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박익수 교수
Ⅰ. 서문(1:1-15)
서문(시작말)과 결문(맺음말)의 중요성 : 복음서의 서문(序文)과 결문(結文)에는 언제나 저자가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의도한 전체적인 의미와 목적이 내포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대부분의 고대 책들과 마찬가지로 네 복음서들도 복음서 전체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해 주는 서문과 결문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해 나갈 마가복음 역시 서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서문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마가복음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첫 작업이다.
1. 표제(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이하 성서본문은 표준새번역개정판)."
(1) 유일한 "복음서" : 사실 4복음서 중 "복음서"(Gospel)란 명칭에 어울리는 것은 오직 마가복음 뿐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자신의 기록을 가리켜 때때로 "천국의 복음"이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책"(마 1:1)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의 경우는 예수의 생애, 즉 예수의 역사(historia)를 기록한 것이다(참조, 눅 1:3).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의 경우도 계시적인 설교들의 수집록인 "책"이라 할 수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기록한 마가복음 :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야웨께서 구원이시다"이다. 물론 이 이름은 구약에서도 발견된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시대의 대제사장이던 여호수아가 그 예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다르게 표기되고 있는 이유는 히브리식 발음인 여호수아를 신약에서는 헬라어식 발음인 "예수"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히브리어인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특별히 구약에서 이 명칭은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 제사장, 왕들에게 붙여졌었다(레 4:5 ; 6:2 ; 22:10 ; 왕상 2:10, 35 ; 12:3, 5 ; 16:6 ; 24:7 ; 사 45:1 ; 시 105:15 등). 그러므로 이 명칭은 예수께서 행하실 일, 또는 직임,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도록 특별히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분''이라는 뜻이다. 신약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호칭하는 것은 예수께서 구약의 이러한 세 가지 역할의 완성자이시며, 실체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출 4:22), 장차 도래하실 메시야"(삼하 7:14 ; 시 2:12 ; 89:27 ; 단 :25), 천사(욥 1:6 ; 2:1), 민족의 지도자(시 82:6), 온 인류(말 2:10)를 지시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마 5:45 ; 요 1:12 ; 롬 8:15), 온 인류(눅 3:38), 그리고 그리스도(요 20:17)를 지시하고 있다. 물론 신, 구약성서를 통하여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적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예수의 신적(神的) 기원(起源)'' 또는 ''예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복음 내용의 주인공 또는 복음 전달의 주체로서의 예수 : ''복음''(유앙겔리온)은 본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승전보(勝戰譜) 또는 로마 황제의 출생이나, 즉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신약에서는 ''복음''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비롯한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인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뜻한다. 바울은 특히 초대교회에서 이 단어를 선교적인 의미로 사용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승리의 메시지 자체로(롬 1:15) 이해했으며, 그 메시지를 전하는 행위(빌 4:15),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를 믿도록 부르시는 분(롬 1:1-4)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복음은 맨 처음 예수께서 전파하신 기쁜 소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는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의 주체이시기도 한 것이다.
2.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1:2-11)
1절에서 마가복음의 내용의 표제(表題)를 소개한 다음, 2-3절에서 마가복음 저자는 구약성서를 인용할 때 자주 사용하는 독특한 도입-공식(導入-公式) 문구인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것과 같이"를 사용하여 구약 본문인 출 23:20, 말 3:1, 사 40:3을 합성하여 인용하고 있다. 마가복음 저자는 이러한 구약 본문들이 세례 요한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저자는 이제 세례 요한의 출현에 뒤이어 ''오실 그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은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마 3:13-17 ; 눅 3:21-22 ; 요 1:32-34). 그러나 네 복음서에는 내용상 약간의 차이점들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 3:4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려고 하시는 것을 극구 만류하고 있고, 누가 3:21에서는 상세한 설명을 피하고 단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는 것을 백성들이 세례 받는 것과 함께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요한 1: 29, 32-34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고 다만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본문상의 차이점들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각 복음서 기자들의 다양한 신학적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3. 시험 받으신 예수(1:12-13)
예수께서 시험 받으신 기사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들이 훨씬 더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마 4:1-11 ; 눅 4:1-13).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복음서를 함께 비교하여 읽어 보면서 마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 본문 중에서 마가복음에 빠진 것은 무엇인가를 구분해 내야만 한다. 마가복음은 다만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만을 보도한다.
4. 세례 요한의 잡힘과 예수의 선포(1:14-15)
이 단락에서는 요한이 잡힌 후 비로써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는(14절)과 선포내용이 소개되고 있다(15절). 갈릴리에서 행하신 많은 선포의 내용이 단지 15절의 내용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내용을 요약한 일종의 '요약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5절의 요약문은 마가복음서의 서론의 결어이기도 한다. : "하나님의 복음"의 구체적인 요점들은 다음과 같다(롬 1:1 ; 15:16 ; 살전 2:2, 8f. ; 고후 11:7 ; 15:16), "때가 찼고"(갈 4:4 ; 엡 1:9),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행전 5:31 ; 11:18 ; 20:21), "복음을 믿으라!".
Ⅱ. 예수의 전권적(全權的) 활동 - 1:16∼3:12 ①
이 단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께서는 곧 바로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들과 중풍병자와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 활동은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논쟁"을 야기 시켰습니다(2:18-3:6). 그 결과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모의를 꾸미기 시작했고, 3:7-12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에 대한 총괄적인 요약문으로서 이 단락을 종결 짓고 있습니다.
1. 네 명의 첫 제자를 부르심(1:16-20)
① 본문읽기:
16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19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② 본문해석: 예수께서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마 4:18-22 ; 눅 5:1-11). 그런데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거의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으나, 누가복음은 내용에 있어서 좀 다르게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 예수께서 밤새껏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해변가의 군중들에게 설교 하신 후, 그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져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후 베드로가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의 경우는 공관복음서와는 아주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요 1:35-42). 안드레는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고, 또한 그는 자기의 형인 베드로에게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을 하고 베드로를 예수께로 데리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이 전하는 내용 중 다른 복음서들과 다른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 차이점들을 통해서 저작 고난과 박해의 상황 속에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질문1) 이 단락에서는 예수께서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 그들의 공통된 직업, 그리고 그들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모습에 대해서 답해보시오.
힌트) 갈릴리 - 삶의 중심지 -에서 제자를 부르심
예수께서 부르신 4명의 제자들의 직업은 공통적으로 어부였고, 또한 어부로서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깁고 있었으며,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공관복음서를 볼 때, '예루살렘'은 예배와 신앙의 중심지였다면, '갈릴리'는 삶의 중심지요, 그야말로 인간생활의 적나라한 모습을 나타내 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어부로서 자신들의 삶에 충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신앙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충실한 사람 이어야 합니다.
질문2)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고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힌트) 16절을 읽어보시오.
"나를 따라 오너라"에서 "따르다"라는 말은 공관복음에서 '제자직'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것을 우선시 했습니다(막 10:21 ; 마 8:19 이하). 예수께서는 들, 산, 길, 그리고 호숫가 등 어느 곳에서나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나, 심지어 세리와 죄인들까지도 자신의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질문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힌트) 어부 - 인간 구원의 의미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설명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새로운 사명을 그들의 옛 직업의 용어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질문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1음절의 부사를 찾아보십시오.
힌트) 18절과 20절을 읽어보세요. 예수께서는 제자 부르심의 권위와 그에 대한 철저한 순종
18절의 "곧"이라는 부사는 제자들의 즉각적인 결단과 이러한 행동을 가능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또한 20절의 "곧"은 예수께서 제자를 선택하실 때에도 제자가 될 사람의 조건이나 환경을 숙고하여 부르신 것이 아니라 신적(神的)인 권위로서, 그리고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면서 부르고 계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참조. 레 2:14, 16-18, 19-20 ; 왕상 19:19-21). 예수께서 "부르시고" 또한 이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은 예수의 제자로서 어려운 결단을 하고, 즉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족과 재산과 생활 수단마저 포기하고 예수를 따르는 어려운 결단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의 제자된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따라 나선 사람임을 재확인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즉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이웃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 시민으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마치 고기를 잡듯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는 일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당신은 자신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 만일 당신 자신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 때 당신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 당신은 현재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결단하고 나섰다면, 그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2.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으심(1:21-28)
①본문읽기:
21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24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25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26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27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 28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②본문해석:
16-20절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면, 21-28절에서는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고,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시는 말씀에도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셔서 그 곳에 있는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이는 16-20절과는 다른 장소와 시간적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6-20절에서의 장소는 갈릴리 바다로 소개되었고, 또한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깁는 것을 볼 때" 아직 안식일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21절에서 장소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이고, 때는 안식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1절은 21-28절의 내용을 전개하기 위한 연결 절인 것입니다. 저자는 22절에서 예수의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음을 보도하고, 23-24절에서는 귀신들린 자와 예수의 대화를 소개하고, 25-26절에서는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깨끗하게 치유하심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27-28절은 이 단락의 종결부분으로서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치심과 귀신을 내어쫓는 능력에 대해 놀라고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결국 예수에 대한 소문이 온 갈릴리 지방에 퍼지게 되었음을 언급합니다.
질문1) 사람들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교훈을 듣고 놀랐습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까?
힌트) 22절을 읽어보세요. 예수의 말씀의 권위, 권세 -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
"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라는 표현은 이곳 이외에도 6:2 ; 7:37 ; 10:26 ; 11:18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서 저자의 의도적인 표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쳤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의 가르치심으로 인해 청중들이 놀라고 있다고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 라고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같이 율법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고 하나님과 인간을 진정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권위 있는 자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여기서 "권위"는 세상 권력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권위"는 마가복음에서는 언제나 제도화된 종교나 기존질서를 부정하는 성격, 즉 반 유대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1:22, 27 ; 2:10 ; 11:28, 29, 30).
질문3) 더러운 귀신들린 자는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 대해서 무엇이라고 질문하고 있습니까?
힌트) 예수의 귀신 쫓아내심 -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귀신을 멸하러 오심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를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우리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입니다. 이것을 좀더 풀어서 설명해 본다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우리와 당신 사이에 무슨 공통된 것이 있습니까?" 또는 "당신이 우리에게 무슨 볼 일이 있습니까?"입니다. 결국 이 말은 뒤에 계속되는 질문과 연결하여 이해해 보면 더욱 분명하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불만스러운 질문이라면,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는 예수께서 하실 직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을 괴롭히는 모든 귀신들을 멸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왜 당신은 우리를 괴롭힙니까?"는 귀신의 불평을 뜻하는 것입니다.
질문4) 귀신들린 사람은 어떻게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 있습니까?
힌트) 24절을 읽어보세요. 예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 즉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자
"나사렛 예수"는 마가복음에 4번 나타납니다(10:47 ; 14:67 ; 16:6). 아직 사람들에게 성(姓)이 없던 시기에 이름과 함께 출신지를 소개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자연스런 관행이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유대인들의 오랜 습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나사렛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언제나 경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는 역사적 예수를 지칭할 때 자연스럽게 그 용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행전 16장 ; 22:8).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더러운 귀신"과 대조적인 명칭입니다. 이 명칭은 구약에서 흔치 않은 칭호로서 하나님(사 40:25 ; 57:15), 대제사장(시 105:16), 선지자(왕하 4:9)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곳과 평행구인 눅 4:34과 요 6:69에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성령)이 함께 하는 자"를 의미하며, 이로써 예수께서는 "더러운 영"과 대조되는 분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직 예수가 메시야이신 줄을 알지 못했을 때도 귀신들은 벌써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질문5)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했을 때, 바로 앞서 예수의 교훈에 놀랐던 무리는 서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힌트) 22절과 27절을 읽어보세요.
이미 예수의 가르침에 놀란 무리는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교훈이 참으로 권위 있는 새 교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꾸짖어"는 예수께서 뒤에 귀신(3:12), 바람(4:39), 베드로(8:32f), 사람들을(9:25) 꾸짖을 때마다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께서 "사탄"을 구체적인 악령의 세력으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 이 동사는 예수께서 병을 꾸짖을 때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눅 4:39). 22절과 27절을 함께 고려해 볼 때, 여기서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뿐만 아니라 예수의 권세도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귀신에게까지도 명령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들
⊙ 마가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보도하고 있습니까?
⊙ 예수께서 귀신들인 사람을 고치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 당신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혹은 '교회'가 이 시대의 악한 세력이나 귀신들인 사람들과 사회를 효과적으로 잘 치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만일 당신이 오늘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귀신들린 것 같은 사회와 개인들을 효과적으로 치유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원인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권세' 또는 '권위'와 함께 의논해 보십시오.
3. 시몬의 장모를 고치심(1:29-31)
이 이적 기사는 복음서 전승에서 가장 짧은 설화입니다. 그러나 이 설화는 이적기사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의사인 예수, 시몬의 장모가 앓고 있다는 환자의 상태, 예수의 치유, 치유 후의 확증 등. 또한 많은 등장인물들, 특히 잘 알려진 "야고보와 요한" "시몬과 안드레의 집"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등은 이 설화가 실제로 일어났음을 입증해 주는 증거들입니다. 또한 이 기사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나와서 시몬의 집에 들어갔다고 말함으로써 같은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시몬의 장모 병을 고쳐주신 것과 여자가 예수 일행들에게 시중을 드는 것을 허락했음은 여전히 안식일 논쟁과 연관되고 있습니다.
4. 해 저물 때 병든 자들을 고치심(1:32-34)
이 기사는 전형적인 이적 기사도 아니고, 또한 3:7-12과 같은 요약문도 아니며, 또한 기억될만한 특별한 때와 장소와도 관계없이 그 당시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예수 이야기"입니다. 이제 마가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예수께서 치유하시는 대상이 '개인'에서 '군중'에 대한 치유로 확대되고 있으며, 치유하시는 장소도 어느 특정한 집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넓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5. 새벽에 한적한 곳에 가심(1:35-39)
이 단락을 읽으면 어떤 위대한 사람의 전기(傳記)를 대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시몬과 그의 일행이 등장하여 예수의 뒤를 좇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38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때, 그들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장소 두 곳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를 하신 다음, "온 갈릴리"로 장소를 옮기시고 계십니다. 이로써 21-34절까지는 가버나움에서의 예수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 반면에, 35절 이하에서는 "갈릴리 전역"에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직 이른 새벽에"와 같은 표현으로 앞 단락과 매끄럽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 등은 마가복음 저자의 편집적 기술(記述)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잘 보여준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갈릴리에는 수 천명이 거주하는 마을이 200여 곳이나 있는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이 지역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갈릴리 전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신 것은 그가 어떤 편협주의나 지역적인 차별의식을 갖지 않으셨음을 의미하고, 또한 자신의 교훈을 듣지 못한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든지 가셔서 선교하셨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6. 나병 환자를 고치심(1:40-45)
① 본문읽기:
40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로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42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께서 단단히 이르시고, 곧 그를 보내셨다. 44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나가서, 모든 일을 널리 알리고, 그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방에서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② 본문해석
이 단락은 한 나병 환자가 예수를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40-42절은 예수께서 나병 환자를 치료하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43절에서는 예수께서 그에게 침묵명령을 내리고, 44절에서는 율법에 규정한 대로 병이 나았다는 것을 확인 받기 위해 제사장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43절과 44절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45절에서는 예수께서 나병 환자에게 당부하신 두 가지 명령은 지켜지지 않고, 오히려 이 일이 더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45절은 저자가 첨가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구절도 예수께서 물러나심을 말함으로써 "메시야 비밀"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당부하신 침묵-명령은 위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공공연히 동네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은 가버나움의 사람들이 예수께서 다시 돌아와 계심을 알게 되었다는 2:1의 언급과 일치합니다.
질문1) 나병 환자가 예수께 나아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답)
나병 환자의 자세가 마 8:1에서는 "절하고"라고 표현되어 있고, 눅 5:12에서는 "엎드려"라고 표현된 것에 비해서 마가복음에서는 좀더 생생하게 "무릎을 꿇고"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가장 겸손한 태도이며 지극한 존경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애절한 간청의 자세를 잘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께 "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라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절대 신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태도와 간청을 통해서 이 나병 환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나병 환자는 자신의 모든 것은 예수께 달려있다는 것, 사람에게는 어떠한 기대도 할 수 없고 오직 예수만 의지해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나올 수 있었던 용기와 겸손과 애절한 간청의 자세가 예수께 인정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을 고쳐주실 지, 않으실 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를 고치실 수 있는 예수의 능력만은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질문2) 예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힌트)이적의 동기 - 예수의 연민과 사랑
"불쌍히 여기시고"는 몇몇 후대의 사본에서는 "노여워 하시고"로 바뀌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의 특성과 그를 고쳐주시는 결과를 볼 때,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의 "불쌍히 여기시고"가 본문에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나병 환자에게 한없는 연민과 동정심을 느끼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사랑과 자비에 의해서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적의 동기인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는 예수께서 율법을 어기고 오히려 자신이 부정케 된다는 것조차 초월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지니신 연민과 사랑의 법이 형식과 의식에 얽매인 기록된 법을 능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질문3) 예수께서 병 고침을 받은 나병 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44절)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과 율법과의 관계를 말씀해 보십시오, 과연 예수님은 율법의 폐기론자였습니까?
답)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는 나병 환자의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완벽한 응답의 선포입니다. 예수께서는 오직 사랑에 찬 말 한마디 "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는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곧 깨끗해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명령은 레위기 13-14장의 복잡한 회복 규례를 준수하라고 하시는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 이 규례를 행한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율법이 사랑의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거룩한 것으로 알고 지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마 5:17).
질문4) 고침을 받은 나병 환자는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습니다. 이 일 때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힌트)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복음전도 - 예수님의 진정한 사역
고침을 받은 나병 환자는 감사와 감격, 그리고 기쁨이 넘친 나머지 예수께서 당부하신 침묵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이 사실을 널리 전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는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한적한 곳에 계시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들을 구원하러 온 구세주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병을 고치는 이적 행위자로 알고 이적을 구경하고 그 혜택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단순한 환성과 환호를 원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진정한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도하는데 있지, 단순히 이적을 행하는데 있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