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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한인연합감리교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면서 믿고 있습니까?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느닺없이 무슨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하느냐구요? 사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우리 신앙 생활의 목적과 매우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기에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이 질문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면서 믿고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과 기대하는 바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 뜻을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도록 돕기 위해 저희 가정의 예화 하나를 들어 보겠습니다.
전에 내가 알라스카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나의 첫째 아들은 자기 아빠는 라면 밖에 끓일 수 없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집에 계시지 않고 아빠와 함께 있을 때 배가 고프면 자신이 직접 냉장고나 저장고에서 무엇을 찾아 먹었습니다. 냉장고나 저장고에 먹을 만한 것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경우에만 아빠에게 배가 고프다고 호소했습니다.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가 아빠로부터 원했던 음식은 항상 라면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빠는 밖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부엌 일은 도무지 할 줄 모르고, 만들 수 있는 음식이란 라면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들 녀석이 아빠로부터 원했던 것은 “Quality Time”이 전부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Quality Time” 이란 “아빠가 자기와 함께 놀아주는 시간” 입니다. 목회하느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아빠로부터 기대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아빠와 함께 즐기는 시간이었지요. 그래서 아들 녀석은 배가 고파서 라면을 얻어먹으려 할 때 미안한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라면 요리사예요 (Dad! You’re the best cook of ramyun).”
하지만 개척하러 토랜스에 내려 온 이후 아들 녀석이 아빠에게 요구하는 음식의 가지 수가 무척 많아졌습니다. 엄마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주로 아빠와 함께 있게 되었고, 아빠로부터 라면 이외의 음식을 얻어 먹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아빠로부터 얻어 먹은 음식이란 아직까지는 짜파게티, 콘독(Corn Dog), 크램 차우더 등의 인스탄스 음식입니다. 아마도 앞으로 아들 녀석은 아빠가 어떤 음식을 만들 수 있는지 깨달아가면 갈수록 아빠에게 요구하는 음식 가지 수도 늘어갈 것입니다.
나는 지난 주 설교를 통해 아브람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은 축복의 언약을 이행해 주시는 분”이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축복 약속을 이행해 주실 하나님을 믿었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했던 것은 10년 전에 자신에게 약속하셨던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이상 그 이하의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아브람에게 있어서 과거에 약속했던 축복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기대하는 기대 이상의 존재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상 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람아, 축복의 언약 성취를 기다림이 길어진다고 해서 두려워 하거나 낙심하지 말라. 내 자신이야 말로 네게 가장 필요한 보호막이요 네 인생 여정 동안 네가 기대할 가장 큰 삶의 목적이니라.” 물론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는 도무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주고 계시는 말씀의 뜻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은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그의 확실한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6절).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람에게 “삶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심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아브람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바는 “축복이란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를 고대하는 것을 허락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분을 믿는 믿음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옳게 이해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이시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허락해 주길 원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낳아주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해서 아버지를 온전히 알고, 아버지께서 자식에게 무엇을 뜻하고 계시며, 무엇을 해주길 원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알아가는 깊이에 따라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어떤 분이시고, 아버지가 자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기 원하시며, 또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줄 더욱 깊게 깨달아 가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람이 옳게 이해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척 중요했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말씀을 옳게 이해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아브람에게 중요했듯이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지극히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혹시 아브람처럼 “하나님께서 나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시라구요? 도대체 그게 나와 무슨 상관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 내게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그토록 갈망하고 있는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라고 대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원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이 늘어가고 믿음이 높아지지만, 원하는 기도의 응답이 더디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나 믿음이 시들어져 버립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줄어갑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헌신이 사라져 갑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부류에 속한 신앙인들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믿음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표류하는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축복을 부어주실 분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자신을 통해 무엇을 해주길 원하신다는 것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23-27에 보면, 어느날 저녁 늦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산으로부터 내리닥친 바람이 잔잔하던 호수를 요동시키면서 파도가 높게 일게 되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가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당황했지만 바로 그러한 시간에도 예수께서는 평온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다급하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4절).
자, 우리는 바로 이 장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이 무엇인지 찾아보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보면, 제자들은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서워 하고 있습니다. 왜? 물론 거세게 일고 있던 폭풍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폭풍으로 인해 배가 뒤집어질 것같아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요인은 자신들과 함께 타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자신들을 지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분이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고백과 믿음이 일치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은 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도 평온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왜? 어떻게? 그것은 예수께서는 자신의 주 되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계셨고 그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자신을 깨우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꾸짖음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6절). 예수께서 제자들이 두려워 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지적하고 계십니까? “너희의 믿음이 적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적다”는 말은 “그들이 주라고 부르고 있는 예수님 자신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주라고 부르고 있는 예수께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그들의 방패 되시는 주님이 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한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국이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놓여 있을 때에도 김활란 여사께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서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일제의 압박에 시달려 고통 당하고 있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김활란 여사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바를 시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는 훗날에 이동훈 교수에 의해 곡이 붙여져 우리 신앙인들에게 알려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찬송가 461장에 실려 있는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라는 찬송입니다.
1.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
2.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고 그 놀란 물 큰 파도 일때에 저 뱃사공 어쩔줄 몰라하니 아 가련하구나 가련하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 되시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 주겠다” (공동 번역).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브람아! 네가 어떤 위험에 빠진다 해도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생의 여정 가운데 풍랑이 거세게 일 때, 삶이 힘들어 낙심될 때, “나는 너의 방패이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믿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비록 삶의 풍랑이 일더라도, 낙심 되더라도, 희망이 없어보이더라도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풍랑 가운데서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의 식민지 가운데서도 “나는 너의 방패이시다”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어잡고 있었던 김활란 여사는 다음과 같은 소망의 싯구를 계속 써내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절망 중에 그 사공 떨면서도 한줄기의 밝은 빛 보고서 배 안에도 하나님 계심 믿고 오 기도 올린다 기도 올린다
4. 아버지여 이 죄인 굽어보사 성난 풍랑 잔잔케 하시고 이 불쌍한 인생을 살리소서 오 우리 하나님 우리 하나님
5. 모진 바람 또 험한 큰 물결이 제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 손 그 노를 저으시니 오 맑은 바다라 맑은 바다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낙심하고 두려워 떨고 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을 항상 기억하기 바랍니다. “아브람아, 나는 너의 방패이시다” 하시는 말씀을.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올바른 이해를 갖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믿음)을 더욱 깊게 갖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초지일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자세로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인생의 모진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큰 믿음의 사람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면서 믿고 있습니까?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느닺없이 무슨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하느냐구요? 사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우리 신앙 생활의 목적과 매우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기에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이 질문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면서 믿고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과 기대하는 바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 뜻을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도록 돕기 위해 저희 가정의 예화 하나를 들어 보겠습니다.
전에 내가 알라스카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나의 첫째 아들은 자기 아빠는 라면 밖에 끓일 수 없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집에 계시지 않고 아빠와 함께 있을 때 배가 고프면 자신이 직접 냉장고나 저장고에서 무엇을 찾아 먹었습니다. 냉장고나 저장고에 먹을 만한 것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경우에만 아빠에게 배가 고프다고 호소했습니다.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가 아빠로부터 원했던 음식은 항상 라면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빠는 밖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부엌 일은 도무지 할 줄 모르고, 만들 수 있는 음식이란 라면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들 녀석이 아빠로부터 원했던 것은 “Quality Time”이 전부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Quality Time” 이란 “아빠가 자기와 함께 놀아주는 시간” 입니다. 목회하느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아빠로부터 기대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아빠와 함께 즐기는 시간이었지요. 그래서 아들 녀석은 배가 고파서 라면을 얻어먹으려 할 때 미안한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라면 요리사예요 (Dad! You’re the best cook of ramyun).”
하지만 개척하러 토랜스에 내려 온 이후 아들 녀석이 아빠에게 요구하는 음식의 가지 수가 무척 많아졌습니다. 엄마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주로 아빠와 함께 있게 되었고, 아빠로부터 라면 이외의 음식을 얻어 먹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아빠로부터 얻어 먹은 음식이란 아직까지는 짜파게티, 콘독(Corn Dog), 크램 차우더 등의 인스탄스 음식입니다. 아마도 앞으로 아들 녀석은 아빠가 어떤 음식을 만들 수 있는지 깨달아가면 갈수록 아빠에게 요구하는 음식 가지 수도 늘어갈 것입니다.
나는 지난 주 설교를 통해 아브람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은 축복의 언약을 이행해 주시는 분”이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축복 약속을 이행해 주실 하나님을 믿었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했던 것은 10년 전에 자신에게 약속하셨던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이상 그 이하의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아브람에게 있어서 과거에 약속했던 축복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기대하는 기대 이상의 존재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상 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람아, 축복의 언약 성취를 기다림이 길어진다고 해서 두려워 하거나 낙심하지 말라. 내 자신이야 말로 네게 가장 필요한 보호막이요 네 인생 여정 동안 네가 기대할 가장 큰 삶의 목적이니라.” 물론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는 도무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주고 계시는 말씀의 뜻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은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그의 확실한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6절).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람에게 “삶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심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아브람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바는 “축복이란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를 고대하는 것을 허락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분을 믿는 믿음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옳게 이해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이시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허락해 주길 원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낳아주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해서 아버지를 온전히 알고, 아버지께서 자식에게 무엇을 뜻하고 계시며, 무엇을 해주길 원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알아가는 깊이에 따라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어떤 분이시고, 아버지가 자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기 원하시며, 또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줄 더욱 깊게 깨달아 가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람이 옳게 이해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척 중요했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말씀을 옳게 이해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아브람에게 중요했듯이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지극히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혹시 아브람처럼 “하나님께서 나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시라구요? 도대체 그게 나와 무슨 상관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 내게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그토록 갈망하고 있는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라고 대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원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이 늘어가고 믿음이 높아지지만, 원하는 기도의 응답이 더디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나 믿음이 시들어져 버립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줄어갑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헌신이 사라져 갑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부류에 속한 신앙인들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믿음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표류하는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축복을 부어주실 분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자신을 통해 무엇을 해주길 원하신다는 것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23-27에 보면, 어느날 저녁 늦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산으로부터 내리닥친 바람이 잔잔하던 호수를 요동시키면서 파도가 높게 일게 되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가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당황했지만 바로 그러한 시간에도 예수께서는 평온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다급하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4절).
자, 우리는 바로 이 장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이 무엇인지 찾아보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보면, 제자들은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서워 하고 있습니다. 왜? 물론 거세게 일고 있던 폭풍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폭풍으로 인해 배가 뒤집어질 것같아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요인은 자신들과 함께 타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자신들을 지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분이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고백과 믿음이 일치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은 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도 평온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왜? 어떻게? 그것은 예수께서는 자신의 주 되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계셨고 그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자신을 깨우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꾸짖음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6절). 예수께서 제자들이 두려워 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지적하고 계십니까? “너희의 믿음이 적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적다”는 말은 “그들이 주라고 부르고 있는 예수님 자신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주라고 부르고 있는 예수께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그들의 방패 되시는 주님이 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한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국이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놓여 있을 때에도 김활란 여사께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서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일제의 압박에 시달려 고통 당하고 있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김활란 여사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바를 시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는 훗날에 이동훈 교수에 의해 곡이 붙여져 우리 신앙인들에게 알려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찬송가 461장에 실려 있는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라는 찬송입니다.
1.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
2.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고 그 놀란 물 큰 파도 일때에 저 뱃사공 어쩔줄 몰라하니 아 가련하구나 가련하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 되시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 주겠다” (공동 번역).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브람아! 네가 어떤 위험에 빠진다 해도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생의 여정 가운데 풍랑이 거세게 일 때, 삶이 힘들어 낙심될 때, “나는 너의 방패이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믿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비록 삶의 풍랑이 일더라도, 낙심 되더라도, 희망이 없어보이더라도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풍랑 가운데서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의 식민지 가운데서도 “나는 너의 방패이시다”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어잡고 있었던 김활란 여사는 다음과 같은 소망의 싯구를 계속 써내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절망 중에 그 사공 떨면서도 한줄기의 밝은 빛 보고서 배 안에도 하나님 계심 믿고 오 기도 올린다 기도 올린다
4. 아버지여 이 죄인 굽어보사 성난 풍랑 잔잔케 하시고 이 불쌍한 인생을 살리소서 오 우리 하나님 우리 하나님
5. 모진 바람 또 험한 큰 물결이 제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 손 그 노를 저으시니 오 맑은 바다라 맑은 바다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낙심하고 두려워 떨고 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을 항상 기억하기 바랍니다. “아브람아, 나는 너의 방패이시다” 하시는 말씀을.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올바른 이해를 갖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믿음)을 더욱 깊게 갖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초지일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자세로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인생의 모진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큰 믿음의 사람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