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1:10-13
누가복음 13:6- 9  

지방에 사는 한 가정에서 아들이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은행 통장을 하나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매달 아들에게 필요한 돈을 입금시켜서 아들이 어려움 없이 공부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시간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항상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공평한 시간의 구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주시며, 일년 365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해와 비를 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그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였는데,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시오.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습니까?”

이 때 농부가 대답합니다. “주인님, 금년 한해에도 그대로 두시지요. 내가 주변의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고 정성껏 가꾸어 보겠습니다. 만일 그때 열매를 열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그때 가서  찍어버리지요.”

이 비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농부는 예수님이시며, 무화과 나무는 우리들입니다.



회개하자

본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무는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입니다. 많은 포도나무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관심과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열매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하고, 사람은 삶의 보람을 거두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는 나무는 잎사귀가 풍성합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 주며 때로는 허기진 나그네의 배를 채워줄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 안에 자기를 증식시킬 씨앗도 없습니다. 세월이 가면 떨어져 썩어져 버릴 이파리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불 붙일 장작에 불과한 나무들이 많습니다.



시간의 은혜

하나님은 이런 열매 없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주십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이 시간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나무에 열리는 열매를 바라십니다.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또 다시 일을 맡기심은 한번의 기회를 더 주사 하나님의 심판을 유예해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당장 그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베어버리고 싶었는데, 그 나무를 위한 중보자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리적 중보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농부와 같은 사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농부와 같이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농부는 무화과의 미래적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지나간 과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신뢰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이 농부는 예수님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실 때, 한 분이 보증을 서 주었습니다. 이분이 예수님입니다. 또 한 해의 시간은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지난 일년간의 우리의 열매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다시 새 해를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농부는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농사를 지었으므로 무화과의 열매없음에도 자신이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모든 책임을 무화과 나무에게 돌려버리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농부가 무화과를 책임있고 성실하게 사랑으로 가꾸어 왔으므로 애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열심 가꾸어 보고자 스스로 결심하고 주인에게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화과 나무에게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라기 보다는 차라리 농부에게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인 것입니다. 이 농부의 책임감은 생산적인 책임감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진노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먼저 끊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책임을 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곧 모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책임감은 단순한 의무가 아닙니다. 이 책임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증물은 당신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목숨을 걸고, 제 생명을 걸고, 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죽어도 끝까지 자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포기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은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주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사랑하신 주님, 고통 속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주님이시기에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시간

다음으로 하나님은 일년 연장된 시간을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유예시켜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더 많은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정리할 것들이 있습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엉뚱한 것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는 잎사귀만 풍성합니다. 우리에게 풍성했던 잎사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잎사귀처럼 버리고 가야 할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던 것을 버리고 가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심판관이 되어서 자비를 제한하고 정죄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정죄함, 미움, 증오와 갈등, 수많은 넘어짐과 실패를 놓고 가야 합니다. 마음 속의 상처들을 모두 내려 놓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해에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화해, 평화, 실패의 교훈들, 사랑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미움과 증오일랑 다 버리고, 이해와 용납과 화해와 사랑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실패일랑 다 버리고, 실패의 교훈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바렌보임과 화해

2001년 여름 예루살렘 콘서트홀입니다. 연주를 마친 세계적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마이크를 잡습니다. 앙코르곡으로 바그너를 연주해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터져 나옵니다. 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연주는 금기(禁忌)로 여겨집니다.

바그너 작품이 나치정권의 선전도구로 이용된 탓입니다. 그래도 대다수 관객은 박수로 환영합니다. 하지만 흥분한 소수 청중이 반발합니다. “나치 수용소를 상기하라”고 외칩니다.

유대인인 바렌보임은 히브리어로 호소합니다. “바그너는 히틀러와 무관한 사람입니다. 예술과 정치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설득은 40분이나 이어집니다. 마침내 그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연주합니다. 연주가 끝난 뒤 청중은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이 한 편의 드라마 속에서 바렌보임이 바란 것은 화해와 평화였고 버리고자 했던 것은 원한과 증오였습니다. 원한과 증오를 품은 사람은 늘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습니다. 마땅히 증오할 만한 대상만 증오한다는 거지요. 하지만 무작정 미워하는 것은 소풍날 쏟아지는 비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욕을 퍼붓는 아이들 같은 짓입니다. 바그너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50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아닙니까? 증오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끈질긴 빚쟁이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힐 뿐입니다. 또 증오는 눈덩이처럼, 갚지 못하는 이자처럼 불어 갑니다.

남아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가 집권한 뒤 만든 것이 '진실과 화해 위원회'입니다. 진실 규명도 좋지만 국민적 화해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증오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늘 존재합니다. 그들에게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분노와 원한은 그들의 자양분입니다. 이해와 사랑으로 그들이 설 자리를 없애야 합니다.

“화해하지 않은 사람은 잠을 설친다”고 니체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사는 사람에게는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평화와 안식이 있습니다. 2007년 새해는 진정한 평화의 해가 되고 화해와 함께 살아가는 해가 되어 두 다리 뻗고 편한 잠을 자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새로운 짐

무화과 나무에서 잎사귀를 없애면 열매를 풍성하게 맺습니다. 열매가 많아지면 잎사귀가 적어집니다. 우리는 내년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잎사귀와 같이 의미 없는 것들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 속의 분노를 없애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분노가 고여 들거든 우선 말하는 것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지독히 화가 날 때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도 벅찬 세상인데 아웅 다웅 싸우며 살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화를 낼 때 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등을 돌렸습니다. 내가 고요한 마음으로 미소지을 때 사람들은 내 주위에서 평화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내게 가장 해가 되는 것은 바로 내 마음 속에 감춰진 분노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분노하는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분노를 억누른다고 그 분노를 이길 수 없음을 압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이 내 마음 속의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음을 압니다. 사랑으로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대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실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미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이 현실을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적인 것을 떨쳐 버리는 노력보다는 긍정적인 것을 더 많이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컵 속의 공기를 어떻게 하면 완전히 없앨 수 있을까요? 아마 최고의 물리학 실험실에서도 공기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컵을 물로 가득 채우면 공기는 더 이상 컵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그릇에 의미있고 소중한 것을 채울 때, 무의미한 것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도 죄악과 싸우기 보다는 성령을 충만히 받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괴로워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편 51:10-11).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시는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이 우리의 어두운 영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할 때, 세상의 악한 영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시간의 허무, 무능력의 우울증을 이기는 방법은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19).

예수님은 “내가 너의 짐을 다 가져가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 짐을 지도록 너를 초청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죄와 실패의 짐을 지시고 그 무게로 인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우리에게 가벼운 짐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짐이 우리가 져야 할 진짜 짐입니다. 이 짐은 감정과 분노의 유혹들을 이기고 지는 사랑의 짐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짐을 질 것인가를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져야 할 진짜 짐은 화해의 짐입니다. 화해의 짐을 짐으로써 미움을 짐을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져야 할 진짜 짐은 사랑의 짐입니다. 사랑의 짐을 짐으로써 중오의 짐을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져야 할 진짜 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소명입니다. 거룩한 소명으로 세상의 욕망의 짐을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나간 한 해에 대한 후회와 회한 보다는 새로운 한 해를 기대를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우리는 2007년도라는 인생의 그릇 속에 희망과 사랑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큰 꿈, 큰 믿음의 그릇을 가지고 2007년 새해를 기대해야 합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

만 두살 때 열병을 앓고 난 후 청각장애, 시각장애, 언어장애의 삼중 장애인이 되었던 헬렌 켈러가 50대에 쓴 수필 중에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 이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헬렌 켈러가 어느 날 숲 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 친구는 ‘별거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두 눈 뜨고도 두 귀 열고도 별로 특별히 본 것도 들은 것도 없고, 할 말조차 없다니…

이 말을 들은 헬렌 켈러는 자신이 비록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지만, 만약 자신이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보고 느낄 것인지를 글로 썼습니다. 그녀는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란 제목으로 수필을 써서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첫째 날,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있게 해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러곤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 나서, 서둘러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 하루 종일 인간이 진화해온 궤적을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어느덧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보고자 소망했던 일들을 우리는 날마다 일상 속에서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는 모릅니다. 아니 잊고 삽니다.

그래서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되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인지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헬렌 켈러의 글은 당시 경제 대공황의 후유증에 허덕이던 미국인들을 잔잔히 위로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마주하는 이 세계가 날마다 기적 같은 것임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나간 한 해는 어땠습니까?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면 날마다 기적이었습니다. 쳇바퀴 돌듯 정신없이 살아온 기억밖에 없는데,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왔는데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으니 기적 중에 기적이 틀림없습니다.

“힘들어 죽겠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아직까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큰 기업, 작은 기업 할 것 없이 숱한 파산과 부도의 위기에서 그래도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입니다. 그 와중에 3000억 달러의 수출 금자탑을 쌓은 것도 기적입니다. 날마다 시위에 시위를 이어가는 분열된 이 나라가 하루에도 열두개로 분열될 것 같은데 아직도 쪼개지지 않고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큰 병 작은 병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아직 숨을 쉬고 있으니 기적입니다.

헬렌 켈러에게는 88년의 생애 중에서 단 3일의 기적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녀의 소망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일년이면 365일 매일 같이 기적 같은 나날을 살아갑니다. 헬렌 켈러에게는 기적 같은 사건이 우리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입니다. 지난 2006년도 매일이 기적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2007년 새해 역시 기적의 한 해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은혜로 가득 가득 채우십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포도원의 많은 포도나무 사이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가올 새해는 지금까지의 은혜 보다도 더 큰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사랑보다도 더욱 많은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대를 받는 존재입니다.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은혜 위에 또 은혜를 입은 존재로 살게 될 것입니다.

새해는 그렇고 그렇게 살아갈 한 해가 아닙니다. 새해는 우리가 큰 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할 한 해입니다. 이 기대와 믿음 속에서 하나님은 기적 같은 약속을 현실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