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2
분류 |
---|
김영봉 목사 (와싱톤 한인교회)
1.
지난 주, 저는 두 번의 장례식을 집전했습니다. 두 가정 모두 준비된 죽음이었기에 충격이 크지는 않았으나, 어떤 경우라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슬픔과 아픔을 안겨주게 되어 있습니다.
월요일 저녁에 옷을 차려 입고 장례식장으로 나가는데, 딸 아이가 "월요일 저녁인데, 어디를 가셔요?"라고 묻습니다. "응, 오늘도 장례식이 있다"라고 대답했더니, "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더니 돌아서 자기 방으로 가면서 한 마디를 던집니다. "요즘, 아빠, 천국 많이 보내 드리네! 좋은 일이지!"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딸 아이의 말을 두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로서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이야기일텐데, 제게는 깊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유가족들의 슬픔과 눈물과 아픔 때문에 자칫 놓치기 쉬운 죽음의 본질을 바로 보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유가족과 함께 슬퍼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그분들과 함께 고인의 삶과 죽음을 축하하는 일임을 분명하게 보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뉴저지에서 제가 만난 Jim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감리교 목사님으로서 은퇴하신 분인데, 현역 시절부터 경목 즉 police chaplain으로 봉사하시다가, 은퇴한 이후로는 전적으로 이 일에 전념하시는 분입니다. 이분은 특히 교통 사고 현장에 달려가 가족들을 보살피고, 필요할 경우 고인의 장례식을 집전하는 일을 주로 섬겨 왔습니다. 911 테러 현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입니다.
목회자들에게 위기를 대처하는 훈련을 시키는 세미나에서 이분을 만났는데, 이분이 강의 중에 "저는 1년에 평균 100회 이상의 장례식을 집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강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년 평균 100회라면, 일 주일에 두 번 꼴인데,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주로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장례식인데, 그분은 어떻게 그 아픔과 슬픔을 견뎌내면서 그렇게 자주 장례식을 집전할 수 있었는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마음으로 나누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심한 마음의 병을 얻을 수 있는 법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자주 장례식을 집전하면서도 그렇게 활기차게 살 수 있습니까? 건강 관리에 무슨 비결이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무심정하게, 사무적으로 장례식을 집전하지 않고는 결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저는 그분의 대답에 완전히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I do funerals not to mourn but to celebrate! That is why I am able to keep my spirit alive." "저는 애도하는 마음이 아니라 축하하는 마음으로 장례식을 집전합니다! 제 마음이 늘 밝은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 저는 "아, 역시 비범한 사람에게는 비범한 시각이 있는 법이로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장례식에 임할 때면 늘 그 어구를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애도하는 것이 아니다. 축하하는 것이다."
2.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축하하라는 말이냐? 혹시 만수무강하시다가 축복 가운데 죽은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급작스러운 사고로, 젊은 나이에, 비참한 모습으로 목숨을 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축하할 수 있는가?"
몇 년 전, 저도 이런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학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한 여학생이 선교사의 꿈을 안고 제가 가르치고 있던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습니다. 신앙도 좋고, 성품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두 아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 옆 연구실을 쓰고 있던 교수님의 조교로 일도 했기 때문에, 틈틈이 제 일도 도와주곤 했습니다. 그 여학생을 볼 때마다, "어디, 좋은 신랑감 없나?"하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좋은 학생이었습니다.
이 학생이 졸업을 하고 필리핀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갔습니다. 파송된 지 약 3개월쯤 되어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며칠 전, 아침에 샤워하다가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을 갓 넘긴 상태였습니다. 이 소식은 학교 전체를 심각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때 저는 신학대학원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여학생의 가족들을 모시고 추모 예배를 드리도록 계획했습니다. 예배를 계획하면서 교수 하나 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설교를 해 달라고 청했지만, 누구도 나서기를 꺼려했습니다. 결국, 책임을 맡고 있던 제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배 중에 함께 읽을만한 적당한 성경 말씀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던 부모님들에게 혹은 친척, 친구들에게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오히려 제가 회중석에 앉아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들어 보다가 가당치도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고 싸우고 싶었습니다. 참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질문에 어떤 말이든 해야 하는 설교자의 운명은 때로 담당하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추모예배 시간은 다가오고, 고민하면 할수록 할 말은 생각나지 않고, 마음만 답답할뿐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마음이 바빠지면 일이 더 안되는 법입니다. 아무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결국 예배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최악의 경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말로 설교를 대신하려 했습니다. 제 설교 차례가 오기까지 저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유가족을 위로할 말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제 차례가 오기 몇 분 전, 기도하던 제 마음에 "네 편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라? 그게 무슨 뜻인가를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유한한 우리의 시간과 공간, 우리의 경험의 차원에서만 보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니, 그 여학생의 죽음은 미완성이요, 비참한 사고요, 물거품이 된 꿈이요,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원의 차원에서 보니, 그 여학생이 하나님을 찾고 그분이 주신 비전에 헌신할 때, 이미 그분의 영원한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의 죽음은 미완성도 아니요,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이성으로 안 것이 아니라, 왠지 그렇게 믿어졌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품 안에 있던 그 여학생은 그 죽음으로 인해 잃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가 이루고자 했던 그 비전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 나무 자체로서는 상실이지만, 더 크게 보아, 숲 전체로서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듯, 그 여학생의 죽음은 우리로서는 상실이지만,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안긴 그 여학생도 그 죽음으로써 잃은 것이 하나도 없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잃었다고 느끼고 번민하고 분노하고 절규하는 것은 다만 육신의 눈으로 밖에는, 이 세상의 눈으로 밖에는, 시간의 눈으로 밖에는, 3차원 공간의 경험으로 밖에는 볼 줄 모르는 우리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제 차례가 왔고, 저는 단상에 올라가 이 생각을 담담히 나누었습니다. 인도 출신의 가톨릭 수사 안토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가 말한 바 있듯, 우리는 자수(quilt)의 뒷면을 보고 있을 뿐이므로, 실상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혼란스럽게만 보이던 그 자수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입니다. 그것처럼, 이 비극을 하나님의 편에서, 영원의 편에서 보면 좋겠다는 권면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눈을 달라고 기도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이로써 저 자신이 위로를 얻고 힘을 얻었습니다.
2.
그렇습니다. 아무리 비극적인 죽음이라도 하나님 편에서, 영원 편에서 본다면, 통곡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을 축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원 편에서 보는 눈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의 축하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 선교 초기에 장례식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무슨 좋은 일이 생겼다고 노래하고 난리냐?"며 박해하던 우리 선조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영원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셨던 김활란 박사님의 유언처럼, 장례식을 장송곡이 아니라 개선행진곡으로 치뤄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시간의 무한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천국'을 이 세상과 다른 별도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이란 우리가 아직 온전히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며, '천국'도 역시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죽고 나서 천국에 간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떠나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어 영생한다"는 말은 이생이 무한히 연장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생명과 전혀 다른 생명을 덧입는다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 사도는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 아주 의미 심장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1절과 2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이 장막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4절에 가서 또 한 번 반복합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뜻을 다 알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를 통해 영감된 진리의 말씀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천국과 영생은 이생에 마침표를 찍고 다른 세상에서 이생과 유사한 삶을 무한정으로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 존재가 하나님에 의해 삼켜져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덧입는다' 혹은 '삼켜진다'는 단어가 그런 의미를 전합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우리가 물질적으로 경험하는 이 세상, 우리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과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결국 그 차원으로 삼켜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비유를 해 봅니다. 자주 사용하는 비유입니다만, 연못 속에 있는 애벌레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이생을 마감하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애벌레가 연못 속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과 비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애벌레의 생이 나비의 생에 삼켜진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간다는 말은 애벌레가 연못을 떠나 더 넓은 호수로 옮겨지는 것에 비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연못에 살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창공을 날아다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은 죽고 나서 연장되는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을 삼키게 될 참된 생명을 가리킵니다. 천국은 우주 어느 한 편에 있는 공간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덮고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연결될 때, 우리는 장차 우리를 삼키게 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며, 장차 우리를 덮어씌우게 될 하나님의 차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누누히 "믿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4.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5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유대인들 중 영원에 대해서도, 천국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52절, 53절입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귀신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이 '나의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 하니, 당신이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이오? 또 예언자들도 다 죽었소. 당신은 스스로 누구라고 생각하오?" 이 목숨이 전부요, 이 몸이 전부요, 이 세상이 전부요, 물질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들의 믿음이 여기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위와 같은 유물론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56절에서 그분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기대하며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2천년도 넘는 오랜 옛날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날을 보고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58절을 보면, 한 술 더 뜹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기 전에 "진정으로 진정으로"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그 말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농담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정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잘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입니다. 도대체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입니다. 영원의 차원, 천국의 차원에 계신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이 땅에 몸을 두고 사셨지만, 그분은 영원 안에, 천국 안에 계셨습니다. 영원을 품고 이 땅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서문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분이 사셨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분이 사셨던 생명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영원을 품고 시간을 살고, 천국의 시민으로서 현세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다가 이생을 떠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하게 하나님의 차원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의 차원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에 대한 믿음, 그 생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차원의 삶을 몸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이 사라지는 영원의 차원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생명을 삼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줄 그런 세상을 믿으십니까? 2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다"는 말이 환히 이해가 되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이생을 덧입힐 영생, 우리의 현세를 삼킬 천국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가십시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런 세상, 그런 생명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생에 대해, 물질에 대해 그리고 현세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을 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은 물질적인 형편이 비교적 좋은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영생을 품고 천국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영생을 믿고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현세에서의 물질에 대한 욕심을 비울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생을 소망하고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현세의 삶에 있어서는 언제까지고 모으기만 하고 잡고 있으려고만 한다면,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소망과 믿음이 커갈수록 물질에 대해 점점 더 마음을 떼고, 마음을 뗀 그만큼 더 비우고 단순해지고 검소해지고, 그렇게 비운 것으로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변화가 있어야만 그 믿음과 소망이 진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서 소유하고 누릴 것 하나도 잃지 않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모든 복을 다 누리기를 소망한다면, 욕심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닐까요?
이번에는 물질적인 형편이 비교적 어려운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지옥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심을 압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생각하는 분들도 계심을 압니다. 하루도 편안히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번민이 많은 분들도 계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원한을 가지고 계신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제와 사고로 인해 동공이 텅 비어버린 분도 계심을 압니다. 이런 상황에 계신 분들은 오늘 저의 말씀이 구름잡는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불과 반세기도 안 되는 과거, 미국 남부 지방 도처에 펼쳐져 있던 목화 농장에서 땡볕 아래 고역을 해 가며 아무 희망도 없는 그 삶을 살아가던 흑인 노예들을 지탱시켜 주었던 유일한 힘이 바로 이 믿음, 이 소망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찌보면 지옥보다 못한 현실을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를 부르면서 그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때로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 ("때로 나는 고아처럼 느낍니다")라고 절규하면서 절망을 토해 냈지만, 또한 "Swing low, sweet chariot, comin' for to carry me home" ("아름다운 수레여, 어서 와서 나를 집으로 데려가 다오")을 부르면서 영원을 바라고 천국을 소망했습니다. 영생과 천국에 대한 그들의 소망은 참혹한 현실을 도피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참혹한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했고, 그 현실을 견디고 극복할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믿음과 소망이 더욱 강해지기를 기원합니다. 그 현실을 바꿀 수 있도록 교회가 돕기 원합니다. 속회를 통해 짐을 나누어 질 수 있기 원합니다. 갑작스러운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저희가 도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장기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경우를 위해 교회 안에 지원 체제를 만들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상담이나 기도가 필요하시면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중보기도팀에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위해 있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필요를 다 채울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한, 여러분의 짐을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 이 믿음과 소망 위에 견고히 서는 것입니다. 절통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그 누가 나의 슬픔 알까"를 찬송하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는, 영생에 대한 소망과 천국에 대한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실로, 우리는 자수의 뒷면을 보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앞면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실상을 알 수 없고, 실상을 알 수 없으면 자주 혼란과 의심과 불신앙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의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인생의 위기는 외적인 조건에서 오기보다는 내적인 조건에서 발생합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 천국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죽음까지도 축하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도대체 앞뒤가 닿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유대인들은 미쳤다고 단정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질만 보이는 사람들에게, 현세만 보이는 사람들에게, 목숨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들은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참된 믿음에 미치지 못했고, 그래서 참된 실상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에 의해 영의 눈을 떠서 참된 믿음에 미쳤고 (다시 말해, "이르렀고"), 참된 소망에 미쳤습니다. 인간이 마침내 다다라야 할 참된 믿음과 소망에 미치신 여러분에게 참된 평강과 기쁨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1.
지난 주, 저는 두 번의 장례식을 집전했습니다. 두 가정 모두 준비된 죽음이었기에 충격이 크지는 않았으나, 어떤 경우라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슬픔과 아픔을 안겨주게 되어 있습니다.
월요일 저녁에 옷을 차려 입고 장례식장으로 나가는데, 딸 아이가 "월요일 저녁인데, 어디를 가셔요?"라고 묻습니다. "응, 오늘도 장례식이 있다"라고 대답했더니, "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더니 돌아서 자기 방으로 가면서 한 마디를 던집니다. "요즘, 아빠, 천국 많이 보내 드리네! 좋은 일이지!"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딸 아이의 말을 두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로서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이야기일텐데, 제게는 깊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유가족들의 슬픔과 눈물과 아픔 때문에 자칫 놓치기 쉬운 죽음의 본질을 바로 보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유가족과 함께 슬퍼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그분들과 함께 고인의 삶과 죽음을 축하하는 일임을 분명하게 보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뉴저지에서 제가 만난 Jim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감리교 목사님으로서 은퇴하신 분인데, 현역 시절부터 경목 즉 police chaplain으로 봉사하시다가, 은퇴한 이후로는 전적으로 이 일에 전념하시는 분입니다. 이분은 특히 교통 사고 현장에 달려가 가족들을 보살피고, 필요할 경우 고인의 장례식을 집전하는 일을 주로 섬겨 왔습니다. 911 테러 현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입니다.
목회자들에게 위기를 대처하는 훈련을 시키는 세미나에서 이분을 만났는데, 이분이 강의 중에 "저는 1년에 평균 100회 이상의 장례식을 집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강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년 평균 100회라면, 일 주일에 두 번 꼴인데,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주로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장례식인데, 그분은 어떻게 그 아픔과 슬픔을 견뎌내면서 그렇게 자주 장례식을 집전할 수 있었는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마음으로 나누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심한 마음의 병을 얻을 수 있는 법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자주 장례식을 집전하면서도 그렇게 활기차게 살 수 있습니까? 건강 관리에 무슨 비결이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무심정하게, 사무적으로 장례식을 집전하지 않고는 결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저는 그분의 대답에 완전히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I do funerals not to mourn but to celebrate! That is why I am able to keep my spirit alive." "저는 애도하는 마음이 아니라 축하하는 마음으로 장례식을 집전합니다! 제 마음이 늘 밝은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 저는 "아, 역시 비범한 사람에게는 비범한 시각이 있는 법이로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장례식에 임할 때면 늘 그 어구를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애도하는 것이 아니다. 축하하는 것이다."
2.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축하하라는 말이냐? 혹시 만수무강하시다가 축복 가운데 죽은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급작스러운 사고로, 젊은 나이에, 비참한 모습으로 목숨을 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축하할 수 있는가?"
몇 년 전, 저도 이런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학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한 여학생이 선교사의 꿈을 안고 제가 가르치고 있던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습니다. 신앙도 좋고, 성품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두 아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 옆 연구실을 쓰고 있던 교수님의 조교로 일도 했기 때문에, 틈틈이 제 일도 도와주곤 했습니다. 그 여학생을 볼 때마다, "어디, 좋은 신랑감 없나?"하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좋은 학생이었습니다.
이 학생이 졸업을 하고 필리핀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갔습니다. 파송된 지 약 3개월쯤 되어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며칠 전, 아침에 샤워하다가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을 갓 넘긴 상태였습니다. 이 소식은 학교 전체를 심각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때 저는 신학대학원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여학생의 가족들을 모시고 추모 예배를 드리도록 계획했습니다. 예배를 계획하면서 교수 하나 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설교를 해 달라고 청했지만, 누구도 나서기를 꺼려했습니다. 결국, 책임을 맡고 있던 제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배 중에 함께 읽을만한 적당한 성경 말씀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던 부모님들에게 혹은 친척, 친구들에게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오히려 제가 회중석에 앉아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들어 보다가 가당치도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고 싸우고 싶었습니다. 참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질문에 어떤 말이든 해야 하는 설교자의 운명은 때로 담당하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추모예배 시간은 다가오고, 고민하면 할수록 할 말은 생각나지 않고, 마음만 답답할뿐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마음이 바빠지면 일이 더 안되는 법입니다. 아무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결국 예배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최악의 경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말로 설교를 대신하려 했습니다. 제 설교 차례가 오기까지 저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유가족을 위로할 말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제 차례가 오기 몇 분 전, 기도하던 제 마음에 "네 편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라? 그게 무슨 뜻인가를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유한한 우리의 시간과 공간, 우리의 경험의 차원에서만 보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니, 그 여학생의 죽음은 미완성이요, 비참한 사고요, 물거품이 된 꿈이요,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원의 차원에서 보니, 그 여학생이 하나님을 찾고 그분이 주신 비전에 헌신할 때, 이미 그분의 영원한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의 죽음은 미완성도 아니요,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이성으로 안 것이 아니라, 왠지 그렇게 믿어졌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품 안에 있던 그 여학생은 그 죽음으로 인해 잃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가 이루고자 했던 그 비전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 나무 자체로서는 상실이지만, 더 크게 보아, 숲 전체로서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듯, 그 여학생의 죽음은 우리로서는 상실이지만,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안긴 그 여학생도 그 죽음으로써 잃은 것이 하나도 없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잃었다고 느끼고 번민하고 분노하고 절규하는 것은 다만 육신의 눈으로 밖에는, 이 세상의 눈으로 밖에는, 시간의 눈으로 밖에는, 3차원 공간의 경험으로 밖에는 볼 줄 모르는 우리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제 차례가 왔고, 저는 단상에 올라가 이 생각을 담담히 나누었습니다. 인도 출신의 가톨릭 수사 안토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가 말한 바 있듯, 우리는 자수(quilt)의 뒷면을 보고 있을 뿐이므로, 실상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혼란스럽게만 보이던 그 자수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입니다. 그것처럼, 이 비극을 하나님의 편에서, 영원의 편에서 보면 좋겠다는 권면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눈을 달라고 기도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이로써 저 자신이 위로를 얻고 힘을 얻었습니다.
2.
그렇습니다. 아무리 비극적인 죽음이라도 하나님 편에서, 영원 편에서 본다면, 통곡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을 축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원 편에서 보는 눈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의 축하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 선교 초기에 장례식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무슨 좋은 일이 생겼다고 노래하고 난리냐?"며 박해하던 우리 선조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영원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셨던 김활란 박사님의 유언처럼, 장례식을 장송곡이 아니라 개선행진곡으로 치뤄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시간의 무한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천국'을 이 세상과 다른 별도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이란 우리가 아직 온전히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며, '천국'도 역시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죽고 나서 천국에 간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떠나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어 영생한다"는 말은 이생이 무한히 연장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생명과 전혀 다른 생명을 덧입는다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 사도는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 아주 의미 심장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1절과 2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이 장막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4절에 가서 또 한 번 반복합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뜻을 다 알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를 통해 영감된 진리의 말씀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천국과 영생은 이생에 마침표를 찍고 다른 세상에서 이생과 유사한 삶을 무한정으로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 존재가 하나님에 의해 삼켜져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덧입는다' 혹은 '삼켜진다'는 단어가 그런 의미를 전합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우리가 물질적으로 경험하는 이 세상, 우리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과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결국 그 차원으로 삼켜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비유를 해 봅니다. 자주 사용하는 비유입니다만, 연못 속에 있는 애벌레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이생을 마감하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애벌레가 연못 속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과 비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애벌레의 생이 나비의 생에 삼켜진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간다는 말은 애벌레가 연못을 떠나 더 넓은 호수로 옮겨지는 것에 비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연못에 살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창공을 날아다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은 죽고 나서 연장되는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을 삼키게 될 참된 생명을 가리킵니다. 천국은 우주 어느 한 편에 있는 공간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덮고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연결될 때, 우리는 장차 우리를 삼키게 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며, 장차 우리를 덮어씌우게 될 하나님의 차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누누히 "믿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4.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5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유대인들 중 영원에 대해서도, 천국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52절, 53절입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귀신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이 '나의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 하니, 당신이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이오? 또 예언자들도 다 죽었소. 당신은 스스로 누구라고 생각하오?" 이 목숨이 전부요, 이 몸이 전부요, 이 세상이 전부요, 물질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들의 믿음이 여기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위와 같은 유물론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56절에서 그분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기대하며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2천년도 넘는 오랜 옛날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날을 보고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58절을 보면, 한 술 더 뜹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기 전에 "진정으로 진정으로"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그 말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농담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정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잘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입니다. 도대체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입니다. 영원의 차원, 천국의 차원에 계신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이 땅에 몸을 두고 사셨지만, 그분은 영원 안에, 천국 안에 계셨습니다. 영원을 품고 이 땅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서문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분이 사셨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분이 사셨던 생명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영원을 품고 시간을 살고, 천국의 시민으로서 현세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다가 이생을 떠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하게 하나님의 차원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의 차원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에 대한 믿음, 그 생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차원의 삶을 몸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이 사라지는 영원의 차원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생명을 삼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줄 그런 세상을 믿으십니까? 2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다"는 말이 환히 이해가 되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이생을 덧입힐 영생, 우리의 현세를 삼킬 천국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가십시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런 세상, 그런 생명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생에 대해, 물질에 대해 그리고 현세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을 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은 물질적인 형편이 비교적 좋은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영생을 품고 천국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영생을 믿고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현세에서의 물질에 대한 욕심을 비울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생을 소망하고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현세의 삶에 있어서는 언제까지고 모으기만 하고 잡고 있으려고만 한다면,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소망과 믿음이 커갈수록 물질에 대해 점점 더 마음을 떼고, 마음을 뗀 그만큼 더 비우고 단순해지고 검소해지고, 그렇게 비운 것으로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변화가 있어야만 그 믿음과 소망이 진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서 소유하고 누릴 것 하나도 잃지 않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모든 복을 다 누리기를 소망한다면, 욕심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닐까요?
이번에는 물질적인 형편이 비교적 어려운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지옥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심을 압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생각하는 분들도 계심을 압니다. 하루도 편안히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번민이 많은 분들도 계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원한을 가지고 계신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제와 사고로 인해 동공이 텅 비어버린 분도 계심을 압니다. 이런 상황에 계신 분들은 오늘 저의 말씀이 구름잡는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불과 반세기도 안 되는 과거, 미국 남부 지방 도처에 펼쳐져 있던 목화 농장에서 땡볕 아래 고역을 해 가며 아무 희망도 없는 그 삶을 살아가던 흑인 노예들을 지탱시켜 주었던 유일한 힘이 바로 이 믿음, 이 소망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찌보면 지옥보다 못한 현실을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를 부르면서 그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때로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 ("때로 나는 고아처럼 느낍니다")라고 절규하면서 절망을 토해 냈지만, 또한 "Swing low, sweet chariot, comin' for to carry me home" ("아름다운 수레여, 어서 와서 나를 집으로 데려가 다오")을 부르면서 영원을 바라고 천국을 소망했습니다. 영생과 천국에 대한 그들의 소망은 참혹한 현실을 도피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참혹한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했고, 그 현실을 견디고 극복할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믿음과 소망이 더욱 강해지기를 기원합니다. 그 현실을 바꿀 수 있도록 교회가 돕기 원합니다. 속회를 통해 짐을 나누어 질 수 있기 원합니다. 갑작스러운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저희가 도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장기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경우를 위해 교회 안에 지원 체제를 만들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상담이나 기도가 필요하시면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중보기도팀에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위해 있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필요를 다 채울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한, 여러분의 짐을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 이 믿음과 소망 위에 견고히 서는 것입니다. 절통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그 누가 나의 슬픔 알까"를 찬송하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는, 영생에 대한 소망과 천국에 대한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실로, 우리는 자수의 뒷면을 보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앞면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실상을 알 수 없고, 실상을 알 수 없으면 자주 혼란과 의심과 불신앙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의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인생의 위기는 외적인 조건에서 오기보다는 내적인 조건에서 발생합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 천국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죽음까지도 축하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도대체 앞뒤가 닿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유대인들은 미쳤다고 단정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질만 보이는 사람들에게, 현세만 보이는 사람들에게, 목숨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들은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참된 믿음에 미치지 못했고, 그래서 참된 실상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에 의해 영의 눈을 떠서 참된 믿음에 미쳤고 (다시 말해, "이르렀고"), 참된 소망에 미쳤습니다. 인간이 마침내 다다라야 할 참된 믿음과 소망에 미치신 여러분에게 참된 평강과 기쁨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