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은혜만이 죄를 해결한다.  (골로새서 3:5-11)

오늘은 골로새서 14번째 강해입니다.
‘고난과 은혜만이 죄인을 치유한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들은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언급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지적과 죄에 대한 언급들에 귀를 막고 고개를 설레설레할 때가 많이 않습니다. 시카고 근교에 헤몬드 시가 있습니다. 거기에 헤몬드제일침례교회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잭 하이스라는 전설적인 목사님이 계십니다. 우리나라에도 이 분의 책이 여러 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분은 설교를 할 때 너무 죄를 자주 지적하고 너무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어서 가슴팍에 있는 권총을 꺼내어서 목사님을 쏘려고 시도했던 일이 두 번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헤몬드제일침레교회의 강대상을 보면 방탄유리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그 정도로 죄를 지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적하는 기독교적인 관점을 가혹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낮추는 것이라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죄를 통해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죄를 통해서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끌고 간다는 식으로 고발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보면 실제적으로 이 땅에 무질서와 고통이 실제합니다.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세상이 문제투성이입니다. 문제와 고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제와 고통의 원인을 죄로부터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발버둥칩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의 산물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지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빈곤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외부의 다른 힘, 구조악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무지가 원인이라고 믿는 사람은 교육에 목숨을 겁니다. 사람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빈곤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은 경제적인 조건만 향상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만 없어지면 사회의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조악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일에 목숨을 겁니다. 구조만 변화되면 인간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 되면 외부의 힘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에 많이 얘기하던 것처럼 제국주의 때문에 안 된다고 얘기합니다. 수탈하는 외부세력 때문에 우리가 안 되는 것이라는 식의 접근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디자인한 유토피아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이러한 사회가 되면 최상의 이상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디자인한 모든 유토피아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다 실패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유토피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고 완전한 사회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인간은 선하고 완전한 사회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과는 정 반대의 접근입니다.

2. 그러나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성경의 접근은 인간은 소망이 없는 존재, 죄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인간 본성의 거대하고 정복할 수 없는 악이 우리 안에 있다고 전제합니다. 성경적인 접근은 사람이 모인 모든 곳, 모든 사람, 모든 사회는 죄가 있고 죄인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반드시 전제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의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여기 나오는 죄악들을 보면 음란-성적부도덕을 얘기합니다. 부정-느슨한 생활과 연결된 유혹적인 불결을 얘기합니다. 사욕-성적 불결을 즐기라는 악한 정욕, 저속하고 악한 욕망을 이야기합니다. 원문을 보면 표현은 여러 가지로 했지만 전부 성적인 죄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탐심을 얘기합니다. 탐심은 항상 좀 더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원하는 것입니다. 좀 더 좀 더 좀 더하다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탐심의 끝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얘기합니다.
100% 양보해서 음란함 탐심을 본능적인 원초적인 죄라고 합시다. 우리는 보통 인간은 성욕, 식욕, 수면욕 같은 기본적인 욕구는 채워져야 한다고 얘기를 하지요. 기초적인 욕구 때문에 오는 범죄, 결핍으로 인한 범죄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해결되면 죄를 짓지 않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캠벨 몰가 목사님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8, 9절에 나오는 죄는 좋은 위치에서의 죄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결핍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필요한 만큼 채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는 분노가 있습니다. 악의가 있습니다. 비판적인 태도, 훼방이 있습니다. 질투어린 심정으로 남들을 넘어지게 만드는 행동과 말, 거짓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가 다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5절과 8절과 9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환경적인 요건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에서는 어려운 환경대로 죄를 짓고 좋은 환경에서는 좋은 환경대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채워지는 조건이 있으나 없으나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원죄라고 말합니다. 원죄교리! 죄를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조금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머리에 먹물이 들었다고 하는 사람은 이 원죄교리에 대해서는 반기를 듭니다. 모든 원죄교리에 반발하는 내용의 뿌리가 되는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사람은 장자크 루소입니다. 이 사람은 모든 유토피아주의의 근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인간 속에 있는 자유를 풀어주기만 하면 인간에게 자유를 주면 유토피아가 온다고 했습니다. 인간 속에는 원래 선한 것이 있었는데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제도와 구조와 전통이 그것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풀어주면 유토피아가 온다는 내용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도입해서 사회가 우리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도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를 다 빼앗겨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악해졌다고 하면서 이제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대한 영향을 받아서 프리--도 나왔습니다. 마음대로 한번 해 보자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해 보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사회제도보다 앞서있기 때문에 사회제도를 벗어날수록 가장 좋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유토피아가 왔습니까?
루소의 전제는 인간의 본성은 사랑스럽고 성선하고 이기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우리가 실제로 만날 때에 질투심이 있고 이기심이 있는 것은 제도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만든 제도 때문에…… 그러므로 이 사회의 인위적인 관습과 제도를 깨기만 하면 인간은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 사람을 자연주의자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루소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루소의 당시의 프랑스는 외식의 사회였습니다.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그 당시는 여자들이 분가루 뿌린 가발 쓰고 다니고 얼굴을 피에로 같이 하고 다니고 보석과 리본으로 치장하고 엉덩이도 이만하게 부풀리는 옷을 입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사회를 루소가 볼 때에는 구역질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 인간의 진정한 본질의 모습이 드러나야 되는 것이 아니냐!
그의 사회계약론이라는 책을 보면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인 규제 때문에 사슬에 놓여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루소가 얘기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개혁자들여! 계몽주의자들이여!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던 모든 제도와 규칙과 간섭으로부터 해방시키라!” 해방의 논리를 얘기했습니다. 루소는 해방의 논리를 처음으로 얘기한 사람입니다. 17, 18, 19세기로 넘어오면서 모든 혁명을 했던 사람에게 이론적인 제공을 했던 사람이 루소입니다. 자유를 위해서 혁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선입견과 신념체계와 도덕적인 충성심을 다 깨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에 있는 것을 먼저 파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혁명을 얘기하면서 은근히 집중되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었습니다. 신앙심을 깨버려야 한다! 또 하나 교회라는 구조를 깨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그런 얘기 들어 보지 않았습니까? 교회에 가면 사람들 앉혀 놓고 자꾸만 죄인, 죄인, 죄인하면서 기를 다 죽여 놓는다, 똑똑한 사람을 반푼이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서는 헌금 바구니 돌려가지고 돈 걷어 간다…… 죄인 죄인 죄인 한 다음에 돌려라 하고 돈 내면 된다고 하고……
그것이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닙니다. 루소의 얘기입니다. 루소가 그런 식으로 접근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옛 정서, 옛 충성, 옛 사고를 다 깨버려야 한다, 그러면 자유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토피아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실제하는 세계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터넷이지요. 인터넷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이제는 어떤 권위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나 마음껏 얘기하고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익명으로 쓸 수 있고 숨어서 얼마든 남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 이렇게 자유롭게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누르는 것을 다 깨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과연 멋진 사회가 오던가요? 인터넷을 통해서 모든 정보가 다 흐르고 좋은 사회가 오던가요? 통계를 보십시오. 인터넷에서 제일 많이 활용되는 것이 음란사이트입니다. 그다음은 사람들 죽이고 비판하는 음해하는 일에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속에 있는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인터넷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유롭게 해 보라고 했더니 여기 내용하고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음란! 맨 음란한 것 아닙니까.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흘기는 눈, 훼방, 광패…… 정확하게 맞지요? 성경만큼 정확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실제로 해 보라고 했더니 그대로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나와서 우리를 더럽게 만든다고 합니다.
루소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루소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혁명을 했던 사람들, 급진적이고 제한받지 않은 자유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가장 억압적인 제도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동 시대에 로베스 피에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유를 위해서 혁명을 하려고 했습니다. 명칭은 멋있지요. 구호야 멋있지요. 그런데 이 로베스 피에로가 했던 일은 200명의 사람을 단두대에 보낸 것입니다. 자유를 얘기하면서 가장 공포적인 정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다음에 마르크스가 있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였는지 아십니까? 사상을 위해서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중국의 마오저뚱, 킬링필드의 주역, 폴포트, 여기서 폴포트가 제일 감명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루소의 저작들입니다. 루소의 저작을 읽으면서 캄보디아 사람 4분의 1을 죽였습니다.
결국은 자기가 인위적으로 유토피아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더니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 기본적인 말씀에 뿌리를 두고 말씀 속에서 우리 행동의 정당성을 따집니다. 루소의 유토피아리즘이 왜 문제이냐 하면 정당성의 근거를 기독교는 성경에 두는 반면 이 사람들은 아직도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이론에 정당성을 두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실험해 보지 않은 미래의 이론을 가지고 급격하고 과격하게 나아갑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미래의 이론……
그런데 미래의 이론은 자이의 취향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입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입니다. 그래서 혁명은 항상 배반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탐욕으로 나중에는 흘러가 버립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고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독점이 이루어지면 안 됩니다. 자기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항상 옳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훌륭한 분들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이 5-10년 지나면 자기도 모르게 의에 취해 버립니다. 자기가 의인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의인인줄 압니다. 이런 것에 제일 빠지기 쉬운 사람이 목사입니다. 목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지 않습니까? 항상 최종심판관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항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토요일 리더모임 할 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도 가끔 합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목사도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때는 편견어린 소리도 많이 합니다. 아무도 동의 하는 얘기도 합니다. 목사도 틀리는 구나……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는 것만이 100% 진리이지 견해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정의는 독점될 수 없습니다.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치면 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옳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100% 옳은 줄 압니다. 정의를 독점합니다. 특별히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들 자기도 모르게 속십니다. 자기는 항상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힘을 갖습니다. 그때도 자기가 정의던가요? 오히려 금방 썩게 되는 것을 보입니다. 시민단체가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항상 옳은 소리만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자신이 정의의 본질인 줄 압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정의를 붙들고 정의를 섬기는 자일 뿐 정의의 본질은 아닙니다.

3.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루소주의의 약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도 모르게 인간이 정의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삶 속에 들어가지 아니한 공상을 가지고 삶의 정당성의 준거를 삼는 사람들은 항상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1982년인가 한국에 프로야구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프로야구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저는 타자들 이름을 다 외우고 타율까지 다 외웠던 사람입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텔레비전 중계 해설자가 한 분 있었는데 이 분이 거의 신적인 존재로 기가 막히게 맞추는 것입니다. 지금 투수가 인코스로 던질 것이라고 하면 진짜 인코스로 들어갑니다. 타자가 어깨 힘이 많이 들어갔군요, 저렇게 하면 헛스윙하지요 하면 정말 헛스윙합니다. 그렇게 하면 라이트로 날아갈 것입니다 하면 정말 라이트로 날아갑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런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허구현 씨라고 하는 해설가입니다. 이름은 허구인데 해설은 실제였습니다. (성도들 웃음) 너무나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 것입니다.
저는 허구현의 해설을 들을 때마다 은혜를 받습니다. “야! 저렇게 전문가가 다 있나!” 저만 은혜받은 것이 아니라 구단주도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없는 팀이지만 청구 핀토스라고 들어 보았습니까? 거기에서 허구현을 감독으로 영입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저런 신적인 예측력을 가지려 있는 사람이 감독이 되면 승승장구할 것이라는 예측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한 시즌도 마치지 못하고 연패 당하다가 쫓겨났습니다.
저는 그때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해설과 실제는 다르구나! 이론 가지고 하는 것과 실제는 다른 것이구나! 선수들 움직이는 리더십이 필요하고 상황을 판단하는 또 다른 변수들이 많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론만 가지고 나아갈 때에는 전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토피아주의는 완전 이론의 세계입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당위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논리를 펴니까 아무 것도 안 됩니다. 거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인간의 죄가 빠졌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이 빠졌어요. 인간이 얼마나 썩어있는 존재라고 라는 것을 빠뜨리고 나오는 이론이기 때문에 그것은 맞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첫걸음으로 깨달아야 될 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분석할 때 제일 먼저 전제해야 될 것은 죄인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비교적 목회를 할 때 상처를 안 입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뛰어갈 수 있다는 전제예요. 저도 마찬가지구요. 그런 전제를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려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로마서 1, 2, 3장에서 계속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죄에 대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얘기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이방인의 죄를 고발하고 도덕군자의 죄를 고발하고 3장에 가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골로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에 “이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고 소망이 없고 전적인 부패라고 합니다.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교도소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교도소선교회를 하면서 교도소에 있던 사람들 한 번 만나러 갔습니다. 지독한 죄인들…… 어떤 죄인이 있느냐 하면 이런 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어떤 남자하고 데이트를 하는데 데이트에 번거롭다고 전 남편과 낳았던 아이 둘을 자동차에 집어넣고 호수로 밀어 넣어서 죽인 여자입니다. 정말 악한 여자이지요. 엄마도 엄마 나름입니다. 그렇지요? 자기의 미래의 장애가 된다고 아이들을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듭니다. 오클랜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어떤 10대 남자애가 칼을 들고 여자를 쫓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뭔지 모릅니다. 여자는 살겠다고 막 도망칩니다. 그때 주위에 군중들이 있었는데 칼을 든 남자를 덮쳐서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Go! Go!" 하면서 박수를 치더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달리기가 빠른지 잡히지도 않더래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빨리 뛰어라! 칼 든다고 남자가 그렇게 늦으면 되냐!” 막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잘 안 잡히니까 공포에 질린 여자가 뛰어갈 때에 어떤 사람이 다리를 걸어서 넘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넘어진 여자에게 덮쳐서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여러 번 난도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환호성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농구에서 슬램덩크 이후에 하이파이브를 하듯이 옆 사람과 하이파이브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잔혹한 사람들 아닙니까?
이렇게 해서 잡혀 온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찰스콜슨은 생각할 때에 그 사람들의 형상 속에는 괴물의 형상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형상 속에는 마귀의 형상이 있을 것이다, 얼마나 잔혹하게 생겼을까 얼마나 험상궂을까 하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남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괴물의 얼굴도 마귀의 얼굴도 아니었습니다. 이웃집 아이의 얼굴, 이웃집 여인의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평범한 얼굴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이런 죄성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인가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이 튀어 나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욕심에 눈이 뒤집히면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호수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칼 들고 찌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에 이유가 무엇이냐! 이유가 뭐냐! 사람들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도망칠 수 있는 회피의 논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어렸을 때의 상처 때문이다, 프로이트 이론 비슷하게…… 어떤 사람이 흑인이었다고 하면 사회적인 차별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라면 빈곤 때문에 저렇다. 가난하면 전부 칼 들고 뜁니까? 어렸을 때에 억압이 있으면 호수에 집어넣습니까? 피부색깔 때문에 사람을 찌릅니까? 전부 다 학문을 가장한 엉터리논리입니다.
왜 한 마디 대답을 안 합니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이유는 한 단어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차마 말을 안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느냐 딱 한 가지, 죄 때문입니다. 다 알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죄를 언급하기 싫어서……

4.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오늘도 어린아이 유아세례를 주었는데 애한테 죄를 가르치겠습니까? 지금부터 죄에 대해서 가르치겠다, 하면서 죄란 무엇인가, 죄는 어떻게 지어야지 안 들키는가, 가르쳐 줄 부모 있습니까? (성도들 웃음)
아이를 배고 나니까 평소에는 생전 성경 읽지도 않다가도 읽고 찬양하고 좋은 것을 먹으려고 하고 험한 것을 안 보려고 하고 좋아하는 커피도 안 마시고 좋은 것만 먹었을 것입니다. 좋은 것만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낳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의 동화책을 보면 동화책을 보면 그 기본 구조가 무엇 인지 아십니까? 권선징악입니다. 콩쥐가 있으면 팥쥐가 있습니다. 흥부가 있으면 놀부가 있고 춘향전을 보면 카운터파트에 변 사또가 있어야 합니다. 변 사또가 악하면 악할수록 히트합니다. 변 사또가 별로 악하지 않고 너그러우면 아무도 안 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이 동화책을 보면서 이해를 하잖아요. 납득을 하잖아요. 무슨 얘기입니까? 아이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죄가 무엇인지 알아요. 악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어른들에게도 동화가 필요합니다. 권선징악이라고 하면 유치한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죄를 도외시해 버립니다. 최근 예술계의 풍토를 보십시오. 권징징악이 나오면 유치한 1차원적인 영화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악이 이기는 것도 나오고 뒤죽박죽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회적인 영향 때문에 그렇다고 하고 탁월한 유전자 때문에 그렇다고 하고 다른 것으로 설명하려는 예술적인 접근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 엉터리입니다. 한 가지! 죄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죄의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6절 보십시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단절시킵니다. 이사야서 59절 2장을 보니까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죄 지어 보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악 가운데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에 우리 안에 죄책감이 있고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가 깨져 버립니다. 우주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이기 때문에 한 가지가 깨지면 나머지 다 깨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다음에 인간관계가 깨졌지요. 아담에게 제일 먼저 선악과를 왜 먹었느냐고 했더니 핑계대지요. 하와 때문에 그랬다고 합니다. 하와는 뱀 때문에 그랬다고 하고…… 그때부터 인간에게 비난과 회피와 손가락질과 자만심이 들어 왔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세요. 거기에 보면 인간의 모든 죄의 뿌리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인간관계의 단절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자연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애를 낳을 때에 해산의 고통이 왔습니다. 애 낳을 때에 아픈 것…… 그러면서 죄를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가족의 삶 가운데 슬픔이 왔습니다. 가시덩굴과 엉겅퀴가 나왔다고 얘기합니다. 노동이 고역과 수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왔습니다.
C.S.루이스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원래 창조에는 죽음이 있을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도취해서 보니까 죽음을 본능적으로 이해를 못합니다. 이상하게 여깁니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라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분노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5. 고난과 은혜만이 죄를 해결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은 선하고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루소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도 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전적 타락입니다. 죄인으로 우리를 판단해야 합니다. 죄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이 죄인이 치유 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은 고난과 은혜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회가 온전하게 되는 길은 고난 밖에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친다고 하면 어떤 벌칙이지요. 사람들이 벌칙을 주어야 돌아옵니다. 우리 삶 가운데 고난이 임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주께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사이에도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난에서 회복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루터의 십자가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패배, 슬픔, 고통을 왜 주셨느냐 하면 그런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드러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인앤뜨루 라고 했습니다. 고난 안에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시고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고난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의 삶의 궤도를 바꾸어 버립니다. 요나의 고난을 보십시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얻었습니다. 그리고서 기도해야 된다는 것과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한 가지 원리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이런 죄인들이 치유받을 수 있는 길은 은혜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힘 가지고 우리 디자인가지고 유토피아가 올 수 없습니다. 은혜를 부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죄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내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 왔기 때문에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3장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생명이 우리안에 감추어있다고 합니다. 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리스도께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에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갈 때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고 은혜 외에는 우리가 살 길이 없다는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쓰러집니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범죄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설 수 있는 것은 은혜 붙드는 것입니다. 내 의지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인격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목회는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은혜가 떠나니까 금방 깨져 버리잖아요. 그것이 인생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귀중한 것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깨끗할 수 있느냐…… 국무총리 임명 동의를 위한 인사청문회를 하면서 느꼈습니다. 기자들을 만나더니 비교적 장상 총리서리가 깨끗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자분들, 희망을 가지십시오. 제일 깨끗하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잣대를 가졌습니까? 사람을 올려놓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공격을 했습니다. 장상 총리서리 세워 놓고 막 공격하고 장대환 총리서리 세워 놓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를 세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세워도 다 박살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세워도……
왜요! 로마서적인 시각에서 보십시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 50-60 먹으신 분들이 어렸을 때 것부터 털기 시작하면 안 걸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정 없다고 하면 고등학교 때의 친구가 나와서 커닝 같이 했다, 이런 것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 안 나오겠습니까?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나오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 번째 총리서리가 지명되었습니다. 이름이 꼭 생수 이름 같습니다. 김석수 총리서리! 이분이 통과가 될 것 같습니까, 안될 것 같습니까? 저는 된다고 믿습니다. 됩니다. 이분은 왜 될까요? 앞에 있던 장상, 장대환 씨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통과가 되는 것입니까? 훨씬 도덕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에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두 명 떨어뜨리다가 세 명째 오니까 이제 또 떨어뜨리기가 민망한 것입니다. 야당도 또 떨어뜨리려니까 민망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번 총리서리는 나이가 70세 되신 분입니다. 또 떨어뜨리자니까 민망하고 미안합니다. 그래서 대충 넘어가는 것입니다. 언론도 그렇습니다. 똑같은 것을 계속하려니까 민망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추적도 별로 안하지요? 이번에는 통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깨끗해서 통과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은혜입니까? 용서와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예리한 칼을 가지고 들이댈 때는 다 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사회가 굉장히 미성숙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이런 훈련이 안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번에 통과되는 것은 결국 용서와 은혜의 잣대 때문에 통과되는 것이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도덕성 때문에 통과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에도 이런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도덕성과 능력인데 도덕성…… 문화라는 것은 공기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한 사회의 도덕적인 수준이 한꺼번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다 똑같이 해 먹던 사람입니다. 똑같이 거짓말하던 문화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최소한 이 정도의 도덕성을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됩니다. 노골적으로 상습적으로 거짓말하는 사람, 말을 뒤집는 것이 상습적이지 않은 사람, 그 정도면 됩니다. 투기는 하긴 했으되 투기가 재산 형성의 주요 요소가 아니면 됩니다. 조금 투기도 했지만 투기꾼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 그다음에 우리가 체크해야 될 것은 국정수행능력이 있는가!
옛날에 링컨대통령이 전쟁을 할 때에 그랜트장군을 썼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알콜중독자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말렸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저런 사람을 쓰느냐, 그러나 링컨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전쟁에 있어서는 그랜트를 당할 자가 없다” 그는 장점을 보고 사람을 썼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인 도덕성과 능력과 장점을 가지고 사람들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시각은 굉장히 중요한 것 아닙니까? 우리는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사람을 쓸 때에는 장점으로 쓸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다고 해도 그 연약함은 단순히 연약함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도 소망을 찾아나가는 것이 리더십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제가 어제 리더모임 때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에는 축구에도 유교주의가 들어가 있습니다. 동네축구할 때 제일 어린애가 하는 일이 골키퍼입니다. 나이 좀 들면 수비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5학년이 되면 미드필더, 6학년은 무조건 공격수입니다. 그러니까 동네축구지요. 될 리가 없지요. 축구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힘이 세거나 학년이 높으면 공격수입니다. 6학년이니까! 이것이 중학교 때도 존재하고 고등학교 때도 존재하고 심지어 대학가서도 존재합니다.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에 와 가지고 놀란 것이 있습니다. 유럽에는 오른발, 왼발을 동시에 쓸 수 있는 선수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선수는 오른발잡이가 왼발도 잘 쓰고 왼발잡이가 오른발도 잘 쓰고 참 이상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급할 때 시켜보니까 수비시키면 수비도 할 줄 알고 미드필더 시키면 공격도 할 줄 알고 물어보면 다 해 봤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는 수비하고 대학 때는 공격했어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이것이 유교주의의 병폐입니다. 실력에 따라 선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위계질서로 쓰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안 된다. 한국의 유교주의가 동네축구 만들었다 한국의 축구가 살기 위해서는 유교주의를 깨버려야 된다고 패배주의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딩크는 거기에서 중요한 장점을 뽑아냈습니다. 이것은 장점도 될 수 있겠구나, 한국선수는 어디 갖다 놓아도 다 쓸 수 있는 선수다! 멀티 플레이어! 멀티 플레이어는 유럽에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개발된 개념입니다. 우리는 어느 것이나 다할 수 있다…… 거기에서 장점을 뽑아내잖아요.
포스트잇도 그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접착제로 개발을 했는데 접착제가 아주 엉터리 같은 접착제입니다. 붙어도 금방 떨어집니다. 이것이 접착제가 됩니까? 이런 접착제를 누가 씁니까? 그래서 욕을 되게 먹었습니다. 아니, 투자비를 주었더니 이런 것을 접착제라고 만들었느냐! 그래서 용도폐기되어 버렸습니다. 만든 사람은 망친 것을 가지고 그냥 성가대 악보에 끼워놓았더라는 것입니다. 끼워 놓으니까 찾기 편하고…… 그런데 우두커니 옆에 있던 사람이 이것을 제품화 시키자고 해서 3M에서 포스트잇이 나온 것입니다.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것…… 다른 사람은 실패라고 하고 약점이라고 하는 것을 잡아서 최고의 강점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포스트잇이 붙었다가 안 떨어지면 그것은 포스트잇이 아니라 스카치테이프입니다. (성도들 웃음) 붙었다가는 떨어져야 합니다. 깨끗하게 떨어져야 합니다.
남들은 약점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지도자는 장점을 바라보잖아요. 그것이 기독교적인 능력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다 깨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 무너지고 다 깨진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시각입니다.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와 은혜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우리는 용서받았잖아요. 1만 달란트 빚진 자인데 용서받았잖아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은혜 베푸는 것입니다.
이 사회…… 지금도 루소 같은 자들이 외치는 것들 구호는 멋집니다. 이렇게 개혁하고 혁명하고 뭐 하자는 것…… 그것 괜히 국민들이 멋도 모르고 쫓아가다가 나라 망칩니다.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딱 하나입니다. 용서와 은혜의 원리! 용서와 은혜의 원리!
저는 우리 국민이 프랑스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원합니다. 프랑스는 루소주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밤낮 피의 혁명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반면 영국사를 보십시오. 영국사회는 묘하게도 순간순간마다 용서의 논리가 들어가고 은혜의 논리가 들어가고 거기는 혁명을 해도 명예혁명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피 없는 혁명! 왜인지 아십니까? 은혜가 있고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가지고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모든 병들고 깨진 부분을 치유하는 종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와 은혜의 논리를 가지고 살리는 종들이 되게 해 달라고 이 시간에 다같이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 : 인본주의자들은 계몽주의자들은 우리 인간이 디자인한 유토피아 이론을 가지고 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속에 선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정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고 썩어질 것밖에 없고 우리에게 파괴적인 속성들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컨트롤을 받고 고난 통해서 다짐을 받고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은혜가 있어야만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종들입니다. 이제는 용서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전병욱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