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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7:4-6
우리집 식탁에는 늘 오뚜기 하나가 있습니다.
넘어뜨리려 해도 기어코 일어나는 오뚜기말입니다. 쳐보고 던져보아도 결국 일어나는 오뚜기 앞에 두 손을 다 들고 말았습니다. 상처를 받아도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만약 누군가가 저와 여러분에게 삶에 이유를 묻는다면 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질문 앞에 내가 살아야 할 이류를 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삶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땅에 하늘에 육에 영적부분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기십니까? 너희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한다 하심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성경에서는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삶의 이유가 육에 있는가 영에 있는 가에 대해서는 성경은 이에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요6: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딤전 4:8절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합니다. 삶의 이유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사실 정답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요구는 무엇이고 나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반응을 보이며 살아야 하는 가를 성도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 안에서 갈등구조를 형성하곤 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도 나을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신앙이 기복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물은 그 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열매가 머리인 것 같지만 뿌리가 머리입니다. 그래서 나무는 가지가 꺽이면 살지만 뿌리가 상하면 살지 못합니다. 식물은 그 머리가 아래를 향하여 있기에 땅이 심겨져 땅이 원하는 대로 만 살면 됩니다. 이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심겨져 땅이 공급하는 것만 받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동물은 그 머리가 옆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물로 하여금 환경에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본능을 주셨습니다. 동물은 사람처럼 학습하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본능에 의해 살아갑니다. 일본 고베의 대 지진 사건 때 동물은 본능에 의해 내일을 감지하고 피신했다합니다. 위기도 압니다. 내일 일은 똑똑한 사람만 모릅니다. 사람은 그 머리가 위를 향해 있습니다. 사람은 하늘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머리가 위를 향해 있습니다. 사람은 하늘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만약 하나님을 놓아버리면 온전한 사람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생기의 공급을 얻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영이신 하나님이 처음부터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느끼며 사십니까? 신앙생활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요? 교회에 처음 나온 날입니까? 세례 받는 날입니까? 직분을 받는 날입니까? 언제입니까 신앙생활의 시작은 내가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나온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이 시작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깨닫게 되면 어머니 모태 때 더 나아가 창세전에 계획된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를 못하면 벌이 꽃을 찾느냐 아니면 꽃이 벌을 유혹하느냐 하는식으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답이 없는 논리에 허우적거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벌이나 꽃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내 안에 삶의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느날부터인가 내 안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보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가 지금은 주님의 원하심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의외로 신앙생활하면서 한번도 주님의 원하심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인간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목사를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시장에서 장사를 해도 그 일은 성직입니다. 진정 거듭난 성도는 주님의 원하심의 소리를 들으며 주님의 원하심에 반응을 보이며 삶을 엮어가니 여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로마서는 죄로부터 자유한 사람들에게 권고합니다. 율법에서 완전히 자유하여 율법과 상관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자유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앞에서 죽어 율법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신앙의 만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어 술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담배를 피우니 안 피우니 하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이제 신분이 바뀌었으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에게 맺어야 하는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을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나는 무엇을 안 할 것인가에 매이는 것보다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생명이 있음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늘나라를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율법앞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면 율법앞에서 상관없는자가 되었다면 여기에서 자기가 목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자유하게 되었습니까? 나 편하게 살자고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5절에 우리가 육신에 있을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여 우리는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합니다. 율법에 메인 삶을 살았습니다. 율법의 요구앞에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그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죄의 정욕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4:7절에서 가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사람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있습니까? 만약에 인간에게 선의 가능성이 있었다면 예수는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어 출세의 문제 성공의 문제가 늘 따라다니지만 결국 죄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죄 짓는 일입니다. 거리낌없이 행합니다. 창4:7절에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했습니다. 사람안에는 죄의 성질이 있습니다.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안타깝게도 죄에 유린당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무엇을 말합니까?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며합니다. 이는 죄에 유린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합니다.
사실 인간은 사망을 위한 열매 곧 죽을 짓만 한 것입니다. 사망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히는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무엇으로 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리스도에게 가서 그리스도안에서 입니다. 사망을 위한 열매맺는 삶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한 삶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나를 위해서입니다. 결국 인간은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신앙의 무게중심이 옮겨가야 합니다. 나에서 나를 위해서에서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마치 4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사도행전으로 바뀌듯 말입니다. 사복음서의 제자들은 모두가 자기자신을 위해서였지만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접붙힘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를 심으면 사과를 맺습니다. 배나무를 심으면 배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감나무를 심으면 감이 나옵니까? 아닙니다. 고엽열매를 맺습니다. 그 감나무를 잘라내고 접붙히면 단감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안에서 나라는 나무가 잘려지고 그리스도에게 접붙힌바가 되어야 합니다. 뿌리는 감나무인데 그냥 큰 나무인 고엽나무에 불과하지만 접붙히면 진짜 감나무가 됩니다. 신앙의 매력은 나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내 욕심 잘라내고 내 성질 잘라내고 내 자존심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여야하고 열매또한 그리스도의 열매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베드로 된 것은 시몬을 잘라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울된 것은 사울을 잘라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또한 나를 나타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신앙의 매력은 나를 숨기는데 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숨겨지고 죽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의문의 죽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라는 울타리 안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이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던 우리가 이제는 6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이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죽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은 이제 우리 신앙의 근거가 의문의 죽은 것 즉 율법이나 법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무서워서 의무감이 아닙니다. 숙제하듯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은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법은 은혜의 법입니다.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안 다니면 안되는 것은 율법이지만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것은 은혜입니다. 구원을 받을려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율법적 행위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은혜의 행위입니다. 천국갈라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천국백성이 되었으니 신앙생활하는 것이 은혜이며 복을 받을려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았으니 봉사하는 것이 은혜의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들에 은혜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자격이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어떤 신앙이 행복하겠습니까? 내가 이룰려고 율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셨으니 동참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또 하나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성령으로 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위한 열매 맺는 사람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율법에 근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신앙이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의 승리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성령의 힘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던 사복음서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율법에서 자유한 것 같더라도 결국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무엇인가 주님을 위하는 것 같다가 주님위해 죽겠다 했지만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갑니다.
죄를 이기는 힘은 나를 이기는 힘은 성령으로 입니다. 성령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의문의 죽은 것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입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셨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성령충만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은혜로 성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내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았을 때 주님이 나를 부르셨고 시작하셨음이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내안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가 중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열매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때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 세상을 정복해 나가는 능력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주님때문에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까 나 때문에 주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까? 비로 이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출처/유재명 목사 설교 중에서
우리집 식탁에는 늘 오뚜기 하나가 있습니다.
넘어뜨리려 해도 기어코 일어나는 오뚜기말입니다. 쳐보고 던져보아도 결국 일어나는 오뚜기 앞에 두 손을 다 들고 말았습니다. 상처를 받아도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만약 누군가가 저와 여러분에게 삶에 이유를 묻는다면 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질문 앞에 내가 살아야 할 이류를 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삶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땅에 하늘에 육에 영적부분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기십니까? 너희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한다 하심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성경에서는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삶의 이유가 육에 있는가 영에 있는 가에 대해서는 성경은 이에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요6: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딤전 4:8절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합니다. 삶의 이유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사실 정답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요구는 무엇이고 나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반응을 보이며 살아야 하는 가를 성도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 안에서 갈등구조를 형성하곤 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도 나을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신앙이 기복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물은 그 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열매가 머리인 것 같지만 뿌리가 머리입니다. 그래서 나무는 가지가 꺽이면 살지만 뿌리가 상하면 살지 못합니다. 식물은 그 머리가 아래를 향하여 있기에 땅이 심겨져 땅이 원하는 대로 만 살면 됩니다. 이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심겨져 땅이 공급하는 것만 받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동물은 그 머리가 옆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물로 하여금 환경에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본능을 주셨습니다. 동물은 사람처럼 학습하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본능에 의해 살아갑니다. 일본 고베의 대 지진 사건 때 동물은 본능에 의해 내일을 감지하고 피신했다합니다. 위기도 압니다. 내일 일은 똑똑한 사람만 모릅니다. 사람은 그 머리가 위를 향해 있습니다. 사람은 하늘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머리가 위를 향해 있습니다. 사람은 하늘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만약 하나님을 놓아버리면 온전한 사람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생기의 공급을 얻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영이신 하나님이 처음부터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느끼며 사십니까? 신앙생활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요? 교회에 처음 나온 날입니까? 세례 받는 날입니까? 직분을 받는 날입니까? 언제입니까 신앙생활의 시작은 내가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나온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이 시작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깨닫게 되면 어머니 모태 때 더 나아가 창세전에 계획된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를 못하면 벌이 꽃을 찾느냐 아니면 꽃이 벌을 유혹하느냐 하는식으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답이 없는 논리에 허우적거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벌이나 꽃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내 안에 삶의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느날부터인가 내 안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보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가 지금은 주님의 원하심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의외로 신앙생활하면서 한번도 주님의 원하심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인간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목사를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시장에서 장사를 해도 그 일은 성직입니다. 진정 거듭난 성도는 주님의 원하심의 소리를 들으며 주님의 원하심에 반응을 보이며 삶을 엮어가니 여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로마서는 죄로부터 자유한 사람들에게 권고합니다. 율법에서 완전히 자유하여 율법과 상관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자유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앞에서 죽어 율법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신앙의 만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어 술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담배를 피우니 안 피우니 하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이제 신분이 바뀌었으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에게 맺어야 하는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을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나는 무엇을 안 할 것인가에 매이는 것보다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생명이 있음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늘나라를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율법앞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면 율법앞에서 상관없는자가 되었다면 여기에서 자기가 목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자유하게 되었습니까? 나 편하게 살자고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5절에 우리가 육신에 있을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여 우리는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합니다. 율법에 메인 삶을 살았습니다. 율법의 요구앞에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그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죄의 정욕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4:7절에서 가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사람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있습니까? 만약에 인간에게 선의 가능성이 있었다면 예수는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어 출세의 문제 성공의 문제가 늘 따라다니지만 결국 죄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죄 짓는 일입니다. 거리낌없이 행합니다. 창4:7절에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했습니다. 사람안에는 죄의 성질이 있습니다.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안타깝게도 죄에 유린당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무엇을 말합니까?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며합니다. 이는 죄에 유린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합니다.
사실 인간은 사망을 위한 열매 곧 죽을 짓만 한 것입니다. 사망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히는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무엇으로 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리스도에게 가서 그리스도안에서 입니다. 사망을 위한 열매맺는 삶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한 삶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나를 위해서입니다. 결국 인간은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신앙의 무게중심이 옮겨가야 합니다. 나에서 나를 위해서에서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마치 4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사도행전으로 바뀌듯 말입니다. 사복음서의 제자들은 모두가 자기자신을 위해서였지만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접붙힘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를 심으면 사과를 맺습니다. 배나무를 심으면 배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감나무를 심으면 감이 나옵니까? 아닙니다. 고엽열매를 맺습니다. 그 감나무를 잘라내고 접붙히면 단감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안에서 나라는 나무가 잘려지고 그리스도에게 접붙힌바가 되어야 합니다. 뿌리는 감나무인데 그냥 큰 나무인 고엽나무에 불과하지만 접붙히면 진짜 감나무가 됩니다. 신앙의 매력은 나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내 욕심 잘라내고 내 성질 잘라내고 내 자존심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여야하고 열매또한 그리스도의 열매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베드로 된 것은 시몬을 잘라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울된 것은 사울을 잘라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또한 나를 나타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신앙의 매력은 나를 숨기는데 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숨겨지고 죽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의문의 죽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라는 울타리 안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이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던 우리가 이제는 6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이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죽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은 이제 우리 신앙의 근거가 의문의 죽은 것 즉 율법이나 법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무서워서 의무감이 아닙니다. 숙제하듯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은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법은 은혜의 법입니다.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안 다니면 안되는 것은 율법이지만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것은 은혜입니다. 구원을 받을려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율법적 행위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은혜의 행위입니다. 천국갈라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천국백성이 되었으니 신앙생활하는 것이 은혜이며 복을 받을려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았으니 봉사하는 것이 은혜의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들에 은혜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자격이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어떤 신앙이 행복하겠습니까? 내가 이룰려고 율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셨으니 동참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또 하나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성령으로 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위한 열매 맺는 사람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율법에 근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신앙이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의 승리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성령의 힘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던 사복음서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율법에서 자유한 것 같더라도 결국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무엇인가 주님을 위하는 것 같다가 주님위해 죽겠다 했지만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갑니다.
죄를 이기는 힘은 나를 이기는 힘은 성령으로 입니다. 성령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의문의 죽은 것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입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셨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성령충만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은혜로 성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내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았을 때 주님이 나를 부르셨고 시작하셨음이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내안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가 중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열매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때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 세상을 정복해 나가는 능력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주님때문에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까 나 때문에 주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까? 비로 이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출처/유재명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