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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근목사 (영안교회)
미국에 상당히 유명한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레드 우드 스테이트 파크(Red Wood State Park)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붉은 나무가 있는 도립 공원" 정도가 되겠습니다. 우리나라도 국립공원, 도립공원이 있는데 그 차이를 아시죠? 국립공원은 무조건 좋은 곳입니다. 주왕산 국립공원, 설악산 국립공원 등 이런 곳은 다 국립공원입니다. 그리고 도립 공원이 있어요. 조금 격이 낮은 곳이죠. 도립공원이지만 이곳은 다른 곳보다도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데 다 붉은 색이에요. 그 나무 이름이 ''레드 우드''라고 해서 ''레드 우드 스테이트 파크 '' 이렇게 정했습니다.
이 공원이 사람들의 많은 방문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나무가 붉은 색깔을 띠기도 했지만 굉장히 크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큰가? 아주 큰 나무에 시범적으로 그 나무 둥치에 터널을 뚫어 놨는데 2대의 자동차가 왔다갔다합니다. 2차선 도로가 나 있어요. 이게 나무예요. 어느 정도 큰지 상상이 가십니까? 제일 큰 나무는 장정 20명이 손을 잡고 둘러서야 그 아름드리를 겨우 두를 만큼 큽니다. 키도 얼마나 큰지, 밑에서 보면 그 끝을 잘 볼 수가 없어요. 이런 나무들이 우거져 있으니까 사람들이 구경할 만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아이들을 데리고 그 공원에 가 봤어요. 얼마나 굵고 높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지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굵고 큰 나무니까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지 궁금해서 그 뿌리를 파헤쳐 보기 시작했습니다. 보통은 나무의 높이만큼 뿌리가 깊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레드우드는 뿌리가 전혀 깊이 내려지지가 않았어요. 깊지도 않은데 어떻게 이 큰 덩치를 유지할 수가 있을까? 사람들이 계속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큰 덩치를 깊지 않은 뿌리로 감당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레드우드 나무의 뿌리는 서로 옆의 나무와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옆의 나무와 서로 뿌리가 연결되어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서 그 큰 덩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저는 그 공원에서 가끔 쓰러져 있는 레드우드 나무를 보았습니다. 쓰러져 있는 것은 반드시 홀로 서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혼자 서 있으면 뿌리가 깊게 들어가지 못하는 까닭에, 어느 정도 자라면 덩치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공원 안내자들이 저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에 사람들이 별명을 붙이기를 ''더불어 사는 나무'' ''혼자서는 살수 없는 나무'' 라고 붙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 역시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시고 우리를 만드실 때, 동역자들을 만들어 주셨어요. 같이 살도록 만들어 주셨어요. 우리는 같이,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싫든 좋든 우리 성도들은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단 두 기관을 만드셨는데, 하나는 가정이요, 또 하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유일하게 만드신 이 두 기관을 하나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가정을 무엇에 비유해 주었습니까?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1)
부부는 두 사람이지만, 각각의 개체가 아니라 한 몸이라고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를 이 땅에 만드시고 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교회라고 하는 곳은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인간은 같이 사는 존재라는 거예요. 부부가 따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살면, 부부이긴 하지만 그 부부는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어요. 자랄 수가 없고, 성숙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을 누릴 수도 없어요. 왜? 한 몸이 따로따로 사니까요. 여러분, 이런 몸을 생각해 봤어요? 눈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이 눈이 날마다 발에게 "아이고, 등신! 매일 발 고린내 나고!" 그래서 발이 살짝 가까이 오면 "야야 가까이 오지마! 저리 가!" 이런 몸을 상상해 보셨어요? 이런 몸은 고통받는 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신기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된 때에 무엇 하러 이 설날에 고생하며 이렇게들 많이 오셨습니까? 저는 오늘 반쯤 자리가 빌 줄 알았는데 꽉 찼어요. 인터넷으로 예배드릴 수 있잖아요. 컴퓨터만 켜 보세요. 저는 앉아서 서울에 있는 목사님의 설교를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목사님 설교를 들을 수 있어요. 여러분, 아십니까? 여러분이 멍하게 앉아 있는 그 표정이 독일도 가고, 미국도 같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인터넷 생방송, 생중계가 되어 있어요. 어떤 분이 저보고 왜 이름표를 안 다냐고 그래요.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목사님, 그 이름표가 교회에는 참 좋지만 세계 사람들이 다 보는데 좀 이상합디다. 떼어 주세요" 제 설교를 미국에서 보고 감사 편지가 와요. 독일에서 제 설교를 보고 편지가 와요. 앉아서 모든 설교와 예배를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 혼자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에요. 혼자서는 언젠가 반드시 쓰러질 때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우리가 한 몸같이 함께 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고, 우리의 믿음이 성숙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에 나오는 많은 성도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혼자서 열심히 성경 봅니다. 그리고 혼자 예배도 드립니다. 혼자 테이프를 통해 말씀도 듣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왔다갔다합니다. 1년, 2년이 지나도 옆의 사람과 전혀 뿌리가 얽히지 않은, 관계를 맺지 않은 성도들이 오늘 영안 교회에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지 아십니까? 혼자 있는 레드우드 나무가 쓰러지듯이, 그는 언젠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비전과 주님의 비전에 동역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바람직한 성도는 어떤 성도인가? 오늘 데살로니가 2장 후반 절에서 3장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은, 이 중요한 이슈인 성도와의 관계, 성도간의 교제에 대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옆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신앙생활 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교회말고 이 영안 교회에 나오셔서 누군가와 끈끈하게 뿌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대답해 보십시오. 혹시 피상적인 관계는 아닌가요? 어릴 때부터 10년, 20년 신앙생활 해 와서 서로 알기는 잘 압니다. 집안끼리도 알고 자녀들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정말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몇 분이나 계시나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한 지체와 한 몸의 지체로서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옆 사람과 신앙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가를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풍랑과 이 세상의 어려움을 능히 헤쳐 나가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천성을 향해 순례의 길을 성공적으로 떠나기 위해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이 있는데, 옆의 성도와 이러이러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설명해 주십니다. 먼저 우리가 맺어야 할 관계를 하나님은 이렇게 정의 하셨습니다. 서로 위로하는 관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1. 서로 위로하는 관계를 가지자
2절을 보십시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7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사도 바울과의 관계는 어떠한 관계였는가? 어떻게 이 교회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소문난 교회가 되고 세계의 모델이 되는 교회가 되었는가? 어떻게 그들의 신앙이 이렇게 급성장할 수 있었는가? 그 비결을 하나님은 이렇게 정의해 주십니다. "그들은 서로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로 뭉쳐 있었다". 우리는 왜 부르심을 받았는가? 위로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영안 교회에 부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적인 의미의 위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 옆에 서 있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옆에 붙어 서서 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세상에 위로가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생은 내리막 길이 있고 고갯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일지라도, 때로 낙심과 좌절의 날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다 위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나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2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사도 바울이 갓 태어난 새 신자를 위로한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는 놀라운 말씀이 있어요. 누구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에게'' 너희가 누구예요? 1년도 안 된 햇병아리 새 신자. 예수를 안 지 1년도 안 된 데살로니가 교인들로부터, 그 대사도(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요, 그의 손수건만 갖다 대어도 병자가 낫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던, 삼청천에 가서 천국을 구경했던) 바울이 위로를 받았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라서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는 위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에요. 때때로 이유도 없는 낙심이 저를 찾아와요. ''월간 목회''라는 유명한 잡지에서 지난주에 저를 인터뷰하러 왔어요. 저는 부산에서 사람을 보낼 줄 알았더니, 서울에서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월요일에 친히 오셨어요. 다음다음 호에 아마 제 기사가 나갈 겁니다.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제가 ''한국의 10대 설교가''라는 책에 나오는데, 그 책에 대해 얘기하면서 "목사님은 설교를 잘하는데 혹시 설교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제가 "있다"라고 했어요. "많다"고 했어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저는 때로 설교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껴요. 사람들은 저를 칭찬할지 모르지만 저는 제 테이프를 듣지 못해요. ''내가 설교를 저렇게 밖에 못하는가?''라는 생각 때문이에요. 그리고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많은 열등감을 느낍니다. 저의 이런 얘기를 듣고 그 인터뷰하는 목사님이 "고맙습니다. 솔직한 말씀을 해 주셔서.. 이 기사 나가면 목사님들이 매우 좋아 하시겠네요"
여러분, 누구라서 위로가 필요 없겠습니까? 우리 모두 다 나약한 존재예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할지 몰라도, 부러워할지 몰라도, 우리 마음 안에는 다 약함이 있어요. 나의 못남을 나 자신은 알고 있어요. 우리 모두 위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셨고,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너희가 너희의 신앙이 자라나기를 원하느냐?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 같이 성숙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서로 옆에 있는 자를 먼저 위로해 주어라. Comfort! 위로하라!"
참으로 건전한 관계는 어떠한 관계인가? 서로 서로 위로하는 관계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로하고, 남편이 아내를 위로하고, 자녀가 부모를 위로하고, 부모가 자녀를 위로하는 관계, 슬픔과 좌절과 고통의 때에 옆에 서서 도와주는 관계, 이것이 우리 신자들이 가져야 할 관계라고 하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위로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실제로 이 위로와 격려는 경우에 따라서 그 받은 사람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영혼을 살릴 수 있고, 여러분의 작은 위로 하나가 그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위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옛날에 ''진 겟츠''라고 하는 한 청년이, 무디 선생이 세운 시카고에 있는 신학교인 무디 바이블 인스티튜트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에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어요. 본래 신학교에 가면 설교에 도움이 되니까 글을 많이 쓰게 합니다. 저도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숙제를 내면 교수들이 문법도 고쳐주고, 문장도 고쳐주곤 합니다. 진 겟츠라는 학생은 자기 나라말인데도, 특별히 영어를 잘 못썼어요.
우리나라 말을 우리가 다 잘 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숙제를 하면 교수가 기록한 게 더 많아요. 빨간 글씨가 더 많아요. "네가 이래서 목사가 될 수 있겠는가?"하고 꾸짖는 교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진 겟츠는 학교를 그만 둘까도 생각했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굉장한 고민에 빠졌어요.
그런데 모든 과정을 지켜본 한 노교수, 헤롤드 가드너라는 교수가 어느 날 진 겟츠를 불렀습니다. 그의 재능을 본 거예요. 그는 비록 서툴지만 그에게 많은 잠재력이 있음을 보고 그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진! 나는 네가 반드시 훌륭한 목사가 될 거라고 믿어! 내가 곧 은퇴하게 될텐데 열심히 공부해서 내 뒤를 이어서 교수가 되거라" 이렇게 그를 위로했어요.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주위의 학생들도 믿지 않았고, 진 겟츠 자신조차도 자기가 교수가 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노교수, 헤롤드 가드너의 위로 때문에, 4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17세에 대학에 들어갔던 사람인데, 4년 과정을 3년 만에 졸업해 버리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무디 바이블 인스티튜트 역사에 없는, 최초의 최연소 교수 즉 23세에 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진 겟츠 교수가 무디 바이블 인스티튜트에서 공부를 더 하고, 다른 곳에서 더 공부하고, 달라스 신학교에 와서 저의 은사가 되셨어요. 저는 그 은사님을 너무 존경합니다. 그는 달라스 신학교 교수 가운데 책을 많이 쓰신 분 중에 한 분입니다. 얼마나 문장력이 좋은지 그의 책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위로에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내가 위로할 때 성령 하나님이 내 옆에 서서 도우십니다. 내 말에 능력을 주십니다. 작은 말 한마디가 그의 영혼을 바꾸고, 그의 인생을 통째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위로와 격려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때로 죽음의 늪에서 소생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명령하시는 첫 번째 성도의 관계는 다름 아닌 위로의 관계임을 꼭 명심하십시다. 주님은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얘들아 내가 떠나간다고 실망하지 마라!"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내가 가고 나면 다른 하나님, 제3의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너희에게 오실 텐데-" 그리고 그의 이름을 말씀해 주셨어요. 별명이죠. 그의 별명을 "보혜사"라고 하셨어요.
여러분, 보혜사가 무슨 뜻이에요? 저는 신학교를 4년 동안 다녔는데도 이것을 몰랐어요. 보혜사 성령! 몰랐어요. 제가 유학 가서 이 단어를 연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파라클레토스! ''파라''는 ''옆에'' ''같이'' ''With'' 라는 뜻이에요. ''옆에 서서 도와주는 사람''
여러분, 이것이 성령 하나님의 별명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무엇인 줄 압니까? 우리 옆에 서서 저와 여러분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에요. 위로자예요. 그래서 NIV 성경에는 성령하나님, 보혜사를 번역하기를 Comfort! 위로자라고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옆에 서서 위로하고 계시다면, 하나님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받은 저와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위로해야 할 줄 믿습니다. 위로하십시오! 오늘부터 결심하십시오. "주여! 내가 주일날 한 번 만나 다섯 사람이상 위로하고 돌아가겠나이다! 제가 제 아내를, 제가 제 남편을, 제 자녀를 위로하겠습니다. 정죄하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겠습니다. 그를 격려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위로의 관계를 맺어갈 때, 이 교회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교회가 살아 움직여요. 심장이 잘 움직이면 그 혜택을 누가 받습니까? 심장 혼자 받나요? 심장 옆에 있는 폐만 받나요? 아니요. 발가락 마지막에 있는 새끼발가락까지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특별히 발이 굉장히 찬 사람이에요. 우리 집사람이 저의 발을 만지면서 "왜 당신은 이렇게 발이 차요?"해서 제가 정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보, 내 다리를 봐. 심장에서 다리까지 거리가 멀잖아! 피가 오다가 중간에 다 식어서..."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장이 튼튼하면 모든 혜택을 몸이 보는 거예요.
여러분이 고통 가운데서 위로하고, 어려울 때도 위로하고, 우리 본성은 다 위로받기를 좋아해요. 남을 위로하기보다는 누가 나를 위로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위로를 기다리지 않고, 교회에 나와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때, 그 혜택이, 그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이 당신에게 옴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어떤 관계로 이 세상을 살아 나가야 되는가? 위로하는 관계입니다. 두 번째 성도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친밀한 관계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 친밀한 관계를 가지자
6절을 보세요.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여기 굉장히 재미있는 말이 두 번 나와요. ''간절히 보고자'' 계속 나오죠? 2장 17절 보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조금 전엔 ''간절히 보고자''였으나, 여기서는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입니다. 그리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떠난 것은'' 여기서 ''떠난다''는 단어도 부모가 자식을 떠날 때 쓰는 단어였어요.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잊어버리고 떠나겠느냐! 어느 부모가 여행을 가서 자식과 육체적으로 헤어져 있다고 해서, 그 자식을 마음에서부터 잊어버리겠느냐! 우리의 떠남은 완전한 이별이 아니었다. 나는 너희를 떠나고서도 부모가 자식을 남겨둠과 같이 너희를 그리워했노라! 그래서 내가 간절히 너희를 보고자 했다. 그래서 내가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낸 것이다.''라는 말씀이에요.
3장 1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참다 못하여'' 아덴에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 주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던지.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사도행전 17장부터 제 2차 전도 여행을 읽어보시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도착합니다. 이미 제가 설명한 대로 아덴은 굉장한 도시였어요. 사도 바울은 기대가 너무 컸어요. 왜냐하면 그 아덴에는 소크라테스가 살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로마와 세계 철학의 본거지가 바로 이 작은 수도 아덴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좋아했고, 철학을 공부했던 사도 바울이 그 아덴에 들어갔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을 거예요. ''이 아덴을 전도할 수 있다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거야!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덴에 들어가 철학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그는 그곳에서 힘든 싸움을 했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왔는데, 아덴은 그렇지 못했어요. 반응이 없었어요. 지식층이 반응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가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어려울 때 옆에 서 있는 동역자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 디모데를, 그 어려운 순간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떠나보내 주었다고 얘기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이러했어요. 보고 싶어 못 사는 관계요, 그를 생각해서 나를 희생하는 관계였어요. 그 단어를 3장1절에 우리가 읽은 말씀으로 표현해 준 것입니다. ''참다 못하여'' 3장 5절에 보세요.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제가 ''참다 못하여''라는 단어를 연구해보고 참 재미있는 것을 느꼈어요. 이 단어는, 원래 물을 담는 그릇 같은 것을 의미했어요. 딱딱한 그릇이 아니고 비닐 봉지 같은 것 말입니다. 물을 가득 넣으면 물 풍선 같은데, 풍선에 물을 넣으면 점점 커집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물을 조금 더 넣으면 퍽 터져 버려요. 이것이 ''참다 못하여''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감정을 이렇게 표현해 줍니다. 내가 그들을 보고 싶어서 참았어요. 참았어요. 참았어요. 그런데 그 감정이 어느 순간 참다 못하여 내가 디모데를 보냈다는 거예요. 그렇게 그들을 그리워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고 얘기합니다.
저는 ''참다 못하여''라는 이 단어, 헬라어 원어의 단어를 직접 경험한 사람입니다. 한국에도 요즘 뷔페 식당이 많아졌죠. 거기에 가면 아이스크림 기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 기계에 그릇을 받치고 레버를 내리면 아이스크림이 쫘악 나옵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생각해요. ''색깔이 하야니까 망정이지 정말 그것과 닮았다'' 레버를 잠그면 뚝 그칩니다. 그 기계가 미국에도 15년 전쯤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미국의 기계는 조금 까다로웠는데, 내릴 때는 그냥 내리면 아이스크림이 나옵니다. 그런데 잠글 때는 오른쪽으로 밀면서 소리가 "탈칵" 하고 나야 그치는 것이었어요. 목사님 열 몇 분이 관광을 오셨어요. 제가 안내를 하게 되어서 뷔페 식당에 모시고 갔습니다. 식사가 끝나 갈 즈음에 저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요. 한국말로 도와 달라고 소리쳐서 그 쪽을 보니까, 한 목사님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기계를 작동했는데 조그만 아이스크림 그릇이 금방 다 찼어요. 오른쪽으로 밀어서 올려야 되는데 그냥 올리니까 안 올라가죠. 이미 아이스크림은 그릇 위에 흘러 넘치고 있었어요. 이 목사님이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갖다 대고 "도와 달라!"고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느 날, 데살로니가 설교 공부를 하다가 그 장면이 생각나더라고요. 이게 ''참다 못하여''예요. 내 감정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죠. 여러분, 성도간의 관계가 이러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올바로 성장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5년, 10년을 교회에 나와도 교회 안에 전혀 보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이사를 가도 영안 교회가 생각나지 않아요. 여러분 그렇게 신앙생활 하시면 그 결과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병들 수밖에 없어요.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에서 가끔 이사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미국에 이사 가신 강정원 집사님을 비롯해서 서울로 이사 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이 가끔 저에게 편지와 안부 전화를 주면서 "목사님, 그리워 죽겠어요. 영안 교회 교인들이 그립고 예배가 그리워요. 목사님, 보고 싶어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런 관계가 형성될 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어떻게 이런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요? 예배만 드리고 간다고 될까요? 5년, 10년을 예배만 드리고 갔다왔다 해 보십시오. 대예배에 딱 한 번 나와주는 교인이 있어요. 나와 주는 교인이에요. 왔다가 그냥 갑니다. 다음 달도 오셨다가 가십니다. 5년 후에도 오셨다 가시고, 그 다음 10년 후에 보면 왔다가 안 보입니다. 혼자 쓰러지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이렇게 인원이 많지만, 저는 마음속으로 정교인, 준교인, 비교인을 만들어 놓았어요. 제 마음 안에 있는 정교인이 누군 줄 압니까? 소그룹에 소속되어 있는 교인입니다. 우리 교회가 40개의 목장으로 출발해서, 90개의 목장으로 자랐습니다. 12개의 위원회가 있고, 20여 개의 남녀 선교회가 있습니다. 60여 개의 팀이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거예요. 목장에 소속되든, 선교회에 소속되든, 팀에 소속되든, 어디에 소속되든, 소그룹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그 소그룹의 몇 사람을 친밀하게 보고 싶어하고 사랑하라는 거예요. 만나서 일 주일에 한 번씩 밥을 먹으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땅에 있는 우리의 모든 관계는 일시적인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일시적이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일시적이에요. 천국에 가서도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단 하나의 영원한 관계를 말씀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의 관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한 거예요.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론"을 몰라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라요. 모든 신앙의 축복이, 여러분의 행복이 교회에서 나옵니다. 영적으로 이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소그룹 가운데, 여러분 지체 가운데 몇 분과 연결되어 있을 때, 레드우드 나무 뿌리가 서로 얽혀 있듯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듯이 자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무리 자라나도 그 뿌리가 튼튼하기에 견딜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부부간의 관계를 이렇게 만드십시오. 성도간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장 19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훗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다 심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영광과 기쁨과 면류관이 무엇인가? 하나님, 저 세상에 있을 때 100억 벌었습니다. 통장이냐? 제가 금배지 달았습니다. 국회의원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믿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면류관과 기쁨과 영광은, 성도와 성도간의 관계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어요.
"너희가 이 소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옆의 성도와의 관계에서, 그가 고난 당할 때 위로하고, 그가 낙심할 때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가 눈물 흘릴 때 손수건을 꺼내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자! 훗날 하나님께서 심판대 앞에서 이렇게 물으실 거예요. "너 어디서 신앙생활 했니?" "예. 영안 교회에서 했습니다" "성도가 몇 명이나 되니?" "예, 한 천 여명 되는 큰 교회입니다. 아이들도 많고요" "그래? 그러면 그 성도 가운데 너와 붙어 있는 사람, 너와 친밀한 관계를 이룬 사람 (계모임 말고) 신앙으로 끈끈하게 붙어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니?" 내일로 미루지 마시고 오늘, 바로 지금 대답해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척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라갈 바탕이에요. 뿌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성도의 바람직한 관계는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요, 밀접하고 긴밀하며 친밀한 관계요, 마지막 세 번째 관계는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입니다.
3.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가 되자
4절부터 8절을 제가 다시 한번 읽을 테니까, 잘 보고 의미를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는지 아세요? 상대가 굳게 서면 나 자신도 사는 관계였어요. 한국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나 하고 찾아봤더니 없더라고요. 그런데 반대되는 속담은 다 있더군요. 완전히 정반대 되는 속담은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입니다. 이게 반대되는 의미예요. 너희가 굳게 섰은 즉, 이제는 우리가 살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상대가 IMF 인데도 불구하고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래서 십일조를 많이 합니다. 그것이 "내가 이제 살았구나!"입니다. 한 형제가 고통을 당합니다. 그를 위해 중보 기도실에서 열심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살아났어요. "아! 그가 살아났구나! 이제는 내가 살리라!" 이것이 바로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입니다.
살 뿐 아니라, 그는 9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그리고 나서 기뻐할 뿐만 아니라 감사했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계속 성장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11절부터 13절의 내용입니다. 11절에 무엇을 위해 기도했나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의 튼튼한 관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12절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끼리 서로 사랑할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결과 13절에서 그들이 믿음 안에 굳게 서기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 사람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해 보신 적이 있는가요?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여러분의 물질의 얼마를 써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지난 한 달 동안 그와 더불어 몇 시간을 보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서로 믿음을 성숙시켜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내 옆의 사람의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는 무엇인가?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요, 친밀한 관계요, 서로의 믿음을 성숙시켜 주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머리로만 안다고 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있어요. 여러분 알잖아요? 부부간에 그렇게 사랑하며 결혼했는데 왜 어려움이 있을까? 성도간에 한 몸이라 그랬는데 왜 어려움이 있을까? 어떤 교인은 그래요. "목사님, 정말 힘들어요. 막 때려주고 싶어요" "집사님도 때려주고 싶어요? 나는 패주고 싶어요" 저는 꼭 이렇게 위로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 대답이 2장 18절에 나와요. 보세요.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태권도 4단이 막은 게 아닙니다. 사탄! 여러분, 이 사탄이 인격적인 존재임을 믿으십니까?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사탄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요. 사탄은 현존하는 존재예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일하는 존재예요. 저는 왜 관계가 파괴되는가를 볼 때, 이유를 다 따져 보면 이유가 없을 때가 있어요. 이유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관계가 틀어져요. 왜 그래요?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인데, 그 말이 상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단 말이에요. 왜 그래요? 사탄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탄이 우리의 관계를 파괴함을 아셔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탄은 성도간에,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해요. 성도와 성도간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거예요. 에덴 동산에 와서 그는 부부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고,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파괴하고, 아벨과 가인의 관계를 철저히 파괴한 그! 그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에요? 이 관계는 저절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회에 왔다갔다한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한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간을 들여야 되고, 물질을 들여야 돼요. 내 정성을 쏟아야 돼요. 그리고 때로는 욕을 먹어야 합니다. 험한 고갯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을 물리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교회를 주셨어요. 아멘! 요즈음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많이 소문이 나고 있더라고요. 서울에 있는 사람들도 우리 교회 소문을 듣고, 우리 교단 아닌 장로 교단 사람들도 많이 알아요. 저는 때로 두려울 때가 있어요. 소문만 무성하고 안은 텅 빈 교회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는 아니 되겠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교회가 될 것인가? 서로 서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관계를 맺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서로를 위로하십시다. 새해에는 친밀하게 서로 붙으십시다. 그리고 서로를 성숙시키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미국에 상당히 유명한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레드 우드 스테이트 파크(Red Wood State Park)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붉은 나무가 있는 도립 공원" 정도가 되겠습니다. 우리나라도 국립공원, 도립공원이 있는데 그 차이를 아시죠? 국립공원은 무조건 좋은 곳입니다. 주왕산 국립공원, 설악산 국립공원 등 이런 곳은 다 국립공원입니다. 그리고 도립 공원이 있어요. 조금 격이 낮은 곳이죠. 도립공원이지만 이곳은 다른 곳보다도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데 다 붉은 색이에요. 그 나무 이름이 ''레드 우드''라고 해서 ''레드 우드 스테이트 파크 '' 이렇게 정했습니다.
이 공원이 사람들의 많은 방문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나무가 붉은 색깔을 띠기도 했지만 굉장히 크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큰가? 아주 큰 나무에 시범적으로 그 나무 둥치에 터널을 뚫어 놨는데 2대의 자동차가 왔다갔다합니다. 2차선 도로가 나 있어요. 이게 나무예요. 어느 정도 큰지 상상이 가십니까? 제일 큰 나무는 장정 20명이 손을 잡고 둘러서야 그 아름드리를 겨우 두를 만큼 큽니다. 키도 얼마나 큰지, 밑에서 보면 그 끝을 잘 볼 수가 없어요. 이런 나무들이 우거져 있으니까 사람들이 구경할 만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아이들을 데리고 그 공원에 가 봤어요. 얼마나 굵고 높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지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굵고 큰 나무니까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지 궁금해서 그 뿌리를 파헤쳐 보기 시작했습니다. 보통은 나무의 높이만큼 뿌리가 깊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레드우드는 뿌리가 전혀 깊이 내려지지가 않았어요. 깊지도 않은데 어떻게 이 큰 덩치를 유지할 수가 있을까? 사람들이 계속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큰 덩치를 깊지 않은 뿌리로 감당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레드우드 나무의 뿌리는 서로 옆의 나무와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옆의 나무와 서로 뿌리가 연결되어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서 그 큰 덩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저는 그 공원에서 가끔 쓰러져 있는 레드우드 나무를 보았습니다. 쓰러져 있는 것은 반드시 홀로 서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혼자 서 있으면 뿌리가 깊게 들어가지 못하는 까닭에, 어느 정도 자라면 덩치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공원 안내자들이 저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에 사람들이 별명을 붙이기를 ''더불어 사는 나무'' ''혼자서는 살수 없는 나무'' 라고 붙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 역시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시고 우리를 만드실 때, 동역자들을 만들어 주셨어요. 같이 살도록 만들어 주셨어요. 우리는 같이,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싫든 좋든 우리 성도들은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단 두 기관을 만드셨는데, 하나는 가정이요, 또 하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유일하게 만드신 이 두 기관을 하나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가정을 무엇에 비유해 주었습니까?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1)
부부는 두 사람이지만, 각각의 개체가 아니라 한 몸이라고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를 이 땅에 만드시고 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교회라고 하는 곳은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인간은 같이 사는 존재라는 거예요. 부부가 따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살면, 부부이긴 하지만 그 부부는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어요. 자랄 수가 없고, 성숙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을 누릴 수도 없어요. 왜? 한 몸이 따로따로 사니까요. 여러분, 이런 몸을 생각해 봤어요? 눈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이 눈이 날마다 발에게 "아이고, 등신! 매일 발 고린내 나고!" 그래서 발이 살짝 가까이 오면 "야야 가까이 오지마! 저리 가!" 이런 몸을 상상해 보셨어요? 이런 몸은 고통받는 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신기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된 때에 무엇 하러 이 설날에 고생하며 이렇게들 많이 오셨습니까? 저는 오늘 반쯤 자리가 빌 줄 알았는데 꽉 찼어요. 인터넷으로 예배드릴 수 있잖아요. 컴퓨터만 켜 보세요. 저는 앉아서 서울에 있는 목사님의 설교를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목사님 설교를 들을 수 있어요. 여러분, 아십니까? 여러분이 멍하게 앉아 있는 그 표정이 독일도 가고, 미국도 같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인터넷 생방송, 생중계가 되어 있어요. 어떤 분이 저보고 왜 이름표를 안 다냐고 그래요.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목사님, 그 이름표가 교회에는 참 좋지만 세계 사람들이 다 보는데 좀 이상합디다. 떼어 주세요" 제 설교를 미국에서 보고 감사 편지가 와요. 독일에서 제 설교를 보고 편지가 와요. 앉아서 모든 설교와 예배를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 혼자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에요. 혼자서는 언젠가 반드시 쓰러질 때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우리가 한 몸같이 함께 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고, 우리의 믿음이 성숙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에 나오는 많은 성도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혼자서 열심히 성경 봅니다. 그리고 혼자 예배도 드립니다. 혼자 테이프를 통해 말씀도 듣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왔다갔다합니다. 1년, 2년이 지나도 옆의 사람과 전혀 뿌리가 얽히지 않은, 관계를 맺지 않은 성도들이 오늘 영안 교회에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지 아십니까? 혼자 있는 레드우드 나무가 쓰러지듯이, 그는 언젠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비전과 주님의 비전에 동역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바람직한 성도는 어떤 성도인가? 오늘 데살로니가 2장 후반 절에서 3장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은, 이 중요한 이슈인 성도와의 관계, 성도간의 교제에 대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옆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신앙생활 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교회말고 이 영안 교회에 나오셔서 누군가와 끈끈하게 뿌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대답해 보십시오. 혹시 피상적인 관계는 아닌가요? 어릴 때부터 10년, 20년 신앙생활 해 와서 서로 알기는 잘 압니다. 집안끼리도 알고 자녀들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정말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몇 분이나 계시나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한 지체와 한 몸의 지체로서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옆 사람과 신앙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가를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풍랑과 이 세상의 어려움을 능히 헤쳐 나가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천성을 향해 순례의 길을 성공적으로 떠나기 위해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이 있는데, 옆의 성도와 이러이러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설명해 주십니다. 먼저 우리가 맺어야 할 관계를 하나님은 이렇게 정의 하셨습니다. 서로 위로하는 관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1. 서로 위로하는 관계를 가지자
2절을 보십시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7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사도 바울과의 관계는 어떠한 관계였는가? 어떻게 이 교회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소문난 교회가 되고 세계의 모델이 되는 교회가 되었는가? 어떻게 그들의 신앙이 이렇게 급성장할 수 있었는가? 그 비결을 하나님은 이렇게 정의해 주십니다. "그들은 서로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로 뭉쳐 있었다". 우리는 왜 부르심을 받았는가? 위로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영안 교회에 부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적인 의미의 위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 옆에 서 있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옆에 붙어 서서 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세상에 위로가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생은 내리막 길이 있고 고갯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일지라도, 때로 낙심과 좌절의 날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다 위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나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2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사도 바울이 갓 태어난 새 신자를 위로한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는 놀라운 말씀이 있어요. 누구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에게'' 너희가 누구예요? 1년도 안 된 햇병아리 새 신자. 예수를 안 지 1년도 안 된 데살로니가 교인들로부터, 그 대사도(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요, 그의 손수건만 갖다 대어도 병자가 낫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던, 삼청천에 가서 천국을 구경했던) 바울이 위로를 받았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라서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는 위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에요. 때때로 이유도 없는 낙심이 저를 찾아와요. ''월간 목회''라는 유명한 잡지에서 지난주에 저를 인터뷰하러 왔어요. 저는 부산에서 사람을 보낼 줄 알았더니, 서울에서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월요일에 친히 오셨어요. 다음다음 호에 아마 제 기사가 나갈 겁니다.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제가 ''한국의 10대 설교가''라는 책에 나오는데, 그 책에 대해 얘기하면서 "목사님은 설교를 잘하는데 혹시 설교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제가 "있다"라고 했어요. "많다"고 했어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저는 때로 설교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껴요. 사람들은 저를 칭찬할지 모르지만 저는 제 테이프를 듣지 못해요. ''내가 설교를 저렇게 밖에 못하는가?''라는 생각 때문이에요. 그리고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많은 열등감을 느낍니다. 저의 이런 얘기를 듣고 그 인터뷰하는 목사님이 "고맙습니다. 솔직한 말씀을 해 주셔서.. 이 기사 나가면 목사님들이 매우 좋아 하시겠네요"
여러분, 누구라서 위로가 필요 없겠습니까? 우리 모두 다 나약한 존재예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할지 몰라도, 부러워할지 몰라도, 우리 마음 안에는 다 약함이 있어요. 나의 못남을 나 자신은 알고 있어요. 우리 모두 위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셨고,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너희가 너희의 신앙이 자라나기를 원하느냐?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 같이 성숙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서로 옆에 있는 자를 먼저 위로해 주어라. Comfort! 위로하라!"
참으로 건전한 관계는 어떠한 관계인가? 서로 서로 위로하는 관계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로하고, 남편이 아내를 위로하고, 자녀가 부모를 위로하고, 부모가 자녀를 위로하는 관계, 슬픔과 좌절과 고통의 때에 옆에 서서 도와주는 관계, 이것이 우리 신자들이 가져야 할 관계라고 하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위로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실제로 이 위로와 격려는 경우에 따라서 그 받은 사람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영혼을 살릴 수 있고, 여러분의 작은 위로 하나가 그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위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옛날에 ''진 겟츠''라고 하는 한 청년이, 무디 선생이 세운 시카고에 있는 신학교인 무디 바이블 인스티튜트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에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어요. 본래 신학교에 가면 설교에 도움이 되니까 글을 많이 쓰게 합니다. 저도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숙제를 내면 교수들이 문법도 고쳐주고, 문장도 고쳐주곤 합니다. 진 겟츠라는 학생은 자기 나라말인데도, 특별히 영어를 잘 못썼어요.
우리나라 말을 우리가 다 잘 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숙제를 하면 교수가 기록한 게 더 많아요. 빨간 글씨가 더 많아요. "네가 이래서 목사가 될 수 있겠는가?"하고 꾸짖는 교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진 겟츠는 학교를 그만 둘까도 생각했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굉장한 고민에 빠졌어요.
그런데 모든 과정을 지켜본 한 노교수, 헤롤드 가드너라는 교수가 어느 날 진 겟츠를 불렀습니다. 그의 재능을 본 거예요. 그는 비록 서툴지만 그에게 많은 잠재력이 있음을 보고 그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진! 나는 네가 반드시 훌륭한 목사가 될 거라고 믿어! 내가 곧 은퇴하게 될텐데 열심히 공부해서 내 뒤를 이어서 교수가 되거라" 이렇게 그를 위로했어요.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주위의 학생들도 믿지 않았고, 진 겟츠 자신조차도 자기가 교수가 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노교수, 헤롤드 가드너의 위로 때문에, 4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17세에 대학에 들어갔던 사람인데, 4년 과정을 3년 만에 졸업해 버리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무디 바이블 인스티튜트 역사에 없는, 최초의 최연소 교수 즉 23세에 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진 겟츠 교수가 무디 바이블 인스티튜트에서 공부를 더 하고, 다른 곳에서 더 공부하고, 달라스 신학교에 와서 저의 은사가 되셨어요. 저는 그 은사님을 너무 존경합니다. 그는 달라스 신학교 교수 가운데 책을 많이 쓰신 분 중에 한 분입니다. 얼마나 문장력이 좋은지 그의 책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위로에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내가 위로할 때 성령 하나님이 내 옆에 서서 도우십니다. 내 말에 능력을 주십니다. 작은 말 한마디가 그의 영혼을 바꾸고, 그의 인생을 통째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위로와 격려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때로 죽음의 늪에서 소생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명령하시는 첫 번째 성도의 관계는 다름 아닌 위로의 관계임을 꼭 명심하십시다. 주님은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얘들아 내가 떠나간다고 실망하지 마라!"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내가 가고 나면 다른 하나님, 제3의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너희에게 오실 텐데-" 그리고 그의 이름을 말씀해 주셨어요. 별명이죠. 그의 별명을 "보혜사"라고 하셨어요.
여러분, 보혜사가 무슨 뜻이에요? 저는 신학교를 4년 동안 다녔는데도 이것을 몰랐어요. 보혜사 성령! 몰랐어요. 제가 유학 가서 이 단어를 연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파라클레토스! ''파라''는 ''옆에'' ''같이'' ''With'' 라는 뜻이에요. ''옆에 서서 도와주는 사람''
여러분, 이것이 성령 하나님의 별명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무엇인 줄 압니까? 우리 옆에 서서 저와 여러분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에요. 위로자예요. 그래서 NIV 성경에는 성령하나님, 보혜사를 번역하기를 Comfort! 위로자라고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옆에 서서 위로하고 계시다면, 하나님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받은 저와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위로해야 할 줄 믿습니다. 위로하십시오! 오늘부터 결심하십시오. "주여! 내가 주일날 한 번 만나 다섯 사람이상 위로하고 돌아가겠나이다! 제가 제 아내를, 제가 제 남편을, 제 자녀를 위로하겠습니다. 정죄하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겠습니다. 그를 격려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위로의 관계를 맺어갈 때, 이 교회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교회가 살아 움직여요. 심장이 잘 움직이면 그 혜택을 누가 받습니까? 심장 혼자 받나요? 심장 옆에 있는 폐만 받나요? 아니요. 발가락 마지막에 있는 새끼발가락까지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특별히 발이 굉장히 찬 사람이에요. 우리 집사람이 저의 발을 만지면서 "왜 당신은 이렇게 발이 차요?"해서 제가 정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보, 내 다리를 봐. 심장에서 다리까지 거리가 멀잖아! 피가 오다가 중간에 다 식어서..."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장이 튼튼하면 모든 혜택을 몸이 보는 거예요.
여러분이 고통 가운데서 위로하고, 어려울 때도 위로하고, 우리 본성은 다 위로받기를 좋아해요. 남을 위로하기보다는 누가 나를 위로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위로를 기다리지 않고, 교회에 나와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때, 그 혜택이, 그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이 당신에게 옴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어떤 관계로 이 세상을 살아 나가야 되는가? 위로하는 관계입니다. 두 번째 성도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친밀한 관계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 친밀한 관계를 가지자
6절을 보세요.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여기 굉장히 재미있는 말이 두 번 나와요. ''간절히 보고자'' 계속 나오죠? 2장 17절 보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조금 전엔 ''간절히 보고자''였으나, 여기서는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입니다. 그리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떠난 것은'' 여기서 ''떠난다''는 단어도 부모가 자식을 떠날 때 쓰는 단어였어요.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잊어버리고 떠나겠느냐! 어느 부모가 여행을 가서 자식과 육체적으로 헤어져 있다고 해서, 그 자식을 마음에서부터 잊어버리겠느냐! 우리의 떠남은 완전한 이별이 아니었다. 나는 너희를 떠나고서도 부모가 자식을 남겨둠과 같이 너희를 그리워했노라! 그래서 내가 간절히 너희를 보고자 했다. 그래서 내가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낸 것이다.''라는 말씀이에요.
3장 1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참다 못하여'' 아덴에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 주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던지.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사도행전 17장부터 제 2차 전도 여행을 읽어보시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도착합니다. 이미 제가 설명한 대로 아덴은 굉장한 도시였어요. 사도 바울은 기대가 너무 컸어요. 왜냐하면 그 아덴에는 소크라테스가 살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로마와 세계 철학의 본거지가 바로 이 작은 수도 아덴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좋아했고, 철학을 공부했던 사도 바울이 그 아덴에 들어갔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을 거예요. ''이 아덴을 전도할 수 있다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거야!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덴에 들어가 철학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그는 그곳에서 힘든 싸움을 했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왔는데, 아덴은 그렇지 못했어요. 반응이 없었어요. 지식층이 반응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가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어려울 때 옆에 서 있는 동역자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 디모데를, 그 어려운 순간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떠나보내 주었다고 얘기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이러했어요. 보고 싶어 못 사는 관계요, 그를 생각해서 나를 희생하는 관계였어요. 그 단어를 3장1절에 우리가 읽은 말씀으로 표현해 준 것입니다. ''참다 못하여'' 3장 5절에 보세요.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제가 ''참다 못하여''라는 단어를 연구해보고 참 재미있는 것을 느꼈어요. 이 단어는, 원래 물을 담는 그릇 같은 것을 의미했어요. 딱딱한 그릇이 아니고 비닐 봉지 같은 것 말입니다. 물을 가득 넣으면 물 풍선 같은데, 풍선에 물을 넣으면 점점 커집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물을 조금 더 넣으면 퍽 터져 버려요. 이것이 ''참다 못하여''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감정을 이렇게 표현해 줍니다. 내가 그들을 보고 싶어서 참았어요. 참았어요. 참았어요. 그런데 그 감정이 어느 순간 참다 못하여 내가 디모데를 보냈다는 거예요. 그렇게 그들을 그리워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고 얘기합니다.
저는 ''참다 못하여''라는 이 단어, 헬라어 원어의 단어를 직접 경험한 사람입니다. 한국에도 요즘 뷔페 식당이 많아졌죠. 거기에 가면 아이스크림 기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 기계에 그릇을 받치고 레버를 내리면 아이스크림이 쫘악 나옵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생각해요. ''색깔이 하야니까 망정이지 정말 그것과 닮았다'' 레버를 잠그면 뚝 그칩니다. 그 기계가 미국에도 15년 전쯤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미국의 기계는 조금 까다로웠는데, 내릴 때는 그냥 내리면 아이스크림이 나옵니다. 그런데 잠글 때는 오른쪽으로 밀면서 소리가 "탈칵" 하고 나야 그치는 것이었어요. 목사님 열 몇 분이 관광을 오셨어요. 제가 안내를 하게 되어서 뷔페 식당에 모시고 갔습니다. 식사가 끝나 갈 즈음에 저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요. 한국말로 도와 달라고 소리쳐서 그 쪽을 보니까, 한 목사님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기계를 작동했는데 조그만 아이스크림 그릇이 금방 다 찼어요. 오른쪽으로 밀어서 올려야 되는데 그냥 올리니까 안 올라가죠. 이미 아이스크림은 그릇 위에 흘러 넘치고 있었어요. 이 목사님이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갖다 대고 "도와 달라!"고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느 날, 데살로니가 설교 공부를 하다가 그 장면이 생각나더라고요. 이게 ''참다 못하여''예요. 내 감정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죠. 여러분, 성도간의 관계가 이러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올바로 성장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5년, 10년을 교회에 나와도 교회 안에 전혀 보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이사를 가도 영안 교회가 생각나지 않아요. 여러분 그렇게 신앙생활 하시면 그 결과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병들 수밖에 없어요.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에서 가끔 이사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미국에 이사 가신 강정원 집사님을 비롯해서 서울로 이사 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이 가끔 저에게 편지와 안부 전화를 주면서 "목사님, 그리워 죽겠어요. 영안 교회 교인들이 그립고 예배가 그리워요. 목사님, 보고 싶어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런 관계가 형성될 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어떻게 이런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요? 예배만 드리고 간다고 될까요? 5년, 10년을 예배만 드리고 갔다왔다 해 보십시오. 대예배에 딱 한 번 나와주는 교인이 있어요. 나와 주는 교인이에요. 왔다가 그냥 갑니다. 다음 달도 오셨다가 가십니다. 5년 후에도 오셨다 가시고, 그 다음 10년 후에 보면 왔다가 안 보입니다. 혼자 쓰러지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이렇게 인원이 많지만, 저는 마음속으로 정교인, 준교인, 비교인을 만들어 놓았어요. 제 마음 안에 있는 정교인이 누군 줄 압니까? 소그룹에 소속되어 있는 교인입니다. 우리 교회가 40개의 목장으로 출발해서, 90개의 목장으로 자랐습니다. 12개의 위원회가 있고, 20여 개의 남녀 선교회가 있습니다. 60여 개의 팀이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거예요. 목장에 소속되든, 선교회에 소속되든, 팀에 소속되든, 어디에 소속되든, 소그룹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그 소그룹의 몇 사람을 친밀하게 보고 싶어하고 사랑하라는 거예요. 만나서 일 주일에 한 번씩 밥을 먹으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땅에 있는 우리의 모든 관계는 일시적인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일시적이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일시적이에요. 천국에 가서도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단 하나의 영원한 관계를 말씀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의 관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한 거예요.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론"을 몰라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라요. 모든 신앙의 축복이, 여러분의 행복이 교회에서 나옵니다. 영적으로 이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소그룹 가운데, 여러분 지체 가운데 몇 분과 연결되어 있을 때, 레드우드 나무 뿌리가 서로 얽혀 있듯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듯이 자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무리 자라나도 그 뿌리가 튼튼하기에 견딜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부부간의 관계를 이렇게 만드십시오. 성도간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장 19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훗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다 심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영광과 기쁨과 면류관이 무엇인가? 하나님, 저 세상에 있을 때 100억 벌었습니다. 통장이냐? 제가 금배지 달았습니다. 국회의원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믿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면류관과 기쁨과 영광은, 성도와 성도간의 관계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어요.
"너희가 이 소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옆의 성도와의 관계에서, 그가 고난 당할 때 위로하고, 그가 낙심할 때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가 눈물 흘릴 때 손수건을 꺼내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자! 훗날 하나님께서 심판대 앞에서 이렇게 물으실 거예요. "너 어디서 신앙생활 했니?" "예. 영안 교회에서 했습니다" "성도가 몇 명이나 되니?" "예, 한 천 여명 되는 큰 교회입니다. 아이들도 많고요" "그래? 그러면 그 성도 가운데 너와 붙어 있는 사람, 너와 친밀한 관계를 이룬 사람 (계모임 말고) 신앙으로 끈끈하게 붙어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니?" 내일로 미루지 마시고 오늘, 바로 지금 대답해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척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라갈 바탕이에요. 뿌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성도의 바람직한 관계는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요, 밀접하고 긴밀하며 친밀한 관계요, 마지막 세 번째 관계는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입니다.
3.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가 되자
4절부터 8절을 제가 다시 한번 읽을 테니까, 잘 보고 의미를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는지 아세요? 상대가 굳게 서면 나 자신도 사는 관계였어요. 한국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나 하고 찾아봤더니 없더라고요. 그런데 반대되는 속담은 다 있더군요. 완전히 정반대 되는 속담은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입니다. 이게 반대되는 의미예요. 너희가 굳게 섰은 즉, 이제는 우리가 살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상대가 IMF 인데도 불구하고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래서 십일조를 많이 합니다. 그것이 "내가 이제 살았구나!"입니다. 한 형제가 고통을 당합니다. 그를 위해 중보 기도실에서 열심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살아났어요. "아! 그가 살아났구나! 이제는 내가 살리라!" 이것이 바로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입니다.
살 뿐 아니라, 그는 9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그리고 나서 기뻐할 뿐만 아니라 감사했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계속 성장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11절부터 13절의 내용입니다. 11절에 무엇을 위해 기도했나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의 튼튼한 관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12절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끼리 서로 사랑할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결과 13절에서 그들이 믿음 안에 굳게 서기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 사람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해 보신 적이 있는가요?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여러분의 물질의 얼마를 써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지난 한 달 동안 그와 더불어 몇 시간을 보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서로 믿음을 성숙시켜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내 옆의 사람의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는 무엇인가?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요, 친밀한 관계요, 서로의 믿음을 성숙시켜 주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머리로만 안다고 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있어요. 여러분 알잖아요? 부부간에 그렇게 사랑하며 결혼했는데 왜 어려움이 있을까? 성도간에 한 몸이라 그랬는데 왜 어려움이 있을까? 어떤 교인은 그래요. "목사님, 정말 힘들어요. 막 때려주고 싶어요" "집사님도 때려주고 싶어요? 나는 패주고 싶어요" 저는 꼭 이렇게 위로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 대답이 2장 18절에 나와요. 보세요.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태권도 4단이 막은 게 아닙니다. 사탄! 여러분, 이 사탄이 인격적인 존재임을 믿으십니까?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사탄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요. 사탄은 현존하는 존재예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일하는 존재예요. 저는 왜 관계가 파괴되는가를 볼 때, 이유를 다 따져 보면 이유가 없을 때가 있어요. 이유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관계가 틀어져요. 왜 그래요?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인데, 그 말이 상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단 말이에요. 왜 그래요? 사탄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탄이 우리의 관계를 파괴함을 아셔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탄은 성도간에,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해요. 성도와 성도간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거예요. 에덴 동산에 와서 그는 부부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고,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파괴하고, 아벨과 가인의 관계를 철저히 파괴한 그! 그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에요? 이 관계는 저절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회에 왔다갔다한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한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간을 들여야 되고, 물질을 들여야 돼요. 내 정성을 쏟아야 돼요. 그리고 때로는 욕을 먹어야 합니다. 험한 고갯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을 물리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교회를 주셨어요. 아멘! 요즈음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많이 소문이 나고 있더라고요. 서울에 있는 사람들도 우리 교회 소문을 듣고, 우리 교단 아닌 장로 교단 사람들도 많이 알아요. 저는 때로 두려울 때가 있어요. 소문만 무성하고 안은 텅 빈 교회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는 아니 되겠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교회가 될 것인가? 서로 서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관계를 맺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서로를 위로하십시다. 새해에는 친밀하게 서로 붙으십시다. 그리고 서로를 성숙시키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