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박익수 교수
두 번째 수난 예고 (9:30-32)
① 본문 읽기
30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이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② 본문 해석
본문은 마가 복음서에서의 두 번째 수난예고입니다.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예수께서 수난에 대해서 여러 번 말했던 것을 근거로 해서, 의도적으로 세 번 배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수난 예고에는 "다시 일으키다"와 "죽이다"라는 동사들이 나타나는데, 마가복음서 저자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도 염두에 두면서 기록했을 가능성을 높여 줍니다.
질문1) 예수는 어느 곳에서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셨습니까?
여기서 갈릴리를 지나갔다는 지리적인 언급은 예수께서 8: 27 이후에는 갈릴리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에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는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이미 예루살렘의 입성을 향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질문2)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 올랐음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이 불필요하게 갈릴리 사람들에 의해 지체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31절이 보여주듯 예루살렘 도상에서 제자들에게 한번 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만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가 아직까지는 그의 제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신 계시였습니다.
질문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 반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수난을 예고하고 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자신의 사역의 마지막 부분을 이루어야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답답하게도 제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영광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예수에 함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질문4)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예고를 듣고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예수의 반복된 수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더 이상 묻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인간적인 욕망과 기대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물론이고, 그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두 번이나 듣고도 그 뜻을 알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섬김의 교훈 (9:33-37).
① 본문 읽기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게 무슨일로 다투었느냐?"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 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② 본문 해석
본문은 수난예고와 이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를 보여준 후에, 예수께서 참으로 위대한 자는 섬김의 태도에 의해서 평가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 교훈은 열 두 제자에게 제시됨으로써 그 중요성이 더해집니다.
질문5) 제자들이 여행 중에 토론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34절).
예수 일행은 빌립보 지역에서 가버나움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는 이 곳에서 여행 중에 표출된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시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여행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의 문제로 격론을 벌였던 것입니다. 요즈음의 표현을 빌리면, 자리다툼 혹은 감투싸움을 벌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가시는데, 제자들은 그의 등뒤에서 누가 더 높으냐는 서열 문제를 가지고 다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자들과 마가 공동체의 구체적인 상황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십자가 밑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보편적인 현실을 고발하기도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버리며, 남이 알아주기보다는 외면당하고 무시 받는 가운데 잊혀진 이름으로, 혹은 역사 속에서 목숨까지도 바치면서 예수를 따라 갔는데, 오늘의 교회일각에서 "우리 교회가 더 크다" "우리 교회가 더 잘 지었다"고 자랑해대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교인의 머릿수와 헌금이 많아지고 교회의 건물이 웅장해져야 교단이나 사회에서도 행세할 수 있고, 교회 연합사업에서도 감투를 쓸 수 있으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질문6) 예수께서는 이런 몰지각한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35절)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은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시기 위한 중요한 길이었지만, 제자들은 이 절박하고도 중요한 여행의 목적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루살렘에서의 높은 자리를 꿈꾸는 어리석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는 첫째가 될 사람은 스스로 낮아져서 맨 마지막 사람이 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타이르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말 그대로 첫째가 되어야지 끝에 서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원리와는 반대되는 역설적인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직 영광의 길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영광의 길은 오직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높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섬김과 낮아짐을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써 제자들의 자리다툼을 일축하신 것입니다.
질문7) 당신은 왜 예수께서 특별히 어린이를 예로 들어서 섬김과 낮아짐에 대한 교훈을 끝맺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에 한 어린이를 가까이 불러 제자들 사이에 세우시고 안아 주셨습니다. 어린이에 대한 예수의 다정한 애정 표시는 신앙 공동체에서 보잘것없는 구성원들에 대한 태도를 나타냅니다. 아람어로 "어린이"는 "종"이란 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어린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관용과 겸손한 자세, 즉 "종"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 안의 미미한 자들도 "내 이름으로 영접하라"고 권고하는 상징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한 섬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기본 자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보잘것없는 자와 자신을 같게 여겼고, 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어린이를 예로 들어서 교훈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높아지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까지도 겸손하게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근본적인 생활원리이기도 합니다. 이는 세상의 표준과는 다른 높아짐이며,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내어놓고 다른 사람들, 곧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예수의 섬김에 대한 교훈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어떻게 다릅니까? 나는 섬김의 교훈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내가 구체적으로 남을 섬길 수 있는 예를 들어보십시오.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가 나를 위하는 자이다 (9:38-41)
① 본문 읽기
38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39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② 본문 해석
본문은 두 가지의 관점을 보여줍니다. 첫째 관점은 제자들의 무지, 곧 누가 큰 자인가를 놓고 다툴 뿐 아니라, 그들만의 특권을 자랑합니다. 둘째 관점은 낯선 귀신 축출 자들도 허용된다는 점입니다. 이어서 목마른 자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숨은 사랑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질문8) 제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낯선 자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까?(38절)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고 귀신을 축출하는 행위를 막으려 했습니다. 이유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외부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빙자하여 병을 고치는 일이 교회 공동체에게는 기득권 침해 내지는 해로운 행위로까지 보였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는 초대교회에서 벌써 예수의 이름이 주술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한편 "우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벌서 폐쇄적인 집단화 경향을 띄기 시작했으며, 후대 교회 공동체의 문제를 배태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질문9) 제자들이 취했던 태도에 대해 예수께서 권고하신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자들은 적어도 예수를 욕하거나 반대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반대해서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동조자로 간주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물 한 그릇을 주면"(41절)은 37절의 "어린아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영접함"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를 영접하듯이 그리스도교의 다른 전도자들도 인정해야 하며, 믿지는 않지만 반대하지 않는 외부인들에게까지도 교회 공동체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란 표현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자"라는 뜻으로, 사도 바울이 사용했던 표현입니다(롬 8:9 ; 고전 1:12 ; 3:23 ; 고후 10:7). 당시의 전도자들은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녀야 했고, 늘 갈증을 느꼈을 것입니다. 특히 교회가 무서운 박해를 받던 때에는 그리스도인들과 전도자들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믿는 일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제자들이 취했던 태도가 혹시 오늘 내가 취하는 태도는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이런 태도는 왜 주님의 말씀에 위배되는지를 말씀해 보십시오.
여러 교훈들 (9:42-50)
① 본문 읽기
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4절 없음)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발은 잃었으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6절 없음) 47 또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② 본문 해석
42-50절에는 여러 다른 경우에 들여주셨던 예수의 말씀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도 감싸 안고 영접할 것을 교훈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더 적극적으로 그런 이들을 실족케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으며, 자신을 실족하게 한 몸의 지체마저도 찍어 없애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지체 때문에 온 몸이 멸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들은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띄고 있지는 않으나, 둘째 수난 예고 뒤에 놓인 의도는 예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관용을 갖되 자신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의 당연한 자제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공동체를 견고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화목하라'는 가르침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질문10) 소자도 실족케 하는 자는 어떠한 경고를 받고 있습니까?
42절의 "소자 중 하나"는 원래 공동체내의 한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앙 공동체내의 “보잘것없는 자"로 해석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실족케 하다"라는 말은 4:17에서 "미혹케 하다" "넘어지게 하다"의 의미와 같습니다. 즉, 넘어지게 하거나 미혹케 하지 말라는 의미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보잘것없고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을 특별히 보호하라는 말씀입니다. 미혹케 하는 자는 중벌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게 되는데, 중벌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표현은 그 중벌의 무서움을 강조한 것입니다.
연자맷돌을 목에 매어 바다에 빠뜨리는 끔찍한 처형은 로마의 처형법이었습니다. 또한 유대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자들에게 시행한 사형법이었으며, 반란을 일으킨 갈릴리인들이 헤롯의 지지자들을 처형하는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강력하게 금하려는 의도로 표현된 것입니다.
질문11)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탐욕 때문에 범죄케 된다면 차라리 육체의 그 부분을 잘라 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이어지는 43-48절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 때문에 스스로 넘어지는 경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인체 기관, 즉 손과 발과 눈에 결부된 것은 인간의 충동이 신체기관과 결부되어 있다는 유대인의 일반적인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는 나쁜 욕망은 죄를 범하는 신체부위를 잘라내듯이 단호하게 끊어낼 것을 요청 받습니다.. 즉 몸의 한 지체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든지, 아니면 한 지체의 만족을 추구하다가 죄인으로서 영원한 형벌을 받든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질문12) 49-50절의 소금과 불의 상징은 매우 다양합니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소금은 보존하고 맛을 내고,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으며 부패를 막아준다면, 불은 소멸시키는 힘과 함께 정화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상징은 지상생활에서 제자들이 저들의 시련과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야 할 사명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시련과 희생은 먼저 저들 자신을 순화시키고, 그의 제자로서의 삶을 깨끗하고 굳게 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악을 소멸시키고 사회의 부패를 막고 정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도 부여된 것입니다.
50절에서의 소금은 그리스도인이 가진 특성으로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희생의 미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화목은 섬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맛입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권면은 33절 이하에서 논의된 제자들의 자리다툼에 대한 결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예수의 섬김에 대한 교훈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어떻게 다릅니까? 나는 섬김의 교훈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내가 구체적으로 남을 섬길 수 있는 예를 들어보십시오
♣ 제자들의 높아지려는 태도가 혹시 오늘 내가 교회 안에서 취하는 태도는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이런 태도는 왜 주님의 말씀에 위배되는지를 말씀해 보십시오.
♣ 당신은 교회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이라도 실족케 하거나 넘어지게 한 적은 없습니까? 당신의 교회 안에서 다른 교우들과 서로 화목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서로의 노력과 결심을 나누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