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16:13~20, 롬10:9~10
제목 : 신앙고백과 사도신경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모든 종파에서 고백하는 가장 보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 시작 또는 예배 도중에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사도신경이 성경의 어느 부분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찾아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던 마르틴 루터는 사도신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도신경은 어떤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닙니다. 마치 꿀벌들이 온갖 아름다운 꽃들로부터 꿀을 모아오듯이, 위대한 사도들의 가르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는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한 기독교인의 유익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루터의 말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을 66송이의 아름다운 꽃으로 비유한다면, 사도신경은 그 꽃들로부터 꽃가루를 모아 만들 꿀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도신경이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를 가장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신앙고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종류가 사도신경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신앙고백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최초의 신앙고백은 오늘 읽은 성경본문 마16:16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라 하는 지역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 예수님 :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 제자들 :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 합니다.”

? 예수님 :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베드로 :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예수님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가르쳐 준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이토록 기뻐하셨다면, 이 신앙고백만 있으면 될텐데 왜 다른 신앙고백이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왜 지금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까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기독교의 역사상 보편적으로 고백되어지는 신앙고백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사도신경 외에도 아타나시우스 신앙고백, 니케아 신앙고백, 콘스탄티노플 신경 등 여러 가지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제외한 다른 신앙고백은 신학자 또는  교부들이 모여서 의논 끝에 채택한 것입니다. 반면 사도신경은 어떤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며, 종교회의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요약하여 교육하고, 이단 사상으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이 오랫동안 시도한 끝에 형성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12명의 사도들이 1가지씩 조문을 만들어서 사도신경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신경이라고 이름붙인 이유는 사도들이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신경의 내용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12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바울에게 사도라는 명칭이 주어졌습니다.

사도신경의 배경을 이루는 신앙의 요약, 신앙규칙, 신앙고백 등은 AD 200년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의 사도신경은 지금으로부터 약1300년 전인 AD 700년경에 확정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신앙고백이 교회 사이에 유통되어져 왔고,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면서 오늘의 사도신경이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만큼 사도신경은 성경의 가르침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외에 다른 신앙고백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 성경만 있으면 충분한데 신앙고백이 왜 따로 필요한 것인가? 이제 그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초대교회에 수많은 이단이 발생하자 기독교의 순수한 진리를 보존하기 위하여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는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얼마동안은 예수님의 12제자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정확하게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도 세상을 떠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들이 침투해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복음의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고, 기독교의 순수한 진리를 잘못된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친 내용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요약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채택한 니케아 신앙고백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하거나,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는 자를 우리 공회가 저주한다.”라는 선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이 교회 안팎에 팽배하여 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오늘 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복음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사도신경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믿지 않거나, 내용을 변질시키는 것은 잘못된 이단으로 보아야 합니다. 비록 사도신경 자체가 성경은 아니지만 그 내용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과 새롭게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교육을 위하여 복음의 진리를 간결한 형태로 표현한 신앙고백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어린 자녀들이나, 처음으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성경 66권의 내용을 한꺼번에 다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복음의 진리를 정확하고 간결하게 요약한 신앙고백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 할찌라도 사도신경의 내용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의 내용을 잘 배우는 것은 성경 전체의 진리를 배우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셋째, 교회에서 세례를 주고자 하는 성도의 신앙상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신앙고백이 필요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고자 할 때에도 과연 이 사람이 세례받을만한 믿음을 가졌는지, 성경말씀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기준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66권의 내용을 다 물어보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내용을 가장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한 신앙고백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눅12:8~9에 예수님께서“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시인한다’는 것은 ‘고백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바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배 시간이 되면 함께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데, 수많은 신앙고백 중에서 가장 성경적이고 보편적인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롬10:9에 사도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어서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10:9~10절의 말씀을 통하여 마음과 입,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4가지는 항상 일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술의 고백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겉다르고 속다른 입술만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당시 사람들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는 수많은 불이익이 뒤따랐습니다. 로마 정부 당국은 정부대로, 유대교인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 대하여 출교를 명하는 등 압박이 가해졌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이유만으로 순교를 당하는 일까지 생겨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입술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상황임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 자신이 크리스챤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까? 때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고 고백하십니까? 이런 믿음을 주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은 하나되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맹목적으로 믿는 맹신의 종교가 아닙니다.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믿는’ 그러한 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믿음의 대상이 있고, 믿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10:14~15에서 “그런 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교회에 나와서 공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도 신앙고백의 하나입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 “이제부터 옛사람된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다소 부족하다고 해도 “내가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그 고백에 맞도록 믿음을 강하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청년이 예쁜 자매를 깊이 사랑하여 연애를 하고 있습니다. 자매는 자기를 사랑하는 형제가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 청년이 자신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자매는 남자 청년의 사랑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될 것입니다. ‘과연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인가?’ 남자 청년은 ‘내가 내 마음 진심으로 사랑하면 됐지 꼭 말로 고백해야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사랑은 고백되어지고, 표현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신앙을 고백해야 할 것인가? 여러 가지의 신앙고백이 가능하겠지만 기독교에서 보편적으로 고백되어지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신앙의 체계를 바로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신경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기독교의 핵심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

  - 성부 하나님 :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 성자 예수 그리스도 : 성령 잉태, 동정녀 탄생, 고난, 십자가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 약속

  - 성령 하나님

2. 거룩한 공회(교회)

3. 성도의 교통

4. 죄 사함

5. 몸의 부활

6. 영생

이제 다음 주일부터 하나씩 살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문을 외듯이 사도신경을 암송해서는 안됩니다. 한마디 한마디의 문장 속에 담긴 진리를 기억하면서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도신경의 앞부분을 제가 고백하면 여러분께서는“아멘”으로 화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아멘)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아멘)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을 믿습니다”(아멘)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아멘)

“예수님께서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습니다”(아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믿습니다”(아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것을 믿습니다”(아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다”(아멘)

“성령님을 믿습니다”(아멘)

“거룩한 공회(교회)를 믿습니다”(아멘)

“성도가 서로 교통(친교)하는 것을 믿습니다”(아멘)

“죄를 사하여 주심(죄사함)을 믿습니다”(아멘)

“몸이 다시 사는 것(몸의 부활)을 믿습니다”(아멘)

“영원히 사는 것(영생)을 믿습니다”(아멘)

저희 모든 성도들은 이러한 신앙의 반석 위에 굳게 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