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박익수 교수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사역
예루살렘에 들어가심(11:1-11)
① 본문 읽기
1 그들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어오너라. 3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 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하고 말하여라." 4 그들이 가서, 새끼 나귀가 바깥 길 쪽으로 나 있는 문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었다. 5 거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새끼 나귀를 풀다니, 무슨 짓이오?" 6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7 제자들은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을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이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꺽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9 그리고 앞에서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② 본문 해석
1-11절의 본문은 베다니와 벳바게의 언급, 예수의 명령,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장면, 무리들의 환영으로 이루어집니다.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내용은 예수께서 타고 갈 짐승을 준비하는 것(1b-7)과 예루살렘 입성(8-11a)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마가복음에서는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치욕의 도시지만 꼭 들어가셔야만 했던 곳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 저자는 꾸미지 않은 소박한 문체로 간략하고 담당하게 이 장면을 기술하고 있어 우리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질문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구약의 어느 구절을 연상시킵니까? 예수께서 특별히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가랴 9:9에 따르면, 전차와 말과 활을 없애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평화를 줄 메시야, 평화의 왕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임이 예언되었습니다. 창세기 49:11은 메시야가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절에 있는 매여 있는 나귀는 바로 창세기 49장을 연상하게 해줍니다.
나귀는 말과는 대조적으로 평화시에 사용된 동물입니다. 말은 솔로몬 시대에 애굽에서 수입한 동물로서 군대용으로 사용된, 전쟁시에 필요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로서 일상생활이나 농경에 사용된 평화시의 동물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에 상징적으로 나귀를 택하신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나귀는 구약의 전통 가운데 메시야와 관련된 짐승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귀 새끼도 아직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기에 메시야를 태우기에는 적합했습니다. 특히, 종교 제의에 있어서 어느 짐승이 사용될 때, 그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은 "순결함"의 여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말씀에 따른 메시야 예언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예루살렘 입성이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 나귀가 어느 마을에 매여 있었다는 지명 이름 대신에 다만 맞은편 마을이라고만 표현합니다. 이로써 복음서 저자의 모든 관심은 '예수의 지시와 그 지시의 성취'임을 알게 됩니다.
질문2)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에서 "주"는 누구입니까? '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3절)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라는 말은 주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주'는 나귀의 주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주'의 의미는 모든 일에 대해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음을 알리는 그리스도론적 호칭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의미는 '예수께서 만물에 대해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만유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질문3) "지체 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3절) 2-3절의 말씀은 이루어졌습니까?(4-6절)
주님은 나귀를 사용한 후에 돌려보내되 '이리로 보낼 것'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나귀새끼를 돌려줄 것을 예고한 것은 남의 소유를 부당하게 갈취했다는 비난에 대한 배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길에 접해 있는 문 앞에 매여 있는 나귀를 발견하고 가져오려 했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이 제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즉각 이의를 제기합니다. 남의 소유인 나귀를 가져가려고 묶인 것을 풀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대답하자 그들은 가만히 있었고,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질문4) 제자들이 겉옷을 나귀 위에 걸쳐놓은 것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7절)
제자들은 스승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서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놓고 예수께서 그 위에 앉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즉위식을 연상케 합니다(열상 1:38-40 ; 열하 9:13 참조). 옷을 펴는 것은 그 위에 앉거나 걷는 이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질문5)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습니다. 그들은 겉옷을 벗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길에 펴기도 합니다. 당신은 예수를 환영하는 이들이 주님께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를 환영하고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겉옷을 길에 펴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꺾어서 길 위에 놓기도 했습니다. 겉옷을 펴는 것은 왕이 왕좌에 오르는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 그 계단에 옷을 펴는 행위를 연상케 합니다. 이런 풍습은 고대의 제왕의식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고대하던 메시아의 출현을 보고 즉위식을 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들에게 자유를 회복시켜 줄 메시야 왕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질문6) '호산나'는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에워 싼 무리들은 시편 118:25-26절로 그들의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히브리어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를 뜻합니다. 유대교에서 이 외침은 예배의식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특별히 유대교 절기 가운데 초막절에 백성들이 소리를 내어 외쳤던 제의적인 간청이었습니다. 후대에는 "호산나"가 예배의식이나 절기 때에 많이 사용되어서 원래의 뜻보다는 "할렐루야"와 같이 환호를 나타내는 소리로 쓰이게 되고, 기독교의 예배의식에도 자연스럽게 도입되었습니다.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시편 118:26에 언급된 것으로서,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선포한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무리들은 도성에 들어가는 예수를 이 말로써 환영했습니다.
질문7)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어느 곳을 가장 먼저 가셨습니까?
본문은 예수께 예루살렘 밖에서 무리들에게 환영 받으시고 성전에 먼저 들어가셨음을 나타내 줍니다. 이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 가를 잘 밝혀주는 구절입니다. 성전이 예루살렘 입성의 목표이며, 이는 성전 숙청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언급된 성전은 성전 건물과 대지를 포함한 성전의 전체 지역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순례자로서 성전을 돌아보신 것이 아니라 잘못되어진 성전의 모습을 관찰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나타나는 성전의 모습은 부정적인 모습이며, 개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질문8) 당신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제일 먼저 성전을 둘러보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성전을 '둘러보신 뒤에' 베다니로 내려 가셨습니다. '둘러보신 뒤에'는 마가복음에 자주 나오는 단어인데, 그저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상태를 확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전의 본래의 모습을 다시 회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알릴 때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셔서 먼저 성전의 잘못된 요소를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바른 뜻을 펼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시 오실 예수께서도 먼저 형식적이고 잘못된 교회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11:12-14)
① 본문 읽기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② 본문 해석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 짧은 기사는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활동 가운데 유일하게 기적을 행하신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이 본문은 이스라엘과 관련해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11장 전체의 구조를 보면, 성전정화 본문은 무화과나무 저주(12-14)와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본 베드로의 질문(20-22) 사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질문9)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기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베다니를 떠나시면서 시장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열매를 기대했던 예수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실망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와 그 열매에 대한 상징적인 설명은 구약성서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미 7:1은 본문과 가깝습니다. "아, 절망이다! 나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과일나무와도 같다. 이 나무에 열매도 하나 남지 않고, 이 포도나무에 포도 한 송이도 달려 있지 않으니, 아무도 나에게 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는구나, 포도 알이 하나도 없고,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무화과 열매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없어졌구나." 예언자가 환멸을 느낀 것은 경건한 자들과 성실한 자들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예수를 거절했으며, 성전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질문10) 무화과 나무는 예수의 기대에 부응했습니까?(13절)
무화과는 잎이 무성하고 좋아 보였지만 불행히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열매를 찾으시는 예수의 기대를 저버린 것입니다. 이는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예수께 열매를 제공하지 못했기에 이 나무는 영원히 열매맺지 못하리라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 저주는 베드로에게서 확인됩니다(20-22).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나무이며, 이는 버림받은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기는 무화과가 달려 있을 수는 없는 시기였고, 추수기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문제를 삼았던 것은 무화과가 덜 익고 잘 익음이 아니고, 무화과가 있고 없음을 문제시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신 무화과라도 먹기를 원했고, 이 나무는 잎사귀가 피기 전 열매를 맺어야 할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에 심판 받게 된 것입니다.
질문11) 예수는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14절)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어서 인간에게 유익을 주어야 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해서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점은 예수의 심판하시는 능력입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시는데, 이 심판은 성전 숙청과 이어집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형식만 있었지 그 내면에 믿음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유대교 신앙의 상징인 성전을 예수께서는 깨끗케 하시며, 바로 무화과나무의 저주로 그 당위성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무화과나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 내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아닙니까?
무화과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고 본다면 우리 자신도 되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웃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해서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을 때, 신앙의 형식만 있고 진정한 마음이 없을 때, 우리는 신앙인으로 존재해야 할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을 깨끗케 하심(11:15-19)
① 본문 읽기
15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지를 둘러엎으시고, 16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 17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18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는,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 하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가 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 저녁때가 되면, 예수와 제자들은 으레 성밖으로 나갔다.
② 본문 해석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의 행동이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의 생애 중 매우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았으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으며,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성전 정화 본문은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 다음에 나옵니다. 이는 마가복음을 읽을 때, 성전정화 목적과 무화과나무 저주와의 연관성을 중시해야함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대할 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성전정화 본문이 단순히 성전을 깨끗케 하시고 혁신하는 종교적 개혁 운동의 의미를 넘어서서 유대인의 성전을 뿌리째 마르게 하는 행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질문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행했던 일들을 순서대로 정리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감람산 근처의 베다니에서 직접 성전을 향해 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맨 먼저 행하신 공식적인 사역은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삶에 있어서 성전은 모든 생활의 중심에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성전의 잘못된 일들을 바로 잡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로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수많은 순례자들과 경건한 사람들은 올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희생제사에 필요한 짐승을 구해야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수요를 충족시킬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장은 원래 감람산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감람산은 넓은 의미에서 성전지역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야바가 성전구역내의 "이방인의 뜰"에다가 시장을 따로 개장해서 감람산 위의 시장과 경쟁하도록 했습니다. 특별히 큰 절기에 앞서 열린 시장이 바깥마당에서 열렸는데, 다른 마당과 성전 건물까지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 매매 활동은 성전당국에 의해서 묵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품목은 독점하기도 했습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진 상업활동의 예로써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파는 자들이 언급됩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기도해야할 거룩한 성전이 환전상과 장사꾼의 사업 터가 된 것을 용납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질문13) 16절에서 언급된 '물건'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것입니까?
누구든지 물건을 가지고 성전을 지나다니는 것을 금한 이유는 성전모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기구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제의에 필요한 '그릇'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의 기구를 나르는 것을 금했다는 것은 성전제의에 대한 폐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전에 대해서 마가복음보다 긍정적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 구절을 생략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 구절은 매우 급진적인 반성전적인 언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의 매매 행위만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성전의 제사적인 기능까지도 정지시킨 것입니다.
질문14) 예수께서는 성전이 어떤 곳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17절)
예수께서는 구약을 인용해서 성전이 어떤 곳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7절에는 성전의 밝음과 어두움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과 '강도들의 소굴'은 빛과 어두움과 같은 대조적인 공간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더 이상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성전을 점거한 자들에 의해서 강도의 소굴로 전락해 버린 성전에 대해 몹시 분노하신 것입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꾸짖음은 단순히 성전을 이용한 상인들을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향한 비난이었습니다. 이 비난은 강도 높은 것이었으며 이 비난을 받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회개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제거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18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사 56:7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만민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특정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포괄적인 느낌을 주게 됩니다.
'강도의 굴혈'은 렘 7:11을 변형해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머리된 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이며 도전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들어와 기도하는 장소를 없애고, 이방인의 뜰을 자기들만의 장사 터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극단적인 비교를 통해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비난을 받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비난에 대해서 위협을 느끼고, 음해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질문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율법학자)들이 예수를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8절)
종교적인 권위와 권세를 갖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행하신 일과 말씀을 듣게 된 후 자신들을 향한 도전임을 깨닫고 이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들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준엄한 꾸짖음을 수용한 만한 자세를 잃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오염되고 잘못되어 있음을 스스로 성찰할 만한 능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이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삼가야 합니다. 자신을 돌이켜 보고 하나님의 가르침 가운데 서지 아니하면 인간은 언제나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면을 늘 경계하셨으며, 비판하셨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즉시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에서도 군중들의 주목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올바르고 힘있는 가르침이 군중들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이 군중들은 예수를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보호해 주게 되나, 결국에는 예수를 배반하고 그를 못박으라고 소리 지르게 됩니다.
예수의 성전 정화는 그저 단순히 성전 제의를 개혁하거나 갱신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기존의 성전에서 행해진 관행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교에서 행해지던 종교행태에 대한 회개의 촉구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하나님 앞에서 돌아서야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심으로써 유대교의 배타적인 성전관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황소, 숫염소, 암소, 비둘기의 피가 아닌 기도를 통해서 제사를 받으시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지 경배를 받으십니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 가운데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복음의 문을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배려와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제 기능을 온전히 행하고 있습니까?
♣ 예수의 성전 숙청이 그의 죽으심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는데, 오늘날 교회의 잘못된 오랜 관행과 신앙을 지적하다가 이단으로 고발되기도 하는 현실의 연관성을 논의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