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는 인생을 살지마라   (골로새서 1장 24-29절)

골로새서 8번째 강해입니다.
밀리는 인생을 살지 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본문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쭉 설명하다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삽입한 구절입니다. 개인적인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종종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다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 11장33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교리를 쭉 설명하다가 33절에서 갑자기 이런 말이 나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생활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경이로움입니다. 매순간순간마다 놀라고 감동하고 하나님께 찬송하는 삶, 터져 나오는 감동이 있는 삶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전에 삼손 강해를 하면서 삼손도 승리하고 난 다음에 못하는 노래실력을 가지고 노래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가 나귀 턱뼈로 1000명을 죽였다 한 더미 두 더미 쌓았다……’ 는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늙은 남자가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어린 여자들은 자꾸만 놀라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음식을 사줘도 이런 음식 처음 먹어본다고 놀라고 새로운 데에 데려가도 놀라고 이런 데 처음 와봤다고 하면서 놀라고 손을 잡으면 남자 손이 이렇게 따뜻한 줄 몰랐다고 하면서 놀랍니다.
어린 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경이로움, 경이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작은 것을 가지고도 놀랍니다. 늙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경이로움이 사라집니다. 이미 다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격하시키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희로애락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응답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교리를 설명하면서 찬송을 하고 교리를 설명하면서 자기 감정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 가운데 제일 중요한 단어는 비밀이라는 단어입니다. 26절과 27절을 보면 비밀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비밀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데 비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방인에 관한 말씀을 비밀이라고 묘사했는데 그것은 과거에는 감추어졌던 것인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중에는 드러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유태인들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영역이 이방인에게까지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병행구절이 에베소서 2장11절 이하에 쭉 나오는데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 나오는 비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유태인에게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벽을 다 깨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인이 되었든 유대인이 되었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모든 백성들에게는 다 구원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까 상식이 되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증거되던 그 당시만 해도 이것은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비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했던 이유가 무엇입니다. 이 말씀 하나 붙들었기 때문에 이방인의 사도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한마디로 얘기해서 모든 벽을 깨버리는 곳입니다. 2000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이방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이방인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어느 지역이 될 수도 있고 계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태인들이 좁게 만들어 놓았던 것들, 세리와 죄인들, 우리의 공동체 속에 들어 올 수 없다고 말했던 그런 사람들을 품은 것입니다. 그다음에 여성의 뜰, 여자들의 뜰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남자들만 들어오고 여자들은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하던 그 벽을 깨어버렸습니다. 유대인만 들어올 수 있고 이방인들은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는 이방인의 뜰을 깨어버렸습니다. 심지어 휘장도 찢어버리고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게 만드는 능력이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하나가 바로 ‘구별함이 없느니라’ 다시 말해서 이방이라고 칭하는 모든 것들을 품는 능력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십자가의 능력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포용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이렇게 이방인들을 품는, 다시 말해서 모든 벽을 깨Em리는 능력을 주시고 사도로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방인의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사명을 잘 감당했던 이유가 바로 사도바울의 고백 가운데 나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복음전파의 사명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어떠한 자세가 되어야 될 것인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1.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 자기 사명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첫 번째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나의 아이덴티티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경륜이라는 것이 영어성경을 보면 commission입니다. 임무, 사명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 내게 주신 임무, 내게 주신 사명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명확히 알았습니다. 자기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택한 그릇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증거할 때 철저하게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서의 자세로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면 사명을 감당하는 데 명확해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사명을 감당하는 목자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한 목자가 있고 두 번째는 삯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선한 목자로 살아가야 됩니다. 선한목자와 삯꾼을 구별하는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양떼의 생명에 관심을 갖느냐 자기의 이익에 관심을 갖느냐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인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양의 생명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그중에서 양의 생명을 붙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쓰임받았던 이유, 자기의 생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다녔던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방인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의 이익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자세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또 다른 말로 쉽게 얘기하면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붙들어야 될 진리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백 마리의 양 비유를 드십니다. 백 마리의 양이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마리의 양도 소중한 양입니다. 남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양을 비교해 보면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아흔아홉 마리 남아있는 양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당연하지요. 1대 99이니까…… 쉽게 말해서 한 마리 양도 귀중하지만 한 마리 정도를 잃었다고 해서 목자를 그만두어야 할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는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별것 아닌 것 같은 한 마리의 양을 위해서, 자기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을 위해서 수고합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선한 목자라고 자칭하면서 실제로는 선한 목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내 삶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인정을 받는 곳에만 집중합니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평가받을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집중합니다. 내 스스로 판단할 때 이 정도면 무게 있는 일이라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잘 안된다고 하고 왜 나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나 그러면서 원망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자기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지극히 작은 일을 위해서 수고합니다.
목회자의 예를 들어 볼까요. 목회자들이 눈에 띄는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설교 열심히 잘하고 기도 잘하고 심방 잘하는 그 정도만 되어도 평균 이상의 목회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 외에 안 해도 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밤 12시 넘어서 부르는데 뛰어가지 않아도 되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 일반적으로 얘기 나누다가 어쩌다가 한둘 정도 소외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욕 안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도 욕하지 않을 부분, 누구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부분, 신경 쓰지 않아도 그럴 수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부분까지도 마음을 두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선한 목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변화될 부분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상식에 기반을 두고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에 기반을 두고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목자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선한 목자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 하나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앞에 내세우는 것들을 잘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앞에 내세웁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을 앞에 내세웁니다. 나보다 더 가진 사람, 나보다 더 역량 있는 사람들을 앞에 내세웁니다. 죄송하지만 그 사람은 삯꾼일 가능성이 큽니다. 선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자기보다 앞세웁니다. 내 앞에 앞세우면 그것을 바라보게 되어 있고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오늘도 이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정말로 쓰임 받는 종이 되기 위해서, 이제까지 내가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그러나 귀중한 것을 다시 앞세우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도외시했던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소외시켰던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붙들어서 세워줄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저는 어제 주례를 하면서 오래간만에 스테이크를 먹었습니다. 제가 스테이크에 소금을 쳤더니 송요해 간사가 왜 그렇게 소금을 많이 쳐서 먹느냐고 합니다.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소금의 의미가 무엇일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스테이크 먹으면서 속으로 소금같이 살아야지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가 음식에 소금을 넣습니다. 더 맛있어지라고 소금을 넣습니다. 스테이크에도 소금을 넣습니다. 소금을 쳐서 먹는 것이 훨씬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누구도 음식을 먹으면서 ‘야! 이 소금 맛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소금, 맛있네. 이 소금 상표가 뭐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소금이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습니다. 소금을 쳐서 훨씬 맛있는 것인데 스테이크가 참 맛있다고 합니다. 소금의 의미는 소금은 들어가서 자기 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은 들어가서 자기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제 맛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소금입니다.
선한 목자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런 소금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들어가서 자기가 녹아짐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맛을 더 확대재생산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명확히 알았습니다. 이방인들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이방인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자기가 소금같이 녹아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을 주께로 나오게 만드는 능력의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삼일교회의 모든 성도들!
하나님 앞에서 소금같이 살기를 바랍니다. 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맛이 나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이익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서 양떼의 유익을 구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나아갈 때 선한 목자의 자세, 소금과 같은 자세로 나아갈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는 능력의 종이 될 줄로 믿습니다.

2.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 환경에 밀리지 않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저는 이것을 21세기 표현으로 하면 밀리지 않고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바울의 밀리지 않고 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 보니까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면서 고난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슬픔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서 고난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교회를 위해서 교난을 당한다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당하는 경험을 나도 당하니 얼마나 기쁜가, 이것은 특권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많은 부분을 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내가 예수님의 고난까지도 담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가!’ 이런 모습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난 때문에 주눅 들고 눌려있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난을 특권으로 여긴다는 얘깁니다. 고난보다 더 큰 능력을 구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고난이 밀려닥치고 있지만 사도바울은 전혀 주눅 들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21세기 말로 표현한다고 하면 바울은 환경에 밀리면서 살지 않는 인생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란에 밀리지 않으면서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우리가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첫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밀린다는 것은 힘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힘이 약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진다고 해도 밀리는 경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주도권을 잡고 살아야 합니다. 축구경기를 할 때 실력이 없으면 뭐라고 합니까? ‘우리 경기 자꾸만 밀리네요.’라고 그럽니다. 힘이 없으면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배도 밀려납니다. 항로에서 밀려납니다.
사도바울에게 고난이라는 바람이 불고 환경이라는 여러 가지 압박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9절에 답이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능력,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답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능력을 따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면 절대로 밀리지 않는 인생을 삽니다. 고난 속에서도 주도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놓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꾸만 밀리는 인생을 사는 이유는 자꾸만 쥐고 있으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놓아주어야 합니다. 놓아버리면 더 강력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 중 하나를 들라고 하면 자식입니다. 애 하나 낳아보십시오. 자식만큼 귀한 것이 있나…… 자식을 쳐다보면 눈물이 납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두 살 때에 어찌 그렇게 귀여운지 네 살이 되면 그 네 살이 너무 귀엽고 초등학교 2학년은 초등학교 2학년의 귀여움이 있습니다. 5학년은 5학년의 귀여움이 있고…… 점점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너무 귀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 있는데 저는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콘택트렌즈 끼는 사람은 알지요? 콘택트렌즈도 가끔은 아픈데 자식 큰 놈을 넣어도 안 아픕니다. 그 정도로 귀하고 그 정도로 예쁩니다.
그러나 자식이 귀하다고 품에 안고 있으면 자식의 앞길을 망칩니다.
결혼 주례를 하면서 보면 가끔 답답한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아들딸들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뭐든지 품에 안으려고 합니다. 귀한 자식으로 키우겠다고 그렇게 하는데 결국 바보로 키워놓았습니다. 신혼여행 가서 계속 전화 걸고…… ‘엄마 어떻게 할까요……’ 바보 아닙니까? 귀한 자식일수록 놓아야 합니다. 풀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한나를 보십시오. 얼마나 귀하게 사무엘을 얻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내 생명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도 내가 품고 있으면 썩습니다. 씨도 품고 있으면 열매 맺습니까? 문익점이 갖고 왔던 목화씨, 귀중한 것이라고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썩어버렸을 것입니다. 귀중한 것이니까 땅에 묻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거둡니다. 생명은 우리 안에서 피어나지 않습니다. 놓아줄 때 피어납니다.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얼마든지 고난당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겠다고 얘기합니다. 생명을 다 내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도 귀한 것 아닙니까? 돈이 얼마나 귀합니까! 돈 벌어본 사람이 압니다. 어렵게 어렵게 돈 번 사람은 돈이 얼마나 귀한지 압니다. 그렇게 귀한 돈이기 때문에 놓아 주어야 합니다. 귀한 것! 돈이 되었든 자식이 되었든 생명이 되었든 귀중한 모든 것들은 다 놓아주어야 합니다.
저는 누누이 말하지만 삼일교회 초창기 100명 정도 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러다보니까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귀합니다. 성도들, 사랑과 기도로 양육했던 성도들, 너무 귀합니다. 자꾸 품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망합니다. 풀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선교사역이 왕성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놓기 때문입니다. 믿고 그냥 풀어주잖아요. 흩어져서 마음껏 뛰라고 풀어주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우리의 기마민족적인 기상이 복음으로 mixing이 되어가지고 뛰어다니면서 별짓을 다하잖아요. 세상을 뒤집어엎지 않습니까? 귀하기 때문에 풀어야 합니다. 품고 있으면 안 됩니다. 풀어주어야 합니다.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싱가폴에 교역자수련회를 갔었습니다. 다른 것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새공원이라고 있었습니다. 새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가이드가 저에게 왜 새들을 풀어놓아도 도망을 안 가는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새공원에는 새들을 묶어놓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풀어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다른 데 가 보아야 그 자리만큼 좋은 자리가 없기 때문에 다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에서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진정한 모습입니다.
이제까지 우리 삶에서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목록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어 놓으십시오. 풀어 주십시오.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때 기적이 나타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뭐 다른 것입니까? 우리 보통 아이들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든 어른들이 예수님 얼굴만 보고 쫓아왔습니다. 남자만 5000명이 쫓아왔습니다. 밥도 안 먹으면서 말씀 증거합니다.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그럴 때 이 어린 아이가 그랬을 것 아닙니까? ‘역시 사전에 준비한 것은 나밖에 없어.’ 아저씨들 다 보는 데서 ‘여기 물고기 있네요!’ 하면서 자랑하고 냄새 풍기고 먹는 척 마는 척, 보리떡 다섯 개나 있는데 줄까말까…… 자랑할 대상 아닙니까? ‘역시 나는 용의주도한 인생이야 어른들이 어린 나보다도 못해!’ 다 굶고 있을 때 물고기 두 마리는 귀중한 것입니다. 그 가치는 무인도에서의 먹을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내놓잖아요. 귀중하니까 내놓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능력은 간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귀중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다 내놓습니다. 쥐고 있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도 내놓습니다. 그러니까 능력 있는 삶이 됩니다.
우리에게 귀중한 것 있습니까?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내 놓으십시오. 사도바울은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는 믿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3.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 변화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세 번째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도바울은 변화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사도바울의 목적은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를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를 전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만 사람이 완전한 자로 변화됩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기가 막힌 내용을 붙든 것입니다. 사람의 변화는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속사람까지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변화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속사람이 다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다 보면 어떤 때는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시간 중에 다리 꼬고 앉아있고 짧은 치마 입고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보면 신경 쓰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 나를 유혹하는 건가, 열 받게 만들려는 것인가……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끔 그런 사람 바라보다가 말더듬고 설교망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성도를 바라볼 때에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만 쳐다보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중의 한 명이 대만 선교갔을 때 사림진리당에 있었던 박정현 자매입니다. 그 자매는 예배드릴 때 정말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자매는 예배드릴 때 반쯤 웁니다. 죄를 많이 지었는지 모르지만 무슨 얘기를 하든 웁니다. 이런 설교를 해도 눈물을 흘리고 저런 설교해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참 묘한 표정입니다. 입을 반쯤 벌리고서 설교 듣습니다. 꼭 제비새끼가 어미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설교가 마음에 와 닿으면 끄떡끄떡합니다. 그 끄떡끄떡하는 것을 보면서 다음으로 넘어가고 이렇게 하니까 힘이 납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예수 믿은 지 이제 9개월 된 자매입니다. 대만선교에 두 번 왔습니다. 이전에는 엄청나게 폭력적인 자매였다고 합니다. 무슨 폭력을 썼는지 모르지만 7공주파 같은 데에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얼굴이 굉장히 어두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번 보십시오. 평상시의 얼굴 자체가 웃는 얼굴입니다. 천사의 얼굴 같습니다.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변화되었습니다. 9개월 이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이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누구나 저 사람은 변화되었다고 다 인정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가장 큰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고 우리의 찬송입니다.
교회는 변화되는 곳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변화되는 곳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천국에서 큰 자냐 이야기할 때 제 생각에는 많이 변화된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몇 년 동안 예수를 믿었는가, 내가 얼마나 연륜이 있는가, 내 직분이 무엇인가…… 그것이 큰 자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천국에서 큰 자란 쉬운 말로 표현해서 많이 변화된 자입니다. 많이 변화되면 자가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자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큰 자라고 하는 지극히 작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는 자신이 큰 자라고 합니다. 성가대 30년하고…… 밤낮 자랑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집안은 3대째 믿고 4대째 믿고…… 속으로 4대를 믿은 꼴이 그 꼴이냐 하는 생각이 들지요. 40년 믿은 꼴이 그 꼴이냐? 그 말이 나오려고 하다가 맙니다. 4대째 믿은 것이 그 모양인가, 30년 40년 믿는 것이 그 모양입니까? 그것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잡니다.
큰 자는 누구입니까? 믿은 지 6개월이 되었든 1년에 되었든 하나님의 말을 받아서 급격하게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문을 닫는 이유가 무엇 입니까?
저는 삼일교회 성도들, 참 좋은 성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 가보면, 특별히 오래된 교회를 보면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얘기는 아멘하고 듣습니다. 그런데 변화를 위해 조금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마음의 문을 꾹꾹 닫아 버립니다. 표정이 달라버립니다. 말씀의 문을 팍 닫아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변하지 않겠다는 것 아닙니까? 변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변화되면 내가 이제까지 누리고 있는 삶을 다 포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에서 문제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씀 문을 꽉 닫습니다. 말씀 문을 닫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변화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변화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내어놓으면 참된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 받아들일 때 변화가 있습니다. 혁명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변화는 겉모습의 변화가 아닙니다.
여러분, 속사람의 변화가 쉽습니까, 겉사람의 변화가 쉽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겉사람의 변화가 쉽다고 생각합니다.
겉사람의 변화를 얘기할 때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비행기 승무원과 군인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비행기 타는 승무원들이 많이 있는데 비행기 타는 승무원들 보면 참 친절하지요. 정말 친절합니다. 욕을 해도 생글생글, 얼굴도 예쁘고 날씬하고 화낼 줄 모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비행기 승무원하고 결혼하고 싶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항상 그렇게 친절할 줄 알고!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과 결혼한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친절합니까?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표변해버립니다. 원래의 범죄한 여성의 표독함으로 다 돌아가 버립니다. 저는 승무원들을 비행기 밑에서 많이 만나지 않습니까? 다른 여자들과 똑같습니다.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시기질투하고 일그러진 얼굴하고 뭐가 친절합니까? 화내고 열 받고 메일 보내고 똑같습니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성도는 다르지요. 물론 삼일교회 다니는 승무원은 다릅니다. 괜찮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훈련한다고 해서 가시나무가 포도나무 되는 것 아닙니다. 가시나무위에 포도를 걸쳐놓았을 뿐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해 봅니다. 승무원 훈련 10년 시켜 보아야 겉모습은 변화되지만 속사람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속사람은 예수만이 변화시킵니다.
남자들 군대 가면 어머니가 좋아합니다. 내 아들이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집에 휴가 나오면 새벽에 일어나고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교회가 변화시키지 못한 사람을 군대는 변화시켜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한 지 3개월만 지나면 똑같습니다. 말짱도루묵입니다. 3개월만 지나보십시오. 10시에 일어납니다. 절도는 무슨 절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속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제도나 도덕은 겉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목표가 다릅니다.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하나니! 그를 전파하여! 예수가 들어가면 속사람이 뒤집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심지어는 bornagain, 두 번 태어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속사람의 변화다, 이것 가지고 충분히 표현이 안 되니까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를 전파하라! 예수님 전파하면 완전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역의 초점을 변화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변화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내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껍데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변화되고 있는지 예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지, 예수 안에 가면 변화되는가! 변화에 초점 맞추는 믿음의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밀리지 않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밀리지 않으려면 능력으로 무장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능력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귀한 것은 놓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밀리지 않는 인생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주도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귀한 것을 놓을 줄 알고 하나님께로부터 날마다 능력을 받고 그리고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에게 임한 경륜, 사명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의가 있고 난 다음에 사역에 임했습니다. 그랬더니 능력 있는 사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무슨 일을 감당하든지 자기 사명을 알고 밀리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열매 맺는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겠습니다.
사도바울 같이 놀라움의 찬송이 있는 인생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① 사명을 알고
② 밀리지 않으면서
③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인생이 되게 해 달라고 다같이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능력 받고 귀한 것을 놓을 줄 아는, 그래서 밀리지 않는 인생 될 수 있도록 우리 삶 전체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