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8:11~13, 요한복음 14:6


   인간의 존재에는 나의 뜻이 아닌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타의(他意)요 섭리이다. 그러나 한편 한 목숨을 가지고 한 생애를 자기의지와도 관계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내 인생은 나의 판단과 나의 결심과 나의 계획과 나의 책임 하에 나는 나의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 내어던져진 존재지만 동시에 나는 스스로를 내어던지는 자유와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도 유의하기 때문이다. 돌멩이나 흙과 같은 무 생명(無 生命)의 존재는 다만 “있다”는 차원에서 있다. 돌멩이는 자유가 없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 그저 있을 뿐이다. 풀이나 개 같은 동식물들의 존재는 “자란다”의 차원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은 “있다”의 차원과 “자란 다”의 차원에 속하면서도 “만든 다”의 고차원의 세계에서 살아감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물건을 만들고 문명을 만들고 미래를 계획하며 변화발전을 기하며 인생을 만들어간다. 인간이 동식물과 무생명과 다른 점은 자유가 있고 창조성이 있다는 의지를 알게 한다. 인간은 이성(理性)과 자유와 창조의 주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란 무엇이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이냐? 하는 물음을 물을 줄 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창조자의 지음을 받은 인간은 창조자의 창조의 의도를 깨달아 알아야 하며 창조자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길에 대한 물음을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늘의 지혜와 올바른 의지를 가지고 인생의 옳은 길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 앞에는 옳은 길이 있고 잘못된 길이 있다.

   인생에게는 행복의 길이 있고 불행의 길이 있다. 성공의 길이 있고 실패의 길이 있다. 번영의 길이 있고 멸망의 길이 있다. 사랑의 길이 있고 미움의 길이 있다. 평화의 길이 있고 전쟁의 길이 있다.  우리는 본다.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길을 잃은 등산객이 조난을 당해 죽음을 자처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인생의 일생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길에는 잘못된 길로 가다가 파멸의 궁지에 다 달은 것도 경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길을 갈 때 먼저 갈 곳의 목표와 가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길을 가되 쉬지 않고 가게 된다.  아무리 옳은 길을 찾았다고 해도 자기가 가야 할 길은 자기가 자기 발로 걷지 않으면 자기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또한 길을 잃으면 반드시 알아보고 안내도를 꺼내 보아야 함은 지혜로운 일인 것도  알게 한다.  행복한 길을 찾아 가려면 결코 고달픈 여행을 각오해야 한다.

   행복과 승리의 정상을 오르려면 땀 흘리고 수고하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나그네와 같다고 했던가! 우리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착실하게 걸어가야 한다. 단숨에 천리 길을 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생에게는 지름길이 없다. 분명하게 말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밟아야 할 순서와 절차가 있다. 목표도 중요하지만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과 순서와 절차도 못지않게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길을 안일하게 살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쉽게 빨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앞에 이익추구를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오늘의 세태는 모든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의 이익과 성공의 영달을 위해 눈앞의 이익을 위한 빠른 지름길을 찾고 있다. 우선의 편안하고 높은 자리를 위해 권력에 아부하고 기존의 질서를 무시하고 얌치 같은 행동을 다반사로 하고 있다. 교통체중만 보더라도 길 네거리에서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자기 먼저 빨리 앞서 간다면 불행한 사고는 물론 이곳저곳에서 모든 교통은 마비가 일어날 것 분명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요즘 우리 사회는 질서의식과 절차문화가 엉망이 되어있다. 이것의 사회병폐적 후유증은 말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민생고에 시달려 조국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경제제일주의와 산업사회를 조성하여 명실공이 이를 부추기는 “빨리 빨리 병”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이 병은 모든 일을 빨리빨리 해결하려고 무리하게 결과를 얻으려는 데에서 오는 무서운 끔직한 사고들을 유발하고 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빨리 빨리 병이 사회전반에 질서, 절차문화를 뭉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일은 길을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은 우리 사회를 우리는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안일하게 살려고 하는 잘 못된 범례인 것을 알아야 한다.  옳은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은 지름길로 가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옳은 길은 지름길이 없다. 지난 새해덕담에서도 말 했지만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은 인생 어느 누구도 약속의 실현을 성실히 지키지 않으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인생은 옳은 의지를 가지고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 잘 못 들어선 길에서 다시 돌아서지 않으면 돌아서지 않는 것만큼 그 인생은 손해임을 알아야 한다. 영어 사전에 쓰여진 ‘길’에 대한 낱말이해는 도로, 항로, 도중, 과정, 목표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길의 노선에서 탈선을 하게 되면 엄청난 사고를 야기하고 실패가 올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길에서 탈선하면 어찌 되리라는 이유쯤은 알았으면 한다. 예컨대 바울이 바울선생이 되기 전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길에서 회개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에게서 그가 가는 길을 따라 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한 해를 맞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 한다. 행복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며 행복이 인간의 모든 삶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길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행운은 서로가 다르다는 진리를 터득해야 한다.

   행복은 happiness요 행운은 fortune, luck이다. 행운을 운(運)으로 의미하듯이 행운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요 우연히 좋은 운이 굴러들어 오는 것을 말함이다. 행운은 나의 노력의 산물도 아니요 지혜와 끈기의 결과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행복은 나의 의지와 계획과 노력과 정성으로 쌓아올리는 피와 땀의 결과인 것이다. 행복은 나의 욕구충족의 산물이 아니다. 더 대범한 뜻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 속에 살아가는 인생들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 안에 만남의 약속을 실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생은 만남의 존재이다. 하늘과 땅과 만남 속에 인간이 존재해야 한다. 인간은 ‘있다’, ‘자란다’,는 것만이 아닌 ‘만든 다’ 의 약속의 실현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관계인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 서로의 사람과의 관계, 자연친화적인 관계는 인생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만남이 행복의 길임을 알게 한다.  동서고금의 사상가, 철학자, 윤리학자, 문필가들이 행복론을 갈파했다. 세네카의 행복론,  럿셀의 행복론, 모로와의 행복론, 아랑의 행복론이 있고 톨스토이의 인생론, 파스칼의 빵세의 명상록, 노자의 도덕경, 논어도 모두 넓은 의미의 행복론에 기준 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행복은 믿음의 만남, 너와 나의 깊은 만남, 창조적인 만남, 올바른 만남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인생 일생에 우리는 만남의 길을 통해서 약속된 그 행복이 진정한 행복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 모두에게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 첫째는 안전(안정)의 욕구가 있다. 두 번째는 소속의 욕구이다. 세 번째는 인정의 욕구이다. 네 번째는 새로운 경험의 욕구이다. 다섯 번째는 사랑의 욕구이다. 여섯 번째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인간의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길이 어디에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아실현의 욕구가 무엇인가? 나를 지으신 분에게서만 자아실현의 욕구가 충족 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그 물음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람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그리고 갈 길을 모르는 우리를 향해 부르시는 분에게 고백의 신앙을 갖는다.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저속한 자요 그 희망은 무너진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것의 “‘길’ 을 찾습니다.”

출처/배성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