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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국 목사 (대흥장로교회)
인류의 역사와 성경의 역사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시기 전의 역사를 주전의 역사(B.C = before Christ)라 부르고, 성경은 구약(옛 언약)의 시대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신 후의 역사를 주후의 역사(A.D= Anno Domini = in the year of our Lord ), 성경은 신약(새 언약)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약을 다시 둘로 나누면 오늘 우리가 봉독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 이 전과 이 후로 나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자의 영, 욕심의 영, 사단의 영으로부터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변화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또 한 번의 변화를 더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성령 충만으로 변화된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물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고 고백도 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자리다툼, 누가 높으냐의 문제,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들에 의해서 잡혀갈 때에는 정작 모두가 두려움 속에 놀라서 도망갔던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체험하게 된 성령 충만한 역사 이후에는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엔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인정받느냐? 이런 것 가지고 다투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나오고 신앙생활도 분명하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은 했지만, 갈수록 실망만 느끼는 신앙은 아닙니까? 목사가 실망스럽고, 교회 성도들이 실망스럽고, 교회 구역 장, 구역 식구들이 실망스럽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볼 때에도 서로가 실망스러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높은 자리, 개인 이익에만 급급한 제자들은 무능한 안드레가 실망스러웠고, 모든 일에 부정적인 도마가 볼 때엔 욕심만 가득한 야고보 요한이 실망스러웠고, 과격하고 성질 급한 베드로가 볼 때에 모든 일에 부정적인 도마가 실망스러웠습니다.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어도, 서로가 볼 때에 실망스러운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변화된 것은 오순절 성령 충만한 역사로 변화 된 것처럼, 우리들도 실망스럽지 않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한 번 더 변화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제 1차적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제 2차적 변화는 그냥 자동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함께 힘써 기도에 힘 쓸 때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으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말씀한 것은, 우리말 성경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한 의미는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순절 날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1)인내하고 기다리던 그 성령 충만한 약속의 날이 드디어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1:4에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는 기다리는 자에게 주셨습니다. 제가 볼 때에 많은 성도들이 나름대로 애를 쓰며 기도하지만 기다리질 못합니다. 당장에 들어주지 않으면 후닥닥 털고 일어나버립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받을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2) 모든 제자들이 14절에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역사는 한 마음속에 역사하십니다. 모인 사람들이 다 개성과 성격과 학벌과 배경은 달라도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에 한 마음이 될 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 14절에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 지금으로 100년 전 1907년 평양에서 놀라운 평양 성령 부흥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장대현 교회에서 성도들이 일심으로 모여 기도하고, 길선주 목사님이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부터 성령 충만한 역사가 있었고 한국 기독교 역사의 전무한 축복이 있었습니다.
말세에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분명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신, 구약 성경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요엘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행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우리가 자주 다투고 분노하고, 실망스러운 것은 제 2의 변화 즉 성령 충만한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은 능력 있는 신앙인으로 바꿉니다
성령 충만한 변화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 변화는 능력과 용기의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무서워서 도망하였던 제자들이었고, 실망 속에 모두 갈릴리 바다로 가서 고기나 잡아 어부로 살 길을 찾고자 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오순절 성령 충만한 역사는 제자들을 담대한 능력의 사람들로 변화시켰습니다. 성령 충만함과 동시에 나타난 것은
(1) 4절에 보면, “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되어있고, 그 주위에 있던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인, 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등 각 나라 방언으로 그들이 말하기를 시작하자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2) 또 이어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으로 설교를 할 때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설교 분석학 적으로 따지면 정말 별 볼일 없는 설교지만, 성령 충만한 자의 말씀 선포는 심령을 쪼개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3) 행3장에 가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금과 은을 준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평생 앉은뱅이를 치유하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4) 사도행전 4장에서는 공회가 너무 달라진 제자들을 붙잡아다가 협박도 해보고, 달래도 봅니다. 옛날 같으면 넘어갔을 텐데....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얼마나 담대하게 변하는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기적과 능력과 담대한 증인의 역사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제자들이 달라질 수 있었습니까? 성령 충만함이 주는 축복이 능력이고 용기이며 담대함입니다.
얼마 전에 중국 사천성에 13년 동안 약 25조원을 들여서 댐을 공사해서 완공했습니다. 크기는 충주댐의 37배이고 중간에 3개의 물줄기가 있는데, 한 개당 얻을 수 있는 전기가 2000만 KW라고 합니다. 그 정도의 댐과 전기라면 사천성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까지도 더 이상 물 걱정, 전기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깡통을 짊어지고 물을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되고, 논과 밭에 물을 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 전기 걱정 안 해도 되고.... 엄청난 능력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이 말하는 성령 충만한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2천년 동안 역사 속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순절 말이 마침 이르렀고 엄청난 량의 능력과 힘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드디어 개통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침내 주신 특권과 축복이 성령충만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모든 개인적인 문제들 고통들, 근심과 두려움들, 이 모든 것이 일괄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 오순절 성령 충만한 역사였습니다. 이젠 축복과 은혜의 물이 쏟아지게 된 줄로 믿습니다. 모든 질병도 모든 유혹과 협박도 시험도 이길 수 있고,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을 아름답게 이기는 삶으로 항상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 “성령 충만”인 줄로 믿습니다.
신학자 David Well 이라는 분이 말하기를 “God is in waste land" (하나님은 무게를 잃어버리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수천만 킬로의 전기와 물을 얻을 수 있는 성령 충만한 댐을 주셨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촛불 걱정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초라하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나와서 첫 번째 맞은 위기가 홍해였습니다. 앞으로 홍해가 막히고 뒤로 애굽 군대가 다시 잡으려고 쫓아올 때에 홍해가 열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적으로 다 홍해를 건너게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비하하는 이성에 호소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 홍해 물이 쫙 갈라진 것이 아니라, 홍해 상류로 건너가면서 무릎에 정도 물이 오는 홍해를 건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 때에 한 초등학생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뒤에 쫓아온 애굽 군대가 홍해에 빠져 죽은 것은 무릎 밖에 안 오는 물에 전부 스스로 말에서 내려 물에 코 박고 죽은 것입니까?
성령 충만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스스로 초라하지 말고, 하나님을 초라하게 해석하려고 하지 맙시다. 1984년에 세상을 떠난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말년에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합니다. 그는 암과 혹독히 싸우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캠퍼스 사역에 나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사랑했던 젊은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최후의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그가 외친 내용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 누구에게나 의아한 제목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은 구하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거룩한 영) 성령님을 구하면 모든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 집니다.
2. 성령님은 기쁨 있는 신앙인으로 바꿉니다.
성령 충만함을 통하여 제자들의 또 하나의 놀라운 변화는 기쁨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예수를 죽게 했던 산헤드린 공회에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채찍질도 하고 , 협박도 하면서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력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얻어 맞아도 협박을 당해도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면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매질도 그들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등장합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집사를 선출할 때에 첫 조건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은 분명히 하나님께 선택 받은 회심하고 중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의 일을 감당하려면 제2의 변화 “성령 충만한 사람”이 그 조건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는데 공회 앞에 섰던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더라... 기쁨이 충만했다는 말입니다. 그를 향하여 돌을 던져 죽일 때에도 스데반 집사님은 저들을 용서하고 “자니라” 죽었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잔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 얼굴이 얼마나 평안했던가를 말해 줍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억누를 수 없는 기쁨 충만한 자로 바꾸어 주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맨 정신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면 정말 항상 기뻐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도대체 기쁨이 없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겨보십시오.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목사가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말씀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 충만한 자가 누리는 것입니다. 말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말 잘하는 사람, 코미디언 같은 설교, 웃겨주는 사람을 통해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잠깐입니다
몇 년 전에 한국 월드컵 때에 한국이 4강에 들어갔었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만큼은 전 세계에서 한국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전세계 어디에 나가 있는 자라도, 어떤 고통과 억압에 있는 자라도, 감옥에 갇혀있는 자든 수도원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든지 우승은 못했어도 한국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아낌없이 그날은 식사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공짜로 대접했고, 커피숍은 커피를 공짜로, 술 파는 사람들은 술을 공짜로 줬습니다. 티셔츠 만드는 분들도 아낌없이 티를 만들고 머리 띠를 만들어 공짜로 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축구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렇게 행복하고 기쁨 충만하게 됩니다. 축구 충만은 잠시지만, 성령 충만은 우리의 일생을 행복하게 기쁨 충만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그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 누가 협박해도 죽인다 해도 그 기쁨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왜 기쁨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고집을 피우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집을 안 피우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고집을 피우면서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왜 사람들이 고집을 피우는가?
1) 나이가 많아지면 고집을 부린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되게 고집 세네...” 이 말은 다른 말로 “ 그 사람 늙었구먼...” 이렇게 들으시면 됩니다. 늙었다는 증거입니다.
2) 상처가 많은 사람이 고집을 부립니다. 이를테면 남자에게 상처를 받은 여성들은 “남자는 몽땅 도둑놈”이라는 것에 대해서 엄청나게 고집을 부리고, 여자에게 상처를 받은 남성들은 “여자는 몽땅 요상한 마귀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양보하지 않고 고집을 부립니다.
3) 지위가 올라갈수록 고집을 부립니다. 교회에서도 고집 부리는 사람들은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로 자기 사업하는 사람들, 사업의 오너들... 남들이 좀 알아주는 사람들이 고집을 부립니다.
4) 경험이 많아지면 고집을 부립니다.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끄러운 곳은 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중심이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면 시끄럽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민 교회의 모습입니다)
갈라디아서5장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그리고 바로 나오는 것이 희락입니다. 제2의 변화는 얼굴에 쓰여있습니다. 물질 충만, 욕심 충만, 축구 충만하지 마시고, 성령 충만함으로 기쁨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성령님은 승리하는 신앙인으로 바꿉니다.
성령 충만한 오순절의 역사는 제자들과 모든 성도들을 온전히 승리하게 하셨으며, 지금까지도 2000년 역사 속에서도 변함없이 교회를 승리하도록 이루어 오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제자들을 붙잡아다가 협박해도 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그들을 죽여도 여전히 복음을 들고 또 그들에게 나아갔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환경이 그 사람을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반드시 승리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만약에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일터에서 10년이 지나도록 성공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개혁 신앙을 돌이켜 보도록 하라.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 가운데 “ 아이삭 폴리만”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 소아마비로 두 손과 두 발 모두 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경에 포기하지 않고 훈련함으로 세계적인 바이얼 리스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환경에 매인 승리가 아니라, 절대적 승리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특권입니다.
지난 4월 신문기사에 보니까, 한국 사람들은 점점 중독증에 빠져가고 있다 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실었습니다. 알코올 중독, 담배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인터넷 중독, 쇼핑 중독 등... 현재 한국에 알코올 중독자가 330만 명, 도박 중독자가 3백만 명, 쇼핑 중독자가 190만 명, 인터넷 중독자가 36만 명 정도라고 했습니다. 합치면 천만 명 정도가 중독증에 걸려 있습니다. 요즘 선거철에 모두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야단입니다. 당신이 대통령에 출마하면 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하나같이 당연히 내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하는가? 라고 물었더니, “점쟁이들이 그렇게 말한다” 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우리 정치인의 현주소입니다. 젊은이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몸을 팔고, 그래도 안 돼서 자살하는 청년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모든 중독으로부터 모든 고통과 걱정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성령 충만한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이민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걱정 없고 두려움 없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런데, 이민생활의 참된 승리자가 되시기를 원하시면, 제 2의 변화 “성령 충만”한 변화를 이루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믿음과 성령 충만한 자가 되면 범사에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죤 스터트 목사는 말하기를 “ 사람들이 세상의 것 술에 취하게 되면 짐승처럼 살게 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면 예수님처럼 능력 있는 삶이 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은 말하기를 어떻게 승리하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단 하나, 성령 충만을 받으면 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에 심장은 보통 1분에 60-70회 정도 뛰는데 뛸 때마다 종이컵 한잔의 피가 뿜어져 나옵니다. 그리고 통계적으로 하루에 십만 3천 689번을 뛰는데 한 시간에 뿜어져 나오는 피의 힘은 75kg의 성인을 1층에서 3층까지 밀어 올리는 힘이고, 70년 동안 그 심장의 힘을 모으면 바다에 떠있는 군함을 육지로 끌어올리는 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피는 하루에 약 1억 6천 8백만 마일을 달립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심장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허락하신 능력과 축복은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공사하시고 기다리고 기다리셨던 성령 충만한 오순절의 역사”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능력은 우리 믿음의 자녀들을 능력의 자녀들로, 기쁨의 자녀들로, 승리의 자녀들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힘 있는 성도는 성령 충만한 성도입니다. 힘 있는 교회는 대형교회가 아니라 성령 충만한 교회입니다. (기다리십시오. 마음을 같이 하십시오. 기도에 힘쓰십시오.... - 이것이 오순절 성령 충만한 역사의 증거입니다 )
우리 힘으로 방황하는 자들이 되지 마시고, 성령 충만함으로 항상 담대하고 항상 승리하고 항상 기뻐하는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류의 역사와 성경의 역사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시기 전의 역사를 주전의 역사(B.C = before Christ)라 부르고, 성경은 구약(옛 언약)의 시대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신 후의 역사를 주후의 역사(A.D= Anno Domini = in the year of our Lord ), 성경은 신약(새 언약)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약을 다시 둘로 나누면 오늘 우리가 봉독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 이 전과 이 후로 나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자의 영, 욕심의 영, 사단의 영으로부터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변화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또 한 번의 변화를 더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성령 충만으로 변화된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물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고 고백도 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자리다툼, 누가 높으냐의 문제,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들에 의해서 잡혀갈 때에는 정작 모두가 두려움 속에 놀라서 도망갔던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체험하게 된 성령 충만한 역사 이후에는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엔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인정받느냐? 이런 것 가지고 다투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나오고 신앙생활도 분명하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은 했지만, 갈수록 실망만 느끼는 신앙은 아닙니까? 목사가 실망스럽고, 교회 성도들이 실망스럽고, 교회 구역 장, 구역 식구들이 실망스럽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볼 때에도 서로가 실망스러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높은 자리, 개인 이익에만 급급한 제자들은 무능한 안드레가 실망스러웠고, 모든 일에 부정적인 도마가 볼 때엔 욕심만 가득한 야고보 요한이 실망스러웠고, 과격하고 성질 급한 베드로가 볼 때에 모든 일에 부정적인 도마가 실망스러웠습니다.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어도, 서로가 볼 때에 실망스러운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변화된 것은 오순절 성령 충만한 역사로 변화 된 것처럼, 우리들도 실망스럽지 않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한 번 더 변화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제 1차적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제 2차적 변화는 그냥 자동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함께 힘써 기도에 힘 쓸 때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으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말씀한 것은, 우리말 성경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한 의미는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순절 날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1)인내하고 기다리던 그 성령 충만한 약속의 날이 드디어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1:4에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는 기다리는 자에게 주셨습니다. 제가 볼 때에 많은 성도들이 나름대로 애를 쓰며 기도하지만 기다리질 못합니다. 당장에 들어주지 않으면 후닥닥 털고 일어나버립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받을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2) 모든 제자들이 14절에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역사는 한 마음속에 역사하십니다. 모인 사람들이 다 개성과 성격과 학벌과 배경은 달라도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에 한 마음이 될 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 14절에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 지금으로 100년 전 1907년 평양에서 놀라운 평양 성령 부흥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장대현 교회에서 성도들이 일심으로 모여 기도하고, 길선주 목사님이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부터 성령 충만한 역사가 있었고 한국 기독교 역사의 전무한 축복이 있었습니다.
말세에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분명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신, 구약 성경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요엘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행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우리가 자주 다투고 분노하고, 실망스러운 것은 제 2의 변화 즉 성령 충만한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1. 성령님은 능력 있는 신앙인으로 바꿉니다
성령 충만한 변화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 변화는 능력과 용기의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무서워서 도망하였던 제자들이었고, 실망 속에 모두 갈릴리 바다로 가서 고기나 잡아 어부로 살 길을 찾고자 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오순절 성령 충만한 역사는 제자들을 담대한 능력의 사람들로 변화시켰습니다. 성령 충만함과 동시에 나타난 것은
(1) 4절에 보면, “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되어있고, 그 주위에 있던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인, 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등 각 나라 방언으로 그들이 말하기를 시작하자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2) 또 이어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으로 설교를 할 때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설교 분석학 적으로 따지면 정말 별 볼일 없는 설교지만, 성령 충만한 자의 말씀 선포는 심령을 쪼개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3) 행3장에 가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금과 은을 준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평생 앉은뱅이를 치유하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4) 사도행전 4장에서는 공회가 너무 달라진 제자들을 붙잡아다가 협박도 해보고, 달래도 봅니다. 옛날 같으면 넘어갔을 텐데....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얼마나 담대하게 변하는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기적과 능력과 담대한 증인의 역사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제자들이 달라질 수 있었습니까? 성령 충만함이 주는 축복이 능력이고 용기이며 담대함입니다.
얼마 전에 중국 사천성에 13년 동안 약 25조원을 들여서 댐을 공사해서 완공했습니다. 크기는 충주댐의 37배이고 중간에 3개의 물줄기가 있는데, 한 개당 얻을 수 있는 전기가 2000만 KW라고 합니다. 그 정도의 댐과 전기라면 사천성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까지도 더 이상 물 걱정, 전기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깡통을 짊어지고 물을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되고, 논과 밭에 물을 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 전기 걱정 안 해도 되고.... 엄청난 능력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이 말하는 성령 충만한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2천년 동안 역사 속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순절 말이 마침 이르렀고 엄청난 량의 능력과 힘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드디어 개통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침내 주신 특권과 축복이 성령충만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모든 개인적인 문제들 고통들, 근심과 두려움들, 이 모든 것이 일괄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 오순절 성령 충만한 역사였습니다. 이젠 축복과 은혜의 물이 쏟아지게 된 줄로 믿습니다. 모든 질병도 모든 유혹과 협박도 시험도 이길 수 있고,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을 아름답게 이기는 삶으로 항상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 “성령 충만”인 줄로 믿습니다.
신학자 David Well 이라는 분이 말하기를 “God is in waste land" (하나님은 무게를 잃어버리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수천만 킬로의 전기와 물을 얻을 수 있는 성령 충만한 댐을 주셨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촛불 걱정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초라하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나와서 첫 번째 맞은 위기가 홍해였습니다. 앞으로 홍해가 막히고 뒤로 애굽 군대가 다시 잡으려고 쫓아올 때에 홍해가 열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적으로 다 홍해를 건너게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비하하는 이성에 호소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 홍해 물이 쫙 갈라진 것이 아니라, 홍해 상류로 건너가면서 무릎에 정도 물이 오는 홍해를 건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 때에 한 초등학생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뒤에 쫓아온 애굽 군대가 홍해에 빠져 죽은 것은 무릎 밖에 안 오는 물에 전부 스스로 말에서 내려 물에 코 박고 죽은 것입니까?
성령 충만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스스로 초라하지 말고, 하나님을 초라하게 해석하려고 하지 맙시다. 1984년에 세상을 떠난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말년에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합니다. 그는 암과 혹독히 싸우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캠퍼스 사역에 나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사랑했던 젊은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최후의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그가 외친 내용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 누구에게나 의아한 제목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은 구하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거룩한 영) 성령님을 구하면 모든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 집니다.
2. 성령님은 기쁨 있는 신앙인으로 바꿉니다.
성령 충만함을 통하여 제자들의 또 하나의 놀라운 변화는 기쁨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예수를 죽게 했던 산헤드린 공회에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채찍질도 하고 , 협박도 하면서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력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얻어 맞아도 협박을 당해도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면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매질도 그들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등장합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집사를 선출할 때에 첫 조건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은 분명히 하나님께 선택 받은 회심하고 중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의 일을 감당하려면 제2의 변화 “성령 충만한 사람”이 그 조건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는데 공회 앞에 섰던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더라... 기쁨이 충만했다는 말입니다. 그를 향하여 돌을 던져 죽일 때에도 스데반 집사님은 저들을 용서하고 “자니라” 죽었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잔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 얼굴이 얼마나 평안했던가를 말해 줍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억누를 수 없는 기쁨 충만한 자로 바꾸어 주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맨 정신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면 정말 항상 기뻐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도대체 기쁨이 없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겨보십시오.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목사가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말씀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 충만한 자가 누리는 것입니다. 말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말 잘하는 사람, 코미디언 같은 설교, 웃겨주는 사람을 통해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잠깐입니다
몇 년 전에 한국 월드컵 때에 한국이 4강에 들어갔었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만큼은 전 세계에서 한국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전세계 어디에 나가 있는 자라도, 어떤 고통과 억압에 있는 자라도, 감옥에 갇혀있는 자든 수도원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든지 우승은 못했어도 한국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아낌없이 그날은 식사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공짜로 대접했고, 커피숍은 커피를 공짜로, 술 파는 사람들은 술을 공짜로 줬습니다. 티셔츠 만드는 분들도 아낌없이 티를 만들고 머리 띠를 만들어 공짜로 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축구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렇게 행복하고 기쁨 충만하게 됩니다. 축구 충만은 잠시지만, 성령 충만은 우리의 일생을 행복하게 기쁨 충만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그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 누가 협박해도 죽인다 해도 그 기쁨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왜 기쁨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고집을 피우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집을 안 피우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고집을 피우면서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왜 사람들이 고집을 피우는가?
1) 나이가 많아지면 고집을 부린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되게 고집 세네...” 이 말은 다른 말로 “ 그 사람 늙었구먼...” 이렇게 들으시면 됩니다. 늙었다는 증거입니다.
2) 상처가 많은 사람이 고집을 부립니다. 이를테면 남자에게 상처를 받은 여성들은 “남자는 몽땅 도둑놈”이라는 것에 대해서 엄청나게 고집을 부리고, 여자에게 상처를 받은 남성들은 “여자는 몽땅 요상한 마귀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양보하지 않고 고집을 부립니다.
3) 지위가 올라갈수록 고집을 부립니다. 교회에서도 고집 부리는 사람들은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로 자기 사업하는 사람들, 사업의 오너들... 남들이 좀 알아주는 사람들이 고집을 부립니다.
4) 경험이 많아지면 고집을 부립니다.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끄러운 곳은 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중심이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면 시끄럽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민 교회의 모습입니다)
갈라디아서5장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그리고 바로 나오는 것이 희락입니다. 제2의 변화는 얼굴에 쓰여있습니다. 물질 충만, 욕심 충만, 축구 충만하지 마시고, 성령 충만함으로 기쁨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성령님은 승리하는 신앙인으로 바꿉니다.
성령 충만한 오순절의 역사는 제자들과 모든 성도들을 온전히 승리하게 하셨으며, 지금까지도 2000년 역사 속에서도 변함없이 교회를 승리하도록 이루어 오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제자들을 붙잡아다가 협박해도 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그들을 죽여도 여전히 복음을 들고 또 그들에게 나아갔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환경이 그 사람을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반드시 승리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만약에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일터에서 10년이 지나도록 성공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개혁 신앙을 돌이켜 보도록 하라.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 가운데 “ 아이삭 폴리만”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 소아마비로 두 손과 두 발 모두 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경에 포기하지 않고 훈련함으로 세계적인 바이얼 리스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환경에 매인 승리가 아니라, 절대적 승리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특권입니다.
지난 4월 신문기사에 보니까, 한국 사람들은 점점 중독증에 빠져가고 있다 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실었습니다. 알코올 중독, 담배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인터넷 중독, 쇼핑 중독 등... 현재 한국에 알코올 중독자가 330만 명, 도박 중독자가 3백만 명, 쇼핑 중독자가 190만 명, 인터넷 중독자가 36만 명 정도라고 했습니다. 합치면 천만 명 정도가 중독증에 걸려 있습니다. 요즘 선거철에 모두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야단입니다. 당신이 대통령에 출마하면 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하나같이 당연히 내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하는가? 라고 물었더니, “점쟁이들이 그렇게 말한다” 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우리 정치인의 현주소입니다. 젊은이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몸을 팔고, 그래도 안 돼서 자살하는 청년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모든 중독으로부터 모든 고통과 걱정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성령 충만한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이민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걱정 없고 두려움 없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런데, 이민생활의 참된 승리자가 되시기를 원하시면, 제 2의 변화 “성령 충만”한 변화를 이루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믿음과 성령 충만한 자가 되면 범사에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죤 스터트 목사는 말하기를 “ 사람들이 세상의 것 술에 취하게 되면 짐승처럼 살게 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면 예수님처럼 능력 있는 삶이 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은 말하기를 어떻게 승리하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단 하나, 성령 충만을 받으면 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에 심장은 보통 1분에 60-70회 정도 뛰는데 뛸 때마다 종이컵 한잔의 피가 뿜어져 나옵니다. 그리고 통계적으로 하루에 십만 3천 689번을 뛰는데 한 시간에 뿜어져 나오는 피의 힘은 75kg의 성인을 1층에서 3층까지 밀어 올리는 힘이고, 70년 동안 그 심장의 힘을 모으면 바다에 떠있는 군함을 육지로 끌어올리는 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피는 하루에 약 1억 6천 8백만 마일을 달립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심장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허락하신 능력과 축복은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공사하시고 기다리고 기다리셨던 성령 충만한 오순절의 역사”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능력은 우리 믿음의 자녀들을 능력의 자녀들로, 기쁨의 자녀들로, 승리의 자녀들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힘 있는 성도는 성령 충만한 성도입니다. 힘 있는 교회는 대형교회가 아니라 성령 충만한 교회입니다. (기다리십시오. 마음을 같이 하십시오. 기도에 힘쓰십시오.... - 이것이 오순절 성령 충만한 역사의 증거입니다 )
우리 힘으로 방황하는 자들이 되지 마시고, 성령 충만함으로 항상 담대하고 항상 승리하고 항상 기뻐하는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