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5
성경본문 : 롬3:9~24
제목 :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해마다 명절이나 국경일이 되면 전국의 감옥에 수감되어있는 죄수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사면조치’가 내려집니다. 사면(赦免)이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 중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모범적으로 수감생활을 하는 죄수를 선별하여 석방시켜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사면 대상에 포함되어 감옥생활을 끝내고 석방되는 날이면 굳게 닫힌 감옥의 문이 열리면서 죄수들이 일제히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마중을 나온 가족들이 기쁨으로 재회를 한 후 미리 준비한 두부를 먹입니다.
그런데 왜 두부를 먹이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혹시 여러분 중에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제가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과거 교도소의 생활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온갖 가혹 행위와 구타가 이어졌고, 나오는 음식도 매우 부실하여 몸이 축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복역을 하고 나온 사람에게 고단백의 영양식을 빨리 먹이려고 했고 그 대상이 두부였다는 것입니다. 두부는 값싸고 영양이 많아 어려운 살림에도 부담이 없었습니다.
둘째, 겉과 속이 하얀 두부처럼 선량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흰 두부를 먹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 법을 어겨 죄를 얻은 경우 감옥에 들어가든지, 벌금을 물든지, 사회봉사 활동에 동원됨으로써 그 죄에 대한 처벌은 일단 종료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계속 죄책감이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전과범이라는 딱지가 남아 자신이 전과범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직장에 취직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출소한 후 다시 범죄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면 화를 버럭내면서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도대체 나를 뭘로 아느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독교의 신앙은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그 죄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단계입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다녀도 진정으로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고 이에 대한 회개가 없으면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위 ‘주기도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에는 우리가 우리의 죄용서 받기를 기도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죄를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얼마나 나쁜 일을 많이 하였기에 교회에 가기만 하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짜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을 전하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고,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선량하게 살아왔는데 나도 죄인이란 말인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두 사람의 기도하는 장면을 목격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또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외견상으로 볼 때 바리새인은 선량하고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반면, 세리는 당시 지배국이었던 로마 정권에 아부하여 동족을 착취하는 매국노요 죄인이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은 성전 입구에 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이 옆에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 중에서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세상 사람들의 상식과 기독교의 진리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 눈에는 바리새인의 삶이 선량하고 훌륭하게 보였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모르는 자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자신의 모습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평가를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반면 세리는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책망하시고, 세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어떤 나라의 왕이 감옥을 시찰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왕이 온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특별 사면을 받고 석방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들어오자 모두 “왕이여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누명을 쓰고 이 곳에 갇혔습니다. 저를 석방시켜 주세요.”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석방에 갇혀있는 한 죄수는 왕에게 아무런 탄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왕이 “그대는 무슨 죄로 이 곳에 갇혔는가?” 질문하자, “왕이여, 저는 참 나쁜 놈입니다. 저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이 곳에서 저의 죄값을 모두 치르고 난 뒤에 나가면 선량한 국민으로 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옥 시찰을 마친 후 왕은 간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감옥에는 모두 의인들만 있는데, 죄인이 딱 한사람 있구나. 죄인이 의인들과 함께 있으면 나쁜 물을 들일 수 있으니 저 죄인을 내어 보내도록 하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인인 줄 깨닫고, 진심으로 고백할 때에 죄 용서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심각한 상태라고 판단되어지면 의사는 X-ray는 물론이고 내시경, MRI, C.T와 같은 종합정밀검사까지 받도록 요구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먼저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다음 단계의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병인 “죄”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죄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올바로 알아야 그 때부터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이 땅을 창조하시고 난 후 소감은 ‘좋았더라’ 였습니다. 마지막 엿새째 되던 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의 모양대로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소감은 ‘심히 좋았더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귀한 축복과 사명을 주시면서, 아담과 한 가지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체결한 언약의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담아,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다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순종‘ 하나만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뱀(사탄)이 여자인 하와에게 접근하여 유혹을 합니다. “하와씨!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워요! 하나님께서 정녕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시던가요? 괜찮아요. 그것을 먹는 날에는 당신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열매를 보니 정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따 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서 함께 먹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죄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죄였습니다. 롬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그 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모두 죄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자범죄’라고 합니다. 소위 살인, 강도, 음란, 도적질, 미움, 거짓, 탐심 등이 자범죄에 해당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정리하면 ‘죄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 가지의 답이 드러납니다. 죄가 무엇인가요? (불순종; 맞습니다. 다른 의견은?) 여기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았더라’고 하신 것이 우리의 보기에 ‘좋지 않더라’는 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이 달라서, 내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죄입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죄는 사람의 습관이나, 관습과 체면, 사회의 도덕에 저촉되는 것으로서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음을 받은 인간이 창조주되신 하나님께 대한 범죄입니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며, 우주적이며, 가장 긴급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살인? 간음? 도적질? 아닙니다. 물론 이것도 죄이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가장 큰 죄는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그런데 이 죄는 세상의 법정에서는 전혀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법을 아무리 잘 지킨 모범 시민이라도 후일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는 세상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울며 이를 갈아도 때는 늦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전3:16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깨달아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이후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성령이 거하는 전이 되었는데,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사탄이 거하는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오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아담에게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여자인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더하셨습니다. 땅도 저주를 받아 땅에서 가시덩쿨과 엉겅퀴가 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하고, 저주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하게 시도를 합니다. 수양을 하고, 구제 등 자선사업을 하기도 하고, 다른 종교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노력과 방법으로는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피부가 검은 흑인이 아무리 좋은 비누를 사용한다고 해도 피부의 검은 색을 지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 속에 그 길이 열려있습니다. 마치 캄캄한 동굴 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빛을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보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처럼 희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아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얻도록 인도하십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인간의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다른 이름이 결단코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진심으로 죄 용서함을 베풀기 원하십니다. 미가서 7:18~19절을 함께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아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진심으로 용서하시기 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오며 그 비유 속에 탕자의 아버지 모습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자기의 둘째 아들이 자기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무리 설득을 시켜도 막무가내입니다. 할 수없이 자신의 재산 중에서 둘째 아들의 몫을 돈으로 주었더니 먼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둘째 아들을 보낸 이후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돌아올 기약도 없는 기나긴 세월 속에 흰머리는 더욱 늘어났습니다. 집을 나간 후에 편지 한 장, 전화 한 번 하지 않은 아들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그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버린 자식’이라고 포기할 만도 한데 탕자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둘째 아들이 가진 재물을 다 허비한 후 제대로 먹지도 못하여 거지꼴로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의 과거를 전혀 묻지 아니하시고 진심으로 그를 받아들입니다.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는 아들의 말은 들은 척하지 않고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십니다. 오래 참으시고, 회개하는 자에게 과거의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다 용서하십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 후 로마서 8장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합니다. 31절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34절에는 “누가 정죄하리요?”, 그리고 35절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완전하게 용서함을 받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죄한 자로 인정함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분리는 끝나고 회복되고 하나 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비록 우리의 모습이 연약하고 죄악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할찌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과 똑같이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칭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연약하여 자주 넘어지고 실족하지만 우리의 신분,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된 신분의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부모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꾸중을 듣기도 하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서먹해지고, 불편해집니다. 그렇다고 하여 부모와 자식이라는 혈육관계가 끊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가지기 위하여 다시 죄악된 삶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마치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죄짓는 자리에 들어가면 안됩니다. 오히려 날마다 예수님을 조금씩 닮아가는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한 것에 대하여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사1:13~17의 말씀입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하여 내 목전에서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거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솔직하게 드러내어야 합니다. 죄사함이 없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구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첫걸음이요 핵심적인 고백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고백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죄 용서에 대한 확신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소망과 평안,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