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6:1-7                                                        

  어느 학교에서 컴퓨터에 자료를 잘못 입력하여 학급 편성을 뒤바꾸어 놓은 일이 있었다. “우수한” 아이들로 편성된 학급을 “우둔한” 학급으로, “우둔한” 아이들을 “우수한” 학급으로 편성한 것이다. 5개월이 지난 뒤에 학사 관리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당황한 학교 측은 컴퓨터 오류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학생들에게 다시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시험 결과가 놀랍게 나왔다. 원래 우수한 아이들의 성적은 크게 떨어진 반면에, 우둔한 학급의 점수는 크게 올랐다. 학교 당국은 그 시험 결과를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어떻게 인정하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우둔한 학생들이지만 한 학기 내내 선생님들로부터 항상 우수한 학생들로 인정받고, 또 그 수준에 맞는 교육하며, 항상 그들에게 긍정적인 기대감을 표현했기 때문에 우둔했던 학생들이 상당히 우수한 학생들로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우수한 학생들로 편성되었으나, 학기 내내 선생님들에 의하여 열등하고 학습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로 여겨져, 무시 당해왔고, 아무도 그들에게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점차 열등한 아이들처럼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고난과 역경에는 반드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도전하는 것이 승리로 향하는 첫 번째 단계인 것이다.
  일생동안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3중고의 인생을 산 ‘헬렌 켈러’에게 한 사람이 물었다고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시각과 청각 중 하나만 되돌려 주신다면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그 질문에 ‘헬렌 켈러’는 주저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청각을 택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현재 미국 부시정부의 장애인 정책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맹인 강영우박사는 헬렌 켈러의 이 이야기를 읽고, 이렇게 글을 썼다. “나는 그렇게도 소중한 청각을 가지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시각을 잃은 것에만 집착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생활을 해왔었는데, 헬렌켈러의 말을 듣고, 그러한 생각이 변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그들이 그렇게도 갖기를 소원하는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이것저것 부족하고 불편한 것들이 많다고 아직도 불평과 원망이 많으니 말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처음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문제를 사도들이 어떻게 풀어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가 날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사도들은 최선을 다하여 교회를 섬겼다. 특별히 교회의 구제를 받아야 하는 과부들을 사랑으로 정성껏 돌보아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사도들의 구제 행위가 공평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매일 구제에서, 히브리파 과부들에 대한 배려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비해, 헬라과부들은 그 구제에서 빠지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교회의 사랑이 아주 편협하고 불공평하다는 불평이 조직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 발단의 배경에 두 가지 사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교회가 부흥이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는데”(1) 예수님이 처음 부르신 제자는 이었다. 이들이 처음교회가 시작이 되던 예루살렘마가의 다락방에는 120명이 모였고, 후에 3,000면으로, 그리고 오천 으로 늘어났고, 후에는 셀 수 없는 남녀의 무리가 교회에 모여들었다. 이것도 시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 급성장을 거듭해 온 것이다. 교회는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의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교회 안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다음은 이 교회의 문제를 활발히 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교회가 사랑을 가지고 어려운 과부들을 돕는 중에 불평과 원망이 일어났던 것이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대”(1)
교회 안에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은 누구인가?
히브리파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서 살아온 유대인들로서 예수를 믿어 교인이 된 사람들이고, 헬라파는 예루살렘 밖에서 헬라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오다가 예수를 믿어 한 교인이 됨 사람들이다. 요즈음 우리 교회를 두고 말한다면, 이 교회에서 몇 대를 이어서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는 토박이 교인들과, 지방에서 올라와서 이 교회에 등록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같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문제를 재기하고 나선 것이다.
자칫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이 위기를,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신앙적인 지혜를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문제를 해결하는 사도들의 지혜이다.  
2절이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供饋)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교회 안의 문제를 쉬쉬하며 감추거나 덮으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덮어가려고 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문제를 들은 사람은 마치 ‘특종기사’라도 잡은 기자처럼 묘한 사명감을 갖는다. 그 때부터 교회는 분주해진다. 물밑에서 쑥덕쑥덕하며 번져 나가는데 이야기는 한 사람에서 다른 한 사람으로 건너갈 때마다 추측과 자기 생각이 하나씩 더해진다. 그러면 나중에는 사실에서 거리가 꽤 멀어진 이야기들이 떠돌면서 교회는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어수선해진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 문제를 공론화하였다. 사도들이 교회 모든 제자들과 함께 연석회의를 열어 해결해 갔다.  
  그리고 사도들은 문제에 대하여 누구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누가 이런 문제를 재기했느냐? 구체적으로 누가 구제에서 빠졌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재기한 문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특별히 사도들이 구제에 매달려서 일하느라고 사도로서 기도하는 일과 말씀전하는 일에 소홀히 하였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영국의회에서 한 의원이 수상 처칠의 정치적 실책에 대해 호된 비난을 퍼부었다. 의원의 발언은 듣기가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한 것이었다. 그곳에 앉아서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처칠은 의원의 발언이 끝나자 연단으로 나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밖에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여러분은 아마 그 대부분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사도들은 불평을 들으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섰다. 사도들 자신들의 판단과 행동이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적절치 못했다고 인정했다.  
  사실은 누구나 실수 할 수 있다.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함께 기도하며 지혜를 모으면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문제 그 자체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교회가 시험에 들고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태국에서 아주 맹독을 가진 뱀 코브라를 다루는 땅꾼이 코브라를 잡는 것을 보았다.  코브라가 쏟아내는 독은 그 독성이 엄청나다. 코브라는 사람을 공격할 때, 그 무서운  눈으로 사람을 째려보며 기회를 타서 직선으로 공격한다. 그때, 용감한 땅꾼은 코브라의 관심을 계속 한쪽으로 집중하게 한 다음 다른 쪽 오른 손을 내밀어 슬그머니 코브라의 목덜미를 잡아챈다.
헬렌켈러가 말했다.  
“닫힌 문을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으면, 등 뒤에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
문제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그 문제에만 집중하게 되면 사탄의 올무에 빠질 수 있다. 전체를 보면서 해결의 지혜를 찾아 나가야 한다.  

2.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3절 말씀이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지금까지 교회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집사를 세우는 일’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사도들을 도와서 구제를 합리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일곱 명의 집사를 선택하였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사도들이 일을 더 잘 해야 한다며, 사도들의 무능을 문제시 하지 않았다. 교회에 새로운 직임을 만들어서 봉사하게 함으로 구제를 비롯한 다른 일들을 위임하고, 사도들을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게 하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집사의 자격기준이다.  
1)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바른 신앙을 고백할 할 수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16:16)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수 없느니라.”(고전12:3)
교회의 일꾼은 무엇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확실한 신앙고백 위에 서야한다.
성령충만한 사람에게 사역에 필요한 여러가지 은사들이 나타난다.
고린도전서12:4-7,11말씀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예언, 영분별, 방언, 통역..
“이 모든 일은 같은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그리고 성령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한다.  
갈라디아5:22,23말씀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법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교회의 일꾼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를 닮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일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을 세우라 하셨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다.
교회의 일꾼은 실력 있는 사람보다 지혜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리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조직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
앞뒤를 가릴 줄 아는 사람,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남의 얘기를 경청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을 높여주고 세워 줄줄 아는 사람, 협력할 줄 아는 사람,
화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내 뜻이 관철되지 않았어도 합의에 의해서 결의된 일에는 순복할 줄도 알아야 한다.
혼자 잘난 척 하고 교만하면 사람들에게 왕 따 당하기 쉽다. 교회 일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 혼자서 다 해결하려는 독불장군보다 여럿이 함께 의견을 모우고, 함께 기도하면서, 협력하여 섬길 줄 아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좋은 일꾼이다.  
3) 칭찬 듣는 사람이다.
능력이 많은 사람보다, 덕이 있어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똑똑한 사람보다 아량이 있어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칭찬을 받게 된다. 교회의 일꾼이 완벽해야한다든가 성자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서로가 다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줄 알고 함께 기도하며 협력하며 서로를 존중하며 힘을 모을 줄 아는 사람들은 칭찬을 받을 수 있다.

3.사도들이 이 일들을 위임하고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셨다.
사도들이 일곱 집사들을 세워서 교회 안에 사도들이 해왔던 그 구제의 일들을 집사들에게 위임하고 사도들은 본연의 사역에 집중하였다.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전하는 일에 전무함으로 교회는 말씀이 저점 왕성하여 갔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과 함께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다.
7절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더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우리는 여기서 아주 평범하면서도 분명한 부흥의 비결을 알게 된다.
교회의 부흥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얼마나 더 많이 개설하느냐에 있지 않다. 온 교회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충실하게 되면 반드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면 아주 은혜로운 교회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온갖 은혜와 축복의 약속들로 가득하다. 그 약속들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충분한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감사하며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어져 있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고아처럼, 초라하게, 실패자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영적으로 메마르고, 은혜가 없고, 기쁨이 없고, 감사도 없이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씀 속에 모든 것이 다 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지 못하는 것은 교인이 적어서가 아니다.  구제사업을 적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지 못해서이다.

작년 연 말에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스테파니 윈스턴’씨가 방한 한 적이 있었다. 홍제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2005 글로벌 리더쉽 페스티벌’에서 “성공하는 최고 경영자들의 일하는 방법”을 강연에서 한 말이다.  
“미국의 경제전문 잡지 포천이 선정하는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들의 책상 위를 본 적이 있는가? 한결같이 컴퓨터와 서류 몇 장 정도만 있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유능한 CEO라면 이처럼 버리고 정리하는데 능통할 것이다.”
“성공한 CEO들은 디지털 시대의 정보홍수 속에서 정보시간 업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들은 불필요한 정보를 과감하게 버림으로써 집중력을 높이고, 신속한의사 결정을 내린다.”
오늘의 교회가 너무 세상적인 일들에 좇기면서 참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기도하는 일에 소홀히 하면서, 영적인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세워진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교회를 위하여 감당해야하는 일에 힘써주십시오, 그리고 목회자들로 하여금 본연의 일에 충성하게 해 주십시오.
교회는 이제 우리들의 삶의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왕성하여 지며, 기도하는 일에 더 집중하여 하나님의 기적이 오늘의 신앙인들 속에 일어나는 초대교회 같은 교회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멘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