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8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는 여기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말씀들 중의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마 음이 청결한 자는 복되도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라
고 우리 주님 은 씀하셨습니다. 처음 듣기에는 이 위대한 말씀에서 묘사된 인격이나 주어진 약속이 사람이 도달하기 더욱 어려운 경지인지 어떤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볼만한 어떤 인격 이나 하나님의 그 눈부신 광채를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만한 성품을 소유하였다고 상 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확실히 이 요구는 불가 능하고 이 약속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족될 수 없는 요구로 우리를 조롱하고 실현될 수없는 소망을 우리 앞에 매달아 놓으셨단 말입니까? 많은 도덕가들과 자칭 스승이라는 자들 이 이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전장에서 두 다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누어있는 군인에 게 '당신이 일어나서 달려가기만 한다면 무사하리라'
고 말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 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와같은 어리석은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거리가 먼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입술 에서 나온 말씀 가운데 가장 희망적이고 밝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 불가능한 인격을 보장하고 있고 외견상 불가능한 하나님을 보는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려움을 진정시켜 주며, 하나님을 보는 일을 우리 자신 부적격하다고 생각하여 때때로 부득히 피하기도 하지만 그 보는일이 가장 순결한 기쁨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말씀을 완전히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본문의 중요한 의미 의 일부를 파악해 보려는 것입니다.
1. 마음의 청결
(1) 먼저 마음은 어떻게 하여 청결해 질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이 대답은 팔복에서 이 말씀의 위치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앞의 강해들에서 팔복에 있 는 의미의 보고들을 열어 주었던 열쇠가 여기서도 특별히 필요합니다. 앞서 지적한대로 이 말씀은 하나의 고립된 말씀으로 간주하면, 조롱거리와 고통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경건한 영혼의 인격적 특성을 묘사하고 있는 이 화환 사슬의 모든 선행(선행) 하는 고리들과 이 말씀을 연결해서 본다면 이 말씀은 다른 모양을 띠게 됩니다. "마음 이 청결한자"는 선행하는 은사들과 자질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발휘하는 사람입니 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볼 수있는 마음의 청결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자기의 상태를 인식하는 영의 빈곤, -그 상태의 심각성과 절망적 모습으로 인해 일어나는 통회 등,
-그리고 의에 대한 갈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선행할 때, 그리고 그것들로 부터 시간의 간격없이 흘러나오는 결과를 수반할 때 - 즉 천국을 소유하고, 통회 후에 위로를 받고, 진정한 소유로만족하고, 의를 갈망하여 얻을 때, 오직 그 때 마음이 죄악과 교만에서 깨끗해지고 눈이 열려 영원한 하나님의 빛을 바라보게 됩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 그런데 처음 세 복은 우리의 필 요, 우리에게 무엇인가 필요하다는 의식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즉 가난한 심령과, 자기 의 죄성에 대한 애통과, 인류의 생활을 파멸시킨 자아와 자아 중심성에 대한 참된 이해 의 결과인 온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세 복은 우리의 깊은 필요 의식의 중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 위대한 욕구 충족의 진술, 곧 하나님께서 이렇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되도다, 저희가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필요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가 배부르게 채워질 것이라는 놀라운 대답을 가지고 오십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계속해서 만족의 결 과, 곧 가득히 채워진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긍휼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하는 자가 됩니다. 그 후에는 이 모 든 것의 결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게"됩니다.
이것이 본문에로의 접근방식입니다. 이것은 주리고 목마른데 대한 중심되는 진술로 유도되고, 그런 다음 이어 그 결과를 서술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홀로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면 절망만을 자아낼 뿐입니다. 그러나 기 스도께서 위치시킨 그 자리에 놓고, 전후에 묘사된 일련의 인격적 특징들 가운데 하나 로 간주한다면, 이 말씀은 지극히 밝고 순수한 소망을 안겨 줍니다.
"구스인이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뇨?"(렘 13:23).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빛갈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본문을 팔복의 다른 복들과 연결해 생각해 볼 때, 마음의 순결은 인간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일련의 팔복 가운데서 본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그 진리 가,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보다 간결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납니 다. -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께끗게 하사"(행 5: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옛 진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개혁과 자기 개량은 죄에 대한 자각, 죄에 대한 통해, 신적 의에 대한 갈망,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개 방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 때만 우리가 마음의 순결이라는 이 고요한 고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 방법에 의해, 오직 이 방법에 의해서만 "께끗한 것이 더러운 것에서"(욥 14:4) 나올 수 있으며, 죄악으로 더러워진 인간, 모든 악의 원천인 사탄의 결박에 매인 인간이 께 끗해지고 청결해지고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될 때 하나님은 모든 인간 행위의 목적,목표,동기,힘,보상이 되십니다. 의는 선물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회심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조 건으로 하여 하사되는 섬물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순결을 향한 갈망은,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억압받고 좌절당하고 벽에 부딛칩니다. 그 갈망은 확실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갈망이 완전히 충족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더러워진 빈 손을 하나님 앞에 높이 들고 나아가, "주께서 명하시는 것, 그 께끗한 마음을 내게 주소서, 그러면 내가 깨끗해지리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시 51:10).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이 선물은 단번에 영구적으로 주어지 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갈망이 있을 경우에 한해 계속적으로 주어진다는 것과, 이 선 물을 우리가 지신의 신앙을 통해서는 물론, 노력을 통하여 삶 속에서 활용하고 인격 속 에서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들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 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려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 게 하자"라고 권면했습니다(고후7:1). "이 선물을 가진 자마다 그가 깨끗하신 것처럼 자 신을 깨끗게 합니다".
우리에게 중생의 선물을 가져다 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정결한 물이 담긴 샘 으로 부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여 너희 악업 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라"(사1:16)라고 외침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순결케 하는 권능을 받고, 부지런한 행위를 통해 이 능력을 사용합니다. 믿음과 행위는 나눌 수 없습니다.
2.하나님을 볼 수 있는 청결한 마음
우리는 여기서 청결한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 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되도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본다" 는 의미로 번역된 헬라어 타노는 "본다, 바라본다, 나타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여 기서 미래 중간태 디포넌트가 사용되어 "볼 것이다"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이와같은 본문에 대해 설교할 때 어떤 신비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쉽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명백한, 실질적 형태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론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반드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본문에서 말하는 문제, 곧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오감에 의해 인지한다는 의미거나 무한하신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충분히 알고 이해한 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불타는 태양의 중심부에 짧은 팔을 뻗칠 수 없 듯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이 겠습니까?
그것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 마음이 청결해질 때 '하나님을 본다'라고 말할만한 하나님과의 어떤 직접적인 관계를 능히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 다.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러한 관계는 오감에 의해 하나님을 보는 것 못지 않게 확고하고 확실하고 뚜렸한 인식 을 가져다 줍니다. 청결한 마음이 청결한 아버지 하나님을 봄에 있어서는 오감의 착각 이라는 것이 존재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성경말씀을 해석할 때는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즉 매우 심 각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천명하셨던 그 위대한 원리에 따라 항상 안내와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9).
영원 전부터 말씀(WORD)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세세무궁토 록 그 이름이 시사하는 바로 그러한 존재로 살아 계십니다. 즉 영원한 하나님을 계시하 시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연을 통하여, 인류역사를 통하여, 또 인간의 도덕성과 양심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연과 섭리에 대한 명상에 의해서나 자 기의 영적 직관에 의해서나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섬광 혹은 일별의 불꽃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언제나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그 빛"의 작용이 거기에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적 계시의 한계를 넘어 그 영원하신 말 씀께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의 빛을 비추고 계셨습니다. 어떤 인간들은 어느 정 도 이를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습니다(요8:56). 모세와 장로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다윗도 하 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16:8).
그러나 본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황홀하고 신비한 하나님 대면 보다도, 종말 때 일어나게 될,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특유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마음이 깨끗 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교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1) 첫째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현세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들 은 육체로 임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현재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그 역사적 현현의 밝은 불꽃 가운데 서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를 "욕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인 식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부르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이라 부르든, 혹은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을 사용하든 결국 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즉 그것은,
-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
-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체험,
-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복된 확신,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가까이 오신 하나님과의 마음, 가슴,
의지, 행 동을 통한 교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각 내지 체험과 적극적, 실제적 교제를 위해 마음의 청결이 필수 불가결하 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는 어떤 독단적 요구가 아닙니 다. 문제의 본질상 필연적으로 내재, 수반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잠간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 만이 실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을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는가"(암3:3)라고 하였 습니다. 시편24;3이하에서 보면,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자만이 성전의 예배 도 종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우리 자신의 느낌과 자각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불결 은 언제나 우리 영혼에 연막을 입히고 하늘 위에 안개막을 입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죄라도 그것은 우리로부터 하나님을 차단시킵니다. 아주 작은 분량의 염료가 수마일의 강물을 흐리게 하여 푸른 하늘과 반짝이는 별빛이 반사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극히 작은 악이라도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시야로부터 차단하거나 흐려지게 만듭니다. 죄인들이 강렬한 풀무불 속에 들어가면 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 음이 청결한 자"가, 그리고 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2) 둘째로 미래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타의 팔복이 그러하듯이 하나 님을 보는 것도 역시 현세에서는 부분적으로 성취되고 미래의 삶에서 완전하게 성취되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하나님과 교제방식 및 하나님에 대한 인식 방식과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그것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필연적으로 크고 놀라 운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지만다
만 양자가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양자는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물론 변화된 상황, 새로운 수용능력, 시간과 오감의 변화, 보이지 않은 사물과 우리 사이에 장벽인 육체적 휘장의 소멸은 하나님을 보는 방법과 정도에 있어서 놀라운 혁 신과 진보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논한다는 자체가 어쩌면 어리석은 짓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늘의 그 영광스러운 지복의 상태가 지상의 상태와 어느 정도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어떤 비교의 대상이 지상에 있다면, 우리는 양자 간의 차이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견줄 수 있는 어떤 사물이 지상에 없습니다. 지상의 것과는 도저히 견줄 수 없을 만큼 하늘은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 지 못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고전2:9).
그리고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장차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보는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 모른다고 하여 그 사실 자체를 의심하거나 무시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그의 계신 그대로 그를 볼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3:2).
사도 바울은 "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 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 이 내가 온전히 아리라"(고전13:12).
3. 하나님을 보는 행복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떻게 복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봅 시다. 하나님을 보는 것 외에 "봄으로써 눈을 만족시킬"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지상에서 가능한 이 원초적, 불완전한 형태에 있어서도, - 우리의 혼란을 평정시키시고,
-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고,
- 우리의 삶을 다른 방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고요한 권능과 행복의 수준으
로 높 혀 주는 유일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태양이 하늘로 솟아 오를 때 별들이 그 모습을 숨기고 희미하게 사라가듯이, 지상의 온갖 현란한 환영들을 무색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주인, 세계의 주권자, 시간과 감각을 다스리 는 왕으로 만들 것입니다.
"땅이 하늘로 가득차고 모든 평범한 수풀이 하나님으로 불타오를 때" 모든 것은 달 라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은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 버지 및 성령과의 교제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다음 저 하늘에서의 행복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지상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 습니다. 그 미래의 행복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황금길과 진주문들은 그 비밀들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 위에 하늘의 행복에 대한 우리의 온갖 생각은 번데기가 자기 무덤 속에서 어느 날 나오게 되, 빛나는 날개 달린 삶에 대해 꿈꾸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나는 의로 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 위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야 말로 하늘 중의 하늘이요 행복 중의 행복임
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굳게 믿읍시다.
이 영원한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 영원한 계시자(REVEALER) 덕분에 우리에게 가 능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화된 성도들이 아버지를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기 지상에서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을 보는 것은 육체적 시각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며, 어떤 붙잡을 수 없는 광채를 멀리서 바라보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그 대상의 실제적 소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게 될 때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저 위에서 그 소유는 충분한 소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제 6 복을 끝맺으면서 사도 요한의 말을 들어봅시다. -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 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하느니라(요일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