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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3:2
부흥을 말할 때 18세기의 신앙 부흥을 일으킨 운동 3가지를 말합습니다. 그 하나는 퀘이커고 운동이고, 또 하나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옥스퍼드 운동, 다른 하나는 모라비아 형제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부흥은 소래 부흥 원산 부흥 평양 부흥을 말하기도 합니다.
일제의 침탈과 함께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매섭던 1907년1월.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는 새해인사가 막 끝난 6일 밤부터 연례행사인 열흘간의 부흥사경회 가 이 해에도 어김없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해의 사경회는 시작 전부터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이날 설교를 맡은 평양신학교 졸업반 39세의 길선주 장로의 얼굴은 위엄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습니다.
부흥집회 마지막 날에 길선주 장로는 회중 앞에 나서더니 저는 아간과 같은 놈이외다. 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받지 못했습네다. 언젠가 제 친구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제게 부탁하기를 '나는 이제 죽지만 내 재산을 잘 처리해주게. 내 아내는 무식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꼭 부탁하네' 라며 세상을 떠났습네다. 저는 그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1백원을 잘라 먹었습네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네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네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말은 모든 회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순식간에 온회중의 통회가 불일 듯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첫날밤 집회에 참석했던 정익호 장로님은 "그는 눈이 멀어 나를 보지 못했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습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두려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곧 되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라고 후일 증언했다 합니다.(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
회개하는 교인들의 열기는 곧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 몰아쳤던 성령의 불길 바로 그것 이었습니다. 이날 밤 집회는 초기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1907년 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운동의 맥락은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의 한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역사입니다.
모라비아 형제단의 지도자로서 훌륭한 역사를 발휘한 진젠돌프 같은 이는 우리가 무심코 생각지 못할 훌륭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생후 6주 만에 부친이 병사했고, 어머니는 개가하므로 할머니 손에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시, 음악, 그림 등에 재능을 가진 분이었고 조직신학과 히브리어, 헬라어에 능통한 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이 할머니의 영향으로 좋은 신앙을 얻었습니다. 그는 나이 어린 6살 때부터 혼자 조용히 기도할 줄 알았고 소년기에 기도 그룹을 만들어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봉독하는 생활에 힘썼습니다. 청년기에 그는 신학, 법률학, 철학, 과학 등 다방면에 공부했고 수재적인 두뇌로서 뛰어난 성적을 가진 학도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은 정한 시간에 기도했고 자주 철야 기도를 했고 금요일에는 안식일로 정하고 오직 기도에 힘썼다. 자기뿐 아니라 겨자씨 단이라고 하는 그룹을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교훈과 진리를 지키며 행동한다. 타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세속적인 안일을 배제하고 버린다.” 라는 목표로 신앙 운동에 부단히 힘썼습니다. 후에 이 멤버 중에서는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진젠돌프가 아직 약관인, 젊었을 때에 모라비아 교단의 대표가 됐지만 그가 전 세계에 끼친 영적인 위대한 생명 운동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는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1970년 2월 3일 화요일 오전 10시 미국 아즈베리 대학 약 천 여명의 학생들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던 설교자가 자기가 받은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간증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졸업반 중 악명 높은 학생 한 명이 나왔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여 주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 여기 서리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와는 딴판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제게 임하여 제 생명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비로소 회개와 구원, 사죄의 은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깊은 감격으로 가득 차게 됐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제까지의 잘못된 나의 생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는 간단히 고백했는데 그 시간에 모였던 전 학생들에게 이상한 감동이 뜨겁게 달아올라 예배 시간이 끝나고 다음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도 계속 학생들은 기도를 그치지 않고 감격에 벅차서 기도하며 신앙을 고백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이런 일이 185시간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2월 10일 그러니까 한 주간이 계속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오는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비신자까지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문, 라디오, TV, 주간지, 월간지 등 모두 이 일을 전 미국에다가 보도를 했었는데 5월 말까지 그 대학과 신학생들이 팀을 만들어 2천명에 달하는 이 불붙은 학생들이 전 미국 각처에 다니면서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변화를 일으키는 놀라운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그룹들이 각처에 생기게 되고 성경연구 모임이 아주 활발하게 운영되어 각 매스컴에서 이를 계속 보도했고 130대학과 신학교가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기도운동은 민족과 인류를 살리는 운동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어떤 업적이나 사업에 성공하기 전 먼저 기도에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은 20세기초 한국 교회 부흥의 씨앗이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1907년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원산은 오랜 기간 동북 아시아의 요충으로 일본 러시아 중국 등이 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입니다. 결국 1876년 한일수호조약으로 체결로 1880년 5월에 부산에 이어 두번째로 개항되었습니다. 원산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1년입니다. 서울보다는 늦었지만 평양과는 거의 동시에 들어왔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1882년 처음 이곳에 와서 사역했습니다. 그러다가 1901년에 다시 와 사역하게 됐습니다. 하디 선교사가 원산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느낀 것은 영적 폐허였습니다. 신자들은 주일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았고 성적으로 방종했습니다. 또한 공금을 횡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디 선교사는 이들에게 성찬을 금했고 심한 경우에는 교회에서 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디가 원산에서 30㎞쯤 떨어진 어떤 집회소를 방문하였을 때 놀랍게도 사람들이 모여서 무당굿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디가 강원도 산간 내륙지방에 들어갔을 때 상황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게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19세기말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 교회는 이들의 피난처였습니다. 1894년 동학혁명 이후 교회 건물에는 깃대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교회라는 표시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는 표시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교회는 외국 선교사들의 소유이기 때문에 치외법권 지대로 인정했습니다. 관리 가운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원산에서 일하던 여선교사 캐럴이 강원도의 어떤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한 사람이 관헌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 와서 교인으로 등록시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의 집에 숨었습니다. 다음날 관리들이 이 사람을 잡으러 왔으나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하디는 교회는 신앙공동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 건물에서 깃대를 제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여기에 순종했으나 어떤 교회는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디는 이런 현실을 보며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1903년 8월 24일 원산의 미 남 감리교 선교지부가 있던 원산교회에서 중국에서 선교하던 하이트 선교사가 한국에 온 것을 기념해 기도회가 열린 자리에서 하디 선교사가 갑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날 그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이 기도회의 성령체험을 원산교회 주일예배 때 설명하며 한국인 교인들 앞에서 다시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후 기도회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원산부흥운동입니다.(<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회개와 고백의 역사입니다.
평양의 부흥운동 보다 약 10년 전에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소래교회는 만주에서 복음을 들은 한국인들이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세운 교회입니다. 1889년 한국에 도착한 캐나다인 선교사 말콤 펜윅은 복음주의 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종종 소래를 방문해서 한국어도 배우고, 그들의 신앙도 살펴보았다. 청일전쟁의 상처가 짙게 배어있던 1896년 말,펜윅은 소래를 다시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약 300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으나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집회 12일째 되는 날, 펜윅은 한 사람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에 역사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제 눈에는 감격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서로 미워하는 신자 두 사람만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이곳 신자들 중에서 누가 서로 미워하고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펜윅의 말이 끝나자 그 사람은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며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 배경을 이야기했습니다. 펜윅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미워했던 그 사람에게 가서 사과하지 않겠느냐"고 권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펜윅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동안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그 사람은 그 길로 미워하던 두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서로 화해했습니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죄 씻음'을 받은 그 신자가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자 모든 신자들이 함께 회개하였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이 이야기를 듣고,"수 천리를 걸어서라도 죄 때문에 그렇게 운 한국인을 만나보고 싶군요. 난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참된 부흥의 시작입니다.<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소래교회의 부흥운동>
영국 웨일즈의 한 작은 교회의 한 부인이 주기도문을 하다가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이 대목에 이르러 더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미워하고 있는 한 형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중단했습니다. 그는 부질없는 봉사를 중단했습니다. 그는 예배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갔습니다.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회개한 것입니다. 우리의 갈등은 당신의 책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라고 그 여자는 자백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던 내 죄를 회개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웨일즈라는 도시에 부흥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의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위대한 부흥은 한 부인의 회개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원인이 되었던 1904년 영국 웨일즈에 영적 부흥이 일어났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새로워지고 있고 교회에 큰 부흥이 임했다는 소문이 요란했습니다. 교회 안나가던 보석가게를 경영하던 한 상인이 이런 부흥의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들려온 소식과 달리 교인들이 예배시간에 좀 격한 감정으로 기도하고 울고 있다는 것외에 크게 그의 마음을 감동시킬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요란하게 알려진 '부흥'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부흥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만의 '요란한 감정의 잔치'라고 생각하고 다시는 교회에 발을 안 들여놓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자기 가게에 한 젊은이가 오더니 자기가 이 보석가게에서 보석을 훔친 일이 있다고 보석을 내놓으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마음이 성령이 임하고 부흥이 일어나서 자기가 회개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다음 주일 교회에 나가 자신도 영적 부흥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당시에도 유사한 사건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평양 대 부흥운동을 목격하고 증언한 스왈른 선교사는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교회에서 부흥을 체험한 성도들은 단순한 통회로만 끝내지 않았다. 다음날 사람들이 거리에서 마을에서 교회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둑맞은 물건들이 되돌아 왔다. 잃어버린 지갑도 돌아왔고 오래동안 갚지 않았던 빚도 청산되었으며 부정한 방법들도 시정되었다." 진정한 부흥은 인생을 바로 잡습니다.(진정한 부흥)
성령의 역사와 전도입니다.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의 소식을 전해들은 성도들은 부흥집회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평양 사경회에서 성령의 종 역할을 감당했던 자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가 2월 16일이었습니다. 서울의 중앙교회(지금의 승동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에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로부터 성령의 역사는 날로 발전되었습니다. 둘째 날 이후 부터는, 회중은 죄에 대한 혐오가 폭발되고 미친듯이 죄를 회개하여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려고 몸부림쳤다. 그들의 심령은 불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의주로 가 11월 27일부터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여기에도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고 특기할 것은 최 재형이라는 열세살 난 소학생(지금의 국민학생)이 죄를 통회하고 주님께 몸 바치기로 한 사실이 있었고 부흥의 물결이 몰아쳐 숭덕학교의 김찬성의 인도로 300여 학생들이 죄를 뉘우치는 부흥의 열기가 타올라 이들에 의한 전도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숭실대학에도 부흥의 물결이 타올랐습니다. 숭실대학의 A.L.Becker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학교 개학은 2월이었는데 그 직전에 집회 중이던 장로교 사경회에 성신 강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은혜가 학교에도 내리기를 원하였습니다..... 학교가 개학되고 학생들이 등교한 다음 우리들은 평상시의 수업시간표를 일시 중지하고 오전, 오후, 저녁을 통하여 성경공부 및 기도회의 특별시간표를 마련하여 실행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학생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려 하지 않았고 또 너무 이래라 저래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의 십자가에 마음 모으기만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크게 나타나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학생까지..... 죄를 회개하고 애통하였습니다. 한때 내가 세어보니 30명 이상의 학생들이 여러시간 서있으면서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기회를 얻으려 기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의 약 10분의 9가 이때에 깊은 감화를 얻어 중생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십자가의 도리를 전하는 열정적 전도인이 되어서 이 부흥의 불길은 온 성내와 인근 촌락에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멀리 제물포와 공주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부흥이라는 말입니다. 기도할 때도 부흥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복음성가를 부를 때도 '부흥'이라는 찬송을 자주 부릅니다. '부흥'이란 무엇인가요? 쉽게 말해서 우리의 심령과 공동체가 새로워지고 변화되며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부흥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만나 주심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할 때 거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할 때 나의 실존을 정확히 바라보게 됩니다. 그 때 나의 더럽고 때묻은 심령이 치유되고 새로워지며 침체된 심령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삶의 비전과 환상을 바라보게 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지게 됩니다.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는 회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치유되고 사랑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것이 변화와 부흥의 역사입니다. 1907년 부흥을 다시 일으키되 말씀과 기도로 회개와 고백으로 성령으로 전도하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
부흥을 말할 때 18세기의 신앙 부흥을 일으킨 운동 3가지를 말합습니다. 그 하나는 퀘이커고 운동이고, 또 하나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옥스퍼드 운동, 다른 하나는 모라비아 형제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부흥은 소래 부흥 원산 부흥 평양 부흥을 말하기도 합니다.
일제의 침탈과 함께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매섭던 1907년1월.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는 새해인사가 막 끝난 6일 밤부터 연례행사인 열흘간의 부흥사경회 가 이 해에도 어김없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해의 사경회는 시작 전부터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이날 설교를 맡은 평양신학교 졸업반 39세의 길선주 장로의 얼굴은 위엄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습니다.
부흥집회 마지막 날에 길선주 장로는 회중 앞에 나서더니 저는 아간과 같은 놈이외다. 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받지 못했습네다. 언젠가 제 친구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제게 부탁하기를 '나는 이제 죽지만 내 재산을 잘 처리해주게. 내 아내는 무식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꼭 부탁하네' 라며 세상을 떠났습네다. 저는 그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1백원을 잘라 먹었습네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네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네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말은 모든 회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순식간에 온회중의 통회가 불일 듯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첫날밤 집회에 참석했던 정익호 장로님은 "그는 눈이 멀어 나를 보지 못했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습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두려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곧 되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라고 후일 증언했다 합니다.(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
회개하는 교인들의 열기는 곧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 몰아쳤던 성령의 불길 바로 그것 이었습니다. 이날 밤 집회는 초기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1907년 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운동의 맥락은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의 한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역사입니다.
모라비아 형제단의 지도자로서 훌륭한 역사를 발휘한 진젠돌프 같은 이는 우리가 무심코 생각지 못할 훌륭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생후 6주 만에 부친이 병사했고, 어머니는 개가하므로 할머니 손에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시, 음악, 그림 등에 재능을 가진 분이었고 조직신학과 히브리어, 헬라어에 능통한 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이 할머니의 영향으로 좋은 신앙을 얻었습니다. 그는 나이 어린 6살 때부터 혼자 조용히 기도할 줄 알았고 소년기에 기도 그룹을 만들어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봉독하는 생활에 힘썼습니다. 청년기에 그는 신학, 법률학, 철학, 과학 등 다방면에 공부했고 수재적인 두뇌로서 뛰어난 성적을 가진 학도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은 정한 시간에 기도했고 자주 철야 기도를 했고 금요일에는 안식일로 정하고 오직 기도에 힘썼다. 자기뿐 아니라 겨자씨 단이라고 하는 그룹을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교훈과 진리를 지키며 행동한다. 타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세속적인 안일을 배제하고 버린다.” 라는 목표로 신앙 운동에 부단히 힘썼습니다. 후에 이 멤버 중에서는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진젠돌프가 아직 약관인, 젊었을 때에 모라비아 교단의 대표가 됐지만 그가 전 세계에 끼친 영적인 위대한 생명 운동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는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1970년 2월 3일 화요일 오전 10시 미국 아즈베리 대학 약 천 여명의 학생들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던 설교자가 자기가 받은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간증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졸업반 중 악명 높은 학생 한 명이 나왔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여 주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 여기 서리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와는 딴판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제게 임하여 제 생명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비로소 회개와 구원, 사죄의 은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깊은 감격으로 가득 차게 됐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제까지의 잘못된 나의 생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는 간단히 고백했는데 그 시간에 모였던 전 학생들에게 이상한 감동이 뜨겁게 달아올라 예배 시간이 끝나고 다음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도 계속 학생들은 기도를 그치지 않고 감격에 벅차서 기도하며 신앙을 고백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이런 일이 185시간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2월 10일 그러니까 한 주간이 계속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오는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비신자까지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문, 라디오, TV, 주간지, 월간지 등 모두 이 일을 전 미국에다가 보도를 했었는데 5월 말까지 그 대학과 신학생들이 팀을 만들어 2천명에 달하는 이 불붙은 학생들이 전 미국 각처에 다니면서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변화를 일으키는 놀라운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그룹들이 각처에 생기게 되고 성경연구 모임이 아주 활발하게 운영되어 각 매스컴에서 이를 계속 보도했고 130대학과 신학교가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기도운동은 민족과 인류를 살리는 운동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어떤 업적이나 사업에 성공하기 전 먼저 기도에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은 20세기초 한국 교회 부흥의 씨앗이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1907년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원산은 오랜 기간 동북 아시아의 요충으로 일본 러시아 중국 등이 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입니다. 결국 1876년 한일수호조약으로 체결로 1880년 5월에 부산에 이어 두번째로 개항되었습니다. 원산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1년입니다. 서울보다는 늦었지만 평양과는 거의 동시에 들어왔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1882년 처음 이곳에 와서 사역했습니다. 그러다가 1901년에 다시 와 사역하게 됐습니다. 하디 선교사가 원산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느낀 것은 영적 폐허였습니다. 신자들은 주일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았고 성적으로 방종했습니다. 또한 공금을 횡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디 선교사는 이들에게 성찬을 금했고 심한 경우에는 교회에서 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디가 원산에서 30㎞쯤 떨어진 어떤 집회소를 방문하였을 때 놀랍게도 사람들이 모여서 무당굿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디가 강원도 산간 내륙지방에 들어갔을 때 상황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게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19세기말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 교회는 이들의 피난처였습니다. 1894년 동학혁명 이후 교회 건물에는 깃대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교회라는 표시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는 표시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교회는 외국 선교사들의 소유이기 때문에 치외법권 지대로 인정했습니다. 관리 가운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원산에서 일하던 여선교사 캐럴이 강원도의 어떤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한 사람이 관헌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 와서 교인으로 등록시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의 집에 숨었습니다. 다음날 관리들이 이 사람을 잡으러 왔으나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하디는 교회는 신앙공동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 건물에서 깃대를 제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여기에 순종했으나 어떤 교회는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디는 이런 현실을 보며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1903년 8월 24일 원산의 미 남 감리교 선교지부가 있던 원산교회에서 중국에서 선교하던 하이트 선교사가 한국에 온 것을 기념해 기도회가 열린 자리에서 하디 선교사가 갑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날 그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이 기도회의 성령체험을 원산교회 주일예배 때 설명하며 한국인 교인들 앞에서 다시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후 기도회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원산부흥운동입니다.(<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회개와 고백의 역사입니다.
평양의 부흥운동 보다 약 10년 전에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소래교회는 만주에서 복음을 들은 한국인들이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세운 교회입니다. 1889년 한국에 도착한 캐나다인 선교사 말콤 펜윅은 복음주의 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종종 소래를 방문해서 한국어도 배우고, 그들의 신앙도 살펴보았다. 청일전쟁의 상처가 짙게 배어있던 1896년 말,펜윅은 소래를 다시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약 300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으나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집회 12일째 되는 날, 펜윅은 한 사람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에 역사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제 눈에는 감격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서로 미워하는 신자 두 사람만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이곳 신자들 중에서 누가 서로 미워하고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펜윅의 말이 끝나자 그 사람은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며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 배경을 이야기했습니다. 펜윅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미워했던 그 사람에게 가서 사과하지 않겠느냐"고 권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펜윅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동안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그 사람은 그 길로 미워하던 두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서로 화해했습니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죄 씻음'을 받은 그 신자가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자 모든 신자들이 함께 회개하였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이 이야기를 듣고,"수 천리를 걸어서라도 죄 때문에 그렇게 운 한국인을 만나보고 싶군요. 난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참된 부흥의 시작입니다.<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소래교회의 부흥운동>
영국 웨일즈의 한 작은 교회의 한 부인이 주기도문을 하다가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이 대목에 이르러 더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미워하고 있는 한 형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중단했습니다. 그는 부질없는 봉사를 중단했습니다. 그는 예배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갔습니다.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회개한 것입니다. 우리의 갈등은 당신의 책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라고 그 여자는 자백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던 내 죄를 회개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웨일즈라는 도시에 부흥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의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위대한 부흥은 한 부인의 회개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원인이 되었던 1904년 영국 웨일즈에 영적 부흥이 일어났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새로워지고 있고 교회에 큰 부흥이 임했다는 소문이 요란했습니다. 교회 안나가던 보석가게를 경영하던 한 상인이 이런 부흥의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들려온 소식과 달리 교인들이 예배시간에 좀 격한 감정으로 기도하고 울고 있다는 것외에 크게 그의 마음을 감동시킬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요란하게 알려진 '부흥'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부흥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만의 '요란한 감정의 잔치'라고 생각하고 다시는 교회에 발을 안 들여놓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자기 가게에 한 젊은이가 오더니 자기가 이 보석가게에서 보석을 훔친 일이 있다고 보석을 내놓으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마음이 성령이 임하고 부흥이 일어나서 자기가 회개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다음 주일 교회에 나가 자신도 영적 부흥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당시에도 유사한 사건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평양 대 부흥운동을 목격하고 증언한 스왈른 선교사는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교회에서 부흥을 체험한 성도들은 단순한 통회로만 끝내지 않았다. 다음날 사람들이 거리에서 마을에서 교회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둑맞은 물건들이 되돌아 왔다. 잃어버린 지갑도 돌아왔고 오래동안 갚지 않았던 빚도 청산되었으며 부정한 방법들도 시정되었다." 진정한 부흥은 인생을 바로 잡습니다.(진정한 부흥)
성령의 역사와 전도입니다.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의 소식을 전해들은 성도들은 부흥집회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평양 사경회에서 성령의 종 역할을 감당했던 자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가 2월 16일이었습니다. 서울의 중앙교회(지금의 승동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에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로부터 성령의 역사는 날로 발전되었습니다. 둘째 날 이후 부터는, 회중은 죄에 대한 혐오가 폭발되고 미친듯이 죄를 회개하여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려고 몸부림쳤다. 그들의 심령은 불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의주로 가 11월 27일부터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여기에도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고 특기할 것은 최 재형이라는 열세살 난 소학생(지금의 국민학생)이 죄를 통회하고 주님께 몸 바치기로 한 사실이 있었고 부흥의 물결이 몰아쳐 숭덕학교의 김찬성의 인도로 300여 학생들이 죄를 뉘우치는 부흥의 열기가 타올라 이들에 의한 전도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숭실대학에도 부흥의 물결이 타올랐습니다. 숭실대학의 A.L.Becker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학교 개학은 2월이었는데 그 직전에 집회 중이던 장로교 사경회에 성신 강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은혜가 학교에도 내리기를 원하였습니다..... 학교가 개학되고 학생들이 등교한 다음 우리들은 평상시의 수업시간표를 일시 중지하고 오전, 오후, 저녁을 통하여 성경공부 및 기도회의 특별시간표를 마련하여 실행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학생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려 하지 않았고 또 너무 이래라 저래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의 십자가에 마음 모으기만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크게 나타나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학생까지..... 죄를 회개하고 애통하였습니다. 한때 내가 세어보니 30명 이상의 학생들이 여러시간 서있으면서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기회를 얻으려 기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의 약 10분의 9가 이때에 깊은 감화를 얻어 중생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십자가의 도리를 전하는 열정적 전도인이 되어서 이 부흥의 불길은 온 성내와 인근 촌락에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멀리 제물포와 공주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부흥이라는 말입니다. 기도할 때도 부흥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복음성가를 부를 때도 '부흥'이라는 찬송을 자주 부릅니다. '부흥'이란 무엇인가요? 쉽게 말해서 우리의 심령과 공동체가 새로워지고 변화되며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부흥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만나 주심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할 때 거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할 때 나의 실존을 정확히 바라보게 됩니다. 그 때 나의 더럽고 때묻은 심령이 치유되고 새로워지며 침체된 심령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삶의 비전과 환상을 바라보게 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지게 됩니다.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는 회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치유되고 사랑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것이 변화와 부흥의 역사입니다. 1907년 부흥을 다시 일으키되 말씀과 기도로 회개와 고백으로 성령으로 전도하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