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
분류 |
---|
박삼우목사 (잠실중앙교회)
우리는 우리의 신앙정신을 표현할 때 개혁주의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개혁주의란 말은 종교개혁 당시의 개혁자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칼빈을 중심으로 한 성경중심의 개혁자들의 신앙정신을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혁자,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성경중심의 신앙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곧 성경중심의 신앙원리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 성경중심의 신앙원리로 볼 때 종교개혁은 16세기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계속해서 잘못된 교리와 풍조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은 고쳐나가면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성경적 원리 위에 세워 나가야 합니다.
전에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이 에티오피아를 방문하신 다음, 에티오피아 교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공산화되기 전으로서 2천년 역사와 전통을 가진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경직 목사님 에티오피아 교회를 방문하신 소감은 ''한 마디로 기독교인지 미신인지 분간을 못하겠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기독교는 2천년 동안 한번도 개혁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천년 동안 자기들 나름대로는 처음 신앙 그대로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거기에는 온갖 잡다한 미신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이 다 섞여 있었습니다. 개혁되지 아니한 기독교,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러고 얼마안가 그 나라가 몽땅 공산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침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침반의 바늘을 남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나침반이 움직일 때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바늘도 움직여야 합니다. 나침반은 움직이는데 바늘이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남북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나침반 속에서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기 위해 계속해서 움직이는 모습,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뜯어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가만히 보면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전임자가 한 것은 모조리 틀렸다고 뜯어고칩니다. 뜯어고치다가 세월 다 보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개혁은 세상의 개혁과 다릅니다. 기독교의 개혁은 오히려 옛 것을 간직하자는 것이요, 옛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사상과 잘못된 풍조가 계속해서 교회 안에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이 중단되면 그 때부터 벌써 변질됩니다. 부단히, 끊임없이 성경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잘못된 사조와 여러 가지 세속적 풍조 속에서 원래의 성경적 교회, 성경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여기에 개혁주의 신앙인의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라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6절에 보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쫓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했습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쫓고 있습니다.
7절에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의도적으로 변질시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요란케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다른 복음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짜는 언제나 진짜보다 좋게 보일 수가 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서 떠나 이 다른 복음을 좇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른 복음은 율법주의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의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무엇인가 스스로 공로를 세우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를 이루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지, 어떻게 은혜로 거저 나갈 수 있느냐는 주장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인간은 다 범죄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이룬 것은 그 어떤 선행과 공로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다 지키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심으로 의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의''를 내 것으로 받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진리가 인간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아니 그래도 사람이 무엇인가 선행을 하고 공로를 세워야지 단지 믿기만 해서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무엇인가 선행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도 여기에 있습니다. 천주교의 교리의 근본이 바로 이 ''공로주의''에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가 열심히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공로를 쌓아야 합니다. 이 교리가 발달해서 어떤 사람은 선행을 너무 많이 쌓아 공로가 넘칩니다. 공로가 넘치는 그 사람이 바로 성자, 성인이 됩니다. 성인은 공로가 남아도니 그 공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이래서 성인에게 기도할 수 있다는 교리가 나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인은 공로가 남아도니 그것을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 공로를 돈을 주고 사서 천국 가는 것이 바로 면제부입니다. 결국 면죄부를 판매한 것도 공로주의에 근거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젊은 시절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옆에 있던 친구가 돌연히 벼락을 맞아 즉사하는 경험을 합니다. 루터는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 구원부터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당시에는 수도원에 들어가면 보통 사람보다 구원받기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부터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중세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온갖 고행을 다 감당하고, 공로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마다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선행을 쌓아도 마음속에 있는 무서운 죄악을 덮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구원은 내가 공로를 쌓아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함 받는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이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터가 한번은 다락방에서 기도를 하는데 마귀가 나타나서 벽에다가 루터가 지은 모든 죄를 기록합니다. 보니 자기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릴 때 지은 죄까지 다 기록을 했습니다. 마귀는 "이런 네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이냐?"고 조롱합니다. 루터는 "나는 정말 소망이 없는 존재구나" 생각하며 절망합니다. 바로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이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았다고 말하면서 벽에 기록된 모든 죄들을 다 지워버립니다. 그러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여기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는 마귀를 향해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고 외치면서 잉크병을 향해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마귀는 이 말씀 앞에 즉시로 살아졌습니다. 루터는 즉시 롬 1:17에서 이 말씀을 확인하고 이것이 바로 복음임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확신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본문의 바울의 주장도 그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님이요, 십자가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곳에서 지적합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순수하게 시작했는데 왜 이제 와서 변질되느냐 뜻입니다. 시작은 순수했는데 과정에서 변질되었습니다. 출발은 아름다웠는데 출발된 그 마음, 그 뜻대로 계속 나가지 못하고 도중에 바뀌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에는 이런 잘못된 사조가 없겠습니까? 바르게 시작했는데 오다가 중간에 변질 된 것은 없겠습니까? 많은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 중에서 제가 요즈음 특별히 우려하는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교회에 대한 소유개념입니다. 어떤 목사 혹은 어떤 장로가 교회를 위해 수 십 년 봉사하며 희생합니다. 교회를 위해 눈물과 기도를 쏟았습니다. 많은 물질도 바쳤습니다. 참으로 귀하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던 사이 슬그머니 이제는 내가 교회의 주인이 됩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내 주장, 내 고집을 꺽지 않습니다. 심지어 은퇴를 해도 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훌륭한 목사님들, 훌륭한 장로님들이 여기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변질입니다. 출발을 아름다웠지만 중간에 바뀌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회의 풍토도 문제입니다. 교회 회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당회든 제직회든 노회든 총회든 모든 교회의 회의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회의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없습니다. 예배 드릴 때는 하나님이 계셨는데 마치고 회의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에서 회의하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사도행전에 그들의 회의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 회의에서 하나님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된 복음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이성을 성경 위에 두는 자유주의 신학이 있습니다. 이성으로 성경을 마음대로 비판하고, 성경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것은 다 부인해버립니다.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사요 신학교수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특별 집회를 했는데 강사가 무당이었습니다. 목사님 사회 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 무녀님 나오셔서 말씀 전하시겠습니다." 이러한 사조들이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복음의 진리를 사수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비판하다보면 자칫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 옳다는 독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아닌, 엉뚱한 것을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가만히 보면 우리 주위에는 성경적 진리가 아닌 것들을 절대화시켜서, 이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다시 생각해보십시다. 그는 결코 매사를 독선적으로 처리하거나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전 9:20 이하에 보면,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을 구원받게 할 수만 있다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했습니다. 진리 아닌 것은 얼마든지 양보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하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처럼 행동했습니다. 복음이 더 잘 전파될 수만 있다면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적인 것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것은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 날 우리가 지켜온 것 중에는 성경적이 아닌 것도 많이 있습니다. 문화적인 이유로 혹은 성경을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성경적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보고,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지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 성경적이 아닌 것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화는 바뀌고 시대는 변합니다. 엄청난 속도로 모든 것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따라 잡을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진리가 아닌 한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오히려 개혁신앙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한 한 양보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한 발자국도 양보가 없습니다. 8절에 보니까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고 합니다. 여기 저주받는다는 말은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지옥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 라고 했습니다. "나까지도" 그 말입니다. 내가 전에 전한 순수한 복음이 있는데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한다면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복음의 절대성, 복음의 순수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내가 믿는 신앙이 성경 위에 있기 때문에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확신 위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루터는 종교 개혁을 일으킨 다음 보름스국회에 호출을 받습니다. 거기서 국왕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루터가 기록한 25권의 저서를 자기의 책으로 인정하는가 물었습니다. 둘째는 그 책에 있는 내용들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물었습니다. 루터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그 책들이 자신의 저서임을 인정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루의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다음날 루터가 다시 법정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대답했습니다 " 내 책에 있는 내용은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경에 근거한 내용을 성경으로 반박하지 않는 한 나는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쳤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왕과 수많은 권력자 둘러 서 있는데 루터는 홀로 섰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장이 성경에 있다고 확신할 때 성경으로 그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데 어떻게 취소합니까? 사람이, 세상의 권력이, 성경적 진리를 취소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당시 15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천주교입니다. 왕들 위에 있는 천주교 교황입니다. 그 막강한 세력 앞에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를 도우소서" 외칩니다. 이 신앙, 이 믿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떠합니까? 왜 우리의 신앙에는 이런 능력이 없습니까? 내가 믿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인데 교회 문만 나서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런 것 같은데 세상에 나가면 또 희미해집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이렇게 사시겠습니까? 이건 끌려가는 것이요, 이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결코 힘을 낼 수 없습니다. 복음에 확신을 가지고 말씀 위해 굳게 서야 합니다. 내가 믿는 복음이 진리요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여기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위해서라면 희생도 하고 헌신도 할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위해 살고, 이 진리를 반대하고 이 진리를 변질시키는 모든 세력과 싸울 수 있는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여기 진정한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에 말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도 좋게 하고, 하나님도 좋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게 하기 위해 때로 사람에게 잘못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때로 여러분 가까이 있는 사람, 소위 여러분의 친구, 여러분의 동료를 슬프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고까지 말합니다.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동안 하나님은 얼마나 섭섭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면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 상관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에서 오는 그 기쁨, 여기 진정한 행복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루터가 보름스국회에 나가려고 할 때 친구가 말렸습니다. 그때 루터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마귀가 보름스 국회의사당 지붕의 기왓장만큼 많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도 마귀도 권세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는 바로 이때 우리가 잘 아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이 찬송을 스스로 지어 부르면서 보름스국회로 나아갔습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면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 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성경적 진리 위해 굳게 서서 진리를 변질시키는 세력을 대항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오늘 이 혼탁한 시대 앞에 개혁주의 신앙인으로서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내가 믿는 진리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변질시키는 모든 세력에 대해 복음을 지켜 가십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 이 시대의 참된 개혁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깨우쳐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간구하오니 내가 믿는바 복음의 절대성을 확신케 하시고, 이 진리 위해 굳게 서서 오늘 변질되어 가는 풍조 앞에서 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신앙 위에 굳게 서서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 상관하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정 이 혼탁한 시대 앞에서 개혁주의 신앙인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희들, 또 저희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정신을 표현할 때 개혁주의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개혁주의란 말은 종교개혁 당시의 개혁자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칼빈을 중심으로 한 성경중심의 개혁자들의 신앙정신을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혁자,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성경중심의 신앙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곧 성경중심의 신앙원리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 성경중심의 신앙원리로 볼 때 종교개혁은 16세기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계속해서 잘못된 교리와 풍조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은 고쳐나가면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성경적 원리 위에 세워 나가야 합니다.
전에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이 에티오피아를 방문하신 다음, 에티오피아 교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공산화되기 전으로서 2천년 역사와 전통을 가진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경직 목사님 에티오피아 교회를 방문하신 소감은 ''한 마디로 기독교인지 미신인지 분간을 못하겠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기독교는 2천년 동안 한번도 개혁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천년 동안 자기들 나름대로는 처음 신앙 그대로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거기에는 온갖 잡다한 미신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이 다 섞여 있었습니다. 개혁되지 아니한 기독교,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러고 얼마안가 그 나라가 몽땅 공산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침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침반의 바늘을 남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나침반이 움직일 때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바늘도 움직여야 합니다. 나침반은 움직이는데 바늘이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남북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나침반 속에서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기 위해 계속해서 움직이는 모습,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뜯어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가만히 보면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전임자가 한 것은 모조리 틀렸다고 뜯어고칩니다. 뜯어고치다가 세월 다 보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개혁은 세상의 개혁과 다릅니다. 기독교의 개혁은 오히려 옛 것을 간직하자는 것이요, 옛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사상과 잘못된 풍조가 계속해서 교회 안에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이 중단되면 그 때부터 벌써 변질됩니다. 부단히, 끊임없이 성경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잘못된 사조와 여러 가지 세속적 풍조 속에서 원래의 성경적 교회, 성경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여기에 개혁주의 신앙인의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라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6절에 보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쫓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했습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쫓고 있습니다.
7절에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의도적으로 변질시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요란케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다른 복음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짜는 언제나 진짜보다 좋게 보일 수가 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서 떠나 이 다른 복음을 좇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른 복음은 율법주의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의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무엇인가 스스로 공로를 세우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를 이루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지, 어떻게 은혜로 거저 나갈 수 있느냐는 주장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인간은 다 범죄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이룬 것은 그 어떤 선행과 공로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다 지키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심으로 의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의''를 내 것으로 받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진리가 인간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아니 그래도 사람이 무엇인가 선행을 하고 공로를 세워야지 단지 믿기만 해서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무엇인가 선행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도 여기에 있습니다. 천주교의 교리의 근본이 바로 이 ''공로주의''에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가 열심히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공로를 쌓아야 합니다. 이 교리가 발달해서 어떤 사람은 선행을 너무 많이 쌓아 공로가 넘칩니다. 공로가 넘치는 그 사람이 바로 성자, 성인이 됩니다. 성인은 공로가 남아도니 그 공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이래서 성인에게 기도할 수 있다는 교리가 나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인은 공로가 남아도니 그것을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 공로를 돈을 주고 사서 천국 가는 것이 바로 면제부입니다. 결국 면죄부를 판매한 것도 공로주의에 근거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젊은 시절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옆에 있던 친구가 돌연히 벼락을 맞아 즉사하는 경험을 합니다. 루터는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 구원부터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당시에는 수도원에 들어가면 보통 사람보다 구원받기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부터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중세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온갖 고행을 다 감당하고, 공로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마다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선행을 쌓아도 마음속에 있는 무서운 죄악을 덮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구원은 내가 공로를 쌓아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함 받는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이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터가 한번은 다락방에서 기도를 하는데 마귀가 나타나서 벽에다가 루터가 지은 모든 죄를 기록합니다. 보니 자기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릴 때 지은 죄까지 다 기록을 했습니다. 마귀는 "이런 네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이냐?"고 조롱합니다. 루터는 "나는 정말 소망이 없는 존재구나" 생각하며 절망합니다. 바로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이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았다고 말하면서 벽에 기록된 모든 죄들을 다 지워버립니다. 그러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여기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는 마귀를 향해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고 외치면서 잉크병을 향해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마귀는 이 말씀 앞에 즉시로 살아졌습니다. 루터는 즉시 롬 1:17에서 이 말씀을 확인하고 이것이 바로 복음임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확신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본문의 바울의 주장도 그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님이요, 십자가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곳에서 지적합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순수하게 시작했는데 왜 이제 와서 변질되느냐 뜻입니다. 시작은 순수했는데 과정에서 변질되었습니다. 출발은 아름다웠는데 출발된 그 마음, 그 뜻대로 계속 나가지 못하고 도중에 바뀌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에는 이런 잘못된 사조가 없겠습니까? 바르게 시작했는데 오다가 중간에 변질 된 것은 없겠습니까? 많은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 중에서 제가 요즈음 특별히 우려하는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교회에 대한 소유개념입니다. 어떤 목사 혹은 어떤 장로가 교회를 위해 수 십 년 봉사하며 희생합니다. 교회를 위해 눈물과 기도를 쏟았습니다. 많은 물질도 바쳤습니다. 참으로 귀하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던 사이 슬그머니 이제는 내가 교회의 주인이 됩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내 주장, 내 고집을 꺽지 않습니다. 심지어 은퇴를 해도 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훌륭한 목사님들, 훌륭한 장로님들이 여기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변질입니다. 출발을 아름다웠지만 중간에 바뀌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회의 풍토도 문제입니다. 교회 회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당회든 제직회든 노회든 총회든 모든 교회의 회의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회의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없습니다. 예배 드릴 때는 하나님이 계셨는데 마치고 회의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에서 회의하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사도행전에 그들의 회의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 회의에서 하나님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된 복음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이성을 성경 위에 두는 자유주의 신학이 있습니다. 이성으로 성경을 마음대로 비판하고, 성경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것은 다 부인해버립니다.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사요 신학교수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특별 집회를 했는데 강사가 무당이었습니다. 목사님 사회 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 무녀님 나오셔서 말씀 전하시겠습니다." 이러한 사조들이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복음의 진리를 사수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비판하다보면 자칫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 옳다는 독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아닌, 엉뚱한 것을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가만히 보면 우리 주위에는 성경적 진리가 아닌 것들을 절대화시켜서, 이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다시 생각해보십시다. 그는 결코 매사를 독선적으로 처리하거나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전 9:20 이하에 보면,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을 구원받게 할 수만 있다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했습니다. 진리 아닌 것은 얼마든지 양보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하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처럼 행동했습니다. 복음이 더 잘 전파될 수만 있다면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적인 것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것은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 날 우리가 지켜온 것 중에는 성경적이 아닌 것도 많이 있습니다. 문화적인 이유로 혹은 성경을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성경적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보고,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지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 성경적이 아닌 것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화는 바뀌고 시대는 변합니다. 엄청난 속도로 모든 것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따라 잡을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진리가 아닌 한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오히려 개혁신앙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한 한 양보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한 발자국도 양보가 없습니다. 8절에 보니까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고 합니다. 여기 저주받는다는 말은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지옥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 라고 했습니다. "나까지도" 그 말입니다. 내가 전에 전한 순수한 복음이 있는데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한다면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복음의 절대성, 복음의 순수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내가 믿는 신앙이 성경 위에 있기 때문에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확신 위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루터는 종교 개혁을 일으킨 다음 보름스국회에 호출을 받습니다. 거기서 국왕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루터가 기록한 25권의 저서를 자기의 책으로 인정하는가 물었습니다. 둘째는 그 책에 있는 내용들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물었습니다. 루터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그 책들이 자신의 저서임을 인정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루의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다음날 루터가 다시 법정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대답했습니다 " 내 책에 있는 내용은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경에 근거한 내용을 성경으로 반박하지 않는 한 나는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쳤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왕과 수많은 권력자 둘러 서 있는데 루터는 홀로 섰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장이 성경에 있다고 확신할 때 성경으로 그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데 어떻게 취소합니까? 사람이, 세상의 권력이, 성경적 진리를 취소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당시 15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천주교입니다. 왕들 위에 있는 천주교 교황입니다. 그 막강한 세력 앞에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를 도우소서" 외칩니다. 이 신앙, 이 믿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떠합니까? 왜 우리의 신앙에는 이런 능력이 없습니까? 내가 믿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인데 교회 문만 나서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런 것 같은데 세상에 나가면 또 희미해집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이렇게 사시겠습니까? 이건 끌려가는 것이요, 이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결코 힘을 낼 수 없습니다. 복음에 확신을 가지고 말씀 위해 굳게 서야 합니다. 내가 믿는 복음이 진리요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여기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위해서라면 희생도 하고 헌신도 할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위해 살고, 이 진리를 반대하고 이 진리를 변질시키는 모든 세력과 싸울 수 있는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여기 진정한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에 말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도 좋게 하고, 하나님도 좋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게 하기 위해 때로 사람에게 잘못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때로 여러분 가까이 있는 사람, 소위 여러분의 친구, 여러분의 동료를 슬프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고까지 말합니다.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동안 하나님은 얼마나 섭섭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면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 상관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에서 오는 그 기쁨, 여기 진정한 행복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루터가 보름스국회에 나가려고 할 때 친구가 말렸습니다. 그때 루터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마귀가 보름스 국회의사당 지붕의 기왓장만큼 많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도 마귀도 권세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는 바로 이때 우리가 잘 아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이 찬송을 스스로 지어 부르면서 보름스국회로 나아갔습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면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 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성경적 진리 위해 굳게 서서 진리를 변질시키는 세력을 대항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오늘 이 혼탁한 시대 앞에 개혁주의 신앙인으로서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내가 믿는 진리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변질시키는 모든 세력에 대해 복음을 지켜 가십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 이 시대의 참된 개혁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깨우쳐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간구하오니 내가 믿는바 복음의 절대성을 확신케 하시고, 이 진리 위해 굳게 서서 오늘 변질되어 가는 풍조 앞에서 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신앙 위에 굳게 서서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 상관하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정 이 혼탁한 시대 앞에서 개혁주의 신앙인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희들, 또 저희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