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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포착을 잘 하십시오 (몬 1:8-12)
(몬 1:8)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몬 1: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몬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몬 1:11)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몬 1:12)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얼마전 우리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뉴스는 각종 케이트에 관한 뉴스들입니다. 그런데 그 뉴스의 중요한 쟁점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이 그런 케이트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라고 높은 자리에 앉혀 두었는데 그 기회를 잘 못 사용하여 일신을 망치는 결과를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빌레몬이란 사람은 골로새 교회의 교인으로 바울의 제자입니다. 그는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전도할 때 회심한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오네세모는 매우 재능이 뛰어난 젊은 사람이었는데 아마 로마 군대의 침략 당시 노예가 된 것 같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가지고 로마로 도망갔다가 거기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을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오네시모도 바울 만난 후 전도를 받고 개종하여 좋은 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개종한 오네시모에게 바울은 본 서신 서를 가지고 주인에게 돌아가게 했습니다. 바울은 편지에서 도망갔던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영접할 것을 빌레몬에게 부탁합니다.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복음을 위하여 유익 한자가 되었기에, 이제는 종의 위치가 아닌 사랑 받는 형제로 두어 복음의 일꾼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오네시모를 향한 관심은 18절에서 그 절정을 이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인하여 잃은 손실은 자신이 보장하겠다고 말합니다. 오네시모를 위하여 자신이 보상하겠다는 바울의 친필은 법적으로 유효한 지불 보증 각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의 말에 순종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확신하되 자신이 요청한 내용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위를 가지고 담대하게 권면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권면은 명령이 아니고 따뜻한 사랑의 간청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상은 무익하여 쓸모 없는 오네시모 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받는 형제가 되게 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백성이 누리는 축복은 무조건적이며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 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누구나 동일하며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이기에 모두가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까?
⑴,믿음의 기회(8-10)
바울과 오네시모가 만난 것은 로마 감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 경위는 각각 달랐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오네시모는 주인의 집에서 재산을 훔쳐 도망친 종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위로 만났던지 간에 그들의 만남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로마의 감옥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감옥에는 죄수들이 살 듯이 이 세상에는 각종 죄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하여 그들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로마의 감옥에서도 그는 비교적 많은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것은 그대로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난 곳이 로마 옥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권한다고 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바울의 옥중 전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기회든지 꼭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놓치면 실패하고 그 기회를 잘 포착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오네시모는 골로새 교회의 중심 인물인 빌레몬의 종이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그러한 좋은 조건 속에서도 예수를 믿지 아니했습니다. 도리혀 잘 믿는 주인의 재산을 훔쳐 로마로 도망했든 사람입니다. 로마에 가기는 했지만 돈이 다 떨어지고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이때 그는 로마 옥중에 있는 바울을 찾아갔고 거기서 전도를 받아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즉 오네시모는 실패하고 앞길이 캄캄했을 때 변화되는 좋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⑵,변화의 기회(11)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으며 주인에게 괴로운 존재로 도망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노예들이 도망할 때는 주인의 재산을 도적질하거나 주인의 처를 강간하거나 또한 주인의 자녀를 살해하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몬1:18절을 보면 오네시모는 아마 주인의 돈을 도적질한 듯 합니다. 이처럼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는 노예로서 주인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주인의 재산까지 도적질한 자로서 주인에게 있어 무익한 종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나기 전의 옛 사람은 자만 속에 사는 듯 싶으나 실상 궁극적으로 무익한 존재와 다름이 없습니다.
주인에게서 떠나 로마까지 도주한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이제 회개하여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법률은 도주한 노예가 잡히는 경우 그 생사 권은 종의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이미 회개하고 거듭났으므로 새 사람이 되었으나 그의 주인 빌레몬으로부터 법적인 용서는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육신의 상전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냄으로서 용서를 받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회개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오네시모에게는 하나님의 용서뿐 아니라 그와 더불어 사람에게 구해야 할용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는 자에게는 사람을 향한 용서도 당연히 따라야 합니다.
주인에게 해를 끼치고 도망한 노예로 무익한 종이었던 오네시모는 이제 회개하여 거듭남으로 그의 이름의 원 의미인 '유익한' 사람이란 뜻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오네시모의 육체적인 상전인 빌레몬에게만이 아니라 빌레몬에게는 이제 충성된 종이 됨은 물론 바울에게도 빌레몬 대신 바울을 섬기는 자로 유익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통해 참된 믿음을 가짐으로 중생 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의 집에 있을 때 주인의 집에서 교회가 개척되고 예배를 드리는데도 예수를 믿지 아니한 것은 그 책임에 주인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에게 있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본문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전에는 무익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전에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은 후에 자기가 잘 못살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즉 실패하고 앞길이 캄캄할 때 변화되는 좋은 기회로 삼았
습니다.
⑶,심복의 기회(12)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갇힌 자가 되었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매임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그는 갇힌 중에서도 개인 전도를 통하여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를 거듭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회개 후 바울에게 유익한 존재가 된 오네시모를 신실한 성도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되 다시 돌아와 복음을 위하여 갇힌 자신을 돕는 자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음 사역을 돕는 빌레몬을 종용했던 것입니다.
당시 바울이 갇힌 옥은 자기가 세를 내여 살던 집으로 비교적 자유가 있었으며 따라서 그에게는 자신의 신변을 돌봐 줄 봉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회심한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 회개한 신실한 성도 빌레몬의 종이었으므로 빌레몬의 자발적인 선행을 통해 오네시모를 자신의 수종 자로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필요로 인하여 빌레몬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맡기며 그의 승낙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대 사도이며 또 자신의 전도로 그리스도 인이 된 빌레몬이었지만 바울은 고자세가 아닌 예의바른 태도로 오네시모의 주인의 뜻을 존중하며 자신의 필요를 설명했습니다.
심복은 내 심장을 뜻하는 말인데 이 낱말의 원어 동사형은 '긍휼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복으로 말한 것은 회개하고 거듭난 오네시모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현입니다. 당시 사회의 형편으로는 종에 대한 인권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한 종이 된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신앙적으로 바울의 친자식처럼 맞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용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른 바울의 신앙적인 인격을 나타내 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는 단지 그리스도 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심복으로 계속 그의 곁에 두고 싶어했고 종으로서가 아니라 형제의 관계로 두고 싶어했으며,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할 만큼 소중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이제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사랑은 그 영혼을 구원시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오네시모는 어느덧 바울의 심복이 되어 있었습니다.
심복이란 내장이란 말로서 마음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는 오네시모에게 속을 몽땅 빼 줄 정도로 마음을 쏟았습니다. 동시에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무조건 복종할 정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옥중에서 자기를 시중 들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네게로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고 본문이 밝혀 줍니다. 결국 빌레몬서와 함께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다시 바울 사도에게 보내어 시중들게 하므로 바울 사도를 따라 서반아 전도에 동행하였고 그후에 바울과 함께 로마로 돌아와서 함께 순교할 만큼 그는 바울의 심복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 님의 심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