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왜 나를!   (로마서 11:1~12)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구원문제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미 9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바울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기를 그토록 원하였습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문제로 많은 고심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민 가운데서 그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토기장이가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거기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과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원의 놀라운 진리를 선포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주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놀라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복음을 들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그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11장에 들어와서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는 말로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반드시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다시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이 사실을 이렇게 계속 강조하고 있을까를 우리가 한번 생각하여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 자신이 순수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 났으며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였고 핍박하였지만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복음의 나팔로 사용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엘리야의 예를 들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악명 높은 아합 왕의 시대에 모두가 그 영향을 받아서 바알을 숭배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타락의 길로 걸어감을 보고 낙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뎀 나무 아래에 쓰러져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면서 나를 죽여달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눈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저 불의한 세력들과 싸우는 자가 자기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무엇이라고 응답을 하였습니까? 본문 4,5절에 인용하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으니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실례를 들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들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본문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남은 자"에 대한 확신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다 타락한 것이 아니다. 다 멸망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 중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을 남겨두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남은 칠천명을 가지고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부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니 낙심하지 말아라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이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자기 혼자만 바알의 세력들과 싸우는 줄 알고서 고독감을 느끼며 실망하였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엘리야, 네가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죽었지만 내가 칠천명을 숨겨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머리를 들 수밖에 없는 위로와 능력의 말씀이 아닐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건을 남은 자의 진리에 비추어 보아야 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남은 자의 진리로 우리 나라를 바라보시면 소망이 있습니다. 남은 자의 진리로 우리 교회를 바라보시면 전망이 매우 밝습니다. 남은 자의 진리로 우리 가정을 바라보시고 나의 자식들을 바라보시면 은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남은 자의 진리로 나를 바라보시면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이 용솟음쳐 오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감사와 감격이 메마르지 않는 한 어떠한 어려움이 다가오더라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와 감격이 떠나지 않는 한 무엇을 두려워하겠으며 무엇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이 시간 우리 주위가 어떻게 변하든지간에, 그것이 내 눈으로 보기에는 절망일 수밖에 없고 소망이라고는 도무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에 나를 위하여 남겨두신 자가 있는데 그 남은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진행하고 계심에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면서 사십시오, "아직까지 한국이 망하지 않은 것은 바로 나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있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 가정이 이만큼 살아가는 것은 나 때문이다"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며 하나님이 마지막 날까지 크게 사용하시는 자인 줄 믿습니다. 우리 대성교회에 이러한 믿음을 충만히 가지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만사를 대할 때 살맛이 날 수밖에 없으며 열심히 의욕을 가지고 일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 나라가 부정과 부패가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고 더욱이 선거를 앞두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그 중에는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하나님이 남겨 둔 자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국가와 사회를 보시면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까지 북한에 있는 동족들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관심을 가지지만 저들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을 남겨두었듯이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을 남겨 두시고 마지막에 그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소망과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를 믿을 것 같지 않고 아무리 좋게 생각하여도 그 사람만은 도저히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있습니까? 절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를 제가 이 시간 말씀드리고자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하필이면 왜 나를!" 이라고 정하여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제목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여 보았는지요? 이제 그 수수께끼를 본문말씀을 통하여 찾아보고자 합니다.

5절을 다시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 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 하나님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을 남겨 두었다고 하였는데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놓쳐서는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질 수 없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진리 앞에서 얼마나 많은 위로와 소망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부디 바라는 것은 여러분들도 이러한 위로와 소망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그 분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가지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말씀의 깨달음을 통하여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단지 설교자의 위로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이 시간 참석하신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소망과 위로가 넘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그루터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남은 자를 두시고 그 남은 자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바울만 하더라도 그가 과거에는 핍박자이었고 죄인 중에서도 괴수인 자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모든 생애를 불살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 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은혜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항상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주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고 이마만큼이라도 주님을 위하여 충성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이야말로 제대로 된 믿음입니다. 내가 잘 나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여 지금까지 남았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반역하는 것이요 자연히 교만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남은 자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을 할 때에 더욱 겸손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 함께 뛰는 교회가 되자고 표어를 정하고 온 교우들이 기도하고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지도하면서 때때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온 교회가 함께 뛰자고 하는데 왜 아무개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느냐?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할 분들이 저럴 수 있느냐? 아무리 철야기도를 외치고 새벽기도를 외치지만 왜 참석하지 못하고 있는가? 가장 가까이서 협력을 하여야 할 종들이 왜 이다지도 협력을 하고 있지 못하는가? 나 혼자만 열을 올리고 나 혼자만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목회를 하는 동안 기쁨은 없을 것이며 소망 중에 목회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나 혼자 기도하고 나 혼자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겨 두신 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진대 소망을 가지고 동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망하지 않고 승리만이 보장되어 있음을 알고 우리의 신앙을 계속 정진하여야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소개드렸습니다만 창조적인 소수에 속한 자만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드릴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더욱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자, 7절의 말씀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었지만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도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완악하다는 말은 그 원래의미가 '굳은살이 박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농촌에서 일을 많이 하시는 농부들과 악수를 나눠보면 그 손에 굳은 살이 박혀있어 살갗이 두터워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을 많이 하다보니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고백하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 심령이 완악하게 되어 보기는 보아도 듣기는 들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의 말씀을 들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아무리 권면의 말씀을 들어도 순종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합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은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깨달음이 옵니다. 말씀이 깨달아질 때마다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혀 순종의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사람들은 혼미한 심령이 되어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귀가 막힌 사람들입니다. 구제불능의 사람들입니다. 오죽하면 9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저희의 밥상이 올무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밥상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밤낮없이 추구하는 육신적인 관심사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출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은 사람이 누리는 분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나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밥상이 올무가 되었다고 하였습니까? 저들은 밥상을 제일로 알았습니다. 눈만 뜨면 오직 무엇을 먹고 마시며 즐기며 세상적으로 성공할 것인가로 생각이 가득찬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원하는대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정말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저들에게 올무가 되었고 거치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말세가 되면 밥상이 올무가 되어 망할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경고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4:38,39절을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경고하신 말씀입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육신적인 생활이 전부인 줄 알고 거기에만 얽매여 사는 사람들의 무지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는 사람이요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혹시나 여러분들의 삶이 이렇지나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일주일의 삶이 밥상이 진수성찬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까? 그러나 이 시간 심각하게 깨달아야 할 말씀은 그 진수성찬의 밥상이 여러분들을 망하게 하는 올무가 되지나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지난 일주일의 삶이 초라한 밥상으로 인하여 염려하며 머리를 들지 못한 삶을 살았다할지라도 그 초라한 밥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었고 하나님께 더욱 무릎을 꿇었다면 그 초라한 밥상이 오히려 복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어떠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통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면 분명 그 밥상은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올무가 되어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다. 자 저는 이제 설교를 마치면서 왜 하나님이 하필이면 나 같은 자를 남겨두셨는가 하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심령이 뜨겁게 되어지기를 소원하여 봅니다.

우리는 곧잘 왜 하나님은 저런 고약한 사람들을 처치하지 않으십니까? 아니 저 사람은 나보다도 낳은 것이 없는데 어찌 나보다 잘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 원수가 어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지만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자존심 상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항의를 하여 보지나 않았습니까? 내가 이렇게 거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바르게 살고 있지만 저 패역무도한 사람들 때문에 일이 안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셨으며 나 같은 용서받지 못할 괴수를 인하여 피를 흘려주셨으며 더군다나 귀한 직분까지 허락하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은 것이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내가 목사 된 것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눈이 멀어셔도 한참 멀어셨지 어떻게 나 같은 것을 구원하여 주셨습니까? 이것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왜 저 사람을 완악하게 만드셨습니까? 왜 저 악한 사람을 택하셨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나를 택하여 이 마지막 시대에 남겨두셨습니까? 왜 나보다 잘나고 훌륭한 사람들 세상 떠난 자도 많이 있는데 어떻게 하려고 나 같은 자를 남겨 두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기가 막힌 일이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고 엎드리는 사람이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성도가 진짜 성도이며 겸손히 세상을 이기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대성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일하고자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싸우는 존재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의 850명과 같은 세력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남겨 둔 소수의 무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이렇게 승리하게 하셨다는 증거를 받아내시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승산이 없고 도저히 소망이 없는 나를 택하시고 마지막 날 쓰시기 위하여 남겨두셨습니까? 하고 날마다 벅찬 감격과 감사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서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홍근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