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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가 되라 (눅22:24-27)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20:28, 막10:45)이라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밝히신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내기 위한 유월절 양이 되어야 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맞춰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층이 당신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과 떡을 나누어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22:15-16).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유월절 식사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눌 마지막 식사이며, 그 식사 후에는 잡히셔서 고난과 능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실 마지막이고 결정적인 일이며, 그 뒤에 남는 것은 완성될 하나님나라에서 잔치를 즐기는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 후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잔을 돌리시고 떡도 떼어 나누어주셨습니다(눅22:17-20).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는데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22:21-22)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며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오늘 본문 직전의 23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당신께서 붙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 있었지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에게는 보통 충격적인 말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시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을 뿐 그들의 관심은 곧 다른 문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니라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에서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한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정말로 당신의 죽음이 가까웠고 당신과 함께 그 자리에 있는 제자 중에 하나가 당신을 곧 팔아넘길 것이라고 심각하기 그지없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그 시점에서조차 제자들은 “또” 그 자리다툼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해온 제자들에게서 드러난 주되고 궁극적인 목적이 동료들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한심스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들의 사고나 가치관과는 정반대로 확립되어야 할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을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25-2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경우와 “너희” 즉 제자들의 경우를 대비시키신 데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세계에서는 임금이 권력을 쥐고 백성을 다스리며 스스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칭송을 듣는 것이 당연시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세계에서는 “큰 자” 즉 존경과 대우를 받을 자격이 더 많은 이들이 오히려 “젊은 자” 곧 존경과 대우를 받을 우선순위에서 뒤에 와야 할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잘 섬길 줄 아는 이가 다스리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 위에 올라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씀으로 한 번 더 반복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여기서는 세상사람들과 예수님 자신을 직접 대비시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자리에 앉아서 날라다 바치는 음식을 받아먹는 사람이 음식을 나르는 사람보다 크다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면서도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도 마땅히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구하기를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한 사실을(마20:20-21)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 했습니다(마20:24).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일러주신 말씀이 바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 교회의 중직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철저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유다의 배신을 보았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열두 제자 모두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배신했다면 나머지 제자들은 권력욕과 명예욕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겸손과 섬김을 가르치셨는데도 서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다투고 있었다면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 배신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반복된 가르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던 제자들은 붙잡히신 예수님을 보고 그를 부인하거나 버리고 도망치기 이전에 이미 다 배신자였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다 배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절을 앞두고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지난주일 장로 열 분을 선출하기 위해 공동의회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거조례가 금지하고 있는 부정선거운동이 적발되어 긴급히 모인 당회에서 의논 끝에 이번 공동의회를 무기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뭐 그 정도 일 가지고 기껏 모인 공동의회를 유회시키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분도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치러질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문제 삼은 일은 세상에서라면 문제꺼리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라 해도 보기에 따라서는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한국교회의 본이 되고 무엇을 하든 교과서같이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고 의지이기에 우리에게서는 용납되지 않은 것입니다. 깨끗한 선거풍토를 다지고 과열선거운동의 재발을 막자고 모든 장로님들이 몇 달 동안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도 스스로 삼가고 장로로 선출되신 분들은 임직을 육 개월 이상 미루는 아픔을 감내한 역사를 지닌 우리 교회이기에 그런 일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의지를 짓밟고 지지하는 특정 인물들의 명단을 만들어 다량으로 복사해서 버젓이 교회마당에서 돌리는 일은 당회에 대한 정면도전이고 교회에 대한 심대한 배신행위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은 세상사람들이 갖는 사고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세상에서 하는 행태를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들어오겠다는 것이 주님에 대한 배신이며 주의 몸 된 교회에 대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당회에 들어온다 한들 어떻게 당회원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진다면 어떻게 주님의 제자이며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 겸손하게 열심히 섬기고 항존직을 선출하는 때가 되면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일꾼들이 되고, 또 그런 사람들을 항존직에 세울 줄 아는 성숙한 교인들이 되어야 한국교회와 이 나라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희망을 꺼뜨리는 일체의 행위는 한국교회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한국교회와 이 나라의 장래가 우리 한 사람 사람의 의식과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모두가 성숙한 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20:28, 막10:45)이라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밝히신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내기 위한 유월절 양이 되어야 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맞춰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층이 당신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과 떡을 나누어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22:15-16).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유월절 식사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눌 마지막 식사이며, 그 식사 후에는 잡히셔서 고난과 능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실 마지막이고 결정적인 일이며, 그 뒤에 남는 것은 완성될 하나님나라에서 잔치를 즐기는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 후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잔을 돌리시고 떡도 떼어 나누어주셨습니다(눅22:17-20).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는데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22:21-22)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며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오늘 본문 직전의 23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당신께서 붙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 있었지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에게는 보통 충격적인 말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시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을 뿐 그들의 관심은 곧 다른 문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니라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에서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한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정말로 당신의 죽음이 가까웠고 당신과 함께 그 자리에 있는 제자 중에 하나가 당신을 곧 팔아넘길 것이라고 심각하기 그지없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그 시점에서조차 제자들은 “또” 그 자리다툼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해온 제자들에게서 드러난 주되고 궁극적인 목적이 동료들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한심스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들의 사고나 가치관과는 정반대로 확립되어야 할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을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25-2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경우와 “너희” 즉 제자들의 경우를 대비시키신 데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세계에서는 임금이 권력을 쥐고 백성을 다스리며 스스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칭송을 듣는 것이 당연시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세계에서는 “큰 자” 즉 존경과 대우를 받을 자격이 더 많은 이들이 오히려 “젊은 자” 곧 존경과 대우를 받을 우선순위에서 뒤에 와야 할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잘 섬길 줄 아는 이가 다스리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 위에 올라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씀으로 한 번 더 반복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여기서는 세상사람들과 예수님 자신을 직접 대비시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자리에 앉아서 날라다 바치는 음식을 받아먹는 사람이 음식을 나르는 사람보다 크다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면서도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도 마땅히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구하기를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한 사실을(마20:20-21)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 했습니다(마20:24).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일러주신 말씀이 바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 교회의 중직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철저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유다의 배신을 보았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열두 제자 모두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배신했다면 나머지 제자들은 권력욕과 명예욕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겸손과 섬김을 가르치셨는데도 서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다투고 있었다면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 배신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반복된 가르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던 제자들은 붙잡히신 예수님을 보고 그를 부인하거나 버리고 도망치기 이전에 이미 다 배신자였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다 배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절을 앞두고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지난주일 장로 열 분을 선출하기 위해 공동의회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거조례가 금지하고 있는 부정선거운동이 적발되어 긴급히 모인 당회에서 의논 끝에 이번 공동의회를 무기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뭐 그 정도 일 가지고 기껏 모인 공동의회를 유회시키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분도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치러질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문제 삼은 일은 세상에서라면 문제꺼리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라 해도 보기에 따라서는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한국교회의 본이 되고 무엇을 하든 교과서같이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고 의지이기에 우리에게서는 용납되지 않은 것입니다. 깨끗한 선거풍토를 다지고 과열선거운동의 재발을 막자고 모든 장로님들이 몇 달 동안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도 스스로 삼가고 장로로 선출되신 분들은 임직을 육 개월 이상 미루는 아픔을 감내한 역사를 지닌 우리 교회이기에 그런 일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의지를 짓밟고 지지하는 특정 인물들의 명단을 만들어 다량으로 복사해서 버젓이 교회마당에서 돌리는 일은 당회에 대한 정면도전이고 교회에 대한 심대한 배신행위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은 세상사람들이 갖는 사고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세상에서 하는 행태를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들어오겠다는 것이 주님에 대한 배신이며 주의 몸 된 교회에 대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당회에 들어온다 한들 어떻게 당회원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진다면 어떻게 주님의 제자이며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 겸손하게 열심히 섬기고 항존직을 선출하는 때가 되면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일꾼들이 되고, 또 그런 사람들을 항존직에 세울 줄 아는 성숙한 교인들이 되어야 한국교회와 이 나라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희망을 꺼뜨리는 일체의 행위는 한국교회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한국교회와 이 나라의 장래가 우리 한 사람 사람의 의식과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모두가 성숙한 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