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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식목사 (높은뜻숭의교회)
지금부터 약 10여 년 전에 어느 교단 소속 《교회성장연구소》에서 한국교회 교인들의 의식을 연구한 보고서를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설문조사를 통해 여러 가지 한국교인들의 생각을 정리해 놓았는데, 그 중에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의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다윗, 모세를 제치고 야곱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또한 목회자들이 설교의 주제로 삼거나 설교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인물도 역시 야곱이었음을 그 보고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야곱은 분명 매력적인 존재요, 입지적인 인물이라서 사람들이 그를 좋아할 만한 조건이 많이 있는 사람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야곱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야곱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그 보고서에는 야곱을 좋아하는 대다수의 교인들이 야곱을 좋아하는 이유로, 그에게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집요한 기도》의 자세를 꼽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자세를 스스로 물을 때, 끝까지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과, 그러기 위해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많은 신앙의 모습 중에 그것도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세도 우리의 신앙적 습관으로 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는 야곱의 모습은 하나하나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대로 투시가 되어, 그 신앙의 행위가 일상생활에 그대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모습은 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보편적인 모습을 한 번 살펴본다면, 복을 얻는데 있어서 수단과 방법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서 오는 《정의감의 결여》, 또 남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되면 그만 이라는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 신앙인의 삶 속에 이미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개교회 중심이고 개인중심에 익숙합니다.
지난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이후 우연히 기독교 TV를 시청했는데 많은 교회들의 예배 때 그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애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를 여러 사건과 사고 속에서 지켜주심을 감사하는 설교와 기도들을 심심지 않게 듣게 되었습니다. 은연 중 우리에게 있는 복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남보다는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신앙, 내 중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믿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도 기독교적 축복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그 이면에는 야곱의 삶의 모습이 그 모델로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신앙윤리는 그대로 사회윤리가 됩니다. 경제가 다 어려워 많은 회사가 문을 듣고, 그 회사원들은 직장을 잃고, 개인들이 도산하는 위기 속에서도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들은 우리가 별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있는 생각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신앙윤리에서 그런 부분들, 즉 정의와 공동체가 무너지니까 무의식중에 복의 개념들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부분들이 고정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모든 고정관념들, 즉 우리의 욕심과 하나님께 대한 의욕이 혼동되어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고라도 채워야 한다는 그 생각은, 우리가 야곱을 좋아하는 것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빼앗는 것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아내는 것, 외삼촌 라반의 양들을 점차 점차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나가는 그런 야곱의 삶의 방법이 어느새 우리의 신앙의식 가운데 아무런 문제없이 인정되어 왔다는 것이고, 문제를 느낀다 하더라도 사회 속에서 적당히 타협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보다 나은 삶을 이루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야곱은 성공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한 때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복을 얻었다는 것과,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의 삶을 동경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야곱의 일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야곱은 이 땅을 살다가 죽은 인간들 중에서 어쩌면 가장 비참한 삶을 산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이요, 처절하리 만치 불행했던 사람입니다.
좀 더 냉정하게 야곱의 삶을 살펴본다면 야곱은 정말 부끄럽고 추한 삶을 산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못된 성품을 갖고 태어납니다. 이름은 야곱이라 해서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은 데서 붙여졌습니다. 태 속에서부터 욕심이 있었던 것이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한국식 언어로 표현하지면 ‘발목을 잡았다’로 해석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남의 성공을 보지 못하는 사람,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견뎌 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입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편애가 심해서 그의 성품은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집니다. 결국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속이고 가출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후에는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못한 한(恨)을 안고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형과는 원수가 돼서 2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나그네의 처지가 되었고, 그의 살아가는 방법은 언제나 파렴치한 것으로 외삼촌의 슬픔을 통하여 자신의 재산을 불려 나갑니다(창31:1-2). 거짓으로 점철된 삶,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아가는 삶의 대표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결혼부터 시작되는 자기의 가정의 문제도 복잡합니다. 결혼식 다음날 신부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는(창29:25)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게 전개가 됩니다. 결혼식을 하고 난 뒤 첫 날 밤을 보내고서 다음 날 아침에서야 신부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행의 시작이 예고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레아를 알아 봤다는 것은 오히려 첫째 딸부터 시집보내려 했던 외삼촌의 계획을 오히려 이용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야곱은 두 명의 부인이 아닌 4명의 부인을 거느리게 되었고 이것은 곧 아내들의 싸움(창29:31-)과 자녀들의 끝없는 갈등(창37:5)으로 이어집니다. 욕심은 계속적으로 슬픔과 아픔을 잉태하게 되고 맙니다.
자식들의 싸움의 정도는 사랑하는 동생 요셉을 죽이는데 까지 이르게 되고 (죽이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야곱은 신음하게 됩니다. 또 딸 디나가 히위족속 하몬의 아들로부터 강간을 당하면서 자식에 대한 불행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34장) 누가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불행한 가정에서 편애를 받다가 가출을 하게 되고, 또 그도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 불행을 끊지 못했으며, 평생을 객지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다가 결국 객지인 애굽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히브리식 복의 개념으로 야곱을 봤을 때 그는 진정 엄청나게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의 삶은 이토록 비참한 삶이었으며 그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상처 입은 자일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의 폭만큼 세상을 보고 이해합니다. 상처가 있으면 그 상처를 토대로 세상을 보고 세상 속에서 그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상처가 크면 그 상처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것은 야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는 26층 건물입니다. 저희 집은 그 중 맨 윗 층인 26층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고층 아파트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비교적 높은 곳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축복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혜택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고층의 혜택 중에 가장 좋은 혜택은 아마 열대야가 계속되는 한여름 밤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저희 집은 26층에 살면서도 창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제 아내 때문인데, 제 아내는 26층임에도 불구하고 문을 다 걸어 잠그고서야 잠을 자는 스타일입니다. 제 아내의 지론은 도둑은 어떻게 해서든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26층에 어떻게 도둑이 들어오는가? 묻기라도 하면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올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제 아내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픈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혼 전까지 도둑을 세 번 맞은 경험이 있었고, 특히 고3 여름에는 새벽까지 공부를 하는데 책상 앞에 열어놓은 창문에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직접 보고 놀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저는 지금껏 도둑맞은 경험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대 가족 틈에서 자라났는데, 제 기억으로 제일 많았던 때는 16명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 상상을 한 번 해 보십시오. 두둑이 들어오다가 현관에 놓여 있는 32짝의 신발을 봤다고 한다면 들어오겠습니까? 그 덕에 저희 집은 단독주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에도 창문들 다 열어 넣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제가 사람을 잘 믿고 세상은, 살만하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다 자신의 경험이라는 창을 통해 사물을 바라봅니다. 사람을 보는 시각도, 세상을 보는 시각도 경험에 의해 바뀌기도 하고 결정되기도 합니다.
다시 야곱으로 돌아갑니다. 야곱은 한가지만이라도 갖고 있으면 불행하다는 인생의 불행의 요소들, 마음의 상처를 너무나 많이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참으로 “운이 없어 불행했었다” 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은 그 불행이 모두 개인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삶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욕심이 동반된 삶의 열정》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이 처절한 아픔으로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시기와 질투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출생 때부터 잘못된 사람이었으며 그의 불행은 그래서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욕심이라는 것은 어찌 야곱에게만 나타나는 것이겠습니까? 모는 사람들에게,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집 둘째 딸 서현이가 얼마 전 유치원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웠습니다. 유치원에서 공동 구매를 해서 체육시간에 가르치는데, 이미 잘 타는 아이도 있고 또 우리 아이같이 처음 배우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자연히 그 실력에 따라 반이 나뉘게 되는데, 토끼와 거북이 반으로 갈린 것입니다. 자연히 거북이 반으로 될 줄 알았는데 유치원에 갔다 온 서현이가 자신은 토끼 반이 되었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전혀 기뻐하질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원래 두 반만 만들려 하다가 한 반을 더 만들었는데, 그 반은 독수리 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배우고 난 뒤에 다시 반 개편이 있었습니다. 저희 아이도 무척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반 개편이 되는 날 우리 아이는 유치원에서 돌아 온 뒤 하루 종일 시무룩하게 지냈습니다. 반 개편을 했는데 자신이 비행기 반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집 식구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비행기 반이면 꽤 잘 타는 아이들이 들어가는 반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다 다른 반으로 갔다는 이유로 인해 시무룩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못타는 아이들은 못타는 반으로 가야지, 좀 힘들어도 비행기 반에서 잘 타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친구들이 간 반 이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딸아이가 한 말은 “로케트 반”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독수리 반이 있는 한 토끼 반에서는 만족감이 없는 것이고, 로케트 반이 있는 한 비행기 반에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원죄로 가득한 인간의 본능이요, 날 때부터 깨닫게 되는 욕심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우리에게 늘 상처로 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상처가 있습니까? 왜입니까?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돈에 깊은 상처가 있습니까? 그것은 또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돈에 대한 욕심 때문 아닙니까? 우리들이 안고 있는 아픔들, 우리가 받고 있는 많은 상처들, 혹 우리들의 지나친 열정 때문은 아닙니까? 우리들의 원초적 욕심이 우리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극단적으로 가면 불교식의 무욕으로 까지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법정 스님의 글 《무소유》에는 그것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습니다. 우리의 집착이 괴로움을 낳게 하고 우리의 욕심과 열정이 상처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그런 상처를 해결해 보려고 예수를 믿어 봅니다.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큰 상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겠다고 신앙의 길에 들어 선 우리가 그 신앙으로 인해 받아야 하는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소유하고 신앙을 간직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껏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여러분들은 적어도 신앙생활의 부분에 있어서 상처는 없으십니까? 믿음으로 우리의 상처와 삶의 무게들이 가벼워져야 하는데 교회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더 큰 짐과 상처는 아니었습니까? 심방을 다녀 보면 교회가 우리에게 준 상처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열정이 교인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목회자의 욕심이 성도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아픔을 줍니다. 누구나 한두 번쯤은 다 경험을 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적인 욕심과 열정이 주님의 복음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외면한 채 우리는 교회를 위한 열정이 곧 하나님을 향한 신앙인양 그렇게 생활해 오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카라마죠프 형제들》에 보면 주인공 이반 카라마죠프가 알료샤에게 해 주는 얘기 중 《대제사장 설화》 란 대목이 있습니다. 16세기, 그리스도교회와 대제사장 즉 대 주교의 권력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 스페인 세빌리아 대성당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대주교는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성당의 지하 감옥에 감금합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과 눈쟁을 벌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참 자유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교는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 설명하며 예수님의 잘못된 가르침을 교회가 다시 가르치고 있다고 반박합니다. 그는 교인들이 예수님이 원래 주었던 자유를 반납하고 교회와 주교에 헌신하고 있는데 이제 나타나서 그것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일침을 놓습니다. 오늘 우리 곁에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그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는 우리 주님을 어떻게 맞이할까요? 여러분,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예견하고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또, 이태리의 사상가인 움베르또 에코도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14세기 중세, 이태리 북부 어느 수도원에서 종교논쟁이 벌어집니다. 교황의 사절로 참가한 베르나르드 귀 신부와 프란시스코 수도사인 윌리엄 수도사 간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프란시스코 신부가 예수는 가난했다고 말하자 교황의 사절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런 가난한 예수를 전하기 위해 교회는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는 가난했기에 우리도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프란체스고 파를 이단으로 몰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상의 논리가 있어 왔습니다. 더 커져야 하고 더 가져야 하는 교회의 논리가 있습니다. 구원의 논리가 성장의 논리와 만나서 교회는 더 열정을 갖고 크고 화려하게 성장을 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 복음의 본질은 차츰 가리워지고 신도들은 교회에 충성하고 목회자에 헌신하다가 결국은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대게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그 상처는 어디에서 싸맴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상처에 대한 치료를 어디에서 받아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날 때만이 우리의 그 삶의 상처와 신앙의 상처가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모두 자신이 끌어안고 힘들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의 상처는 너무나 컸고, 그는 그 상처로 인해 비인격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야곱은 상처가 가장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되게 하였을까요? 왜 그렇게 성격 상 모가 많고 힘든 삶을 살아 온 야곱을 하나님은 택하여 이스라엘로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손대시면 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우리의 상처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장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정도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정으로 그는 평생 자신만을 위해 살아 왔던 사람입니다. 소위 자수성가를 했습니다. 세상 적으로는 많은 물질을 모아 넉넉하게 살아 우리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열정 때문에 가장 부끄러운 삶의 모습이 많았고 그래서 가장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다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야곱의 상처를 싸매시고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상처들이 내면에 있습니까?
정신없이 살아 왔습니다.
열정을 갖고 살아 왔습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더 많은 것을 위해 더 높은 것을 위해 살아 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힘든 경쟁 속에 승리하셨습니까?
열정으로 이뤄 놓은 결과에 만족하십니까?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기쁜 만족보다는 상처가 더 많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를 위해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봉사자들의 빈손을 채웠고
교회의 성장과 건축의 일부를 감당했습니다.
목사님의 오른팔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가 아닙니까?
이제는 진정 나에게도 얍복강가의 만남이 있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교회는 이번 수련회 때 여러분들의 그 상처를 끄집어 내 보려고 합니다. 그 상처를 모두에게 알려 식구들과 교인들이 함께 공유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게 짐으로 남아 있어 나를 누르고 있는 그 상처들, 나를 자유케 하지 못하고 무겁게 얽어매고 있는 그 상처를 그리스도 예수 앞에 갖고 나와 해결 받는 그 소중한 시간을 마련해 보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 남편에게 받은 상처, 자녀에게 받은 상처,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 목회자에게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받은 것 뿐 아니라 나의 열정으로 인해 내 스스로 받은 상처도 있으며, 또 남에게 퍼부은 상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여기에 깨끗이 차려 입고 점잖게 앉아 있지만 다 옷을 벗으면 말 못할 상처들 투성이 일 것입니다.
상처는 절대 사람이 치유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 상처를 감싸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능하고 가족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그 상처를 감당해 줄 수도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사람들의 조직이라 한다면 교회는 우리에게 치유자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더욱 상처만 줄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상처를 감싸주시는 분이시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수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의 삶의 상처들이 회복된 것 같이 우리의 열정으로 인해 우리가 받아 왔던 그 상처들은 하나님을 깊이 만날 때만이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거운 상처를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는 그 하나님을 깊이 깊이 만나는 이 번 여름 수련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약 10여 년 전에 어느 교단 소속 《교회성장연구소》에서 한국교회 교인들의 의식을 연구한 보고서를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설문조사를 통해 여러 가지 한국교인들의 생각을 정리해 놓았는데, 그 중에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의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다윗, 모세를 제치고 야곱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또한 목회자들이 설교의 주제로 삼거나 설교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인물도 역시 야곱이었음을 그 보고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야곱은 분명 매력적인 존재요, 입지적인 인물이라서 사람들이 그를 좋아할 만한 조건이 많이 있는 사람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야곱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야곱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그 보고서에는 야곱을 좋아하는 대다수의 교인들이 야곱을 좋아하는 이유로, 그에게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집요한 기도》의 자세를 꼽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자세를 스스로 물을 때, 끝까지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과, 그러기 위해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많은 신앙의 모습 중에 그것도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세도 우리의 신앙적 습관으로 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는 야곱의 모습은 하나하나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대로 투시가 되어, 그 신앙의 행위가 일상생활에 그대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모습은 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보편적인 모습을 한 번 살펴본다면, 복을 얻는데 있어서 수단과 방법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서 오는 《정의감의 결여》, 또 남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되면 그만 이라는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 신앙인의 삶 속에 이미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개교회 중심이고 개인중심에 익숙합니다.
지난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이후 우연히 기독교 TV를 시청했는데 많은 교회들의 예배 때 그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애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를 여러 사건과 사고 속에서 지켜주심을 감사하는 설교와 기도들을 심심지 않게 듣게 되었습니다. 은연 중 우리에게 있는 복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남보다는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신앙, 내 중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믿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도 기독교적 축복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그 이면에는 야곱의 삶의 모습이 그 모델로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신앙윤리는 그대로 사회윤리가 됩니다. 경제가 다 어려워 많은 회사가 문을 듣고, 그 회사원들은 직장을 잃고, 개인들이 도산하는 위기 속에서도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들은 우리가 별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있는 생각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신앙윤리에서 그런 부분들, 즉 정의와 공동체가 무너지니까 무의식중에 복의 개념들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부분들이 고정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모든 고정관념들, 즉 우리의 욕심과 하나님께 대한 의욕이 혼동되어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고라도 채워야 한다는 그 생각은, 우리가 야곱을 좋아하는 것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빼앗는 것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아내는 것, 외삼촌 라반의 양들을 점차 점차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나가는 그런 야곱의 삶의 방법이 어느새 우리의 신앙의식 가운데 아무런 문제없이 인정되어 왔다는 것이고, 문제를 느낀다 하더라도 사회 속에서 적당히 타협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보다 나은 삶을 이루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야곱은 성공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한 때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복을 얻었다는 것과,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의 삶을 동경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야곱의 일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야곱은 이 땅을 살다가 죽은 인간들 중에서 어쩌면 가장 비참한 삶을 산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이요, 처절하리 만치 불행했던 사람입니다.
좀 더 냉정하게 야곱의 삶을 살펴본다면 야곱은 정말 부끄럽고 추한 삶을 산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못된 성품을 갖고 태어납니다. 이름은 야곱이라 해서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은 데서 붙여졌습니다. 태 속에서부터 욕심이 있었던 것이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한국식 언어로 표현하지면 ‘발목을 잡았다’로 해석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남의 성공을 보지 못하는 사람,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견뎌 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입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편애가 심해서 그의 성품은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집니다. 결국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속이고 가출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후에는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못한 한(恨)을 안고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형과는 원수가 돼서 2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나그네의 처지가 되었고, 그의 살아가는 방법은 언제나 파렴치한 것으로 외삼촌의 슬픔을 통하여 자신의 재산을 불려 나갑니다(창31:1-2). 거짓으로 점철된 삶,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아가는 삶의 대표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결혼부터 시작되는 자기의 가정의 문제도 복잡합니다. 결혼식 다음날 신부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는(창29:25)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게 전개가 됩니다. 결혼식을 하고 난 뒤 첫 날 밤을 보내고서 다음 날 아침에서야 신부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행의 시작이 예고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레아를 알아 봤다는 것은 오히려 첫째 딸부터 시집보내려 했던 외삼촌의 계획을 오히려 이용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야곱은 두 명의 부인이 아닌 4명의 부인을 거느리게 되었고 이것은 곧 아내들의 싸움(창29:31-)과 자녀들의 끝없는 갈등(창37:5)으로 이어집니다. 욕심은 계속적으로 슬픔과 아픔을 잉태하게 되고 맙니다.
자식들의 싸움의 정도는 사랑하는 동생 요셉을 죽이는데 까지 이르게 되고 (죽이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야곱은 신음하게 됩니다. 또 딸 디나가 히위족속 하몬의 아들로부터 강간을 당하면서 자식에 대한 불행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34장) 누가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불행한 가정에서 편애를 받다가 가출을 하게 되고, 또 그도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 불행을 끊지 못했으며, 평생을 객지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다가 결국 객지인 애굽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히브리식 복의 개념으로 야곱을 봤을 때 그는 진정 엄청나게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의 삶은 이토록 비참한 삶이었으며 그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상처 입은 자일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의 폭만큼 세상을 보고 이해합니다. 상처가 있으면 그 상처를 토대로 세상을 보고 세상 속에서 그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상처가 크면 그 상처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것은 야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는 26층 건물입니다. 저희 집은 그 중 맨 윗 층인 26층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고층 아파트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비교적 높은 곳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축복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혜택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고층의 혜택 중에 가장 좋은 혜택은 아마 열대야가 계속되는 한여름 밤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저희 집은 26층에 살면서도 창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제 아내 때문인데, 제 아내는 26층임에도 불구하고 문을 다 걸어 잠그고서야 잠을 자는 스타일입니다. 제 아내의 지론은 도둑은 어떻게 해서든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26층에 어떻게 도둑이 들어오는가? 묻기라도 하면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올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제 아내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픈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혼 전까지 도둑을 세 번 맞은 경험이 있었고, 특히 고3 여름에는 새벽까지 공부를 하는데 책상 앞에 열어놓은 창문에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직접 보고 놀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저는 지금껏 도둑맞은 경험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대 가족 틈에서 자라났는데, 제 기억으로 제일 많았던 때는 16명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 상상을 한 번 해 보십시오. 두둑이 들어오다가 현관에 놓여 있는 32짝의 신발을 봤다고 한다면 들어오겠습니까? 그 덕에 저희 집은 단독주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에도 창문들 다 열어 넣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제가 사람을 잘 믿고 세상은, 살만하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다 자신의 경험이라는 창을 통해 사물을 바라봅니다. 사람을 보는 시각도, 세상을 보는 시각도 경험에 의해 바뀌기도 하고 결정되기도 합니다.
다시 야곱으로 돌아갑니다. 야곱은 한가지만이라도 갖고 있으면 불행하다는 인생의 불행의 요소들, 마음의 상처를 너무나 많이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참으로 “운이 없어 불행했었다” 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은 그 불행이 모두 개인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삶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욕심이 동반된 삶의 열정》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이 처절한 아픔으로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시기와 질투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출생 때부터 잘못된 사람이었으며 그의 불행은 그래서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욕심이라는 것은 어찌 야곱에게만 나타나는 것이겠습니까? 모는 사람들에게,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집 둘째 딸 서현이가 얼마 전 유치원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웠습니다. 유치원에서 공동 구매를 해서 체육시간에 가르치는데, 이미 잘 타는 아이도 있고 또 우리 아이같이 처음 배우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자연히 그 실력에 따라 반이 나뉘게 되는데, 토끼와 거북이 반으로 갈린 것입니다. 자연히 거북이 반으로 될 줄 알았는데 유치원에 갔다 온 서현이가 자신은 토끼 반이 되었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전혀 기뻐하질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원래 두 반만 만들려 하다가 한 반을 더 만들었는데, 그 반은 독수리 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배우고 난 뒤에 다시 반 개편이 있었습니다. 저희 아이도 무척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반 개편이 되는 날 우리 아이는 유치원에서 돌아 온 뒤 하루 종일 시무룩하게 지냈습니다. 반 개편을 했는데 자신이 비행기 반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집 식구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비행기 반이면 꽤 잘 타는 아이들이 들어가는 반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다 다른 반으로 갔다는 이유로 인해 시무룩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못타는 아이들은 못타는 반으로 가야지, 좀 힘들어도 비행기 반에서 잘 타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친구들이 간 반 이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딸아이가 한 말은 “로케트 반”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독수리 반이 있는 한 토끼 반에서는 만족감이 없는 것이고, 로케트 반이 있는 한 비행기 반에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원죄로 가득한 인간의 본능이요, 날 때부터 깨닫게 되는 욕심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우리에게 늘 상처로 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상처가 있습니까? 왜입니까?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돈에 깊은 상처가 있습니까? 그것은 또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돈에 대한 욕심 때문 아닙니까? 우리들이 안고 있는 아픔들, 우리가 받고 있는 많은 상처들, 혹 우리들의 지나친 열정 때문은 아닙니까? 우리들의 원초적 욕심이 우리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극단적으로 가면 불교식의 무욕으로 까지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법정 스님의 글 《무소유》에는 그것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습니다. 우리의 집착이 괴로움을 낳게 하고 우리의 욕심과 열정이 상처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그런 상처를 해결해 보려고 예수를 믿어 봅니다.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큰 상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겠다고 신앙의 길에 들어 선 우리가 그 신앙으로 인해 받아야 하는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소유하고 신앙을 간직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껏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여러분들은 적어도 신앙생활의 부분에 있어서 상처는 없으십니까? 믿음으로 우리의 상처와 삶의 무게들이 가벼워져야 하는데 교회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더 큰 짐과 상처는 아니었습니까? 심방을 다녀 보면 교회가 우리에게 준 상처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열정이 교인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목회자의 욕심이 성도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아픔을 줍니다. 누구나 한두 번쯤은 다 경험을 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적인 욕심과 열정이 주님의 복음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외면한 채 우리는 교회를 위한 열정이 곧 하나님을 향한 신앙인양 그렇게 생활해 오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카라마죠프 형제들》에 보면 주인공 이반 카라마죠프가 알료샤에게 해 주는 얘기 중 《대제사장 설화》 란 대목이 있습니다. 16세기, 그리스도교회와 대제사장 즉 대 주교의 권력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 스페인 세빌리아 대성당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대주교는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성당의 지하 감옥에 감금합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과 눈쟁을 벌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참 자유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교는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 설명하며 예수님의 잘못된 가르침을 교회가 다시 가르치고 있다고 반박합니다. 그는 교인들이 예수님이 원래 주었던 자유를 반납하고 교회와 주교에 헌신하고 있는데 이제 나타나서 그것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일침을 놓습니다. 오늘 우리 곁에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그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는 우리 주님을 어떻게 맞이할까요? 여러분,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예견하고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또, 이태리의 사상가인 움베르또 에코도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14세기 중세, 이태리 북부 어느 수도원에서 종교논쟁이 벌어집니다. 교황의 사절로 참가한 베르나르드 귀 신부와 프란시스코 수도사인 윌리엄 수도사 간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프란시스코 신부가 예수는 가난했다고 말하자 교황의 사절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런 가난한 예수를 전하기 위해 교회는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는 가난했기에 우리도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프란체스고 파를 이단으로 몰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상의 논리가 있어 왔습니다. 더 커져야 하고 더 가져야 하는 교회의 논리가 있습니다. 구원의 논리가 성장의 논리와 만나서 교회는 더 열정을 갖고 크고 화려하게 성장을 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 복음의 본질은 차츰 가리워지고 신도들은 교회에 충성하고 목회자에 헌신하다가 결국은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대게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그 상처는 어디에서 싸맴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상처에 대한 치료를 어디에서 받아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날 때만이 우리의 그 삶의 상처와 신앙의 상처가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모두 자신이 끌어안고 힘들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의 상처는 너무나 컸고, 그는 그 상처로 인해 비인격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야곱은 상처가 가장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되게 하였을까요? 왜 그렇게 성격 상 모가 많고 힘든 삶을 살아 온 야곱을 하나님은 택하여 이스라엘로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손대시면 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우리의 상처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장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정도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정으로 그는 평생 자신만을 위해 살아 왔던 사람입니다. 소위 자수성가를 했습니다. 세상 적으로는 많은 물질을 모아 넉넉하게 살아 우리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열정 때문에 가장 부끄러운 삶의 모습이 많았고 그래서 가장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다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야곱의 상처를 싸매시고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상처들이 내면에 있습니까?
정신없이 살아 왔습니다.
열정을 갖고 살아 왔습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더 많은 것을 위해 더 높은 것을 위해 살아 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힘든 경쟁 속에 승리하셨습니까?
열정으로 이뤄 놓은 결과에 만족하십니까?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기쁜 만족보다는 상처가 더 많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를 위해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봉사자들의 빈손을 채웠고
교회의 성장과 건축의 일부를 감당했습니다.
목사님의 오른팔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가 아닙니까?
이제는 진정 나에게도 얍복강가의 만남이 있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교회는 이번 수련회 때 여러분들의 그 상처를 끄집어 내 보려고 합니다. 그 상처를 모두에게 알려 식구들과 교인들이 함께 공유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게 짐으로 남아 있어 나를 누르고 있는 그 상처들, 나를 자유케 하지 못하고 무겁게 얽어매고 있는 그 상처를 그리스도 예수 앞에 갖고 나와 해결 받는 그 소중한 시간을 마련해 보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 남편에게 받은 상처, 자녀에게 받은 상처,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 목회자에게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받은 것 뿐 아니라 나의 열정으로 인해 내 스스로 받은 상처도 있으며, 또 남에게 퍼부은 상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여기에 깨끗이 차려 입고 점잖게 앉아 있지만 다 옷을 벗으면 말 못할 상처들 투성이 일 것입니다.
상처는 절대 사람이 치유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 상처를 감싸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능하고 가족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그 상처를 감당해 줄 수도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사람들의 조직이라 한다면 교회는 우리에게 치유자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더욱 상처만 줄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상처를 감싸주시는 분이시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수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의 삶의 상처들이 회복된 것 같이 우리의 열정으로 인해 우리가 받아 왔던 그 상처들은 하나님을 깊이 만날 때만이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거운 상처를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는 그 하나님을 깊이 깊이 만나는 이 번 여름 수련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