깨어 있으면서,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고 도와줌으로 “복음 안에서 거룩함을 향해 함께 자라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용서하시고, 위로하시며, 새 힘을 주시어, 거룩함을 향해 자라가게 하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분의 은혜를 힘 입으심으로, 죄를 벗어나 의로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 이웃에게도 알게 하십시다. 다들, 틀켜 쥐었던 돌을 버리고 떠나갈 때, 우리는 주님 곁에 남아, 그분과 함께, 죄에 빠진 사람들으로 도와주도록 힘쓰십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돕는 길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