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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목사 (소망교회)
베트남 전쟁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전투상황이 아주 불리해져서 후퇴를 하는 중에 한 병사가 뒤에서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안전지대로 대피한 중대 대원 중에 한 사람이 “저 총에 맞은 저 병사는 내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구출하러 가야겠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듯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 친구는 총에 맞은 자신의 친구를 구출하기 위하여 그 무서운 장소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중대장은 말렸습니다. 안된다고. “그렇게 하다가는 너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고 위험하고 또 보건대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니 자네 친구는 벌써 죽었어. 그러니까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반드시 가야된다고 중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그 전쟁터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친구를 등에 업고 부대로 돌아왔지만, 생각대로 친구는 죽었습니다. 업혀 오는 동안에 죽었습니다. 그 때에 중대장이 말하기를 그것보라고 왜 고집스럽게 쓸데없는 일을 했냐고. 자네 생명도 참으로 위험했다고 그런데 자네가 업고 온 친구는 이미 죽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에 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병사는 말합니다. “아니올시다. 내 친구는 내가 등에 업어서 이리로 데려올 때에 내 등에 업혀서 말하기를 ‘네가 올 줄 알았다. 네가 반드시 올 줄 알았다. 나는 너와 같은 친구가 있으니 참으로 행복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다. 누구의 사랑을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느니라.”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바로 그 같은 친구를 가졌기에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그 사랑에 감격했기에 죽어 가는 이 친구는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살고 죽는 일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살고 죽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내가 물질이다 성공이다 번영이다 자유다 뭐다 말과 문제가 많지만은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근심 걱정도 다 물러갈 뿐만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근대 신학자인 칼바르트라고 하는 교수가 어느 날 시카고 대학에 방문하여 젊은이들에게 신학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 젊은 친구 하나가 따라오면서 집요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교수님께서 쓰신 책을 다는 못 읽었습니다만 몇 권을 읽었는데 감동적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해박한 지식에 저는 늘 놀라곤 했습니다. 한평생 저술 생활을 하고 가르치고 또 연구하고 그러면서 깨달은 진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가장 중요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한마디로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은 껄걸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닐 때에 부른 찬송 한 구절을 외웠습니다. “Jesus loves me bible said so;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예수 사랑 하심은, Jesus loves me bible said so. 그것이 핵심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다 잊어버리세요. Jesus loves me. 예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딱 한마디만 똑바로 알고 똑바로 느끼면 모든 문제는 다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문제, 그것이 마스터키요 그것이 생명선이요 모든 것을 이기는 힘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본문입니다. 여기는 세 가지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승리, 둘째는 의의 승리, 셋째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오늘 먼저 생각할 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은사로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은사로 주신다. 그럼 우리편에서는 은사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습니까? 내가 얻은 일이 있습니까? 내가 성취한 일이 있습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압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런 이야기도 합니다. “내 마음대로 안된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영영 못 쓸 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 되는 일이건 안 되는 일이건 때로는 우리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 것이라고,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실패든 역경이든 건강이든 질병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사람으로 볼 때에는 모든 것이 은혜요 또,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생각하면 기적과 같은 은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랑 중에 가장 큰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왜? 아들은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독생자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외아들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에는 게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아들을 내어주는 것 같은 그 엄청난 사랑으로 자기 희생을 지불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다면 모든 것이 어찌 주신 바가 아니겠습니까? 우스운 이야기이고 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은 전 어렸을 때에 어머니로부터는 맞은 기억이 없는데 아버지로부터 많이 맞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십니다. 어쩌다 몇 마디하고 때리고는 설명도 없이 나가십니다. 중얼중얼 하십니다. ‘사랑한다면서 왜 때렸냐’고 했다가 다시 맞았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전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때에 맞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때 그렇게 엄한 징계를 받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피난을 나와서 군대에 들어가 있을 때에나 혼자서 고학을 할 때에 순간 순간 어머니가 그립기도 하지만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나를 자주 때리시던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싶어요. 그 아버지의 채찍이 그립고 그 아버지의 징계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때 뭐라고 말씀 좀 하세요’ 그러고 싶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모든 것은 그대로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합니다. 주도적으로 사랑합니다.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랑합니다. 그것이 은혜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란 곧 이기는 힘입니다. 은혜를 아는 순간, 은혜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종교심리학자 애디 깁스(Eddie Gibbs)라고 하는 분이 깊은 연구 끝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각 좀 개인적으로 다른 체험을 가지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에 공통점은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 안에서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가지는 이만큼의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살게 만든 것입니다. 네 단계를 말합니다. 첫째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한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무신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단계가 있고. 두번째는 막연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무언가 우리 인간의 의지 외에 큰 의지가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잘못했지, 우리 인간이 잘못했지, 우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가보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천벌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우리 인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네번째 단계는 이제 이 모든 노력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됩니다. 오직 긍휼 오직 사랑 오직 은총만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이 있게 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그런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보십시오. 이 과정 이 단계 전부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도적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을 어떻게 소화하십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그가 치르시고 우리를 의로 싸서 의로 옷입혀서 당신의 자녀로 맞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탕자가 돌아옵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오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런데 나는 그 성경을 볼 때마다 내가 아버지 입장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집을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꼭 한마디하고 싶은데,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또 한가지 있습니다. “네가 집을 나갔을 때에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느냐.” 꼭 한 마디 하고 싶은데, 만일 그랬다면 이 아들은 조용히 집을 나가서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한마디의 말이 없습니까? 다시 한 번 잊지 마십시오. 탕자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로 영접한 것입니다. 전혀 관계없는 아들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오로지 아들로. 그래서 “잃었다 얻었노라. 죽었다 살았노라. 내 아들이 돌아왔다.” 이렇게 환영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의를 주어서 영접한 것이요. 가끔 보면 부부간에도 다투다가 자녀간에도 가출한다 어쩌고... 꼭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의인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맞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No! 그것은 의롭다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히 의로 대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부족함은 내가 대신 지불하고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자로, 가장 깨끗한 자로, 가장 의로운 자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즐기는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의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 가서 대접을 받으실 때에도 절대로 죄인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똑같이.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오명을 받으시면서도 예수님은 새리의 집에가서 머뭅니다. 그들을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그대로 향유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의롭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의의 승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이렇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종일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이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 사랑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순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참하게 죽어도 사랑이 있고 아무리 어렵게 고생을 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고난을 치르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러분, 참으로 사랑하면 병도 이깁니다. 원수도 이깁니다. 의심도 이깁니다. 죄를 이깁니다. 사망을 이깁니다. 위대한 역사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성경은 말합니다. ‘이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끊으리요. 그가 나를 의롭다 하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입니다.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당당하게 그리고 그 사랑을 깊이 깊이 간직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유명한 폴 틸리히의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회색 어두움이 있다. 첫째, 공허감입니다. 가만히 보면 종종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공부하느라 정신 없다가 그 다음엔 연애하느라고 한참 빠졌다가 그 다음엔 결혼을 해 가지고 애 낳고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다가 애들이 다 결혼해 가지고 나가고 그러니까 “허전합니다. 허망합니다.” 왜요? 당신의 사랑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았거든. 정말로 사랑한 일엔 허망함이 없습니다. 사랑이 의미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참사랑 속에는 허망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공허감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죄책감입니다. 현대인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복잡합니다. 이렇게 변명하고 저래서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지만, 그 양심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I.Q.가 90이하가 되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멍청하면 걱정도 없습니다. 똑똑하니까 생각이 많습니다. 이렇게 변명, 아무리 변명을 해보아도 내 양심은 나를 정죄합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안에서 회개의 용기를 얻을 때에 비로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 이 많은 죄책에서 아무도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술집으로 가고, 그래서 마약을 하고 그래서 폭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숨길 수 없는 죄책감, 여기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또한 공포감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암담하기만 합니다. 옛날에 제가 써놓은 제 학위 논문이 종말론입니다. 그래서 미래학에 대해서 Futurology에 대해서 제가 책을 비교적 많이 읽는 편입니다. 새로 나온다는 책이 나오면 제가 또 사서 읽어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래학을 아무리 보아도 결론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암담하다, 절망이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종말론과 미래학은 다릅니다. 여러분, 이 무서운 공포, 불확실함, 암담함, 절망이 밀려옵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입니까?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그 믿음 안에서만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그 사람만이 모든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은혜 Sola Glatia! 모든 것은 은혜다. 절대적 은혜다.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Sola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다시 한 번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생각하십시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영광! 새로운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생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전투상황이 아주 불리해져서 후퇴를 하는 중에 한 병사가 뒤에서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안전지대로 대피한 중대 대원 중에 한 사람이 “저 총에 맞은 저 병사는 내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구출하러 가야겠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듯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 친구는 총에 맞은 자신의 친구를 구출하기 위하여 그 무서운 장소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중대장은 말렸습니다. 안된다고. “그렇게 하다가는 너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고 위험하고 또 보건대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니 자네 친구는 벌써 죽었어. 그러니까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반드시 가야된다고 중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그 전쟁터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친구를 등에 업고 부대로 돌아왔지만, 생각대로 친구는 죽었습니다. 업혀 오는 동안에 죽었습니다. 그 때에 중대장이 말하기를 그것보라고 왜 고집스럽게 쓸데없는 일을 했냐고. 자네 생명도 참으로 위험했다고 그런데 자네가 업고 온 친구는 이미 죽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에 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병사는 말합니다. “아니올시다. 내 친구는 내가 등에 업어서 이리로 데려올 때에 내 등에 업혀서 말하기를 ‘네가 올 줄 알았다. 네가 반드시 올 줄 알았다. 나는 너와 같은 친구가 있으니 참으로 행복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다. 누구의 사랑을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느니라.”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바로 그 같은 친구를 가졌기에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그 사랑에 감격했기에 죽어 가는 이 친구는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살고 죽는 일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살고 죽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내가 물질이다 성공이다 번영이다 자유다 뭐다 말과 문제가 많지만은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근심 걱정도 다 물러갈 뿐만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근대 신학자인 칼바르트라고 하는 교수가 어느 날 시카고 대학에 방문하여 젊은이들에게 신학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 젊은 친구 하나가 따라오면서 집요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교수님께서 쓰신 책을 다는 못 읽었습니다만 몇 권을 읽었는데 감동적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해박한 지식에 저는 늘 놀라곤 했습니다. 한평생 저술 생활을 하고 가르치고 또 연구하고 그러면서 깨달은 진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가장 중요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한마디로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은 껄걸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닐 때에 부른 찬송 한 구절을 외웠습니다. “Jesus loves me bible said so;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예수 사랑 하심은, Jesus loves me bible said so. 그것이 핵심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다 잊어버리세요. Jesus loves me. 예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딱 한마디만 똑바로 알고 똑바로 느끼면 모든 문제는 다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문제, 그것이 마스터키요 그것이 생명선이요 모든 것을 이기는 힘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본문입니다. 여기는 세 가지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승리, 둘째는 의의 승리, 셋째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오늘 먼저 생각할 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은사로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은사로 주신다. 그럼 우리편에서는 은사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습니까? 내가 얻은 일이 있습니까? 내가 성취한 일이 있습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압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런 이야기도 합니다. “내 마음대로 안된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영영 못 쓸 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 되는 일이건 안 되는 일이건 때로는 우리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 것이라고,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실패든 역경이든 건강이든 질병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사람으로 볼 때에는 모든 것이 은혜요 또,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생각하면 기적과 같은 은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랑 중에 가장 큰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왜? 아들은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독생자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외아들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에는 게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아들을 내어주는 것 같은 그 엄청난 사랑으로 자기 희생을 지불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다면 모든 것이 어찌 주신 바가 아니겠습니까? 우스운 이야기이고 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은 전 어렸을 때에 어머니로부터는 맞은 기억이 없는데 아버지로부터 많이 맞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십니다. 어쩌다 몇 마디하고 때리고는 설명도 없이 나가십니다. 중얼중얼 하십니다. ‘사랑한다면서 왜 때렸냐’고 했다가 다시 맞았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전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때에 맞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때 그렇게 엄한 징계를 받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피난을 나와서 군대에 들어가 있을 때에나 혼자서 고학을 할 때에 순간 순간 어머니가 그립기도 하지만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나를 자주 때리시던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싶어요. 그 아버지의 채찍이 그립고 그 아버지의 징계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때 뭐라고 말씀 좀 하세요’ 그러고 싶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모든 것은 그대로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합니다. 주도적으로 사랑합니다.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랑합니다. 그것이 은혜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란 곧 이기는 힘입니다. 은혜를 아는 순간, 은혜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종교심리학자 애디 깁스(Eddie Gibbs)라고 하는 분이 깊은 연구 끝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각 좀 개인적으로 다른 체험을 가지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에 공통점은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 안에서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가지는 이만큼의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살게 만든 것입니다. 네 단계를 말합니다. 첫째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한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무신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단계가 있고. 두번째는 막연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무언가 우리 인간의 의지 외에 큰 의지가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잘못했지, 우리 인간이 잘못했지, 우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가보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천벌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우리 인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네번째 단계는 이제 이 모든 노력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됩니다. 오직 긍휼 오직 사랑 오직 은총만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이 있게 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그런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보십시오. 이 과정 이 단계 전부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도적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을 어떻게 소화하십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그가 치르시고 우리를 의로 싸서 의로 옷입혀서 당신의 자녀로 맞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탕자가 돌아옵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오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런데 나는 그 성경을 볼 때마다 내가 아버지 입장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집을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꼭 한마디하고 싶은데,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또 한가지 있습니다. “네가 집을 나갔을 때에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느냐.” 꼭 한 마디 하고 싶은데, 만일 그랬다면 이 아들은 조용히 집을 나가서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한마디의 말이 없습니까? 다시 한 번 잊지 마십시오. 탕자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로 영접한 것입니다. 전혀 관계없는 아들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오로지 아들로. 그래서 “잃었다 얻었노라. 죽었다 살았노라. 내 아들이 돌아왔다.” 이렇게 환영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의를 주어서 영접한 것이요. 가끔 보면 부부간에도 다투다가 자녀간에도 가출한다 어쩌고... 꼭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의인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맞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No! 그것은 의롭다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히 의로 대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부족함은 내가 대신 지불하고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자로, 가장 깨끗한 자로, 가장 의로운 자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즐기는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의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 가서 대접을 받으실 때에도 절대로 죄인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똑같이.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오명을 받으시면서도 예수님은 새리의 집에가서 머뭅니다. 그들을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그대로 향유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의롭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의의 승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이렇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종일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이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 사랑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순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참하게 죽어도 사랑이 있고 아무리 어렵게 고생을 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고난을 치르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러분, 참으로 사랑하면 병도 이깁니다. 원수도 이깁니다. 의심도 이깁니다. 죄를 이깁니다. 사망을 이깁니다. 위대한 역사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성경은 말합니다. ‘이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끊으리요. 그가 나를 의롭다 하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입니다.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당당하게 그리고 그 사랑을 깊이 깊이 간직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유명한 폴 틸리히의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회색 어두움이 있다. 첫째, 공허감입니다. 가만히 보면 종종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공부하느라 정신 없다가 그 다음엔 연애하느라고 한참 빠졌다가 그 다음엔 결혼을 해 가지고 애 낳고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다가 애들이 다 결혼해 가지고 나가고 그러니까 “허전합니다. 허망합니다.” 왜요? 당신의 사랑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았거든. 정말로 사랑한 일엔 허망함이 없습니다. 사랑이 의미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참사랑 속에는 허망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공허감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죄책감입니다. 현대인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복잡합니다. 이렇게 변명하고 저래서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지만, 그 양심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I.Q.가 90이하가 되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멍청하면 걱정도 없습니다. 똑똑하니까 생각이 많습니다. 이렇게 변명, 아무리 변명을 해보아도 내 양심은 나를 정죄합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안에서 회개의 용기를 얻을 때에 비로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 이 많은 죄책에서 아무도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술집으로 가고, 그래서 마약을 하고 그래서 폭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숨길 수 없는 죄책감, 여기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또한 공포감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암담하기만 합니다. 옛날에 제가 써놓은 제 학위 논문이 종말론입니다. 그래서 미래학에 대해서 Futurology에 대해서 제가 책을 비교적 많이 읽는 편입니다. 새로 나온다는 책이 나오면 제가 또 사서 읽어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래학을 아무리 보아도 결론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암담하다, 절망이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종말론과 미래학은 다릅니다. 여러분, 이 무서운 공포, 불확실함, 암담함, 절망이 밀려옵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입니까?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그 믿음 안에서만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그 사람만이 모든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은혜 Sola Glatia! 모든 것은 은혜다. 절대적 은혜다.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Sola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다시 한 번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생각하십시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영광! 새로운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생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