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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1-24
다 같은 살색입니다!
예전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살색, 흰색, 검정색 크레파스가 부채꼴을 이루며 나란히 놓여있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다 같은 살색입니다!”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캠페인 광고였습니다. 피부색이 검정색이건 흰색이건 황색이건 다 같은 살색이고 인류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도 옳은 관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건강하건 그렇지 못하건,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옳지 못한 판단을 하게 되고, 그 판단에 근거해 옳지 못한 일을 당당하게 행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국가에서 수백년동안 지속되어온 노예제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른 판단을 가지고 바른 일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다가도 곧 변질되기 쉬운 것이 바로 사람이 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믿고 율법을 잘 준수하기 위해 시작했던 안식일, 십일조, 금식기도 등의 일이 나중에는 예수님께 호된 책망을 듣는 인간의 명예와 권세를 위한 교만으로 변질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는 일과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회의 일들을 잘 살펴보고 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바른 방법으로 실행하고 있는가를 늘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신앙생활의 올바른 판단 기준을 예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바른 신앙생활의 전제로 “먼저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신앙생활의 판단 기준은 “외모가 아니라 공의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잘 듣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바른 신앙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초막절이 가까운지라(1-5)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사건, 즉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유대 지역에서의 사역을 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이 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1). 그들의 율법에는 ‘살인하지 말라’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은 이미 마음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살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왔습니다(2).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은 유월절(무교절), 오순절(맥추절, 칠칠절)과 함께 유대인의 3대 명절 중 하나로서 추수한 이후의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절기였습니다. 따라서 이 날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추수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했으며, 12세 이상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전세계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드는 절기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이 시점에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한 가지 일을 간청합니다. 3-4절. “3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무엇을 간청했습니까? “형님, 유대로 가시죠!” 한마디로 갈릴리 촌을 떠나 수도 예루살렘에 가서 출세하라는 것입니다. 명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고, 그때 권력의 핵심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낸다면 분명히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까, 지금 올라가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이런 간청이었습니다. 형님! 베데스다의 병자도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형님을 따르고 있으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영광을 얻으시죠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겉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말입니다. 동생들이 형님께 이제는 큰물에서 놀자는 겁니다. 이런 시골에 파묻혀 있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어,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한마디로 형님, 이제 대통령에 출마하셔도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밀어드리겠습니다. 우리도 형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유대인들이 형님을 죽이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우리가 있으니, 형님이 기적을 행하시기만 하면 오히려 전세는 역전될 것입니다! 형님! 가시죠!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 사랑스럽고 충성스러운 동생들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5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과 함께 큰 일을 해보겠다고 하는 형제들인데, 실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란게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무슨 기업으로 알고 확장해 가고, 세상 앞에 자기 교회 이름을 내려하고, 예수님 이름을 등에 업고 출세하려는 사람들과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입으로는 예수님, 예수님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요, 예수님이 안 계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형제들은 예수님과 피를 나눈 사이입니다. 자기들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육적으로만 알았지 영적인 것에는 전혀 무지했습니다. 혈통으로는 거듭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 믿는 것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형님으로 둔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결국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형제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로 본 것이 아니라, 자기 형으로써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형을 이용해 덕을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형제라 할지라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구주와 죄인’의 관계가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주로 모시어 들이는 것이 바로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형제들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잘 믿고, 어머니가 잘 믿고, 내가 모태신앙인 것하고 거듭나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나 사이에 ‘구주와 죄인’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과연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분인가?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시며, 나는 죄를 용서 받아야 할 죄인인가를 분명히 하시고, 생명의 구주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심으로,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과 생명의 구주와 죄인의 관계를 맺으신 분들도 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해서 그 후로 죄를 전혀 안짓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날마다 십자가 아래 나아가 하루 하루의 죄를 고백하고 심령을 새롭게 하여 주님과의 나와의 관계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 이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6-9)
이렇게 형제들은 예수님께 유대로 올라가자고 독촉했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6절.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내 때’는 곧 십자가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때를 기다리셨고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 일하셨지, 사람의 충동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10-13)
그러나 10절을 보면 예수님은 비밀리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10). 형제들에게는 예수님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따돌리셨지만, 백성들을 위해서 올라가신 것입니다. 비록 살기가 등등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며,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섬기고자 하시는 참목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수근거림이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유대인, 즉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찾고 있었습니다. 또한 무리들 중에 예수님을 좋은 사람이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무리를 미혹하게 하는 사람이라며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12).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 즉 산헤드린 공의회를 두려워하여 드러나게 믿음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13). 이것이 예루살렘의 분위기였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초막절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잡아 죽일까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은 여기에 찬성과 반대의 양파로 나뉘어 서로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신 예수님(14-18)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명절 중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직접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를 정면돌파하신 것입니다. 한두 명에게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드러내 놓고 가르치셨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더 지혜롭고 용기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유대인들의 판단은 무엇입니까? 15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히브리어를 아냐 모르냐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는 유대인들이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처럼 정규 교육 코스를 밟은 사람도 아니고, 갈릴리 촌 출신인 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며 놀란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자기들처럼 자격증도 없이 왜 여기에서 소란을 떠느냐며 비꼬는 말입니다. 인간적인 편견과 아집으로 예수님을 판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람들이 타인을 판단하고 교회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12절에도 보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외적으로 보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이리 저리 끌고 다니는 사람이다’, 이렇게 외모로 판단합니다. 15절에서도, 이 사람은 우리들처럼 정규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갈릴리 촌 구석에서 놀던 사람인데 예루살렘이 어디라고 감히 여기 와서 글을 아는 체 하느냐? 이렇게 외모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모로 판단하다보니 예수님의 가르침이 놀랍고 기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마음으로 영접하여 순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인간적인 생각, 사상, 판단이 꽉 차 있으면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말씀을 들어도 비판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17절.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인지, 아니면 배우지 못한 인간 예수님의 말인지 분명히 분별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무디는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가장 좋은 학교이다’라고 했습니다. 무디의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T와 P라는 영어 글자가 있었답니다. 이는 성경 말씀을 읽다가 그것이 정말 그런가 의심되면 그 말씀대로 살아보는 테스트를 해보고, 정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면 증명되었다( proved)는 표시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체험해 봐야 진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눈으로만 읽어서는 안됩니다. 삶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옥같은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보지 않고서는 그 말씀의 진면목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보지 않고서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해보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과의 싸움을 말씀을 붙들고 싸워본 사람만이 말씀의 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적 싸움도 말씀을 붙들어야 영적 성장의 교훈의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무작정 기도가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체험되어진 말씀이 비로소 ‘내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자 하는 분명한 영적인 소원과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한 말씀을 붙들고, 그 한 말씀에 내 인생을 걸 때 바로 그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란 사실이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지켜 순종하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를 정죄하는 죽음의 화살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겸손히 서서, 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며, 진리를 삶으로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19-24)
이제 19-24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왜 자신을 죽이려하는지 그들의 동기를 파헤치시며 바른 판단을 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아무도 모세가 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할례는 난지 8일만에 행하여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그 날이 안식일과 겹치게 되면 안식일 일지라도 할례를 행했습니다(22). 이렇게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하물며 38년 된 병자를 고침으로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은 얼마나 잘한 일입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일을 하신 예수님을 정죄하며 노여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23).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과연 올바른 신앙의 판단기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24절.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예수님이 선한 일을 많이 한다, 사람들을 미혹한다, 잘 가르친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 등의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의의 판단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마음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실수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어떤 성도의 봉사와 섬김의 모습, 예배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유교적이며 불교적인 요소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체면과 공덕과 열심히 불공 쌓듯이 하면 신앙이 좋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복음이 아니라 외모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봉사보다 마음에 참된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항상 바쁘고 분주한 일로 인해 비로 교회에 모습은 자주 드러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한 영혼을 위해 눈물로 중보기도하는 사람을 귀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의 말, 평가, 또는 나에게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어떤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떨까? 하나님께서 칭찬하실까? 하나님께서 바르다, 잘했다고 하실까? 이것이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내 자신의 동기와 목적이 순수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울어지고 삐뚤어진 판단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진실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의 판단입니다.
둘째는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것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나, 또는 사회의 통념,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비추어 이것이 옳은가 아닌가를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판단할 때 예수님의 겉모습, 학력과 출신 등을 기준 잣대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타이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학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문도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배척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진리의 말씀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권위주의에 기초해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권위주의가 아주 팽배해 있습니다. 학력, 경력, 출신에 의해서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런 배경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를 판단할 때도 그 사람의 학력, 경력, 직업, 출신 등에 의해서 판단합니다. 참으로 순수하지 못한 판단입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에 기초해 판단하고, 말씀에 기초해 믿고 순종하는가를 기준으로 판단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판단 기준이 어떠하든 우리의 판단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판단 기준이 분명할 때 하나님 역사가 순수해지고 말씀에 힘이 있고 강력한 회개와 함께 교회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가지는 그 사람이나 그의 행동, 또는 교회가 하고자 하는 일이 현재 가고 있는 성령의 방향에 합하는가, 아니면 거스르는가를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성령님께 민감하여 예민하게 지켜보고 기도하며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의 열심만을 볼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열심히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성령님께로부터 나온 것인가를 잘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결 론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겉만 보고 판단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예수님과 구주와 죄인의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나와 타인과 교회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공의의 판단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깨어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우리는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판단을 내렸으면 우리는 바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행함으로 진리인 것이 판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끄는 자,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허락하시고, 진리의 말씀 위에선 바른 판단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가 생명력 있게 우리 위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김성기 목사 설교 중에서
다 같은 살색입니다!
예전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살색, 흰색, 검정색 크레파스가 부채꼴을 이루며 나란히 놓여있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다 같은 살색입니다!”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캠페인 광고였습니다. 피부색이 검정색이건 흰색이건 황색이건 다 같은 살색이고 인류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도 옳은 관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건강하건 그렇지 못하건,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옳지 못한 판단을 하게 되고, 그 판단에 근거해 옳지 못한 일을 당당하게 행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국가에서 수백년동안 지속되어온 노예제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른 판단을 가지고 바른 일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다가도 곧 변질되기 쉬운 것이 바로 사람이 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믿고 율법을 잘 준수하기 위해 시작했던 안식일, 십일조, 금식기도 등의 일이 나중에는 예수님께 호된 책망을 듣는 인간의 명예와 권세를 위한 교만으로 변질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는 일과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회의 일들을 잘 살펴보고 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바른 방법으로 실행하고 있는가를 늘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신앙생활의 올바른 판단 기준을 예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바른 신앙생활의 전제로 “먼저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신앙생활의 판단 기준은 “외모가 아니라 공의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잘 듣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바른 신앙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초막절이 가까운지라(1-5)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사건, 즉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유대 지역에서의 사역을 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이 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1). 그들의 율법에는 ‘살인하지 말라’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은 이미 마음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살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왔습니다(2).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은 유월절(무교절), 오순절(맥추절, 칠칠절)과 함께 유대인의 3대 명절 중 하나로서 추수한 이후의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절기였습니다. 따라서 이 날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추수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했으며, 12세 이상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전세계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드는 절기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이 시점에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한 가지 일을 간청합니다. 3-4절. “3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무엇을 간청했습니까? “형님, 유대로 가시죠!” 한마디로 갈릴리 촌을 떠나 수도 예루살렘에 가서 출세하라는 것입니다. 명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고, 그때 권력의 핵심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낸다면 분명히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까, 지금 올라가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이런 간청이었습니다. 형님! 베데스다의 병자도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형님을 따르고 있으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영광을 얻으시죠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겉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말입니다. 동생들이 형님께 이제는 큰물에서 놀자는 겁니다. 이런 시골에 파묻혀 있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어,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한마디로 형님, 이제 대통령에 출마하셔도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밀어드리겠습니다. 우리도 형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유대인들이 형님을 죽이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우리가 있으니, 형님이 기적을 행하시기만 하면 오히려 전세는 역전될 것입니다! 형님! 가시죠!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 사랑스럽고 충성스러운 동생들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5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과 함께 큰 일을 해보겠다고 하는 형제들인데, 실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란게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무슨 기업으로 알고 확장해 가고, 세상 앞에 자기 교회 이름을 내려하고, 예수님 이름을 등에 업고 출세하려는 사람들과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입으로는 예수님, 예수님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요, 예수님이 안 계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형제들은 예수님과 피를 나눈 사이입니다. 자기들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육적으로만 알았지 영적인 것에는 전혀 무지했습니다. 혈통으로는 거듭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 믿는 것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형님으로 둔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결국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형제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로 본 것이 아니라, 자기 형으로써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형을 이용해 덕을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형제라 할지라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구주와 죄인’의 관계가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주로 모시어 들이는 것이 바로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형제들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잘 믿고, 어머니가 잘 믿고, 내가 모태신앙인 것하고 거듭나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나 사이에 ‘구주와 죄인’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과연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분인가?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시며, 나는 죄를 용서 받아야 할 죄인인가를 분명히 하시고, 생명의 구주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심으로,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과 생명의 구주와 죄인의 관계를 맺으신 분들도 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해서 그 후로 죄를 전혀 안짓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날마다 십자가 아래 나아가 하루 하루의 죄를 고백하고 심령을 새롭게 하여 주님과의 나와의 관계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 이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6-9)
이렇게 형제들은 예수님께 유대로 올라가자고 독촉했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6절.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내 때’는 곧 십자가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때를 기다리셨고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 일하셨지, 사람의 충동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10-13)
그러나 10절을 보면 예수님은 비밀리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10). 형제들에게는 예수님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따돌리셨지만, 백성들을 위해서 올라가신 것입니다. 비록 살기가 등등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며,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섬기고자 하시는 참목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수근거림이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유대인, 즉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찾고 있었습니다. 또한 무리들 중에 예수님을 좋은 사람이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무리를 미혹하게 하는 사람이라며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12).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 즉 산헤드린 공의회를 두려워하여 드러나게 믿음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13). 이것이 예루살렘의 분위기였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초막절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잡아 죽일까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은 여기에 찬성과 반대의 양파로 나뉘어 서로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신 예수님(14-18)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명절 중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직접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를 정면돌파하신 것입니다. 한두 명에게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드러내 놓고 가르치셨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더 지혜롭고 용기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유대인들의 판단은 무엇입니까? 15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히브리어를 아냐 모르냐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는 유대인들이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처럼 정규 교육 코스를 밟은 사람도 아니고, 갈릴리 촌 출신인 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며 놀란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자기들처럼 자격증도 없이 왜 여기에서 소란을 떠느냐며 비꼬는 말입니다. 인간적인 편견과 아집으로 예수님을 판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람들이 타인을 판단하고 교회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12절에도 보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외적으로 보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이리 저리 끌고 다니는 사람이다’, 이렇게 외모로 판단합니다. 15절에서도, 이 사람은 우리들처럼 정규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갈릴리 촌 구석에서 놀던 사람인데 예루살렘이 어디라고 감히 여기 와서 글을 아는 체 하느냐? 이렇게 외모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모로 판단하다보니 예수님의 가르침이 놀랍고 기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마음으로 영접하여 순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인간적인 생각, 사상, 판단이 꽉 차 있으면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말씀을 들어도 비판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17절.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인지, 아니면 배우지 못한 인간 예수님의 말인지 분명히 분별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무디는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가장 좋은 학교이다’라고 했습니다. 무디의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T와 P라는 영어 글자가 있었답니다. 이는 성경 말씀을 읽다가 그것이 정말 그런가 의심되면 그 말씀대로 살아보는 테스트를 해보고, 정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면 증명되었다( proved)는 표시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체험해 봐야 진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눈으로만 읽어서는 안됩니다. 삶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옥같은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보지 않고서는 그 말씀의 진면목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보지 않고서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해보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과의 싸움을 말씀을 붙들고 싸워본 사람만이 말씀의 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적 싸움도 말씀을 붙들어야 영적 성장의 교훈의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무작정 기도가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체험되어진 말씀이 비로소 ‘내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자 하는 분명한 영적인 소원과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한 말씀을 붙들고, 그 한 말씀에 내 인생을 걸 때 바로 그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란 사실이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지켜 순종하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를 정죄하는 죽음의 화살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겸손히 서서, 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며, 진리를 삶으로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19-24)
이제 19-24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왜 자신을 죽이려하는지 그들의 동기를 파헤치시며 바른 판단을 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아무도 모세가 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할례는 난지 8일만에 행하여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그 날이 안식일과 겹치게 되면 안식일 일지라도 할례를 행했습니다(22). 이렇게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하물며 38년 된 병자를 고침으로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은 얼마나 잘한 일입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일을 하신 예수님을 정죄하며 노여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23).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과연 올바른 신앙의 판단기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24절.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예수님이 선한 일을 많이 한다, 사람들을 미혹한다, 잘 가르친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 등의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의의 판단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마음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실수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어떤 성도의 봉사와 섬김의 모습, 예배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유교적이며 불교적인 요소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체면과 공덕과 열심히 불공 쌓듯이 하면 신앙이 좋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복음이 아니라 외모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봉사보다 마음에 참된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항상 바쁘고 분주한 일로 인해 비로 교회에 모습은 자주 드러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한 영혼을 위해 눈물로 중보기도하는 사람을 귀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의 말, 평가, 또는 나에게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어떤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떨까? 하나님께서 칭찬하실까? 하나님께서 바르다, 잘했다고 하실까? 이것이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내 자신의 동기와 목적이 순수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울어지고 삐뚤어진 판단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진실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의 판단입니다.
둘째는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것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나, 또는 사회의 통념,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비추어 이것이 옳은가 아닌가를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판단할 때 예수님의 겉모습, 학력과 출신 등을 기준 잣대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타이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학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문도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배척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진리의 말씀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권위주의에 기초해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권위주의가 아주 팽배해 있습니다. 학력, 경력, 출신에 의해서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런 배경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를 판단할 때도 그 사람의 학력, 경력, 직업, 출신 등에 의해서 판단합니다. 참으로 순수하지 못한 판단입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에 기초해 판단하고, 말씀에 기초해 믿고 순종하는가를 기준으로 판단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판단 기준이 어떠하든 우리의 판단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판단 기준이 분명할 때 하나님 역사가 순수해지고 말씀에 힘이 있고 강력한 회개와 함께 교회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가지는 그 사람이나 그의 행동, 또는 교회가 하고자 하는 일이 현재 가고 있는 성령의 방향에 합하는가, 아니면 거스르는가를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성령님께 민감하여 예민하게 지켜보고 기도하며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의 열심만을 볼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열심히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성령님께로부터 나온 것인가를 잘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결 론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겉만 보고 판단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예수님과 구주와 죄인의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나와 타인과 교회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공의의 판단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깨어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우리는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판단을 내렸으면 우리는 바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행함으로 진리인 것이 판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끄는 자,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허락하시고, 진리의 말씀 위에선 바른 판단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가 생명력 있게 우리 위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김성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