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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목사 (새문안교회)
비열한 욕심과 속임수로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과 권리를 다 훔치고는 격분한 형의 보복이 두려워 멀리 외삼촌 라반에게로 도망가 20년을 살며 열두 명의 자녀를 낳은 야곱은 드디어 그 지긋지긋하던 외삼촌의 굴레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귀향의 발길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20년 동안 그의 마음 한 구석을 짓눌러왔던 형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온통 뒤덮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토록 무서운 형 에서와의 대면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있는 지혜를 다 짜내어 형 에서와의 만남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보다 앞서 사신들을 형 에서에게로 보냈습니다(창32:3). 그는 사신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그의 형 에서를 만나 이같이 말하라 했습니다. 창32:4-5를 봅니다: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 야곱은 형으로부터 “은혜 받기를”, 즉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인 줄 알지만 그래도 그 과거 일에 대하여 용서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형에게 알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셨습니다.”
둘째, 야곱은 형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선물을 보내 형의 환심을 살 뿐 아니라, 다시는 과거처럼 형의 재산이나 권리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임을 안심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셨습니다.”(32:5) 야곱이 그의 사신들에게 명하기를 자신의 형에게 가서 자기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음”(32:4)을 굳이 말하라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야곱이 어디 숨어 산 것도 아니고 또 그러면서도 형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지난 20년간 형을 속이거나 형에게 어떤 손해를 입히지도 않았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셋째, 야곱은 형에게 보낼 사신들을 불러 명령하기를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이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형 에서를 “내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주의 종 야곱”이라고 낮춘 것입니다. 야곱이 형과의 사이에서 “나의 주, 당신의 종”이라 한 것은 동양적 예법치고도 놀랄만한 자기비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형 에서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래서 그의 분노와 반감을 누그러뜨려야 하는 야곱의 절박했던 심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명령을 받고 떠나갔던 사신들이 돌아와 전한 말은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고 있다”(32:6)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가타부타 말도 없이 형이 야곱에게로 오고 있으며 그것도 400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것은 야곱을 “심히 두렵고 답답하게”(32:7)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32:7). 그것은 만일 에서가 와서 공격을 하드라도 절반은 피할 수 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32:8). 야곱은 자기의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골랐습니다. 암염소 이백 마리와 숫염소가 이십 마리, 암양 이백 마리와 숫양이 이십 마리, 젖 나는 낙타 삼십 마리와 그 새끼들, 암소 사십 마리와 황소 열 마리, 암나귀 이십 마리와 그 새끼 나귀가 열 마리를 골랐습니다(32:13-15). 그 정도의 가축은 한 도시가 그 도시를 포위하고 위협하는 외국군대로 하여금 되돌아 갈 마음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재산이었습니다. 또 에서가 동원한 400명의 군사를 고용했다면 그들을 다 보상하고도 남을 만한 재물이었습니다. 전과물로서 충분하다가 여기게 할 만한 물질입니다. 게다가 각 가축마다 암컷과 수컷을 같이 보낸 것은 증산의 가능성으로 인해 선물의 가치를 한층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가축을 내놓아서라도 에서의 감정을 풀어보고자 했을 만큼(32:20) 에서에 대한 야곱의 두려움은 컸던 것입니다.
야곱은 그 선물들을 한 몫에 보내려 하지 않고 다섯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자기보다 앞서 건너가되 각 떼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하고는(32:16), 각 떼를 맡은 그의 종들에게 이르기를 만일 형 에서가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물을 때에는 모두가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라고 말하라 했습니다(32:17-20). 이것은 다섯 차례에 나누어 선물 파상공세를 폄으로써 에서의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누그러뜨릴 뿐 아니라, 만일의 경우라도 제일 뒤에 오는 야곱의 식구들이 기습을 당하지 않게 하고 공격의 충격을 완화시키며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계책이었습니다.
야곱은 예물만 다섯 차례의 떼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식구들도 앞뒤로 나누어 배치했습니다. 제일 앞에는 레아와 라헬의 두 여종과 그 여종들이 낳은 자식들을 두었고, 그 다음에는 레아와 그의 자식들을 두었으며, 그가 가장 사랑한 아내 라헬과 그 아들 요셉은 제일 뒤에 두었습니다(33:1-2). 그렇게 그의 모든 소유와 온 가족들을 차례로 다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도 야곱은 뒤에 홀로 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의 지혜로 준비할 수 있는 모든 안전장치를 다 갖추고도 불안감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찾는 야곱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 사신으로 에서에게 갔던 자들이 돌아와 그저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보고만 듣고는 심히 두렵고 답답해 우선 급한 대로 일행을 두 떼로 나눈 후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를 우리는 32:9-12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위기의 때에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대책과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고 그를 20년 동안 짓눌러 온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결국 야곱이 붙잡고 호소해야 했던 것은 하나님과 그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9),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2). 야곱이 궁극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과 약속이었습니다. 믿음의 뿌리를 찾아가는 야곱을 보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을 찾은 야곱,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게 된 야곱에게서 우리는 놀라운 고백도 듣게 됩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그 고백의 첫째는 야곱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에게 신실하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이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절절한 인식과 고백,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의지하는 믿음, 에서의 무서운 분노와 복수의 손에서 자기와 자기 가족들을 구해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시고 그와 씨름하신 일입니다.
24절에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셨음이 뒤에 드러납니다. 28을 보면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했습니다. 29절에서는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가 하나님이셨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30절도 그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은 나중에는 하나님으로 깨달은 그 정체 모를 사람과의 만남에서 치열한 한 판의 씨름을 밤새 벌입니다. 그는 그로부터 축복을 받아내지 않고는 결코 그냥 가게 하지 않겠다는 그의 단호한 의지를 밝혔고 결국 그로부터 축복을 받아내고야 맙니다. 야곱이 구한 축복이란 다름 아니라 얍복 나루를 평안히 건너갈 수 있도록 그의 지나간 죄의 용서와 보호의 약속을 얻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의미 깊은 것은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새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와 성격과 사명과 삶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가진 새 야곱이 탄생한 것입니다. 더 이상 남을 속이고 꾀를 부리며 자기의 욕심을 따라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과 자기 가족의 생명의 안위를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며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뺏어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워서, 즉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는 인간으로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뜻과 자기 방식으로 재산을 모으고 큰 집안을 이루며 번성하는 인간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하나님과 치열하게 씨름하는 인간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하나님께 얻어맞고 새벽에 절룩거리며 얍복 나루를 건너는 홀로 선 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야곱의 가장 진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겨루었던 야곱의 씨름이 그의 승리로 끝난 것인지 패배로 끝난 것인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허벅지를 얻어맞고 그를 친 이를 놓아주어야 했던 것은 그의 패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자기가 원한 축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승리라고 보아야 합니다. 얍복 나루에서의 야곱의 씨름은 그의 패배인 동시에 승리였습니다. 인간 야곱이 패배하고 하나님이 승리하는 것은 진정 야곱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의 사람답지 않았던 인간이 쓰러지고 참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의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자아가 지고 내 안에서 하나님이 승하는 것이 진정 우리 삶의 승리입니다. 하나님께 지고 그로부터 복을 받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최고최대의 승리라는 것입니다.
얍복 나루는 성경에서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그런데 매번 얍복 나루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경계선의 의미를 갖습니다. 얍복 나루는 훗날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르단 동쪽을 점령할 때의 경계선이기도 했고, 약속의 땅의 왕들에 맞선 첫 승리의 경계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얍복 나루를 건넌다는 것은 전술적 의미를 넘어서서 이스라엘에게는 어떤 정신적,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와 그 복을 누림에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야곱이 그의 많은 자녀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넌다는 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까지 확인되며 전해져온 언약이 실현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개개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나 자기 인생의 얍복 나루를 건너야 합니다. 이 인생의 얍복 나루를 건너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겨야 합니다. 28절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했지만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통과시켜 주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통과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매어달리고 그의 복주심에 의해 지나간 모든 죄와 지금의 온갖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을 확신하게 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쌓은 모든 성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처럼 절룩거리는 처량한 모습으로 철저히 내려갔을 때 비로소 얍복을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야곱의 그 곤고함에 처해 번민하는 분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얍복 나루에 서신 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때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실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모든 문제의 해결을 얻으려고 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통과시켜 주심을 얻고서 건너야만 합니다. 절룩거리는 것은 수치도 패배도 아닙니다. 그것이 기쁨이요 승리로 여겨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지고 그 앞에서 절룩거리는 인간으로 얍복 나루를 건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의 약속의 복된 삶을 누리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