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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목사 (와싱톤한인교회)
1.
‘이름 부르는 것’과 ‘이름 붙이는 것’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실은 전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려는 시도입니다. 만나자마자 이름을 주고받는 서양 문화와는 달리, 우리 한국 문화에서는 ‘통성명’이 사귐의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상대방의 이름을 앎으로써 서로를 향해 자신을 열었음을 드러냅니다. 관계가 트인 것입니다.
이름을 무시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않는다”(출 20:7)고 말씀하십니다. 감옥에서 이름을 무시하고 번호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있는 한 너희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김춘수님의 유명한 시 ‘꽃’이 생각이 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반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것과 전혀 다릅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김춘수 시인의 표현대로, 그 사람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대접을 해 주는 것이지만,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사람과 상관 없는 빛깔과 향기를 내 쪽에서 덮어 씌우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근대사에 보면, ‘빨갱이’ 혹은 ‘운동권’ 혹은 ‘매국노’라는 이름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정죄당하고 고통당했습니다.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 정작 그 이름의 값에 합당한 사상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불행하게도, 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빛깔과 향기’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이름을 뒤집어씌인채 죽음을 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정치적인 환경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생활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잘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부자’라고 단정하고는, 독특한 한 인격체가 아니라 ‘부자’라는 고정 관념으로 대합니다. 행동이나 생각하는 것이 자유스러워 보이는 사람을 보면 ‘자유주의자’라고 단정하고 위험한 인물로 취급합니다. 듣기에 거북한 소리를 하면 ‘극단주의자’라고 단정하고 거부합니다. 변변한 학벌이 없는 사람 같으면 ‘무식한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무시합니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 사람의 독특한 인격은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내가 덮어씌운 그 이름만 보입니다.
있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다가가고, 있는 그대로 나를 상대방에게 여는 것은 매우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 만남을 통해 내가 변화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기보다는 상대방에게 자기가 원하는 이름을 붙여주려 하는 것 같습니다.
2.
오늘 우리는 아주 긴 본문을 읽었습니다. (성경 봉독을 하신 분들이 아마 “잘 못 걸렸다”라고 느끼셨을텐데,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을 알리라는 동생들의 요청을 마다하고 예루살렘 행을 거부하신 예수님은 나중에 몰래 따라 올라가십니다. 아직 당신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낼 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에서 할 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8일동안 지속되는 초막절 축제 중간 쯤에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가 설교하는 것처럼 가르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이라는 말은 성전 바깥 뜰을 가리키는데, 성전 바깥 뜰은 축구장 4개 정도를 합친 정도의 넓은 광장이었습니다. 축제 때는 워낙 많은 순례객이 운집하기 때문에 한 편에서 수십명의 사람을 모아놓고 설교를 해도 그리 괄목할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설교 이후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논쟁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복되는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누구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면서 예수님을 평가하고 판단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붙인 첫 번째의 이름은 ‘무식쟁이’라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서 감탄하는 말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실은 의심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말은, “말은 맞는데, 정말 대단한 말씀인데, 당신의 배경을 볼 때, 도대체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말을 하려면 그만한 학력이 받쳐줘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으니, 믿어지질 않고 오히려 의심이 앞선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히브리말 ‘메시야’는 헬라말로 ‘그리스도’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두 단어는 유대인들이 기다려 왔던 영원한 왕, 영원한 구원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31절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해도, 이분이 하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행하시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딱히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의 이쪽 저쪽을 꿰맞춰서 ‘그리스도가 충족시켜야 할 조건들’을 정리해 놓고, 그 조건들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곤 했습니다. 그 조건 중 하나가 “그리스도는 그 출신 배경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분이 나사렛 출신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7절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조건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다”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당시 사람들 그분이 나사렛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얻기에 또 하나의 큰 결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지켜 보다가 “이 사람은 정말로 그 예언자다”라고 말합니다. 40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단순히 예언자로 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예언자’라는 말은 모세가 신명기 18장 18절에서 예언한 바로 그 예언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세를 시키셔서, 장차 모세와 같은 예언자 즉 제 2의 모세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십니다. 성전 뜰에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던 어떤 유대인들이 이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예수님이 이 이름에도 딱 들어맞는 분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32절에 그들의 심정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 보시오. 그러면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결국,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이름을 예수님께 붙여보고, 그 이름에 걸맞는가를 따져 보고는, 실망하고, 등을 돌리고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품어왔던 어떤 구원자를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들의 마음에 있던 그 이미지와 맞지 않음을 알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그들은 필경 성전 뜰에서 가르치고 있던 다른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이 자신들이 찾고 있는 ‘그리스도의 조건’에 걸맞는지를 따졌을 것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자기들 스스로, 원천적으로 차단시켰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름과 개념과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름과 개념과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는데 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만날 여유가, 그럴 관심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났습니다.
3.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무슨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왜 그런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이 붙인 그 이름에 딱 들어 맞습니까? 여러분이 붙인 그 이름이 만족스럽습니까? 이제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았으니, 예수님을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그 이름을 붙이기 전에,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 사귀어 그분을 충분히 아는 시간을 가졌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51절을 보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도 않고 그분에게 이런 저런 이름을 붙이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본 니고데모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요?”
이 질문은 예수님을 대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만나 그분을 사귀어 그분을 알아감으로 믿음에 이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급하게 그분에게 어떤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따라 그분을 평가하려 하거나 주조하려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우상을 예수님을 통해 믿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허울뿐이지, 그들이 믿는 것은 우상화된 예수, 박제화된 예수, 축소된 예수, 왜곡된 예수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우리에게 드러나시는 그 모습대로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사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이름들을 다 합쳐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다 알지 못할 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철저하게 연구하고 이해했다 하더라도, 제 아무리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제 아무리 많은 학위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내가 예수를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말하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자 중 하나인 필립 얀시(Philip Yancy)는 그의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The Jesus I Never Knew)의 결론에서 이렇게 마무리 짓습니다. 수 많은 해답과 그에 못지 않은 질문을 산출해 낸 나의 예수 탐사는 이제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그 과정에서 결코 예수를 규정지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오히려 예수를 규격화하려는, 그를 상자 속에 가두려는 모든 시도들에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예수는 진정 세상에 살았던 그 누구와도 현저히 다른 존재이다.(427쪽).
진실이 이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가장 바른 길은 우리 자신을 열고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만나고 사귀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진지한 사귐을 나누어간다면, 그분은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놀래키실 것입니다. 참다운 믿음이란 이렇게 모험적이면서도 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신비로운 분이어서, 그분을 알아가면서 그분에게 매혹당하지 않을 방법이 없고, 드류 신학대학원의 전도학 교수 레너드 스위(Leonard Sweet)이 말했듯, 예수님은 알아갈수록 그분에게 미치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17절을 보시겠습니까? 이 구절이 오늘의 요절과 같은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안다.
참된 믿음의 정수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분을 통해 참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선다면, 참된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내 존재의 중심이요 근거요 원천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그분에게 돌아가려는 열심이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만나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원하는 이름이나 개념으로 그분을 판단하고 평가하려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름과 개념과 사상을 접어놓고 그분을 배워갑니다. 그분을 알아갑니다. 그분과 사귀어갑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분의 참된 모습이 점차 드러납니다. 알아갈수록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고, 더 신비롭습니다. 알아갈수록, 그분에게 어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고, 그분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4.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제가 믿는 예수님은 2천년전 유대땅에 사셨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늘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다 알지 못할 분, 다 알 수 없는 분, 그래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분, 그래서 항상 신비로써 저를 깨워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을 이제까지 배우고 사귀고 믿어오면서 그분을 통해 참된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더욱 더 예수님의 말씀이 그분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의 삶이 그분 자신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삶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마땅한 표현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얼마 후에는 필경 그 이름이 부적절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영국 출신의 목사이자 저술가였던 레슬리 웨더헤드(Leslie Weatherhead)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찾아와 "당신 교회의 교인이 되려면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라고 물을 때, "당신에게 진리로 보이는 것만 믿으시면 됩니다."라고 답하곤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저는 오늘의 본문에 기초해서 "참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답하려 합니다. 말은 다르지만, 포함된 뜻은 동일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이름이 아닙니다. 개념이 아닙니다. 참된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 참된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혹은 참된 진리를 향한 진실한 마음, 그 마음이 결국 우리를 예수님을 참되게 만나게 하고, 그분의 신비에 취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저는 자신있게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 마음으로 복음서와 다른 성경을 통해 과거에 오셨던 예수님을 배우시고, 기도와 예배와 묵상을 통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영과 만나 사귀시고, 실천과 봉사를 통해 그분의 삶을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한 컷, 한 컷, 여러분에게 드러나는 그분의 참모습을 보면서 놀랄 것이고, 그분의 신비 앞에 경외감으로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이름들을 다 동원해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그분의 신비로운 현존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럴 때, 김춘수 시인의 표현대로, 그분은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시며 나에게 다가오실 것이고, 그분은 나에게, 나는 그분에게 의미로운 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이 믿음입니다. 다 알지 못할 그분께 나를 열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만나 사귈 때, 우리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모습으로 변모해 갈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는 우리를 변화시킬 믿음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는 이 피곤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진실되게 변화시킬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는 우리를 구원할만한 믿음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한 보석상 주인처럼, 자신의 모든 것과 맞바꾸더라도 추구해 볼 만합니다.
주님,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참된 하나님을 만나
참된 삶을 찾으려는 한 가지 열망을
저희 마음에 주소서.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붙잡게 하소서.
그분의 신비로 인해
매일의 삶이 경이감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고
이생에서 영생을 살게 하소서.
1.
‘이름 부르는 것’과 ‘이름 붙이는 것’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실은 전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려는 시도입니다. 만나자마자 이름을 주고받는 서양 문화와는 달리, 우리 한국 문화에서는 ‘통성명’이 사귐의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상대방의 이름을 앎으로써 서로를 향해 자신을 열었음을 드러냅니다. 관계가 트인 것입니다.
이름을 무시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않는다”(출 20:7)고 말씀하십니다. 감옥에서 이름을 무시하고 번호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있는 한 너희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김춘수님의 유명한 시 ‘꽃’이 생각이 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반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것과 전혀 다릅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김춘수 시인의 표현대로, 그 사람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대접을 해 주는 것이지만,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사람과 상관 없는 빛깔과 향기를 내 쪽에서 덮어 씌우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근대사에 보면, ‘빨갱이’ 혹은 ‘운동권’ 혹은 ‘매국노’라는 이름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정죄당하고 고통당했습니다.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 정작 그 이름의 값에 합당한 사상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불행하게도, 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빛깔과 향기’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이름을 뒤집어씌인채 죽음을 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정치적인 환경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생활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잘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부자’라고 단정하고는, 독특한 한 인격체가 아니라 ‘부자’라는 고정 관념으로 대합니다. 행동이나 생각하는 것이 자유스러워 보이는 사람을 보면 ‘자유주의자’라고 단정하고 위험한 인물로 취급합니다. 듣기에 거북한 소리를 하면 ‘극단주의자’라고 단정하고 거부합니다. 변변한 학벌이 없는 사람 같으면 ‘무식한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무시합니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 사람의 독특한 인격은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내가 덮어씌운 그 이름만 보입니다.
있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다가가고, 있는 그대로 나를 상대방에게 여는 것은 매우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 만남을 통해 내가 변화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기보다는 상대방에게 자기가 원하는 이름을 붙여주려 하는 것 같습니다.
2.
오늘 우리는 아주 긴 본문을 읽었습니다. (성경 봉독을 하신 분들이 아마 “잘 못 걸렸다”라고 느끼셨을텐데,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을 알리라는 동생들의 요청을 마다하고 예루살렘 행을 거부하신 예수님은 나중에 몰래 따라 올라가십니다. 아직 당신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낼 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에서 할 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8일동안 지속되는 초막절 축제 중간 쯤에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가 설교하는 것처럼 가르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이라는 말은 성전 바깥 뜰을 가리키는데, 성전 바깥 뜰은 축구장 4개 정도를 합친 정도의 넓은 광장이었습니다. 축제 때는 워낙 많은 순례객이 운집하기 때문에 한 편에서 수십명의 사람을 모아놓고 설교를 해도 그리 괄목할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설교 이후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논쟁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복되는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누구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면서 예수님을 평가하고 판단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붙인 첫 번째의 이름은 ‘무식쟁이’라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서 감탄하는 말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실은 의심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말은, “말은 맞는데, 정말 대단한 말씀인데, 당신의 배경을 볼 때, 도대체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말을 하려면 그만한 학력이 받쳐줘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으니, 믿어지질 않고 오히려 의심이 앞선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히브리말 ‘메시야’는 헬라말로 ‘그리스도’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두 단어는 유대인들이 기다려 왔던 영원한 왕, 영원한 구원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31절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해도, 이분이 하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행하시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딱히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의 이쪽 저쪽을 꿰맞춰서 ‘그리스도가 충족시켜야 할 조건들’을 정리해 놓고, 그 조건들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곤 했습니다. 그 조건 중 하나가 “그리스도는 그 출신 배경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분이 나사렛 출신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7절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조건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다”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당시 사람들 그분이 나사렛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얻기에 또 하나의 큰 결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지켜 보다가 “이 사람은 정말로 그 예언자다”라고 말합니다. 40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단순히 예언자로 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예언자’라는 말은 모세가 신명기 18장 18절에서 예언한 바로 그 예언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세를 시키셔서, 장차 모세와 같은 예언자 즉 제 2의 모세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십니다. 성전 뜰에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던 어떤 유대인들이 이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예수님이 이 이름에도 딱 들어맞는 분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32절에 그들의 심정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 보시오. 그러면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결국,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이름을 예수님께 붙여보고, 그 이름에 걸맞는가를 따져 보고는, 실망하고, 등을 돌리고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품어왔던 어떤 구원자를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들의 마음에 있던 그 이미지와 맞지 않음을 알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그들은 필경 성전 뜰에서 가르치고 있던 다른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이 자신들이 찾고 있는 ‘그리스도의 조건’에 걸맞는지를 따졌을 것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자기들 스스로, 원천적으로 차단시켰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름과 개념과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름과 개념과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는데 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만날 여유가, 그럴 관심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났습니다.
3.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무슨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왜 그런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이 붙인 그 이름에 딱 들어 맞습니까? 여러분이 붙인 그 이름이 만족스럽습니까? 이제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았으니, 예수님을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그 이름을 붙이기 전에,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 사귀어 그분을 충분히 아는 시간을 가졌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51절을 보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도 않고 그분에게 이런 저런 이름을 붙이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본 니고데모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요?”
이 질문은 예수님을 대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만나 그분을 사귀어 그분을 알아감으로 믿음에 이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급하게 그분에게 어떤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따라 그분을 평가하려 하거나 주조하려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우상을 예수님을 통해 믿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허울뿐이지, 그들이 믿는 것은 우상화된 예수, 박제화된 예수, 축소된 예수, 왜곡된 예수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우리에게 드러나시는 그 모습대로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사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이름들을 다 합쳐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다 알지 못할 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철저하게 연구하고 이해했다 하더라도, 제 아무리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제 아무리 많은 학위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내가 예수를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말하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자 중 하나인 필립 얀시(Philip Yancy)는 그의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The Jesus I Never Knew)의 결론에서 이렇게 마무리 짓습니다. 수 많은 해답과 그에 못지 않은 질문을 산출해 낸 나의 예수 탐사는 이제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그 과정에서 결코 예수를 규정지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오히려 예수를 규격화하려는, 그를 상자 속에 가두려는 모든 시도들에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예수는 진정 세상에 살았던 그 누구와도 현저히 다른 존재이다.(427쪽).
진실이 이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가장 바른 길은 우리 자신을 열고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만나고 사귀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진지한 사귐을 나누어간다면, 그분은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놀래키실 것입니다. 참다운 믿음이란 이렇게 모험적이면서도 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신비로운 분이어서, 그분을 알아가면서 그분에게 매혹당하지 않을 방법이 없고, 드류 신학대학원의 전도학 교수 레너드 스위(Leonard Sweet)이 말했듯, 예수님은 알아갈수록 그분에게 미치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17절을 보시겠습니까? 이 구절이 오늘의 요절과 같은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안다.
참된 믿음의 정수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분을 통해 참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선다면, 참된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내 존재의 중심이요 근거요 원천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그분에게 돌아가려는 열심이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만나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원하는 이름이나 개념으로 그분을 판단하고 평가하려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름과 개념과 사상을 접어놓고 그분을 배워갑니다. 그분을 알아갑니다. 그분과 사귀어갑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분의 참된 모습이 점차 드러납니다. 알아갈수록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고, 더 신비롭습니다. 알아갈수록, 그분에게 어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고, 그분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4.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제가 믿는 예수님은 2천년전 유대땅에 사셨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늘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다 알지 못할 분, 다 알 수 없는 분, 그래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분, 그래서 항상 신비로써 저를 깨워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을 이제까지 배우고 사귀고 믿어오면서 그분을 통해 참된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더욱 더 예수님의 말씀이 그분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의 삶이 그분 자신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삶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마땅한 표현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얼마 후에는 필경 그 이름이 부적절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영국 출신의 목사이자 저술가였던 레슬리 웨더헤드(Leslie Weatherhead)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찾아와 "당신 교회의 교인이 되려면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라고 물을 때, "당신에게 진리로 보이는 것만 믿으시면 됩니다."라고 답하곤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저는 오늘의 본문에 기초해서 "참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답하려 합니다. 말은 다르지만, 포함된 뜻은 동일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이름이 아닙니다. 개념이 아닙니다. 참된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 참된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혹은 참된 진리를 향한 진실한 마음, 그 마음이 결국 우리를 예수님을 참되게 만나게 하고, 그분의 신비에 취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저는 자신있게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 마음으로 복음서와 다른 성경을 통해 과거에 오셨던 예수님을 배우시고, 기도와 예배와 묵상을 통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영과 만나 사귀시고, 실천과 봉사를 통해 그분의 삶을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한 컷, 한 컷, 여러분에게 드러나는 그분의 참모습을 보면서 놀랄 것이고, 그분의 신비 앞에 경외감으로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이름들을 다 동원해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그분의 신비로운 현존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럴 때, 김춘수 시인의 표현대로, 그분은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시며 나에게 다가오실 것이고, 그분은 나에게, 나는 그분에게 의미로운 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이 믿음입니다. 다 알지 못할 그분께 나를 열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만나 사귈 때, 우리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모습으로 변모해 갈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는 우리를 변화시킬 믿음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는 이 피곤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진실되게 변화시킬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는 우리를 구원할만한 믿음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한 보석상 주인처럼, 자신의 모든 것과 맞바꾸더라도 추구해 볼 만합니다.
주님,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참된 하나님을 만나
참된 삶을 찾으려는 한 가지 열망을
저희 마음에 주소서.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붙잡게 하소서.
그분의 신비로 인해
매일의 삶이 경이감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고
이생에서 영생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