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박익수 교수
서기관들의 비난(3:22-30)
본문읽기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놓고,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버틸 수 없다. 25 또 한 가정이 갈라져서 싸우면, 그 가정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이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갈라지면, 버틸 수 없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 2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 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악한 귀신이 들렸다"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본문해석
이 단락은 전형적인 논쟁설화입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를 비난하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난에 대해 반박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질문1) 누가 예수를 비방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서기관들"이라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실 곳, 멸망할 적대적인 도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서기관들은 예수를 대적한 가장 극렬한 적대자들이라는 저자의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질문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를 어떻게 비방했습니까?
첫 번째 비난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합니다. 두 번째 비난으로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이 비난들은 백성을 미혹케 한다는 고발과도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보이신 기적의 능력이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갈등도 유발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하시며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능력(카리스마)을 지닌 자로서 주술의 혐의를 받기도 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서기관들"의 악의에 찬 시기와 질투는 예수를 통한 성령의 역사를 귀신들의 두목이 일으키는 행위로 비방하는 극단적인 잘못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질문3)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의 이러한 비난에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23절)고 반문하십니다. 여기서 사탄에 대한 두 다른 표현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 '사탄'은 "바알세불"을 가리키고, 두 번째 '사탄'은 "귀신"을 가리킵니다. 사탄인 바알세불이 사탄들인 귀신들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으로써 예수는 자신이 마귀를 쫓는 것은 사탄의 힘을 입어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것임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질문4) 23-27절이 서기관들의 비난에 대해서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반박하신 말씀이라면, 28-29절의 말씀은 그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 경고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령 훼방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용서받지 못하는 단 하나의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항상 성령을 소유하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시는 일을 비방하고 훼방하는 것은 곧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았는데, 이 사실을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비방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이 됩니다.
질문5) "성령을 훼방하는 죄"의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와 성령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마지막 구원의 방편입니다. 그런데 이 방편을 인정하지 않고 거역하는 것은 최후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 결과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의 결과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죄 사하심을 영원히 받지 못함. 영원한 죄에 처함. "영원한 죄"는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받을 무서운 심판을 강조한 말입니다. 동시에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해 구원을 주시는 예수를 훼방하는 자에게는 더 이상 구원의 길이 없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인정하고,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예수의 참된 가족(3:31-35)
본문읽기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32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3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34 그리고 주위를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본문해석
20-21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족들 역시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를 데리러 왔다고 서술합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가족들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자신의 주변에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가족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새로운 가족들이란 주위에 모여든 제자들을 의미한 것입니다.
질문6)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불렀다"고 합니다(31절). 여기서 그들이 "밖에 서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합니까?
"밖에 서서"는 문자적으로 집밖에 서 있음을 의미하지만, 신학적으로는 그들이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대열에 소속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집안에 있을 때, 예수의 가족들이 "밖"에 있었다는 것은 혈연관계라 해서 어떠한 특권적 위치를 인정받는다거나 자연스럽게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질문7) 왜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불렀습니까?
그들이 예수를 따르는 무리 가운데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소속하려는 의지도 없고, 다만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만 믿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은 여전히 이 세상의 관계, 즉 혈연관계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질문8) 그 때에 예수께서는 주위에 둘러 앉아 있는 무리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소개하시면서 혈연적 관계를 거절하십니다. 그의 주위에 둘러앉은 무리들, 즉 그의 제자들이야말로 새로운 가족이 된 것입니다. 여기의 "예수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가족들과 서기관들과 철저하게 구별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소속감을 갖지 않고 밖에 서 있는 예수의 가족들과는 달리 그들은 적극적으로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들의 소속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대적하는 자이며, 나와 함께 모이지 않는 사람은 흩으는 자이다."
질문9) 예수께서는 자신의 참된 가족은 어떠한 사람이라고 규정하십니까?
예수께서는 혈연관계의 가족 개념을 뛰어 넘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진정한 자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길은 예수께 나아오는 것 뿐이며, 이때도 아무런 제한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질문10) 누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의 말씀 선포에 순종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1:15).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뜻"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나님께 순복하셨고, 제자들이 예수의 부르심에 순복했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철저한 순종의 뜻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시키시는 예수의 부르심과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우리는 누구입니까? 뜻밖에도 "밖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듯을 행하는 자들"입니까?
씨 뿌리는 자의 비유(4:1-9)
본문읽기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매우 큰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오르셔서, 바다 쪽에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바닷가 뭍에 있었다. 2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는데,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 "잘 들어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는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5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으므로 싹은 곧 나왔지만, 6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다. 7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 그 기운을 막아버려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 9 예수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본문해석
이 비유는 본래 예수께서 제자들을 전도 여행을 보내신 후 다양한 경험을 갖고 돌아 온 자신의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주신 비유였습니다. 씨 뿌리는 자는 때가 되면 들에 나가 씨를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크게 개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받은 사람도 우쭐해서는 안되고, 그렇다고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거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한 사람도 낙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은 충성스럽게 최선을 다해서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자신의 성공과 실패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씨 뿌린 사람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더러는 좋은 땅"에서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수확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로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질문11) 예수께서 바닷가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는 것은 예수의 영향력이 이전보다 훨씬 더 증대되었음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예수의 가족들은 오해하고, 적대자들은 끊임없이 그의 선교를 훼방했지만, 오히려 예수의 선교사역은 계속해서 증대되기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업은 측근들의 오해와 적대적인 세력들에 의해 훼방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들 때문에 결코 축소되거나 중단될 수 없는 것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질문12) 큰 무리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자 모여들었을 때 예수께서는 주로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예수의 비유들은 분명하게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비록 다른 모든 자세한 설명들도 특별히 하나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비유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자리"와 의도 또한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전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나라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비유들은 아직 예수가 누구신지를 잘 모르고 있는 무리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귀있는 자'만 알아듣고 깨닫게 함으로써 특히 자신을 공격하는 적대자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방편으로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질문13) 예수께서는 3절에서 "들으라"라는 명령과 함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후에 예수께서는 무슨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까?
"들으라"는 무리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이 말씀을 듣고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전하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육신의 귀가 있다고 누구나 다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귀, 즉 신령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14) 이 비유에서 씨는 네 곳에 뿌려지고 있지만, 크게 좋은 땅과 나쁜 땅으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되는 세 곳의 나쁜 땅을 적어보고 그 땅에서는 결실을 거둘 수 없는 이유를 적어 봅시다.
우리나라에서는 밭을 일군 후에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시를 파종한 뒤에 밭을 갈았습니다. 따라서 파종한 씨앗의 일부가 마을 주민들이 걷는 길이나 경계를 나타내는 길 위에 떨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길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흙이 단단하게 굳었으므로 씨가 심겨지지 못하고, 또한 새들의 눈에 잘 뜨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어떤 씨앗들은 흙으로 얇게 덮여진 바위 위에 떨어지고, 또 어떤 씨앗들은 너무 깊이 심어져서 보이지 않거나 여름에 곳곳에 뻗어 나온 가시덤불 아래로 떨어지기도 한 것입니다. "흙이 얇은 돌밭"은 돌이 많이 섞여 있는 밭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에 흔한 크고, 넓적하고 두꺼운 바위 위에 흙이 얇게 덮여 있는 밭을 말합니다. 이 밭에 씨가 떨어지면 태양열과 수분을 쉽게 받아 싹이 빨리 나오기는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말라 죽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가시나무"는 흔히 억세고 번식력이 강한 온갖 가시 돋친 잡초들에 대한 총괄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질문15) 나쁜 땅에 뿌려진 씨앗들이 전혀 열매를 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들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좋은 땅에서 거둔 결실은 밭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씨앗 하나하나에 대한 것입니다. 씨앗 하나가 "삼십배-육십배-백배"의 결실을 거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대체로 하나의 이삭에 35개의 낟알이 달려 있지만 하나의 이삭에 백 개의 낟알을 헤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30배-60배" 다음에는 "90배"가 예상되지만, 의외로 "100배"가 되었다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이는 하나의 낟알이 인간의 기대치 이상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성장과 결실의 증가를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서의 저자는 씨앗들이 좋은 땅에만 뿌려지지 않고, 나쁜 땅, 즉 길가, 돌밭, 가시덤불 위에도 뿌려져 많은 씨앗을 상실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씨 뿌리는 자도 예상하지 못했던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복음을 증거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지시 받은 곳에 가서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면 됩니다. 자신이 씨를 뿌려야 될 때 열심히 뿌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 결과에 조바심을 갖거나 인간적 성공과 실패를 가늠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슬그머니 들어온 성공주의와 물량주의를 분명히 구분하고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들은 더욱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사명자로서 조급하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