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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한 늙은 구두쇠에게 길들여진 까마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까마귀는 동전만 보면 몰래 물어다가 벽에 뚫린 구멍 속에 숨겨두곤 했습니다. 그런 이상한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옆집 고양이가 하루는 까마귀에게 물었습니다. “그 반짝이는 동그란 물건들은 네게 아무 쓸모도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열심히 물어 와서 숨기고 그러냐?” 이에 까마귀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인이 하니까 나도 그대로 따라 할 뿐이야. 주인에게도 돈이 가득 들어 있는 돈궤가 있지만 쓰지 않기는 나와 똑같거든.”
꽃이 피어 있는 산길을 걸을 때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음미하며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으며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꽃들을 꺾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꽃들이 너무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말입니다. 그 꽃들로 자기 집을 장식하려는 것이겠지요. 들꽃을 꺾어다가 자기 집을 장식하는 사람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어떤 것일까요? 고작해야 그 꽃의 고운 빛깔이나 향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겠지요.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 모르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일 수도 없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없습니다. 들꽃을 꺾어 자기 집을 꾸미는 사람은 한 송이 꽃 속에 있는 우주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꽃을 피운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과 높이 떠 있는 구름을, 꽃을 스쳐지나간 바람의 속삭임과 꽃 위에 머물렀던 이슬의 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주를 감싸고 있는 조물주의 체온을 느끼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일 이런 아름다움을 안다면 꽃을 꺾었을 리가 없습니다.
집안에 빵을 잔뜩 쌓아두었다고 해서 빵맛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빵을 손에 쥐기까지 이어진 온갖 자연의 조화와 더불어 농부의 수고, 그리고 그 빵을 쥔 내 손에 땀과 눈물이 묻어 있지 않고서 어떻게 빵맛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곳간에 가득 쌓여 있는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이런 뜻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본 사람은 빵맛을 압니다.
빵은 우리 배를 채우는 수단에 그치지 않습니다. 빵에는 영성(靈性)이 있습니다. 밥은 하늘이요 밥은 우주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은 본다 /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 And a heaven in the wild flower, /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라고 노래했고, 의상조사(義湘祖師)도 “티끌 하나가 온 우주를 머금었고. 찰나의 생각이 끝도 없는 영겁이라”(一微塵中含十方 一念卽時無量劫)이라 했습니다.
기독교의 감사는 바람직한 미덕 이상이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는 농부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농사짓고 추수하지는 않았지만 풍성한 곡식과 야채와 과일들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농부의 마음 한 자락을 나눠 가지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입니다. 그는 매우 딱딱한 정통주의 신학자입니다. 이런 딱딱한 신학자가 감사에 대해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감사할 일을 만나도 감사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고집스런 정통주의 신학자도 감사에 대해서는 딱딱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무엇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종교와 상관없이 누가 봐도 바람직한 미덕 중 하나입니다. 남의 호의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곧 외로워질 것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좋은 일을 우연이나 행운으로 돌리는 사람의 삶은 무척 건조할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감사는 외부에서 주어진 좋은 쪽으로의 변화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가리킵니다. 돈을 벌었다든지 승진을 했다든지 명예를 얻었다든지 좋은 대학에 진학을 했다든지 하는 등의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을 일어나게 한 누군가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감사’라고 부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감사에 대한 생각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감사할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비종교인들과 차이가 있지만 결국 외부에서 주어진 좋은 쪽으로의 변화에 대한 반응이란 점에서는 비종교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더욱이 많은 목사들이 좋은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면 반드시 더 좋은 일을 만난다고 가르칩니다. 좋은 일을 만났는데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사람이요 결국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이라고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기독교의 감사의 정신을 크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감사는 '뇌물'도 아니고 '도박'도 아닙니다.
좋은 일을 만났을 때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께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도 훌륭한 미덕입니다. 그런 일을 만날 때마다 감사헌금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10불씩 저축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 다 좋은 일들입니다. 늘 뭔가 거창한 것을 얘기를 하고 심오한 정신세계를 얘기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사소한 선행에도 인색한 사람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작은 선행으로 표현하고 나누는 마음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기독교의 감사는 독주(獨奏)가 아니라 합주(合奏)
그런데 오늘 저는 기독교의 감사에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합니다. 기독교의 감사는 음악에 비유하면 혼자만 잘 연주하면 되는 '독주'가 아니라 다른 연주자들과 어우러져서 좋은 화음을 내야 하는 '합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삶의 모든 면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교향곡' 같은 것입니다. 감사는 외부에서 주어진 좋은 변화에 대해 고마워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감사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기독교인의 감사는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 삶을 대하는 기본자세이고 삶의 모든 면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교향곡입니다. 그럼 감사는 무엇과 어울려야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감사는 다음의 일곱 개의 악기와 화음을 이뤄야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선 감사는 '깨끗함'과 어우러져야 합니다. 때가 끼어 있는 유리창을 닦아 투명하게 만드는 것처럼 선함과 순수함으로 자기 마음을 갈고 닦아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이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감사는 '따뜻함'과 어우러져 화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퉁명스럽지 않은 다정함으로 남을 배려하고 그 누구도 모질게 내치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몫을 이웃과 나누기를 즐겨하고 사소한 것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함과 어우러져야 감사는 비로소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또 감사는 '겸손함'과도 소리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아도취나 오만한 독선에 빠지지 않는 겸손함과 온유함과 더불어 화음을 이뤄야 감사는 빛을 발합니다. 남을 섣불리 비판하기 전에 그의 좋은 점부터 찾아내서 칭찬하고 격려하다 보면 어느새 감사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기쁨'과도 어우러져야 합니다. 우울하고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끔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그 안에 숨어 있는 뜻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 너그러워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감사는 예민하게 '깨어 있는 마음'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는 많이 보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으르고 둔감한 사람은 감사의 별들을 볼 수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사물에 대해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민감하게 바라보고 느끼는 사람이 사소하게 보이는 일에서도 깊은 의미를 찾아내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평화로운 마음'과 화음을 이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남 때문에 화가 난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화는 결국 남이 아니라 내가 일으키는 것입니다. 화의 원인은 내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만이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임을 깨닫는 사람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기도하는 마음'과 어우러져야 합니다. 좋은 일에든 나쁜 일에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는 빈 마음에서 감사가 솟아납니다. 숨을 쉬듯 끊임없이 기도하는 마음 안에서 마침내 감사는 크고 깊은 사랑으로 이어져 여러분의 삶은 오늘에서 내일로, 그리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축제가 될 것입니다.
Happy Thanksgiving! ♣
한 늙은 구두쇠에게 길들여진 까마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까마귀는 동전만 보면 몰래 물어다가 벽에 뚫린 구멍 속에 숨겨두곤 했습니다. 그런 이상한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옆집 고양이가 하루는 까마귀에게 물었습니다. “그 반짝이는 동그란 물건들은 네게 아무 쓸모도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열심히 물어 와서 숨기고 그러냐?” 이에 까마귀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인이 하니까 나도 그대로 따라 할 뿐이야. 주인에게도 돈이 가득 들어 있는 돈궤가 있지만 쓰지 않기는 나와 똑같거든.”
꽃이 피어 있는 산길을 걸을 때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음미하며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으며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꽃들을 꺾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꽃들이 너무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말입니다. 그 꽃들로 자기 집을 장식하려는 것이겠지요. 들꽃을 꺾어다가 자기 집을 장식하는 사람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어떤 것일까요? 고작해야 그 꽃의 고운 빛깔이나 향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겠지요.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 모르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일 수도 없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없습니다. 들꽃을 꺾어 자기 집을 꾸미는 사람은 한 송이 꽃 속에 있는 우주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꽃을 피운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과 높이 떠 있는 구름을, 꽃을 스쳐지나간 바람의 속삭임과 꽃 위에 머물렀던 이슬의 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주를 감싸고 있는 조물주의 체온을 느끼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일 이런 아름다움을 안다면 꽃을 꺾었을 리가 없습니다.
집안에 빵을 잔뜩 쌓아두었다고 해서 빵맛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빵을 손에 쥐기까지 이어진 온갖 자연의 조화와 더불어 농부의 수고, 그리고 그 빵을 쥔 내 손에 땀과 눈물이 묻어 있지 않고서 어떻게 빵맛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곳간에 가득 쌓여 있는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이런 뜻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본 사람은 빵맛을 압니다.
빵은 우리 배를 채우는 수단에 그치지 않습니다. 빵에는 영성(靈性)이 있습니다. 밥은 하늘이요 밥은 우주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은 본다 /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 And a heaven in the wild flower, /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라고 노래했고, 의상조사(義湘祖師)도 “티끌 하나가 온 우주를 머금었고. 찰나의 생각이 끝도 없는 영겁이라”(一微塵中含十方 一念卽時無量劫)이라 했습니다.
기독교의 감사는 바람직한 미덕 이상이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는 농부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농사짓고 추수하지는 않았지만 풍성한 곡식과 야채와 과일들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농부의 마음 한 자락을 나눠 가지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입니다. 그는 매우 딱딱한 정통주의 신학자입니다. 이런 딱딱한 신학자가 감사에 대해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감사할 일을 만나도 감사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고집스런 정통주의 신학자도 감사에 대해서는 딱딱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무엇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종교와 상관없이 누가 봐도 바람직한 미덕 중 하나입니다. 남의 호의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곧 외로워질 것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좋은 일을 우연이나 행운으로 돌리는 사람의 삶은 무척 건조할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감사는 외부에서 주어진 좋은 쪽으로의 변화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가리킵니다. 돈을 벌었다든지 승진을 했다든지 명예를 얻었다든지 좋은 대학에 진학을 했다든지 하는 등의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을 일어나게 한 누군가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감사’라고 부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감사에 대한 생각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감사할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비종교인들과 차이가 있지만 결국 외부에서 주어진 좋은 쪽으로의 변화에 대한 반응이란 점에서는 비종교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더욱이 많은 목사들이 좋은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면 반드시 더 좋은 일을 만난다고 가르칩니다. 좋은 일을 만났는데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사람이요 결국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이라고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기독교의 감사의 정신을 크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감사는 '뇌물'도 아니고 '도박'도 아닙니다.
좋은 일을 만났을 때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께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도 훌륭한 미덕입니다. 그런 일을 만날 때마다 감사헌금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10불씩 저축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 다 좋은 일들입니다. 늘 뭔가 거창한 것을 얘기를 하고 심오한 정신세계를 얘기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사소한 선행에도 인색한 사람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작은 선행으로 표현하고 나누는 마음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기독교의 감사는 독주(獨奏)가 아니라 합주(合奏)
그런데 오늘 저는 기독교의 감사에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합니다. 기독교의 감사는 음악에 비유하면 혼자만 잘 연주하면 되는 '독주'가 아니라 다른 연주자들과 어우러져서 좋은 화음을 내야 하는 '합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삶의 모든 면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교향곡' 같은 것입니다. 감사는 외부에서 주어진 좋은 변화에 대해 고마워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감사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기독교인의 감사는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 삶을 대하는 기본자세이고 삶의 모든 면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교향곡입니다. 그럼 감사는 무엇과 어울려야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감사는 다음의 일곱 개의 악기와 화음을 이뤄야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선 감사는 '깨끗함'과 어우러져야 합니다. 때가 끼어 있는 유리창을 닦아 투명하게 만드는 것처럼 선함과 순수함으로 자기 마음을 갈고 닦아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이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감사는 '따뜻함'과 어우러져 화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퉁명스럽지 않은 다정함으로 남을 배려하고 그 누구도 모질게 내치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몫을 이웃과 나누기를 즐겨하고 사소한 것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함과 어우러져야 감사는 비로소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또 감사는 '겸손함'과도 소리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아도취나 오만한 독선에 빠지지 않는 겸손함과 온유함과 더불어 화음을 이뤄야 감사는 빛을 발합니다. 남을 섣불리 비판하기 전에 그의 좋은 점부터 찾아내서 칭찬하고 격려하다 보면 어느새 감사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기쁨'과도 어우러져야 합니다. 우울하고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끔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그 안에 숨어 있는 뜻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 너그러워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감사는 예민하게 '깨어 있는 마음'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는 많이 보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으르고 둔감한 사람은 감사의 별들을 볼 수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사물에 대해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민감하게 바라보고 느끼는 사람이 사소하게 보이는 일에서도 깊은 의미를 찾아내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평화로운 마음'과 화음을 이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남 때문에 화가 난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화는 결국 남이 아니라 내가 일으키는 것입니다. 화의 원인은 내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만이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임을 깨닫는 사람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기도하는 마음'과 어우러져야 합니다. 좋은 일에든 나쁜 일에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는 빈 마음에서 감사가 솟아납니다. 숨을 쉬듯 끊임없이 기도하는 마음 안에서 마침내 감사는 크고 깊은 사랑으로 이어져 여러분의 삶은 오늘에서 내일로, 그리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축제가 될 것입니다.
Happy Thanksgiv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