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4:7-17

룻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의 하나일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룻기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과 위로와 희망은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룻기 전체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겠습니다.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자 유다 베들레헴의 엘리멜렉이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엘리멜렉이 먼저 죽고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했는데 그 중 하나가 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압에서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두 아들도 다 죽고 여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유다 땅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고는 두 며느리에게 각기 그들의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 남편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라고 당부하며 하나님께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두 며느리는 소리를 높여 울며 "아닙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새로 남편을 얻고 아들도 낳아 행복하게들 살지 않으면 그들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플 것이라며 단호히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한 며느리는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어디든지 시어머니를 따라 가서 모시고 함께 살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한 말은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룻의 이 굳은 결심을 확인한 나오미는 할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압 지방으로부터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는 보리 추수가 시작될 때였습니다(룻1:22).  룻은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추수하는 밭에 나가서 추수하다 떨어지는 이삭을 줍기로 했습니다(룻2:2).  레19:9-10에 보면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고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 곳은 공교롭게도 시아버지였던 엘리멜렉의 친족 중 보아스라 하는 사람의 밭이었습니다(룻2:3).  보아스는 부호이면서도(룻2:1)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처음 보는 여자가 이삭을 줍는 것을 보고는 자기의 추수감독관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룻2:5).  추수감독관으로부터 룻에 관한 답변(룻2:6-7)을 들은 보아스는 룻에게 말하기를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며 친절과 호의를 베풀고(룻2:8-9) 축복까지 해주었으며(룻2:12), 식사할 때에는 자기와 함께 먹게 하고 풍족히 먹을 것을 주었으며(룻2:14), 추수하는 자들에게 룻이 이삭을 주울 때에는 책망하지 말 것은 물론이고 그녀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일부러 떨어뜨려서 그녀가 주울 것이 많게 하라고 미리 명령하기도 했습니다(룻2:15-16).  보아스는 룻이 남편을 잃은 후로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효도와 시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부모와 고국을 떠나 낯선 백성에게로 온 일에 관해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룻2:11).

   룻은 밭에서 주운 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다 먹지 않고 남겨 온 것을 시어머니에게 드리며 오늘 자기에게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이 보아스라는 말씀도 드리고 그 날 그가 자기에게 해준 바를 소상히 보고했습니다(룻2:17-19, 21).  그 말을 들은 나오미는 룻에게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라"(룻2:20) 했습니다.  레25:2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시기를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라"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옛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친족 소유의 땅은 항상 그 친족의 소유로 남아있어야 했으며, 친족 중 어떤 사람이 생활이 어려워져서 자기의 땅을 팔아야 할 때에는 같은 친족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 땅을 다시 삼으로써 그 땅이 계속해서 한 친족의 소유로 남게 할 의무를 갖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그 의무를 갖는 사람을 가리켜서 "기업을 무를 자"라고 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로 하여금 자기의 기업을 무르게 하고는 착하고 가여운 며느리 룻의 남편이 되게 하여 그녀에게 안식과 행복을 안겨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룻3:1).  그래서 어느날 룻에게 이르기를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가 먹고 마시기를 다 한 후 누울 때에 그가 눕는 곳에 들어가 그의 발치에 누워 그의 반응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3:2-4).  착하고 순종적인 룻은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했습니다(3:5-6).  보아스는 밤중에 자다가 자기 발치에 누가 누워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 일어나 룻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룻은 대답하기를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했습니다(3:7-9).  그런데 이에 대한 보아스의 반응이 너무나 감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3:10-13) 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날 나오미 일가의 기업을 무를 자로서 자기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그를 불러 앉히고 그 성읍의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증인으로 삼아 그들 앞에서 그에게 말하기를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4:1-4).  그러자 나오미 일가의 기업을 무를 그 1순위의 사람이 무르겠다고 대답했고, 이에 보아스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4:4-5).  무슨 말인가 하면 나오미 일가의 기업을 무르는 책임 속에는 나오미가 팔려고 하는 땅을 사는 일뿐 아니라 그 일가의 과부인 모압 여자 룻의 남편이 되어 그녀의 전 남편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아들을 낳게 해주어야 하는 의무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정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자가 자기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도 그 아들은 자기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전 남편의 아들이 되어 그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그 사들인 땅이 전부 기업 무르는 자의 것으로 남지만 아들이 태어날 경우 그 땅은 모두 그 여자의 아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업 무를 자는 땅을 사고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대답하기를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했습니다(4:6).

   나오미 일가의 기업을 무를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 1순위에 있던 사람이 그 권리와 의무를 포기해줄 것을 내심 바라고 있던 보아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권리와 의무를 인수했습니다.  오늘 본문 7-12절이 보여주는 대로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관행에 따라 장로들과 모든 백성으로 증인이 되게 하고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에게 속했던 모든 것을 사며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는 모든 법적 절차를 마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미와 그의 며느리 룻은 그간의 모든 슬픔과 가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기쁘고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큰 축복과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11-12, 14-15절).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 복을 내려주셨고(13절),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라는 칭송을 듣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15절).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룻과 나오미와 보아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7절을 보면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됨으로써 훗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님의 가계에 예외적으로 그 이름이 오른 몇 명의 영광스런 여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착하고 순종적인 마음으로 가족과 하나님께 충절을 바친 룻에게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의로우며 유력한 한 남자를 새 남편으로 허락하셔서 가난과 외로움을 벗어버리게 해주실 뿐 아니라, 어두워져만 가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방 모압 출신의 한 작은 여인의 충절이 그녀 자신의 행복뿐 아니라 훗날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한 하나님의 큰 은혜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에서 룻기가 사사기 다음에 사무엘서 앞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로 기울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외적의 침입과 지배와 착취와 학대로 고통을 받고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사사의 세우심을 받고 평화를 되찾은 후 얼마 못가서 또 하나님을 잊기를 계속 반복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영적으로 점점 쇠락해갔으며 우상숭배의 습성은 갈수록 심해졌고 사사들에게서조차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지 못하는 모습이 더해갔습니다.  사사시대 말기의 이스라엘 백성의 일반적인 의식과 삶의 모습은 엽기적이라 할 정도로 부패하고 잔인해져갔습니다.  인간관계의 온갖 질서가 다 무너지는 현상이 빈발했습니다.  사사기의 끝부분인 17장부터 21장 사이의 기록은 이스라엘 민족의 어두워진 영적 상태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매듭짓고 있는 맨 끝 절의 말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려졌고 각자가 멋대로 사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둠의 그늘이 짙게 덮인 이스라엘의 장래를 보여주며 끝나는 사사기이기에 그 바로 뒤에 수록된 룻기의 이야기는 더 아름답게 빛나고 어두운 이스라엘의 역사에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귀한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룻기는 어떻게 어두워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뚫고 위대한 왕 다윗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와해될 대로 와해된 이스라엘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회복과 민족의 영화를 허락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이 룻기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념적으로 정신적으로 혼란의 극에 달한 암흑기를 맞고 있다고 봅니다.  일부 학문과 기술 분야에서 발군의 역량을 과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오히려 가치전복의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나,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폭력시위자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공공질서의 유지를 책임 맡아 직무에 충실하려 했던 사람들은 범죄자 취급받는 현상이나, 이런 정부의 오랜 방조에 힘입어 버릇이 잘못 든 일부 시위꾼들은 외국에까지 원정을 가서 나라와 국민의 명예를 추락시키는 추태를 보이기에 이른 사태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신적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의 의식이 이러한 상태로 계속된다면 우리의 장래는 이스라엘의 사사시대 말기처럼 암울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했듯이, 우리나라에도 최고 통수권자가 있기는 있어도 그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서 있으나 없으나 한 상태가 되고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겠다고 국민들이 여길 정도가 된다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혼란상태가 오고 말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렇게 암울해 보이는 때라 할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룻기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룻과 같이 충절을 지키는 지극히 작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우리나라와 민족 전체를 위한 하나님의 큰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우쳐주고 계십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위태할수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 충절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충절을 바로 지킬 때에 우리나라와 민족 전체는 오히려 다윗 왕 때 이스라엘이 누린 것과 같은 영화로운 시대를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여전도회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의 여전도회 회원들과 이 나라의 모든 여신도들이 룻과 같이 하나님께 충절을 다함으로써 이 나라와 민족의 희망의 씨앗들이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