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5
본문 : 살전 4:13~18
제목 :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저희들이 사도신경 강해를 시작한지 4개월만에 오늘 마지막 종착역에 이르렀습니다. 이 강해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저 나름대로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고, 크게 유익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러신가요?)
이제 오늘로 사도신경 강해가 끝나고 나면 다음 수요일부터는 ‘십계명 강해설교’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 수요일 예배만 잘 참석하시면 신학교 수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게 되며, 체계적이고 뿌리깊은 신앙의 기초를 다져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예배에 비하여 수요일 저녁에는 수준높은 설교가 가능합니다. 사실 주일 오전예배에는 교회에 처음 오시거나 신앙생활을 한지 얼마되지 않는 분이 함께 예배를 드리므로 그 분들을 생각하여 너무 깊이있는 내용의 설교는 삼가게 됩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 많이 참석하시기 때문에 초보의 수준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저희들은 ‘몸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던지고자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몸이 다시 살게 된다면 그 부활한 몸은 죽기 전의 몸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아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고백이 가능하게 됩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영원히 살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병장수(無病長壽)”의 복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조금 더 오래 사는 사람은 있지만 영원히 죽지 않고 살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앞으로도 모든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고려시대 어떤 무명의 시인이 지은 이런 시조가 있습니다.
왼 손에 가시들고 오른 손에 막대잡고
가는 청춘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드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이 시조는 자신이 늙어지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젊었을 때 누렸던 부귀와 영화도 세월이 지나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늙고 병든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한탄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난 날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고, 돈이 많고, 많이 배운 사람이라도 이 길을 피하지 못하였고, 의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죽음의 턱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죽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에서 영혼을 분리되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버리면 그것을 일컬어 ‘죽었다’라고 하며,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첫째 사망입니다.
다음으로 영적 죽음이 있습니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계20:11~15에 의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마침내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을 일컬어 영적 죽음 또는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계2:11에서 “예수님을 믿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들은 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50에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범죄함으로 썩을 수밖에 없는 부패한 우리의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가운데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다시 오실 때 그 육체를 다시 살리시고, 다시 살아난 육체와 영혼이 다시 연합할 것입니다. 부활하여 영혼과 다시 결합하게 될 육체는 처음 죽기 전과는 전혀 다르게 완전한 몸이 됩니다. 그 몸은 죽지 않고 썩지아니하는 완전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우리 성도들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 영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딛1:2에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라고 하였고, 요일2:24~25에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영생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것입니다. 요10:28에 예수님께서 “내가 저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단12;2에서 “땅이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은 자도 있겠고 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다니엘은 영생과 그 반대인 치욕, 부끄러움을 함께 예언하였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에는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 형벌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는 영원한 지옥 형벌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우리 성도들은 이 두 가지를 함께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두 성경말씀은 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36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은 믿음은 곧 영생이요, 불신은 곧 멸망과 진노라는 의미입니다.
신학적으로 복음의 보편성과 배타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의 보편성’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보혈의 공로는 모든 인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즉,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식의 차이, 인종의 차이, 피부색깔의 차이 등 어떤 제한을 두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배타성’이란 복음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보혈의 공로가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믿는 자에게만 임하는 구원의 축복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와 연결할 때 우리의 몸이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새로운 몸을 입었을 때,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은 세상 마지막 날 천국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 보장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의 형벌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영생과 영벌의 차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영생에 대하여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현세의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며 죽음 저 편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과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엡4:23~24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될 때 비로소 천국을 우러러 볼 수 있고, 영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영생을 얻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성경에서 몇 군데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습니다.
요3:15~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둘째, 죄에서 자유하게 됨으로 얻습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셋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앎으로 얻습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마지막으로, 죽도록 충성함으로 얻습니다.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요 영원한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한다면 오늘 우리의 삶을 달라져야 합니다.
흔히 우리의 인생살이를 나그네에 비유합니다.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잠시 머문 곳이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그 곳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돌아가야 할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아름다운 천국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소중하기에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고, 현재 당하는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다가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삶, 더 이상 어둠과 죽음과 고통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그 곳에서의 영원하고 아름다운 삶을 소망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제목 :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저희들이 사도신경 강해를 시작한지 4개월만에 오늘 마지막 종착역에 이르렀습니다. 이 강해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저 나름대로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고, 크게 유익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러신가요?)
이제 오늘로 사도신경 강해가 끝나고 나면 다음 수요일부터는 ‘십계명 강해설교’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 수요일 예배만 잘 참석하시면 신학교 수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게 되며, 체계적이고 뿌리깊은 신앙의 기초를 다져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예배에 비하여 수요일 저녁에는 수준높은 설교가 가능합니다. 사실 주일 오전예배에는 교회에 처음 오시거나 신앙생활을 한지 얼마되지 않는 분이 함께 예배를 드리므로 그 분들을 생각하여 너무 깊이있는 내용의 설교는 삼가게 됩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 많이 참석하시기 때문에 초보의 수준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저희들은 ‘몸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던지고자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몸이 다시 살게 된다면 그 부활한 몸은 죽기 전의 몸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아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고백이 가능하게 됩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영원히 살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병장수(無病長壽)”의 복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조금 더 오래 사는 사람은 있지만 영원히 죽지 않고 살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앞으로도 모든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고려시대 어떤 무명의 시인이 지은 이런 시조가 있습니다.
왼 손에 가시들고 오른 손에 막대잡고
가는 청춘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드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이 시조는 자신이 늙어지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젊었을 때 누렸던 부귀와 영화도 세월이 지나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늙고 병든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한탄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난 날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고, 돈이 많고, 많이 배운 사람이라도 이 길을 피하지 못하였고, 의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죽음의 턱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죽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에서 영혼을 분리되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버리면 그것을 일컬어 ‘죽었다’라고 하며,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첫째 사망입니다.
다음으로 영적 죽음이 있습니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계20:11~15에 의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마침내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을 일컬어 영적 죽음 또는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계2:11에서 “예수님을 믿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들은 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50에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범죄함으로 썩을 수밖에 없는 부패한 우리의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가운데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다시 오실 때 그 육체를 다시 살리시고, 다시 살아난 육체와 영혼이 다시 연합할 것입니다. 부활하여 영혼과 다시 결합하게 될 육체는 처음 죽기 전과는 전혀 다르게 완전한 몸이 됩니다. 그 몸은 죽지 않고 썩지아니하는 완전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우리 성도들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 영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딛1:2에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라고 하였고, 요일2:24~25에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영생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것입니다. 요10:28에 예수님께서 “내가 저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단12;2에서 “땅이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은 자도 있겠고 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다니엘은 영생과 그 반대인 치욕, 부끄러움을 함께 예언하였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에는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 형벌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는 영원한 지옥 형벌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우리 성도들은 이 두 가지를 함께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두 성경말씀은 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36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은 믿음은 곧 영생이요, 불신은 곧 멸망과 진노라는 의미입니다.
신학적으로 복음의 보편성과 배타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의 보편성’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보혈의 공로는 모든 인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즉,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식의 차이, 인종의 차이, 피부색깔의 차이 등 어떤 제한을 두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배타성’이란 복음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보혈의 공로가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믿는 자에게만 임하는 구원의 축복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와 연결할 때 우리의 몸이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새로운 몸을 입었을 때,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은 세상 마지막 날 천국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 보장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의 형벌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영생과 영벌의 차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영생에 대하여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현세의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며 죽음 저 편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과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엡4:23~24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될 때 비로소 천국을 우러러 볼 수 있고, 영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영생을 얻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성경에서 몇 군데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습니다.
요3:15~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둘째, 죄에서 자유하게 됨으로 얻습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셋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앎으로 얻습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마지막으로, 죽도록 충성함으로 얻습니다.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요 영원한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한다면 오늘 우리의 삶을 달라져야 합니다.
흔히 우리의 인생살이를 나그네에 비유합니다.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잠시 머문 곳이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그 곳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돌아가야 할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아름다운 천국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소중하기에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고, 현재 당하는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다가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삶, 더 이상 어둠과 죽음과 고통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그 곳에서의 영원하고 아름다운 삶을 소망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