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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 (창11:27-12:5)
어떤 분야에 있어서 그것의 흐름을 주도해 가는 지점을 ‘일번지’라고 말합니다. 보통 서울시 종로구를 ‘정치일번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이곳이 조선시대부터, 가깝게는 한국근대사와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역사에서 정치적인 중심 무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머일번지’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1990년대 모 방송국에서 만든 개그프로그램이었는데, 개그에 있어서는 그곳이 원조이고, 개그를 주도해 간다는 의도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 외에는 많은 일번지가 주변에 보입니다. 식당과 음식의 일번지가 가장 많은 것을 비롯하여 부동산일번지, 이사일번지, 현수막일번지 등이 생겨 모두가 으뜸이고, 앞서간다는 자부심을 갖는 것을 봅니다. 가만히 보면 믿음에 있어서도 일번지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일번지가 어디일까요? 성경에서 인정하는 믿음의 원조가 누구일까요? 바로 본문이고, 여기에 중심이 되는 아브라함입니다. 물론 아브라함 이전에도 믿음의 사람을 소개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창세기 12장이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말할 때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 오늘은 아벨과 에녹과 노아에 이어 아브라함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의 사람일까요? 오늘 그것을 그가 부름을 받는 본문을 통해 그의 믿음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말씀을 좇아가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 1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다가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무엇일까요?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믿음에서 우선적으로 돋보이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이것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곧 그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의 말씀에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사람을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자를 믿는 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는 자의 우선적인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고, 그 말씀을 좇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가기 위해서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는 자들이기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면서 살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좇아가기 위해 필요한 다른 하나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영혼의 양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밥만 먹고사는 자가 아닙니다. 말씀을 먹고사는 자들입니다. 하루라도 음식이 우리 몸에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 육신이 지탱하거나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잘 먹는 자가 건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을 먹지도 않고 우리 신앙이 유지되고,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미국의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말 가운데 ‘거북이 교인’ (Turtle Christia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는 9일간 먹지 않고 살 수 있고, 개는 20일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500일을 먹지 않아도 살고, 견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는 신자를 거북이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혹시 거북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시편 119편 10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캄캄한 우리 앞길에 환한 등불과 빛처럼 이끄는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나와 관계를 맺고 언제나 말씀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말씀을 따라 가면 살고, 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는 자는 말씀을 듣는 자요, 먹는 자요, 말씀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나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확신을 갖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참으로 돋보이는 믿음은 그가 무슨 일이든지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확신이 참 중요합니다. 확신이 곧 믿음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있느냐는 곧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사느냐와 같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확신이 있는 사람이고, 확신이 있는 사람을 우리는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믿음의 소유자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보다도 자손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자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자녀 때문에 울고 웃는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시험을 통과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을 잘 압니다. 본문도 그것의 중요함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가 처음 부름을 받을 때 선뜻 하나님을 따른 동기가 바로 자녀와 후손에 대한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12장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로 인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으로 번성케 하겠다는 약속이고, 아울러 후손이 잘 되고, 그들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아브라함이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11장 30절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늘의 별은 고사하고 대를 이을 아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곧 아브라함이 지금 확신을 갖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더 어려웠던 것은 지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라는 말의 히브리어의 뜻을 살펴보면 그 속에는 그녀가 근원적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태임을 암시합니다. 사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는 것처럼 당시 사래도 그랬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갖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아브라함이 확신을 갖지 못할 상황은 이미 그의 나이가 75세라는 고령이었기 때문입니다. 12장 4절에서 이것을 의미 있게 강조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중심이기에 연대나 숫자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언급되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기 아브라함의 나이를 유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자녀와 후손에 대한 확신을 갖기가 힘들었던 상황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여건으로 보아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뛰어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확신을 가진 것에 있습니다. 상황이나 인간적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 가능하다,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서 돋보이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곧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확신을 갖지 못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의심하면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로서 모든 일에 의심이나 염려를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확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처럼 확신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결단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가장 귀하게 본받아야 할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결단’에 있습니다. 말씀이 중요하고, 확신을 갖는 것도 정말 귀한 일이지만, 결국 신앙은 결단과 행동을 통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먼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 큰 결단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말씀은 하란이 아니라 고향 우르에서 들은 말씀입니다. 창세기 15장 7절과 특히 사도행전 7장 2절에 나타난 스데반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부터 이미 나타나셨고 그를 지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11장 31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에 이끌려 고향을 떠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여 고향을 떠나게 했던 원동력은 아브라함에게 있던 것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으로 아버지를 설득하여 온 가족이 함께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서 우선적으로 돋보이는 결단의 믿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보통 결단입니까? 자기가 태어나 자라고 살던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닙니다. 지금도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의 결단을 귀하게 봅니다만 당시는 더 힘든 결단입니다. 보통 가족과 혈족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고대근동지방의 문화적 특성으로 볼 때 대가족이 마을을 벗어나고, 나라를 바꾸어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면에서 뛰어납니다.
더 놀라운 결단은 하란을 떠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결단으로 아버지 데라는 온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간기착지라고 할 수 있는 하란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데라의 가족은 하란을 지나가지 않고 거기에 정착하고 말았습니다. 11장 31절에 나오는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다’는 말은 자리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하란에서 그들은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어쩌면 대를 이어 살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목적지는 가나안이었는데 하란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곳이 먹고살기에 충족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우상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하란에 와서 잠시 머물다가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는데 하란이 살기가 좋고,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도 잘 되자 가나안을 잊어버리고 하란에서 눌러 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세월을 꽤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 그것을 기점으로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어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고향을 떠나는 것도 결단이지만 삶에서 익숙한 것, 편하고 즐겁고 좋은 생활에서 떠나는 것은 더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장사를 통해 돈버는 재미가 솔솔 붙게 되면 누구라도 그 좋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가 힘듭니다.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아브라함은 하란을 훌훌 털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익숙한 것, 좋은 자리, 편안한 여건을 뒤로하고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놀라운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결단이 돋보이는 것은, 그가 가는 가나안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분명 하란보다 낯선 땅이고, 고향보다 정착하여 살기가 매우 힘든 곳입니다. 여러 위험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도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길입니다. 이런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간다는 것은 보통 믿음의 결단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특히 결단의 믿음입니다. 고향을 떠난 결단, 익숙하고 좋은 환경을 버리고 떠나는 결단,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결단입니다. 결국 이런 결단의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의 조상, 원조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결단으로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누렸고 복의 근원과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곧 결단입니다. 결단이 없으면 믿음은 역사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믿음은 지식이나 감정이 전부가 아닙니다. 의지까지 가야 합니다. 결국 결단의 믿음이 우리를 성숙한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세워 가는 것입니다. 버릴 것 버리고, 끊을 것 끊고, 할 것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과감히 하지 않는 신앙과 믿음의 결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결단의 믿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결단이 결국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말씀을 따라가는 믿음, 확신을 갖는 믿음, 결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런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며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어떤 분야에 있어서 그것의 흐름을 주도해 가는 지점을 ‘일번지’라고 말합니다. 보통 서울시 종로구를 ‘정치일번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이곳이 조선시대부터, 가깝게는 한국근대사와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역사에서 정치적인 중심 무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머일번지’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1990년대 모 방송국에서 만든 개그프로그램이었는데, 개그에 있어서는 그곳이 원조이고, 개그를 주도해 간다는 의도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 외에는 많은 일번지가 주변에 보입니다. 식당과 음식의 일번지가 가장 많은 것을 비롯하여 부동산일번지, 이사일번지, 현수막일번지 등이 생겨 모두가 으뜸이고, 앞서간다는 자부심을 갖는 것을 봅니다. 가만히 보면 믿음에 있어서도 일번지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일번지가 어디일까요? 성경에서 인정하는 믿음의 원조가 누구일까요? 바로 본문이고, 여기에 중심이 되는 아브라함입니다. 물론 아브라함 이전에도 믿음의 사람을 소개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창세기 12장이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말할 때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 오늘은 아벨과 에녹과 노아에 이어 아브라함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의 사람일까요? 오늘 그것을 그가 부름을 받는 본문을 통해 그의 믿음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말씀을 좇아가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 1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다가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무엇일까요?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믿음에서 우선적으로 돋보이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이것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곧 그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의 말씀에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사람을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자를 믿는 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는 자의 우선적인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고, 그 말씀을 좇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가기 위해서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는 자들이기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면서 살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좇아가기 위해 필요한 다른 하나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영혼의 양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밥만 먹고사는 자가 아닙니다. 말씀을 먹고사는 자들입니다. 하루라도 음식이 우리 몸에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 육신이 지탱하거나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잘 먹는 자가 건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을 먹지도 않고 우리 신앙이 유지되고,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미국의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말 가운데 ‘거북이 교인’ (Turtle Christia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는 9일간 먹지 않고 살 수 있고, 개는 20일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500일을 먹지 않아도 살고, 견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는 신자를 거북이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혹시 거북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시편 119편 10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캄캄한 우리 앞길에 환한 등불과 빛처럼 이끄는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나와 관계를 맺고 언제나 말씀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말씀을 따라 가면 살고, 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는 자는 말씀을 듣는 자요, 먹는 자요, 말씀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나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확신을 갖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참으로 돋보이는 믿음은 그가 무슨 일이든지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확신이 참 중요합니다. 확신이 곧 믿음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있느냐는 곧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사느냐와 같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확신이 있는 사람이고, 확신이 있는 사람을 우리는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믿음의 소유자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보다도 자손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자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자녀 때문에 울고 웃는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시험을 통과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을 잘 압니다. 본문도 그것의 중요함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가 처음 부름을 받을 때 선뜻 하나님을 따른 동기가 바로 자녀와 후손에 대한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12장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로 인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으로 번성케 하겠다는 약속이고, 아울러 후손이 잘 되고, 그들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아브라함이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11장 30절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늘의 별은 고사하고 대를 이을 아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곧 아브라함이 지금 확신을 갖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더 어려웠던 것은 지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라는 말의 히브리어의 뜻을 살펴보면 그 속에는 그녀가 근원적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태임을 암시합니다. 사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는 것처럼 당시 사래도 그랬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갖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아브라함이 확신을 갖지 못할 상황은 이미 그의 나이가 75세라는 고령이었기 때문입니다. 12장 4절에서 이것을 의미 있게 강조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중심이기에 연대나 숫자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언급되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기 아브라함의 나이를 유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자녀와 후손에 대한 확신을 갖기가 힘들었던 상황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여건으로 보아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뛰어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확신을 가진 것에 있습니다. 상황이나 인간적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 가능하다,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서 돋보이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곧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확신을 갖지 못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의심하면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로서 모든 일에 의심이나 염려를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확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처럼 확신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결단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가장 귀하게 본받아야 할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결단’에 있습니다. 말씀이 중요하고, 확신을 갖는 것도 정말 귀한 일이지만, 결국 신앙은 결단과 행동을 통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먼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 큰 결단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말씀은 하란이 아니라 고향 우르에서 들은 말씀입니다. 창세기 15장 7절과 특히 사도행전 7장 2절에 나타난 스데반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부터 이미 나타나셨고 그를 지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11장 31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에 이끌려 고향을 떠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여 고향을 떠나게 했던 원동력은 아브라함에게 있던 것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으로 아버지를 설득하여 온 가족이 함께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서 우선적으로 돋보이는 결단의 믿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보통 결단입니까? 자기가 태어나 자라고 살던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닙니다. 지금도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의 결단을 귀하게 봅니다만 당시는 더 힘든 결단입니다. 보통 가족과 혈족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고대근동지방의 문화적 특성으로 볼 때 대가족이 마을을 벗어나고, 나라를 바꾸어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면에서 뛰어납니다.
더 놀라운 결단은 하란을 떠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결단으로 아버지 데라는 온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간기착지라고 할 수 있는 하란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데라의 가족은 하란을 지나가지 않고 거기에 정착하고 말았습니다. 11장 31절에 나오는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다’는 말은 자리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하란에서 그들은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어쩌면 대를 이어 살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목적지는 가나안이었는데 하란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곳이 먹고살기에 충족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우상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하란에 와서 잠시 머물다가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는데 하란이 살기가 좋고,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도 잘 되자 가나안을 잊어버리고 하란에서 눌러 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세월을 꽤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 그것을 기점으로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어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고향을 떠나는 것도 결단이지만 삶에서 익숙한 것, 편하고 즐겁고 좋은 생활에서 떠나는 것은 더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장사를 통해 돈버는 재미가 솔솔 붙게 되면 누구라도 그 좋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가 힘듭니다.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아브라함은 하란을 훌훌 털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익숙한 것, 좋은 자리, 편안한 여건을 뒤로하고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놀라운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결단이 돋보이는 것은, 그가 가는 가나안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분명 하란보다 낯선 땅이고, 고향보다 정착하여 살기가 매우 힘든 곳입니다. 여러 위험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도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길입니다. 이런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간다는 것은 보통 믿음의 결단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특히 결단의 믿음입니다. 고향을 떠난 결단, 익숙하고 좋은 환경을 버리고 떠나는 결단,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결단입니다. 결국 이런 결단의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의 조상, 원조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결단으로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누렸고 복의 근원과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곧 결단입니다. 결단이 없으면 믿음은 역사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믿음은 지식이나 감정이 전부가 아닙니다. 의지까지 가야 합니다. 결국 결단의 믿음이 우리를 성숙한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세워 가는 것입니다. 버릴 것 버리고, 끊을 것 끊고, 할 것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과감히 하지 않는 신앙과 믿음의 결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결단의 믿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결단이 결국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말씀을 따라가는 믿음, 확신을 갖는 믿음, 결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런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며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