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6
이계준
1. 옥외 전도자
존 웨슬리가 옥외 전도자가 된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야외 설교란 그의 성격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그에게 생소한 길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그를 민중에게 접근시키려고 그런 방법을 택하신 것이었다.
웨슬리는 비록 키는 작았지만 날씬한 신사였다. 그는 늘 자기 외모에 대하여 신경을 썼으며 양복점의 모델처럼 깔끔해 보였다. 그의 성직자 의상에는 먼지 하나 묻는 일이 없었다. 그는 소음이나 소란스러움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옥스포드의 학원다운 정숙이나 시골 목사관 같은 것에 익숙한 편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크고 작은 길가에서 세련되지 못한 민중을 만나야 하고 불결하고 악취를 풍기며 때로는 비방하고 폭행하는 대중에게 에워싸여도 위축되지 않은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웨슬리가 일반 대중을 위한 선교사가 된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했던 것이다.
웨슬리의 성격에는 자기 선전이나 배우 같은 기질이 없었다. 그는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가 사기꾼이라고 불린 야외 전도자가 된 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자기희생이 있었음에 틀림 없다. 그는 과거의 엄숙주의적 태도를 모두 포기하고 구원의 소식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접근한 것은 그의 회심의 효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가늠케 한다. 1738년 5월 24일 이전에 웨슬리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인 것이다. 조지아에서 인디언들과 지낼 때도 그랬고 영국에 돌아와서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웨슬리는 옥외 설교에 대한 반응을 자주 일기에 나타냈다. "악마가 야외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가! 나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넓은 방, 푹신한 의자, 멋진 강대를 좋아한다. 그러나 하나의 영혼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의 열정이 설 땅이 어디 있는가?" 이렇듯 그는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낮아진 것이다. 이 겸허한 자세는 바울이 사도들을 "세상의 쓰레기"와 "인간의 찌꺼기"라고 묘사한 자기 멸시의 대열에 가담하였다는 뜻이다.
2. 세간의 비판
웨슬리는 세간의 비판을 미리 예측하지 못하였으나 신랄한 비난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곧 인지하게 되었다. 그의 형 사무엘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편지하기를 존과 찰스가 "무어필드 지역에서 설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 안에서 볏짚 줍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존은 이에 대하여 응답한 것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형님, 누가 당신을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기뻐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게 만들었습니까? 당신은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야지 교회 밖에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찬양드릴 수 없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당신은 하느님을 성전 안에 가둘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성전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디에나 존재하심을 믿습니다. 나는 교회의 예전과 의식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것들 없이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죄인이 어디서, 누구에 의하여 죄의 길에서 돌아섰다면 나는 다만 기뻐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웨슬리의 옥외 활동에 대한 혹평이 어떠했는가를 당대의 지성적 사제라고 불린 조셉 트랩의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영국 교회에 속한 성직자가 야외, 시골, 도시의 가두에서 기도하고 설교하는 새로운 풍조에 대하여 교회와 국가 및 인간성 자체를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런 행태는 기독교를 우습게 만들고 모욕하는 것이며 이단자들과 무신론자들의 비난과 빈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로 이러한 협잡꾼들과 유혹자들을 따르지 말고 그들의 독기에 손상 입지 않도록 그들을 멀리하라고 하였다. 런던에 있는 교회들이 웨슬리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웨슬리는 스스로 겸손을 택하므로서 그가 물려받은 귀족적 성향, 규칙 및 헌법을 존경하는 옥스포드의 학자와 거장의 자리에서 정규 목회의 탈락자 곧 '야외 설교자'(field preacher)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교권의 압력과 교회의 많은 지인들의 존경과 우정의 포기하는 것을 시사하고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된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얻은 가치를 위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였다. 인간에게 멸시 받는 것은 하느님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그는 동생 찰스의 찬송가 가사에서 배운 바 크다. "십자가의 치욕을 귀하게 여기고 하느님의 칭찬만을 구한다."
3.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은 시대에 따라 독특한 선교 계획을 세우신다. 옥외 설교는 18세기에 대중에게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웨슬리에게 당시 교회가 갖지 못한 기동성을 주었으며 교회에 수용 불가능한 수의 대중을 불러왔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남루한 옷과 때 묻은 몸으로 예배 장소에 감히 찾아 올 수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과 만나게 하였다. 만일 민중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그 길 밖에 없었다. 그 대가가 얼마이던 간에 그 과제는 성취되어야 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이 일을 위해 하느님의 선택 받은 그릇이었다.
옥외 설교는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은 방법이었다. 당시 산업 혁명의 풍조는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중엽에는 교회나 성직자 없는 공장 지대와 도시 외각 지대가 무수하였다. 기독교의 기본 요소들을 무시하는 세속주의도 만연하였다. 이를 대처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과감한 제도적 개혁이 필요한데 그것은 교회의 기본 구조를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非) 국교도 시대적 책임을 깨닫지 못하였다. 소외된 영혼들을 추수할 막중한 사명이 웨슬리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이제 웨슬리는 야외 설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에 우선순위를 둠으로써 향후 50년을 위한 선교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주로 순회 전도자로서 옥외와 임대 건물, 그리고 간혹 교회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1739년 4월에서 12월 사이에 약 500회 설교하였는데 교회에서 한 것은 불과 8회이었다고 한다.
회중은 날로 증가일로에 있었다. 그의 일기는 기록하기를 보올링 그린과 로즈 그린에서는 회중이 7천명에 이르렀고 런던에서는 휘트필드와 함께 1만 2천-1만 4천의 회중에게 설교하였다고 한다.
웨슬리는 옥외 설교의 가치와 효력을 크게 인정하였다. 그는 그것의 효과와 편리함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였다. 1773년 그는 무어필즈에서 기록상 가장 많은 회중과 함께 하게 되었는데 그의 음성이 컸기 때문에 끝머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설교를 잘 들을 수 있었던 것에 매우 만족하였다. 그는 일기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야외 설교의 시대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죄와 혈기 가운데 머므르는 동안 그것은 효과적일 것이다."
4. 웨슬리의 변호
야외 설교라는 비전통적인 방법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 웨슬리는 그것에 대하여 변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1745년 "이성 및 종교인에 대한 호소"란 글에서 그 방법을 선택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그는 교회의 사용이 금지되기 전까지는 옥외에서 설교할 의도가 계획은 없었다고 항다. 그것은다만 가능한 한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고 선택한 '긴금 조치'에 불과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설교를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동기는 두 가지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자기에게 위임되었으므로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 속에서 죽음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영적 애원을 들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성 및 종교인에 대한 호소"의 제 3부에서 같은 주제를 가지고 비판자들에게 답변하였다. 비판자들이 설교할 교회가 충분하다고 말하나 웨슬리 자신이 설교할 곳이 없기 때문에 들과 가두에서 설교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비판자들은 죄인들을 구원할 교회와 사제들이 충분하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구원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나 사제가 충분치 못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웨슬리는 논평한다.
물론 교회에 1년이나 또는 수 년에 한번도 나오지 않는 것은 민중의 잘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제들이 무책임하게 방황할 때 일어난 일이므로 우리 사제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목자는 우리를 찾아 들로 나가셨으므로 "우리도 역시 잃은 양을 찾고 구원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웨슬리는 촉구하였다. 이렇듯 비상한 수단은 하느님께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미 광야에서 실시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너의는 주의 길을 닦으라. 때가 왔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 1:15). 이 말씀은 지금까지 선교를 위해 사용된 방법가운데 가장 감동적이고 설득력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웨슬리는 기성 교회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광부들이나 부두 노동자들 등 비참한 인간들이 지옥으로 떠러지고 있는데 그들을 구원하기 바란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는가 반문한다. 그들은 교구의 성직자가 천사처럼 설교한다손 치더라고 그 말을 듣지도 않고 아무 유익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산 꼭대기에서 어느 누가 설교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뛰어와 듣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임에 틀림 없다. 만일 상황이 요청하는 특수한 방법 곧 야와 설교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구원을 불가능했을 것이다.
5. 웨슬리의 도전
웨슬리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야외 설교에 대하여 비신사적이고 비사제적이라고 비방하는 태만한 성직자들에게 도전하다. 그는 사제들이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도구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웨슬리는 야외에서 당하는 온 갓 불편한 것들 즉 여름의 뙤약볕, 차가운 비바람, 폭설 등을 참을 수 있는가고 묻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은 속물들의 비방, 멸시와 비난, 언어의 모독과 함께 야만적인 폭행, 때로는 건강과 생명의 위협 등인데 과연 사제들이 능히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겠느냐고 도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하느님의 소명이 없이 어느 누가 이런 일을 감수할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라고 반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더 이상 야외 선교에 대하여 협조는 못하나 비방하거나 방해하지 말도록 호소한다.
웨슬리는 정체 불명의 "존 스미스"란 사람에게서 그가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무시하였다는 혐의를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은 그가 신성한 교회 밖에서 설교하고 즉흥적인 기도를 드린 것과 관계된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1)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죽는 것이 낫다. 따라서 나는 교회에서 설교할 수 없을 때 들에서라도 설교해야 한다. 2) 나는 주일마다 교회 예배에 참여하였고 즉흥기도가 교회 법에 저촉된다는 항목이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질서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여 그의 사랑과 정의로 양육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질서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
웨슬리의 선교는 확실히 교회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급적 성공회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존재 이유와 함께 자기 사명의 근거인 선교에 저해 요인이 되는 법은 무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영혼 구원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질서를 철저히 지킬 것입니다. 나는 수단보다 목적을 중요시합니다."
웨슬리는 또한 다른 성직자들의 교구를 침범함으로 무례와 불복종을 일삼는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는 합법적 목자들에게 속한 양들을 훔치려는 변절자로 규탄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선교적 관심은 교인들을 어떤 사람이나 공간으로 이동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죄악에서 하느님에게로 개종시키고 그 분을 섬기게 하려는데 있다고 밝혔다.
어떤 사람들은 웨슬리를 엉터리 성직자로 간주하고 그의 목회활동이 무례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것에 대하여 예리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말하기를 '설교의 무례함을 들자면 세인트 폴 교회에서 대부분의 회중들이 졸거나 말하거나 주위를 살피면서 설교에 무관심한 때이다. 반면에 최고의 예의는 교회나 야외에서 회중 전체가 우주의 재판장을 바라보고 하늘로부터 오는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목을 집중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웨슬리의 야와 설교에 대한 확신은 실증적인 것이었다. 그는 1759년 10월 23일자 일기에 이런 요지의 말을 남겼다. 무어필즈에 거대한 군중이 모였는데 이것이 아마도 야외 설교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인트 폴 교회 이외에는 그만한 회중을 수용할 수 없고 수용한다고 해도 사람의 육성으로 전달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는 거기에 모인 회중이 건물의 수용인원에 3배에 달한다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하느님의 개종과 능력이 그들과 함께 했는데 야외 설교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라고 피력한 것이다.
"존 스미스"란 정체 불명의 사람-옥스포드의 감독이고 추후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토마스 세커라고 전해지고 있다-이 웨슬리의 순회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물을 때 그는 자기의 심중을 토로한 바를 요약해 본다. 즉 '나는 하느님께서 그 일을 나에게 맡기신 것을 믿으며 그 일을 축복하신 것이 확실한 증거입니다. 물론 나에게 교만과 허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설교의 동기는 아니고 그 바탕에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깊은 신념이 깔려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거역할 때 "착하고 충성스런 종아"라는 말씀을 듣게 될 줄로 압니다"
웨슬리는 "생소한 길"인 옥외 선교가 오직 자기를 위한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는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는 뒤늦게 1772년 9월 6일자 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오늘날까지 야외 설교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사명을 인식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이 이것 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