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5
성경본문 : 사53:1~12
제목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오늘은 한 장의 손수건이나 휴지를 함께 준비하고 설교를 들으셔야 할 것입니다. 너무 슬프고 너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드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 중에 흑인 영가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중세시대에 흑인들은 피부가 검다는 이유만으로 노예로 끌려와서 한평생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때로는 가족과도 떨어져 살아야했고, 하루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서 죽을 때까지 일만 해야 했습니다. 이들에게 육체적인 고난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마치 동물처럼 취급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흑인들은 자신의 괴로움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호소하면서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흑인 영가입니다. 따라서 흑인 영가는 듣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적 슬픔과 애절함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흑인 영가가 3곡 있습니다. 136장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420장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518장 (신자되기 원합니다)입니다. 저는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 420장을 즐겨 찬송합니다. 저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나의 괴롬알며 또 나의 슬픔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수 실패합니다 오 주여
그 누가 나의 괴롬알며 또 나의 슬픔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누가 우리의 고통을 가장 잘 알아줄까요? 부모형제라도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친한 친구도 내가 어려움을 당하면 떠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다고 느껴질 때 많은 사람들은 술로 잊고자 하지만 술을 깨고 난 후의 허망함은 더욱 절망의 끝없는 나락에 떨어지게 합니다.
우리말 고사성어 가운데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엽게 여긴다.’ 또는 ‘어려운 사람끼리 동정하고 돕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고통당하는 자의 마음을 잘 알고 위로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 앞에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가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열쇠를 가지신 분을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을까요?
세상의 것들 속에서는 참된 위로와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모두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내가 병들고 돈이 떨어지면 떠나갑니다. 재물도 잠시 있다가 금방 없어집니다. 권력도 영원히 나와 함께 있어주지 못합니다. 언젠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 순간부터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사셨습니다. 그는 가난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또한 그 분은 이 땅에서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생명까지도 다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저들의 슬픔을 아시고 위로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질병과 가난과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진정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공관복음이라 일컫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내용이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는 거의 절반을 이 기사를 기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미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었습니다. 사53:4~9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나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아멘)
저희들이 사도신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말하면서도, 그의 생애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30년간 육신의 부모에 대하여는 아들로서 효도하였고, 랍비로부터 열심히 말씀을 배웠고, 3년간 제대로 쉬지도, 주무시지도 못하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고, 제자들을 양육하셨고, 병든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도 사도신경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의 구속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신경의 고백 중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첫째 본디오 빌라도라는 인물에 대하여, 둘째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본디오 빌라도만큼 억울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주후 26년~37년까지 약11년동안 로마황제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총독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으로 다루기가 매우 까다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의 법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율법이 그들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심당원들을 중심으로 자주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소요가 발생하여 그 때마다 군대를 보내어 진압해야만 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들이 아무 일없이 조용히 있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요구가 접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장로 등 몇몇 지도자들의 요구였으나 점차 성 안의 모든 유대인들이 이에 가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기하여 죽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부하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대하여 보고받은 내용을 종합해 본 결과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할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요하게 요구하여오자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내어보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도 민심이 가라앉지 않자 명절에 단행되는 특별사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성을 잃은 백성들은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빌라도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중 군중들로부터 빌라도에게 매우 결정적인 말 한마디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는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를 죽이지 않고 놓아주면 빌라도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힘으로는 소요를 가라앉힐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총독이라고 하는 자신의 지위까지 위태롭게 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사실 빌라도의 입장에서 유대인 한 사람쯤 죽게함으로 자신의 통치지역에서 일어날 민란을 방지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가 무위로 돌아가자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하여는 나는 무죄하다. 너희들이 모든 피의 값을 다 받으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라고 하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빌라도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가혹하고 불합리하게 여겨집니다. 빌라도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구명운동에 앞장을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는 그의 행동을 결코 정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에서는 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고 있을까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은 신화나 거짓이 아니라 인류의 분명한 역사 속에,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발생하였던 사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빌라도는 주후 26~37년까지 유대의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의 황제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유대인들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시대에, 총독으로 있는 빌라도의 통치행위에 의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기적과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만나고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허황된 신화나 거짓은 결코 없습니다. 단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성경의 증거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수많은 증인들이 과거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증거들을 지금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 의해 팔렸습니까? 자기가 선택하여 3년간 양육한 제자들에 의해 배반당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판 사람은 로마의 관원도 아니요, 유대인들도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3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던 가롯 유다였습니다. 사랑한 만큼 배신당했을 때의 미움은 커지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상심하셨을까요?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모두 다 도망쳤습니다. 평소 모일 때마다 ‘누가 더 높으냐?’고 다투고,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나를 우편에, 혹은 좌편에 앉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였던 그들도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결코, 죽는 한이 있어도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하였던 베드로도 도망가다가 그나마 양심이 있어서 멀찍이 따라가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계집종에게 창피를 당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라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제자들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비난의 돌을 던질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의 손에 붙잡혀 말할 수 없는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빌라도 총독으로부터 불공정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들이 세운 증인들끼리 서로 말이 맞지 아니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죄한 줄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을 내려주었습니다.
마침내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으로부터 강압적으로 사형집행 판결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기고만장한 그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신이 매어달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심문을 받으시느라고 한 숨도 자지 못하였고 온몸은 채찍에 맞아 내딛는 발자국마다 피로 물들었습니다. 가다가 지쳐서 쓰러지면 로마의 군인들은 발로 걷어차고, 채찍으로 내리칩니다. 겨우 일어나서 걷다가 쓰러지고, 일어나서 다시 걷다가 쓰러지고....
길가에 서 있는 여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면서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여인들을 향하여 위로하며 말씀하십니다. “여인들이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마시요. 오히려 당신과 당신들의 자녀를 위하여 우십시오.”
드디어 사형집행장에 도달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조롱과 모욕을 퍼부었습니다. 저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들과 같아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다 벗기고 붉은색 옷을 입혔습니다. 당시 붉은 옷은 황제들이 입은 옷의 색깔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절을 하는 등 왕에게 드리는 예(禮)를 보이면서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웠습니다. 날카로운 가시에 머리와 이마와 얼굴이 찢겨서 선혈이 뚝뚝 흘러내립니다. 그들은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우면서 ‘당신의 왕관이 참으로 멋집니다.’라고 놀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갈대를 쥐어주었습니다. 군대의 장군이나 지휘관의 지휘봉처럼 옛날 왕들은 금으로 만든 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갈대를 예수님의 손에 쥐어주면서 ‘자 이것이 왕이 들고 다니는 홀이다’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손에서 갈대를 도로 빼앗아 얼굴을 쳤습니다.
왕께 절을 해야 한다면 넙죽 절을 하고는 일어나서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았습니다. 손으로 얼굴을 때리고 채찍으로 예수님의 몸을 무자비하게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닿는 곳마다 선혈이 낭자하고, 마치 밭에서 고랑을 판 것처럼 온 몸은 채찍 자국으로 얼룩졌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몸이 거친 십자가 형틀위에 뉘어졌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의 양손과 발을 십자가에 밧줄로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손과 발을 녹슨 못을 사정없이 박았습니다. “쾅쾅쾅” 요란한 망치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집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집니다. 이성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은 마치 승리자가 된 것처럼 환호를 합니다.
그 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에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줍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했네
귀중한 그 보배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비웃는 저 무리들 주의 옷 벗긴 후에 주님 몸 깊이 찔렀네
귀중한 그 보배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그 때 구원을 이루셨네
마지막 피 한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극심한 육체적 고난을 겪었습니다. 당시 십자가의 형틀은 인류가 고안해 낸 사형제도 중에서 가장 잔혹한 것입니다. 교수형이나 총살형처럼 즉시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고통가운데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잠시도 그 고통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고통은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인간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배척을 받으시고, 하나님으로부터도 거절을 당하신 고통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셨을까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까? 그리고, 예수라고 이름하는 한 유대인의 죽음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 고난의 발자취를 함께 돌아 본 우리들이 진지하게 던져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우리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 구속사역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의 생애와 가르침과 죽으심을 단지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믿사오며”
믿는다는 것은 그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음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믿지 않으면 예수님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믿지 않으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이제 벧전2:22~25의 말씀을 찾아서 함께 읽음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말씀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징계를 받으셨고, 우리의 나음을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