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6
이계준
1. 아마도 독자들은 헨리 펄리 파커의 그림을 무심코 보아 넘겼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1709년 2월 9일 존 웨슬리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목회하는 엡워드 교회 주택이 화마에 휩싸여 전소되는 상황에서 존이 구출되는 극적인 장면을 화폭에 담은 화가이다. 그 그림은 재목이 완전히 건조한 낡은 건물, 대부분의 가족의 탈출, 커튼 사이로 내다보는 존의 공포에 질린 얼굴, 창가에 가서 남의 어깨 위에 올라 서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존이 구출되었을 때 모든 이웃들을 기도로 초청하는 아버지 사무엘 등을 묘사하고 있다. 사무엘은 말하기를 "이웃들이여, 와서 무릎을 끓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는 나의 여덟 자녀를 모두 구해 주셨습니다. 집은 타게 버려둡시다. 나는 만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회재사건이 일어난 것은 존이 여섯 살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따라서 이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그의 뇌리 속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어떤 목적 때문에 구출되었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운명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스가랴3:2)란 성경구절로 표현하면서 해마다 그 신기한 밤을 기념하였다. 그는 고백하기를 이 사건은 "내가 23세나 24세가 될 때까지 나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이었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회심 이후 자기 자신이 영적인 의미에서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부터 그는 엡워드의 구출이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시려는 선교를 위해 준비하는 일로 이해하였다. 그는 늙어서 자기의 초상화를 만들 때 그 배경은 불타는 집이었고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즉 "이것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닌가?"
웨슬리는 1753년 11월에 심한 병에 걸려서 죽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나친 찬사를 피하기 위하여 자기의 비문을 직접 만들었다. 그것은 "여기에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존 웨슬리의 육신이 누워 있다"는 말로 시작된다. 그러나 동생 찰스는 그의 일기에서 형의 비문에 수정을 가하였다. "불에서 한번만 꺼내지 않은 그슬린 나무"라고. 이것은 존의 회심에 대한 정확한 풍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진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가(街)의 경험과 1709년 불에서 구출된 사건이 영적 반려자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의 상징은 그가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자각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이 그를 부르신 영혼 구원의 사명을 대변하는 것이다. W. H. 피체트는 "그의 신학은 그날 밤의 광경의 맥락에서 해석되었다"고 하면서 아래와 같이 부연하였다. "불타는 집은 멸망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웨슬리의 사상에 있어서 각 사람의 영혼은 불에 둘러싸인 어린애와 같이 죄의 불길과 하느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한밤중에 불타는 집에서 구출된 그는 더 무서운 불길에서 사람들을 건져내야 한다. 이러한 멸망에 대한 기억이 죽는 날까지 그의 생각을 지배하였다." 이상이 존을 위대한 전도자로 만들어내는 제1단계이었다.
2. 웨슬리는 어릴 때부터 깊은 사명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는 자기가 특별히 할 일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물론 그 일이 무엇인지 회심할 때까지는 몰랐으나 그는 30년 간 그것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드디어 그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웨슬리는 모태 속에 있는 전도자로서 오랜 임신 기간을 거쳐 1738년에 밝은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다음에 그가 전도자가 되는데 기여한 요인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웨슬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의 가정이었다. H. 베트는 엡워드 목사 주택은 감리교의 요람(the cradle of Methodism)이라고 하였다. J. 레이버는 "후기에 발전한 웨슬리의 성격 및 생각의 대부분이 엡워드 주택의 분위기와 어머니의 모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 스잔나 웨슬리가 존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화재 사건 이후였다고 한다. "내가 이 애의 영혼에 대하여 특히 주의를 집중하려는 것은 당신께서 이전보다 더욱 자비하심으로 나에게 기회를 주셨으니 나는 그 애 마음 속에 당신의 참 진리와 덕목을 넣어주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주여, 그것을 성실하고 신중하게 행하도록 나에게 은총을 주시고 나의 계획이 성공하게 축복하소서"라고 그녀는 자기 수첩에 기록하였다. 수잔나의 교육은 매우 철저하였고 존은 재주있는 학생이었다. 물론 그녀의 교육은 모든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어머니 수잔나가 자녀들에게 매주마다 한 이야기는 존에게 친교는 신도들에게 본질적인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였고 이것이 옥스포드에서 신성 클럽(Holy Club)과 그 후에 감리교의 속회(class meeting)을 형성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남편의 부재시에 그녀는 집에서 자녀들과 하인들을 위해서 기도회를 인도하였는데 다른 교인들도 참여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200명 이상이 집안을 채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 존의 나이는 9세 정도였는데 조숙한 편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사실을 마음에 새겨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장면이 자기의 순회 전도에서 수 없이 반복되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미래의 전도자에게 영향을 미친 다른 교훈들도 역시 엡워드에서 병행되었다. 그것은 18세기 초엽 최초의 선교 사업에 관한 관심사이었다. 아버지 사무엘 자신도 동(東) 인도 선교 사업에 단기간 종사하였으나 별다른 결과는 없었다. 스잔나는 남(南) 인도의 선교사들로 부터 받은 편지를 집회에서 읽어 주곤 하였다고 한다.
3. 존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그는 가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차터하우스에서 공부할 때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여 말하기를 빵 밖에는 별로 먹을 것이 없었고 그나마도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으 몫을 빼았아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빵의 부족은 건강을 해치기 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날마다 교정을 세 바퀴 달리라는 말씀에 순종한 것이 그의 선교활동을 위해 투철한 정신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터하우스가 존의 신앙 성장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타이어만은 웨슬리가 "차터하우스에 성자로 들어가서 죄인이 되어 나왔다"고 한 말은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이 엡워드의 건전한 교육 환경을 떠난 것이 일시적으로 신앙의 후퇴를 불러 왔을지도 모른다. 웨슬리도 추후에 그 때 상황을 솔직히 말하고 있다. 즉 차터하우스에서 6, 7년 보내는 어간에 외적인 통제가 없어지니까 외적인 의무에 대해서도 소홀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 보기에는 별로 다를 것이 없지만 스스로 외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양심을 지키고 성경을 읽는 등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계속되었다.
웨슬리는 17세에 옥스포드 크라이스트 처지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초기에 신앙생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자기도 모르게 소명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그는 토론이나 웅변에 있어서 매우 특출한 소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전도자가 되는 데 있어서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그의 이런 준비과정은 그가 전도자로서 대중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선포하고 설득하며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S. 배드콕은 1724년에 웨슬리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는 매우 예리하고 민감한 대학생으로서 정연한 논리로 모든 사람을 당황하게 하였고 그들이 그렇게 쉽게 패주하는 것을 보고 비웃었다. 이 젊은 친구는 숭고한 고전적 취향과 가장 자유롭고 남성적인 정취의 소유자였다." 웨슬리는 그후 링컨 대학에서 시험 감독관이 되어 학생들의 논문을 심사하였고 수준 높은 토론가가 되어 하느님이 주신 탈란트에 감사하였다. 이와 같은 훈련은 그가 성서의 복음에 입각한 설교자가 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하였다.
4. 웨슬리는 1724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문학사의 학위를 받았다. 그는 원리적이고 기초적인 학문에 충실하였을 뿐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이나 안수 받는 문제나 또는 신앙에 대한 어떤 관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1725년에 전환점이 왔다. 그는 어머니와 신학적인 토론을 하는 동시에 목회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양친에게 의견을 물은 결과 반응은 서로 달랐다. 아버지는 그의 사명의 동기가 하느님께 영광 돌리고 그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려는 순수성에 대해 점검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더 공부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와는 달리 어머니는 자기가 드린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면서 먼저 집사 안수(주:영국교회와 미국 감리교는 수련하는 이에게 주는 집사안수-deacon ordination와 수련 끝난 이에게 주는 장로안수-elder ordination가 있다)를 받으라고 하였다. 그녀는 아들이 비판적인 학문에 몰두하기 보다는 목회를 택하여 실천적인 학문에 이바지하도록 하느님께 기도드릴 뿐 더 이상의 조언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제 웨슬리는 안수 받기로 결심하고 고시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아버지는 성서해석에 관해 훈륭한 교사이었다. 그는 그리스어 성경과 히부리어 성경을 원전으로 읽을 수 있었고 교부들의 책과 함께 신학서적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1725년9월 옥스포드 대학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에서 후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존 포터에게 집사안수를 받았다. 웨슬리는 존 포터의 권고의 말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만일 그대가 크게 유익한 사람이 되기 원하면 논쟁 거리를 가지고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지 말고 보이는 악과 싸우며 순수하고 본질적인 경건을 증진하는 데 이바지하시오." 이것은 웨슬리가 실천하고자 모색한 바로 그것이었다.
웨슬리가 집사 안수를 받고 처녀 설교를 한 교회는 사우스 레이에 있는 작은 교회이었다. 지금도 그 강단 위에는 그의 방문을 기념하는 비문이 적혀 있다. 첫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음 6:33이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덧붙여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설교 원고는 아직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그는 옥스포드와 함께 여러 지방에 있는 교회에서도 설교하였다. 그는 기후나 거리를 개의치 아니하고 마차로, 도보로 또는 말을 빌려 타고 갔다. 그는 그런 생각이 없었지만 추후에 전개될 전도 여행을 위해서 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계속되는 설교를 통해 설교 작성법을 배우고 있었으나 아직 설교하는 방법이나 메시지의 핵심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웨슬리는 1726년 옥스포드 링컨대학의 연구원으로 선발되었다. 이 임명은 그가 앞으로 수행할 전도자의 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할지라도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의 섭리가 개입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1751년 결혼할 때까지 경제적인 안정을 보장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전도 사업 초기에 경제적 구애 없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이다.
신성 클럽이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다. 존은 옥스포드를 떠나 교구의 부사제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클럽을 시작하는 데 공헌한 사람은 동생 찰스였다. 존이 링컨 대학의 강사로 돌아왔을 때 찰스는 형에게 수장을 맡기었다. 그 모임은 본래 반(半) 교육적 목적을 지녔으나 그것은 곧 존의 생각대로 신앙 운동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존 자신의 신앙 문제를 해결하는 통로가 된 동시에 미래 전도의 열매를 걷는 매체가 되기도 하였다. 신성 클럽은 친교 집단에 머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과 함께 외적인 것에도 관심을 가졌다. 신앙 훈련에 더하여 하층 계급에 대한 자선 사업도 베풀었다. 그들은 감옥과 공장을 방문하였고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도왔다. 그들은 1주일 1회 금식하고 헌금하여 자금을 충당하였다. 웨슬리는 처음으로 민중과 만나게 되었고 민중의 사도가 되는 길이 자기도 모르게 열린 것이다. 그는 이 클럽 활동을 통해 미래의 고객들에게 소개된 것이다.
5. 위에서 웨슬리가 전도자가 되는 데 기여한 옥스포드의 경험들 곧 그 곳에서 우연하게 생긴 생활의 면모를 생각해 보았다. 실상 그것들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후기의 사건들에 비추어 볼 때 거기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개입되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오랜 시련과 단련을 통해 그의 선교에 필요한 인물을 양성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