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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목사 (순복음인천교회)
오늘 이 시간의 말씀 제목은 "아담의 실패."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아담의 실패", "아담의 실패." 네, 모든 사람이 제일 원하는 것이 뭐냐? "성공"입니다. 일반 서점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 뭘까? 성공에 대한 책, 리더쉽에 대한 책,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가'', 그 책이 제일 많이 팔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다 성공을 소망합니다. 어떤 경우는 성공하기 위해서 온갖 종교를 다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교회에도 가고, 성공하기 위해서 절간에도 가고, 성공하기 위해서 천주교에도 가고. 누가 그럴까? 선거철이 되면 교회에도 가고, 성당에도 가고, 절에도 가는 후보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공이 곧 생존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고 실패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 성경에는 성공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인물들의 실패와 실수가 적나라하게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많은 실패자들이 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사람 몇 명만 꼽으면, 성경에서 실패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이 다 실패할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믿음의 조상, 축복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어떻게 실패하겠어요?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입니다. 너무너무 멋있게, 준수하게 생겼습니다. 잘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기도하고 뽑은 제자 중의 한 사람,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인 가룟 유다가 실패했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실패한 사람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실수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기억할 것은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이, 성공한 인물들이 실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실수가 없는 지도자, 실수 없이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 이후로. 보세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실수했습니다. 얼마나 실수했느냐?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게 되었는데, 잠시 기근이 왔다고 그래서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자기 마누라를 팔아먹었습니다. 큰 실수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성군 다윗왕도 실수를 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실패자 중의 최고의 실패자는 누굴까? 바로 인류의 대표가 되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본래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이 세상에 살면서 아담처럼 복 받은 사람이 없어요. 아담은 눈을 딱 뜨니까 흠~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생명나무 과일이 꽉 찼어요. 먹고 싶으면 먹고, 놀고 싶으면 놀고 마음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아담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다 있는데 아담에게 뭐가 없습니까? 아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인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갔습니다. 아담은 무슨 복도 받았습니까? 마누라 복도 받았습니다. 아담이 얼마나 좋았던지 아담이 뭐라고 말합니까? "히익~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히익~ 이는 살 중의 살이라." 물론 거기에 성경에는 "히익~", 이것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저 그냥 기록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렇게 감탄하면서 이야기한 아담이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국어책 읽는 것처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랬겠습니까? 너무너무 좋은 현상이니까 "히익~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히익~ 이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했던, 부요했던, 넉넉했던, 최고의 복을 받은 아담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붸겨났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영이 죽었습니다. 생활이 저주받았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이 죽었고, 생활이 저주받았고, 육신이 유한한 생명이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후손들이 모두가 다 저주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아담은 최고 축복의 자리에서 최악의 실패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 성공받았느냐? 아니야. 실패도 한다. 그러면 성공했다고 해서 계속 성공을 유지하느냐? 아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까딱 실수하면, 까딱 잘못하면, 우리는 다시 실패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실패는 우리의 실패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의 실패는 나의 실패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벗어나야 할 실패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벗어나야 할 실패의 자리가 뭔가? 무엇을 버려야 될 것인가?
이 시간, 아담의 실패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아니하고, 우리 모두가 다 믿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성공을 누리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첫째, 탐욕
첫째로, 아담의 실패는 뭘까요? "탐욕"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5절로 6절을 보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5-6). 누가 미혹했습니까? 뱀이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그랬습니다(창 2:17). 그런데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언감생심 어떻게 피조물인 아담이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가려고 그런 탐욕을 부립니까? 그러므로 탐욕은 없는 사람이 갖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이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복된 존재로 창조하시고 필요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탐욕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만족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누리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마음 속에 감사가 없고 만족이 없으면 뭐가 나오느냐? 탐욕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도 감사치 않음이 죄의 뿌리가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우리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사단은 감사가 없는 자리에 찾아와서 탐욕과 불평을 가져다 줍니다. 원수 마귀는 어찌 하든지 감사 못하는 사람만 찾아옵니다. 그래서 탐욕을 가져다 줍니다. 불평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원수 마귀가 들어오지 못해요. 빙빙 돌다가 매일매일 감사, 아침에도 감사, 낮에도 감사, 일할 때도 감사, 좋을 때도 감사, 어려울 때도 감사, 감사, 감사, 감사하면, 원수마귀가 찾으러 왔다가 "기회 좀 보고 들어가야 될텐데", 그러다가 어지러워서, 나가 떨어져서,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떠날 것입니다.
아담처럼 모든 것을 소유해도 감사치 않으면 탐욕에 빠질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없어도 사도 바울처럼 감사의 삶을 살면, 어떤 역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삶은 어떠한 삶이냐? 현실에 감사, 감옥 안에 들어가 있을 때조차도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감사하라. 감사하라. 감사하라."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사단은 지금도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탐욕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선악과가 아니라 뭘 통해서? 부를 통해서. 명예를 통해서. 권세를 통해서. 학벌을 통해서 유혹합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지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기도를 줄이고 출세와 성공을 위해 일하라고 유혹합니다. 기도의 은혜로 살지 않는다면 자기 힘으로 사는 세상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끊임없이 유혹하는 세상 탐욕을 버리고, 기도에 대한 욕심, 이웃 사랑에 대한 욕심, 복음 전하는 욕심, 구역 부흥의 욕심, 감사의 욕심, 이런 욕심은 모두가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욕심이에요. 거룩한 욕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두 번째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왜 실패했냐고요? 하나님의 명령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축복입니다. 지금 당장 내 마음에 안들어도, 내가 지금 손해 보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명령하시고, 사랑하시니까 권면하시고, 사랑하시니까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실패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단과 사람의 말을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전략을 파악해야 합니다. 사단보다도 지혜로워야 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사단은 말씀을 조금 바꾸거나, 일부만 인용해서 우리를 현혹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절로 하반절에 보니까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우리 하나님은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빼고 동산의 모든 나무를 너희가 다 임의로 먹되, 모든 실과를 다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뱀이 와서 뭐라고 말합니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습니다. 거짓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혹이 올 때, 하와처럼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 패배하게 됩니다. 그 말은 들은 하와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창세기 3장 3절에 보니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아닙니다. 먹지 말라고 했지, 만지지 말라는 말은 안했습니다. "죽으리라,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했지, 죽을까 하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모든 이단 중에 말씀 없는 이단은 없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자기의 주장대로, 자기의 유익대로, 자기의 방법대로, 살짝살짝 바꿔서 전하는 것이 이단입니다. 성경 없는 이단은 없어요. 다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의 뭐가 달라요? 해석이 달라요. 주장이 달라요.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이라도 변치 않고, 말씀대로 읽고, 말씀대로 듣고,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이라도 변함 없이 믿는 자, 변함 없이 지키는 자가 성공하는 인생이 되는 것 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없이 이단도 안나오고, 말씀 없이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대로 믿으면, 말씀대로 지키면 분명히 성공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시편 1절, 2절, 3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그랬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처럼? 노아처럼 120년 동안 말씀을 먹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처럼 인생을 다 할 때까지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이 말씀을 따르고, 이 말씀을 전하고, 이 말씀을 위해서, 말씀을 위해서 생명을 거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매를 맞으셔도, 그렇게 가시관을 쓰셔도, 그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셔도, 그 많은 고통을 다 견디시면서도,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우리 예수님은 그 말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냐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의 하나님은 3일만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승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곧 다시 오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땅 안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경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가 할 일이 뭐냐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걸면 실패하지 않아요. 성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생명을 거는 우리 모두가 되면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놀라운 축복을 받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7절을 보니까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그랬습니다. 노아에게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노아는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동안? 120년을 친척이 손가락질하고, 친구가 바보라고 말하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120년 동안 흔들리지 아니하고, 120년 동안 그 많은 돈을 들여서 그 고생을 하면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홍수가 나서, 땅이 터지고 하늘이 터져서 온 세상을 다 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았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지금 세상에는 죄악의 홍수, 질병의 홍수, 저주의 홍수, 가난의 홍수, 미움의 홍수, 모든 어려운 홍수들이 막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아처럼 말씀으로 무장하고 살아가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살게 됩니다. 말씀을 읽다가 복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읽다가 사업의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면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믿고 인내해야 해요. 노아 말고도 아브라함도 얼마만큼 인내했습니까? 25년. 요셉도 13년,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반을 일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30년 동안을 기다리셨습니다. 세상 사람이 비웃고 욕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당장은 손해보고 어려운 것 같지만, 말씀대로 살면 절대로 실패보지 않고, 말씀대로 살면 절대로 손해보지 않고 모두가 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8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아멘. 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메시아, 우리의 신랑 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자기의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전가
세 번째, "자기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전가." 아담은 왜 실패했냐고요? 자기의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전가했기 때문입니다. 비겁하죠? 아주 제일 비겁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집안에 남편과 아내, 아들 세 식구가 살아나갑니다. 이제 아내는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해요. 그 아들과 아버지가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탁에 있던 컵을 아들이 잘못 건드려서 떨어뜨렸어요. 물이 엎지러졌어요. 그 순간 아버지는 아들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찰싹 때렸습니다. 뭐라 그랬게요? "좀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하니?"라고 그랬습니다. 며칠이 지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물컵을 쳐서 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들은 재빨리 아버지를 쳐다봅니다. 그때 아버지는 뭐라고 말했게요? 어머니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물 컵을 걸리적거리는데 놓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 자신을 정당화했습니다. 이런 가정은 과연 행복할까? 아담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아닌가? 우리는 아닌가?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핑계대고 전가하는, 그런 삶을 내가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스스로 책임지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은 가정도 실패, 사업도 실패, 교회도 실패, 인생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담은 모든 잘못을 아내와 그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보니까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을 원망해요. 하나님께서 하와를 주실 때는 하와가 너무너무 아름답게 보이니까 "히익~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나니까 누구에게 핑계를 댑니까? "하나님이 주셨잖아요, 그 여자를."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아니라 "그 여자"입니다. "그 여자." "그 여자"는 뭡니까?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이었어요. 아담은 남편으로서의 책임과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특권을 게을리 하였습니까? 남편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특권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담은 다 포기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땅과 바다와 하늘의 모든 것을 다스릴 통치권을 아담은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것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뱀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아내에게 돌린 것입니다. 뱀의 이름을 누가 지어줬습니까? 아담이 지어줬습니다. 아담의 통치권 아래에 뱀이 있습니다. 뱀을 통치할 수 있습니다. "뱀아, 유혹하지 말아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책임 전가는 자신의 특권과 책임을 모두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책임과 권세를 포기하는 자는 성공의 영광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권세를, 자기의 책임을 포기하는 사람은 누구도 성공할 수 없으며, 성공의 맛을 볼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분쟁과 다툼은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책임은 철저히 물으면서도 자신의 책임은 적당히 감당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고 그럽니다. 첫 아담은 책임을 전가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일부러 또 책임을 졌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를 진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책임을 지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첫 아담을 따라가지 말고 마지막 아담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첫 아담으로 말미암아 실패한 인생들이 마지막 아담 안에서, 예수 안에서 살고, 풍성히 누리고, 성공할 수 있으며, 영혼이 잘 될 수 있으며, 범사가 형통할 수 있으며, 강건할 수 있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된 우리들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영적 책임을 맡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넷째,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회개가 없다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아담이 왜 실패했냐고요?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회개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복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 때, 아담이 이랬어야 해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아내의 잘못이 아닙니다. 내 잘못입니다. 아내에게 말씀을 가르치지 못한 내 잘못인 것입니다. 아내가 잘못했을 때, 회개하라고 하지 못한 내가 잘못입니다. 내가 죄를 졌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하고 무릎을 꿇었다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참으십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고 먹보다 검을지라도 흰눈처럼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변명했습니다. 숨었습니다. 감추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 보다 더 큰 죄가 뭐냐? 회개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보다,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더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잠언서 28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신 것은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징벌하려고 했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영원히 땅에 멸망 받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은 회복시켜 주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회복하는 자요, 성공하는 자인 것 아시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뭐냐? 잘못의 차이가 아니라, 회개의 차이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보다 더 잘못을 한지 몰라요. 다윗이 사울보다 더 한지 몰라요. 그런데 가룟 유다와 사울왕은 잘못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사울은 범죄했을 때, 온갖 이유를 들어서 변명하고 자신을 합리화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지적 받으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고 자복하고 울면서 밤이 맞도록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 있나요? "의인이 없나니 아무도 없다. 하나도 없다"(롬 3:10)고 그랬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된 존재로 지으시고, 성공자로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실패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공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오늘 이 시간의 말씀 제목은 "아담의 실패."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아담의 실패", "아담의 실패." 네, 모든 사람이 제일 원하는 것이 뭐냐? "성공"입니다. 일반 서점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 뭘까? 성공에 대한 책, 리더쉽에 대한 책,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가'', 그 책이 제일 많이 팔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다 성공을 소망합니다. 어떤 경우는 성공하기 위해서 온갖 종교를 다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교회에도 가고, 성공하기 위해서 절간에도 가고, 성공하기 위해서 천주교에도 가고. 누가 그럴까? 선거철이 되면 교회에도 가고, 성당에도 가고, 절에도 가는 후보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공이 곧 생존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고 실패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 성경에는 성공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인물들의 실패와 실수가 적나라하게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많은 실패자들이 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사람 몇 명만 꼽으면, 성경에서 실패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이 다 실패할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믿음의 조상, 축복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어떻게 실패하겠어요?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입니다. 너무너무 멋있게, 준수하게 생겼습니다. 잘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기도하고 뽑은 제자 중의 한 사람,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인 가룟 유다가 실패했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실패한 사람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실수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기억할 것은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이, 성공한 인물들이 실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실수가 없는 지도자, 실수 없이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 이후로. 보세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실수했습니다. 얼마나 실수했느냐?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게 되었는데, 잠시 기근이 왔다고 그래서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자기 마누라를 팔아먹었습니다. 큰 실수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성군 다윗왕도 실수를 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실패자 중의 최고의 실패자는 누굴까? 바로 인류의 대표가 되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본래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이 세상에 살면서 아담처럼 복 받은 사람이 없어요. 아담은 눈을 딱 뜨니까 흠~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생명나무 과일이 꽉 찼어요. 먹고 싶으면 먹고, 놀고 싶으면 놀고 마음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아담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다 있는데 아담에게 뭐가 없습니까? 아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인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갔습니다. 아담은 무슨 복도 받았습니까? 마누라 복도 받았습니다. 아담이 얼마나 좋았던지 아담이 뭐라고 말합니까? "히익~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히익~ 이는 살 중의 살이라." 물론 거기에 성경에는 "히익~", 이것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저 그냥 기록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렇게 감탄하면서 이야기한 아담이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국어책 읽는 것처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랬겠습니까? 너무너무 좋은 현상이니까 "히익~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히익~ 이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했던, 부요했던, 넉넉했던, 최고의 복을 받은 아담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붸겨났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영이 죽었습니다. 생활이 저주받았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이 죽었고, 생활이 저주받았고, 육신이 유한한 생명이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후손들이 모두가 다 저주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아담은 최고 축복의 자리에서 최악의 실패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 성공받았느냐? 아니야. 실패도 한다. 그러면 성공했다고 해서 계속 성공을 유지하느냐? 아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까딱 실수하면, 까딱 잘못하면, 우리는 다시 실패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실패는 우리의 실패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의 실패는 나의 실패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벗어나야 할 실패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벗어나야 할 실패의 자리가 뭔가? 무엇을 버려야 될 것인가?
이 시간, 아담의 실패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아니하고, 우리 모두가 다 믿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성공을 누리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첫째, 탐욕
첫째로, 아담의 실패는 뭘까요? "탐욕"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5절로 6절을 보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5-6). 누가 미혹했습니까? 뱀이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그랬습니다(창 2:17). 그런데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언감생심 어떻게 피조물인 아담이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가려고 그런 탐욕을 부립니까? 그러므로 탐욕은 없는 사람이 갖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이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복된 존재로 창조하시고 필요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탐욕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만족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누리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마음 속에 감사가 없고 만족이 없으면 뭐가 나오느냐? 탐욕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도 감사치 않음이 죄의 뿌리가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우리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사단은 감사가 없는 자리에 찾아와서 탐욕과 불평을 가져다 줍니다. 원수 마귀는 어찌 하든지 감사 못하는 사람만 찾아옵니다. 그래서 탐욕을 가져다 줍니다. 불평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원수 마귀가 들어오지 못해요. 빙빙 돌다가 매일매일 감사, 아침에도 감사, 낮에도 감사, 일할 때도 감사, 좋을 때도 감사, 어려울 때도 감사, 감사, 감사, 감사하면, 원수마귀가 찾으러 왔다가 "기회 좀 보고 들어가야 될텐데", 그러다가 어지러워서, 나가 떨어져서,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떠날 것입니다.
아담처럼 모든 것을 소유해도 감사치 않으면 탐욕에 빠질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없어도 사도 바울처럼 감사의 삶을 살면, 어떤 역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삶은 어떠한 삶이냐? 현실에 감사, 감옥 안에 들어가 있을 때조차도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감사하라. 감사하라. 감사하라."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사단은 지금도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탐욕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선악과가 아니라 뭘 통해서? 부를 통해서. 명예를 통해서. 권세를 통해서. 학벌을 통해서 유혹합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지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기도를 줄이고 출세와 성공을 위해 일하라고 유혹합니다. 기도의 은혜로 살지 않는다면 자기 힘으로 사는 세상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끊임없이 유혹하는 세상 탐욕을 버리고, 기도에 대한 욕심, 이웃 사랑에 대한 욕심, 복음 전하는 욕심, 구역 부흥의 욕심, 감사의 욕심, 이런 욕심은 모두가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욕심이에요. 거룩한 욕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두 번째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왜 실패했냐고요? 하나님의 명령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축복입니다. 지금 당장 내 마음에 안들어도, 내가 지금 손해 보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명령하시고, 사랑하시니까 권면하시고, 사랑하시니까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실패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단과 사람의 말을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전략을 파악해야 합니다. 사단보다도 지혜로워야 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사단은 말씀을 조금 바꾸거나, 일부만 인용해서 우리를 현혹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절로 하반절에 보니까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우리 하나님은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빼고 동산의 모든 나무를 너희가 다 임의로 먹되, 모든 실과를 다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뱀이 와서 뭐라고 말합니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습니다. 거짓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혹이 올 때, 하와처럼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 패배하게 됩니다. 그 말은 들은 하와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창세기 3장 3절에 보니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아닙니다. 먹지 말라고 했지, 만지지 말라는 말은 안했습니다. "죽으리라,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했지, 죽을까 하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모든 이단 중에 말씀 없는 이단은 없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자기의 주장대로, 자기의 유익대로, 자기의 방법대로, 살짝살짝 바꿔서 전하는 것이 이단입니다. 성경 없는 이단은 없어요. 다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의 뭐가 달라요? 해석이 달라요. 주장이 달라요.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이라도 변치 않고, 말씀대로 읽고, 말씀대로 듣고,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이라도 변함 없이 믿는 자, 변함 없이 지키는 자가 성공하는 인생이 되는 것 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없이 이단도 안나오고, 말씀 없이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대로 믿으면, 말씀대로 지키면 분명히 성공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시편 1절, 2절, 3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그랬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처럼? 노아처럼 120년 동안 말씀을 먹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처럼 인생을 다 할 때까지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이 말씀을 따르고, 이 말씀을 전하고, 이 말씀을 위해서, 말씀을 위해서 생명을 거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매를 맞으셔도, 그렇게 가시관을 쓰셔도, 그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셔도, 그 많은 고통을 다 견디시면서도,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우리 예수님은 그 말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냐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의 하나님은 3일만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승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곧 다시 오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땅 안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경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가 할 일이 뭐냐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걸면 실패하지 않아요. 성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생명을 거는 우리 모두가 되면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놀라운 축복을 받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7절을 보니까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그랬습니다. 노아에게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노아는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동안? 120년을 친척이 손가락질하고, 친구가 바보라고 말하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120년 동안 흔들리지 아니하고, 120년 동안 그 많은 돈을 들여서 그 고생을 하면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홍수가 나서, 땅이 터지고 하늘이 터져서 온 세상을 다 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았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지금 세상에는 죄악의 홍수, 질병의 홍수, 저주의 홍수, 가난의 홍수, 미움의 홍수, 모든 어려운 홍수들이 막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아처럼 말씀으로 무장하고 살아가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살게 됩니다. 말씀을 읽다가 복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읽다가 사업의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면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믿고 인내해야 해요. 노아 말고도 아브라함도 얼마만큼 인내했습니까? 25년. 요셉도 13년,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반을 일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30년 동안을 기다리셨습니다. 세상 사람이 비웃고 욕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당장은 손해보고 어려운 것 같지만, 말씀대로 살면 절대로 실패보지 않고, 말씀대로 살면 절대로 손해보지 않고 모두가 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8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아멘. 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메시아, 우리의 신랑 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자기의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전가
세 번째, "자기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전가." 아담은 왜 실패했냐고요? 자기의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전가했기 때문입니다. 비겁하죠? 아주 제일 비겁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집안에 남편과 아내, 아들 세 식구가 살아나갑니다. 이제 아내는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해요. 그 아들과 아버지가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탁에 있던 컵을 아들이 잘못 건드려서 떨어뜨렸어요. 물이 엎지러졌어요. 그 순간 아버지는 아들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찰싹 때렸습니다. 뭐라 그랬게요? "좀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하니?"라고 그랬습니다. 며칠이 지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물컵을 쳐서 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들은 재빨리 아버지를 쳐다봅니다. 그때 아버지는 뭐라고 말했게요? 어머니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물 컵을 걸리적거리는데 놓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 자신을 정당화했습니다. 이런 가정은 과연 행복할까? 아담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아닌가? 우리는 아닌가?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핑계대고 전가하는, 그런 삶을 내가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스스로 책임지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은 가정도 실패, 사업도 실패, 교회도 실패, 인생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담은 모든 잘못을 아내와 그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보니까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을 원망해요. 하나님께서 하와를 주실 때는 하와가 너무너무 아름답게 보이니까 "히익~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나니까 누구에게 핑계를 댑니까? "하나님이 주셨잖아요, 그 여자를."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아니라 "그 여자"입니다. "그 여자." "그 여자"는 뭡니까?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이었어요. 아담은 남편으로서의 책임과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특권을 게을리 하였습니까? 남편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특권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담은 다 포기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땅과 바다와 하늘의 모든 것을 다스릴 통치권을 아담은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것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뱀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아내에게 돌린 것입니다. 뱀의 이름을 누가 지어줬습니까? 아담이 지어줬습니다. 아담의 통치권 아래에 뱀이 있습니다. 뱀을 통치할 수 있습니다. "뱀아, 유혹하지 말아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책임 전가는 자신의 특권과 책임을 모두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책임과 권세를 포기하는 자는 성공의 영광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권세를, 자기의 책임을 포기하는 사람은 누구도 성공할 수 없으며, 성공의 맛을 볼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분쟁과 다툼은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책임은 철저히 물으면서도 자신의 책임은 적당히 감당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고 그럽니다. 첫 아담은 책임을 전가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일부러 또 책임을 졌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를 진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책임을 지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첫 아담을 따라가지 말고 마지막 아담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첫 아담으로 말미암아 실패한 인생들이 마지막 아담 안에서, 예수 안에서 살고, 풍성히 누리고, 성공할 수 있으며, 영혼이 잘 될 수 있으며, 범사가 형통할 수 있으며, 강건할 수 있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된 우리들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영적 책임을 맡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넷째,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회개가 없다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아담이 왜 실패했냐고요?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회개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복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 때, 아담이 이랬어야 해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아내의 잘못이 아닙니다. 내 잘못입니다. 아내에게 말씀을 가르치지 못한 내 잘못인 것입니다. 아내가 잘못했을 때, 회개하라고 하지 못한 내가 잘못입니다. 내가 죄를 졌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하고 무릎을 꿇었다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참으십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고 먹보다 검을지라도 흰눈처럼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변명했습니다. 숨었습니다. 감추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 보다 더 큰 죄가 뭐냐? 회개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보다,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더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잠언서 28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신 것은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징벌하려고 했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영원히 땅에 멸망 받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은 회복시켜 주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회복하는 자요, 성공하는 자인 것 아시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뭐냐? 잘못의 차이가 아니라, 회개의 차이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보다 더 잘못을 한지 몰라요. 다윗이 사울보다 더 한지 몰라요. 그런데 가룟 유다와 사울왕은 잘못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사울은 범죄했을 때, 온갖 이유를 들어서 변명하고 자신을 합리화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지적 받으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고 자복하고 울면서 밤이 맞도록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 있나요? "의인이 없나니 아무도 없다. 하나도 없다"(롬 3:10)고 그랬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된 존재로 지으시고, 성공자로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실패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공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