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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성의 회복 (롬 14:17)
중국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차이 없다'라는 말을 잘 사용한다고 합니다. 한 집에 아버지가 아파서 아들에게 의사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 아들이 수의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왜 수의사를 데리고 왔냐고 하니까 "아버지, 수의사나 의사나 별 차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위문한 사람들이 안됐다고 하니까 그 아들은 "죽으나 사나 별 차이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장춘에서 하얼빈까지 만주 벌판을 잇는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그 고속도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고속도로였습니다. 버스도 달립니다. 승용차도 달립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자전거도 달립니다. 경운기도 달립니다. 마차도 달립니다. 온갖 것들이 달리는 고속도로입니다. 경운기나 자전거는 승용차에 비하면 그 속도가 도저히 경쟁이 안됩니다. 그래서 승용차의 속도로 자전거도 피하고 경운기도 피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기준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나라에는 엄격한 기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마태복음 25장29절에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무엇이 있다는 것이고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물질이나 분량이 아니라 가치, 기준, 질서, 법칙같은 것을 말합니다. 가치가 있느냐? 기준이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기준이 있는 자는 더 얻고 기준이 없는 자는 있는 것도 잃어버린다는 말씀입니다.
결혼식장의 꽃꽂이를 보면 뒤에 큰 틀이 있습니다. 이 큰 틀에 꽃을 꽂아 만듭니다. 이 틀이 없으면 꽃이 붙어 있지도 않고 모양을 낼 수도 없습니다. 그 틀과 같은 것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라고 부정적인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다, 물질 문제가 아니다, 사람 문제가 아니다 즉 이 세상 것이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문제는 먹고 마시는 것 가지고 변명할 수 없고 합리화 할 수 없고, 먹고 마시는 것 가지고 믿음을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한 것을 역으로 '이것이다'라고 하며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신앙문제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이 되고 안 되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신의 문제가 영적인 기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육신의 문제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가치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것과 지상의 가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것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 땅의 것도 나를 중심으로 하느냐 아니면 남을 중심으로 하느냐에 따가 차이가 납니다. 나를 위한 일과 남을 생각하고 하는 일은 서로 다릅니다.
기준의 가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나미의 관찰이 굉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설교를 할 때 성경을 가지고 합니다만 나나미는 로마인의 역사를 가지고 지구촌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 속의 들을만한 이야기를 이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집트는 피라밋이라는 거대하고 놀라운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세계 어느 사람도 피라밋 아래 가면 기가 다 죽을 정도로 그 돌무덤의 규모가 대단합니다. 룩소에 가면 그 신전 왕궁터는 형언을 못합니다. 그 규모를 보면 평균 3톤이상의 돌이 280만개로 묶어진 것이 피라밋입니다. 평균무게가 3톤이 넘고 작은 것은 1톤에서 큰 것은 20톤이 넘는 그런 돌로 형성된 것입니다. 이집트 문화는 거대한 문화입니다. 피라밋, 스핑크스, 신전 왕궁 등 말로 다 못합니다. 그런데 이집트 문명은 자기 나라를 자랑하는데 그렇게 거대한 힘을 소모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중요한 역사관을 붙잡고 일을 했습니다. 길을 닦았습니다.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를 통한다'라는 격언이 있듯이 로마의 도로는 남이 쓰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나라도 다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로마 역사관의 정치이념은 세계를 향한 개방 즉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를 이집트보다 강한 나라로 만든 길이 되었습니다. 이 길을 닦는 문화가 세계를 정복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나라도 길을 닦는 것이 국가발전과 정비례합니다. 이제 앞으로 2010년을 전후로 해서 우리나라도 동서남북으로 바둑판처럼 형성이 됩니다. 서울도 외곽도로와 도심도로가 아주 편리하게 형성되고 이제 경부, 호남의 고속전철화가 되면 승용차, 기차, 고속철도, 고속버스, 비행기를 통한 입체적인 교통망이 형성되는 것이 불과 5∼10년 안에 이뤄집니다. 어마어마한 개념이 이 도로개념입니다.
로마가 도로를 닦았다는 것 때문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라는 역사의 설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을 할 때에 나를 위한 것보다는 남을 위한 것이 가치가 높고, 이 세상의 것을 위한 것보다 하늘나라를 위한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 역사가 우리 앞에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가 길을 닦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가 피라밋을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형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이 땅을 위한 것입니다. 왕을 위한 것입니다.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에 주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이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바랍니다.
의를 행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의'라고 했습니다. 이 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의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주심으로 우리가 의를 가지게 됩니다. 의라는 것은 관계성입니다. '내가 의롭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 내가 의로운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 관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관계가 있는 사람은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의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불리한 것을 유리하게, 슬픈 것을 기쁘게, 실패를 성공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어떤 동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지금 살아났다면 거기에는 살아날 수 있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된 것은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특사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자랑스러운 상품으로 휴대폰이 있습니다. 조금 지나니까 폴더형으로, 칼라로, 16화음에서 42화음으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휴대폰이 국가경제의 효자노릇을 합니다. 수출이 100억불이 넘었습니다. 중국대륙을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며 뻗어가고 있습니다.
평강을 누리자
그리고 가전제품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해외에 가서 휴대폰이나 가전제품을 사오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외제를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승용차도 굉장히 발전해 갑니다. 기발한 신제품이 막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구도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도 새것이 나오면 팔린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태리가 가장 사치성 있는 민족이다'라고 합니다. 왜 이태리가 명품이 많습니까? 사치성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나라 국민이라고 합니다. 한국인들도 사치성이 굉장합니다.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사치성은 나라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으로 바뀌는 기술입니다. 우리처럼 새것 좋아하는 심성이 없으면 휴대폰 시장의 형성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치성을 너무 비난할 것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에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빨리 빨리하는 것이 기술개발에 도입이 되어서 앞질러 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모두 관계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사치성을 경제원리로 역이용할 때 국가경쟁력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나 국가경제 개발과는 상관없이 사치로 끝나면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이라는 개념도 관계성을 가집니다. 지금 북한이 성명을 발표하는데 자신의 독자적인 발표가 아닙니다. 미국을 향해 노리는 것, 남한을 위해 노리는 것, 우방을 위해 노리는 치밀한 계산 하에 있는 것입니다. 평강이라는 이것이 한반도의 평화라는 것 안에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줄 것을 주어야 평화가 옵니다. 빚이 있는데 빚을 안 갚으면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줄 것을 주고 평화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있지 않으면 국제관계가 깨어집니다.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사죄'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죄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유지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그 평강은 사죄로 가능합니다. 사죄를 주시는 이 은혜를 입어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신인관계에도 주고받는 영적인 거래가 있어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에베소서 2장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했습니다.
막힌 담이 헐어져야 평화가 가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속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용서함을 받아야 평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평화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희락을 누리자
그 다음에 희락도 관계성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기쁨이라는 것도 나만을 위한 기쁨은 가치가 없습니다. 지금 기쁜 것도 별 가치가 없습니다. 또 기뻐했는데도 열매가 없는 기쁨도 많습니다. 여러분, 술판에서 희희낙락 하는 웃음은 술 깨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익한 기쁨입니다. 결과가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관계성을 가지면 나만의 기쁨이 아니고 모두의 기쁨이 됩니다. 가족이 기뻐하고 친구가 기뻐하고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합니다.
호주 시드니에서 이형택 선수가 아디다스컵 테니스에서 우승을 했는데 이형택의 기쁨은 그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왜 그의 우승이 그렇게 기쁩니까? 그것은 관계성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만의 기쁨이 아닌 영원한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은 결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역사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말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도 아래서 의와 평강과 희락은 사람이 아무리 얻으려고 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사랑으로 긍휼로 역사하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에 우리가 믿음으로 아멘하는 것, 헌신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령이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대표선수가 되자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있는 이 세 가지 조건은 아주 불변하는 조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과 관계성과 성령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에서 이 세 가지 관계성을 회복한 의를 행하는 그리스도인, 평강을 누리는 그리스도인, 희락을 누리는 그리스도 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이 세 가지 관계성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이 손해를 보거나 망가지는 법이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필요도구이지 기준이 아닙니다. 절대로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영적인 것을 변명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뿐이지 기준은 아닙니다.
TV 스포츠에서 우리나라와 폴란드의 월드컵 예선전을 방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요약한 내용을 봤는데 그 게임을 보고 새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첫 게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 2대0으로 이겼습니다. 또 첫 1승 게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게임을 이김으로 16강까지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도 관전을 했습니다. 그 선수들이 골을 넣고 기뻐하는 것, 관중이 즐거워하는 것, 대통령까지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골 넣은 선수가 기쁩니까? 관중이 기쁩니까? 골을 넣은 선수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왜 기뻐합니까? 골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 선수들이 우리 사천만 백성들을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늘 남이 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신앙인이 있고, 자신이 골을 넣어 즐거워하는 신앙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할 때 제발 대표선수로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대표선수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히딩크 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십니다. 열 두명 선수를 뽑아서 온 세계 역사를 열광시키는 일을 주님이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열광시키는 데에는 대표선수만 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도 대표선수가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를 열광시킬 수 있는 대표선수가 우리 안에도 일어나기를 바립니다. 관중으로서의 대표선수가 아니라 대표선수로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신앙인들을 보면 이런 유형이 있습니다. 아기 같은 신앙인이 있습니다. 돌을 갓 지난 아기는 귀엽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기본적으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입니다. 애들은 놀자고 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놉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환자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환자는 위로를 받아야 하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병원입니다. 교회는 약한 자를 위로하고 치유받고 변호합니다. 우리가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입원이 있으면 퇴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입원만 계속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위로해야 하고 돌봐줘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은 국가대표같은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국가대표 같은 신앙인으로 살다가는 멋있는 이 시대의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중국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차이 없다'라는 말을 잘 사용한다고 합니다. 한 집에 아버지가 아파서 아들에게 의사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 아들이 수의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왜 수의사를 데리고 왔냐고 하니까 "아버지, 수의사나 의사나 별 차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위문한 사람들이 안됐다고 하니까 그 아들은 "죽으나 사나 별 차이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장춘에서 하얼빈까지 만주 벌판을 잇는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그 고속도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고속도로였습니다. 버스도 달립니다. 승용차도 달립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자전거도 달립니다. 경운기도 달립니다. 마차도 달립니다. 온갖 것들이 달리는 고속도로입니다. 경운기나 자전거는 승용차에 비하면 그 속도가 도저히 경쟁이 안됩니다. 그래서 승용차의 속도로 자전거도 피하고 경운기도 피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기준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나라에는 엄격한 기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마태복음 25장29절에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무엇이 있다는 것이고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물질이나 분량이 아니라 가치, 기준, 질서, 법칙같은 것을 말합니다. 가치가 있느냐? 기준이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기준이 있는 자는 더 얻고 기준이 없는 자는 있는 것도 잃어버린다는 말씀입니다.
결혼식장의 꽃꽂이를 보면 뒤에 큰 틀이 있습니다. 이 큰 틀에 꽃을 꽂아 만듭니다. 이 틀이 없으면 꽃이 붙어 있지도 않고 모양을 낼 수도 없습니다. 그 틀과 같은 것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라고 부정적인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다, 물질 문제가 아니다, 사람 문제가 아니다 즉 이 세상 것이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문제는 먹고 마시는 것 가지고 변명할 수 없고 합리화 할 수 없고, 먹고 마시는 것 가지고 믿음을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한 것을 역으로 '이것이다'라고 하며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신앙문제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이 되고 안 되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신의 문제가 영적인 기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육신의 문제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가치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것과 지상의 가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것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 땅의 것도 나를 중심으로 하느냐 아니면 남을 중심으로 하느냐에 따가 차이가 납니다. 나를 위한 일과 남을 생각하고 하는 일은 서로 다릅니다.
기준의 가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나미의 관찰이 굉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설교를 할 때 성경을 가지고 합니다만 나나미는 로마인의 역사를 가지고 지구촌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 속의 들을만한 이야기를 이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집트는 피라밋이라는 거대하고 놀라운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세계 어느 사람도 피라밋 아래 가면 기가 다 죽을 정도로 그 돌무덤의 규모가 대단합니다. 룩소에 가면 그 신전 왕궁터는 형언을 못합니다. 그 규모를 보면 평균 3톤이상의 돌이 280만개로 묶어진 것이 피라밋입니다. 평균무게가 3톤이 넘고 작은 것은 1톤에서 큰 것은 20톤이 넘는 그런 돌로 형성된 것입니다. 이집트 문화는 거대한 문화입니다. 피라밋, 스핑크스, 신전 왕궁 등 말로 다 못합니다. 그런데 이집트 문명은 자기 나라를 자랑하는데 그렇게 거대한 힘을 소모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중요한 역사관을 붙잡고 일을 했습니다. 길을 닦았습니다.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를 통한다'라는 격언이 있듯이 로마의 도로는 남이 쓰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나라도 다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로마 역사관의 정치이념은 세계를 향한 개방 즉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를 이집트보다 강한 나라로 만든 길이 되었습니다. 이 길을 닦는 문화가 세계를 정복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나라도 길을 닦는 것이 국가발전과 정비례합니다. 이제 앞으로 2010년을 전후로 해서 우리나라도 동서남북으로 바둑판처럼 형성이 됩니다. 서울도 외곽도로와 도심도로가 아주 편리하게 형성되고 이제 경부, 호남의 고속전철화가 되면 승용차, 기차, 고속철도, 고속버스, 비행기를 통한 입체적인 교통망이 형성되는 것이 불과 5∼10년 안에 이뤄집니다. 어마어마한 개념이 이 도로개념입니다.
로마가 도로를 닦았다는 것 때문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라는 역사의 설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을 할 때에 나를 위한 것보다는 남을 위한 것이 가치가 높고, 이 세상의 것을 위한 것보다 하늘나라를 위한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 역사가 우리 앞에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가 길을 닦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가 피라밋을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형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이 땅을 위한 것입니다. 왕을 위한 것입니다.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에 주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이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바랍니다.
의를 행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의'라고 했습니다. 이 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의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주심으로 우리가 의를 가지게 됩니다. 의라는 것은 관계성입니다. '내가 의롭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 내가 의로운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 관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관계가 있는 사람은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의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불리한 것을 유리하게, 슬픈 것을 기쁘게, 실패를 성공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어떤 동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지금 살아났다면 거기에는 살아날 수 있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된 것은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특사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자랑스러운 상품으로 휴대폰이 있습니다. 조금 지나니까 폴더형으로, 칼라로, 16화음에서 42화음으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휴대폰이 국가경제의 효자노릇을 합니다. 수출이 100억불이 넘었습니다. 중국대륙을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며 뻗어가고 있습니다.
평강을 누리자
그리고 가전제품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해외에 가서 휴대폰이나 가전제품을 사오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외제를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승용차도 굉장히 발전해 갑니다. 기발한 신제품이 막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구도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도 새것이 나오면 팔린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태리가 가장 사치성 있는 민족이다'라고 합니다. 왜 이태리가 명품이 많습니까? 사치성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나라 국민이라고 합니다. 한국인들도 사치성이 굉장합니다.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사치성은 나라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으로 바뀌는 기술입니다. 우리처럼 새것 좋아하는 심성이 없으면 휴대폰 시장의 형성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치성을 너무 비난할 것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에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빨리 빨리하는 것이 기술개발에 도입이 되어서 앞질러 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모두 관계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사치성을 경제원리로 역이용할 때 국가경쟁력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나 국가경제 개발과는 상관없이 사치로 끝나면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이라는 개념도 관계성을 가집니다. 지금 북한이 성명을 발표하는데 자신의 독자적인 발표가 아닙니다. 미국을 향해 노리는 것, 남한을 위해 노리는 것, 우방을 위해 노리는 치밀한 계산 하에 있는 것입니다. 평강이라는 이것이 한반도의 평화라는 것 안에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줄 것을 주어야 평화가 옵니다. 빚이 있는데 빚을 안 갚으면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줄 것을 주고 평화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있지 않으면 국제관계가 깨어집니다.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사죄'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죄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유지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그 평강은 사죄로 가능합니다. 사죄를 주시는 이 은혜를 입어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신인관계에도 주고받는 영적인 거래가 있어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에베소서 2장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했습니다.
막힌 담이 헐어져야 평화가 가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속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용서함을 받아야 평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평화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희락을 누리자
그 다음에 희락도 관계성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기쁨이라는 것도 나만을 위한 기쁨은 가치가 없습니다. 지금 기쁜 것도 별 가치가 없습니다. 또 기뻐했는데도 열매가 없는 기쁨도 많습니다. 여러분, 술판에서 희희낙락 하는 웃음은 술 깨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익한 기쁨입니다. 결과가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관계성을 가지면 나만의 기쁨이 아니고 모두의 기쁨이 됩니다. 가족이 기뻐하고 친구가 기뻐하고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합니다.
호주 시드니에서 이형택 선수가 아디다스컵 테니스에서 우승을 했는데 이형택의 기쁨은 그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왜 그의 우승이 그렇게 기쁩니까? 그것은 관계성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만의 기쁨이 아닌 영원한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은 결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역사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말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도 아래서 의와 평강과 희락은 사람이 아무리 얻으려고 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사랑으로 긍휼로 역사하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에 우리가 믿음으로 아멘하는 것, 헌신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령이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대표선수가 되자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있는 이 세 가지 조건은 아주 불변하는 조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과 관계성과 성령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에서 이 세 가지 관계성을 회복한 의를 행하는 그리스도인, 평강을 누리는 그리스도인, 희락을 누리는 그리스도 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이 세 가지 관계성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이 손해를 보거나 망가지는 법이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필요도구이지 기준이 아닙니다. 절대로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영적인 것을 변명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뿐이지 기준은 아닙니다.
TV 스포츠에서 우리나라와 폴란드의 월드컵 예선전을 방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요약한 내용을 봤는데 그 게임을 보고 새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첫 게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 2대0으로 이겼습니다. 또 첫 1승 게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게임을 이김으로 16강까지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도 관전을 했습니다. 그 선수들이 골을 넣고 기뻐하는 것, 관중이 즐거워하는 것, 대통령까지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골 넣은 선수가 기쁩니까? 관중이 기쁩니까? 골을 넣은 선수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왜 기뻐합니까? 골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 선수들이 우리 사천만 백성들을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늘 남이 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신앙인이 있고, 자신이 골을 넣어 즐거워하는 신앙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할 때 제발 대표선수로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대표선수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히딩크 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십니다. 열 두명 선수를 뽑아서 온 세계 역사를 열광시키는 일을 주님이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열광시키는 데에는 대표선수만 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도 대표선수가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를 열광시킬 수 있는 대표선수가 우리 안에도 일어나기를 바립니다. 관중으로서의 대표선수가 아니라 대표선수로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신앙인들을 보면 이런 유형이 있습니다. 아기 같은 신앙인이 있습니다. 돌을 갓 지난 아기는 귀엽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기본적으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입니다. 애들은 놀자고 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놉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환자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환자는 위로를 받아야 하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병원입니다. 교회는 약한 자를 위로하고 치유받고 변호합니다. 우리가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입원이 있으면 퇴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입원만 계속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위로해야 하고 돌봐줘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은 국가대표같은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국가대표 같은 신앙인으로 살다가는 멋있는 이 시대의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