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회(挽回)의 시간들  (눅13:1-9)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기독교 입문의 시기가 언제부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시기가 언제부터라고 생각하십니까? 언제부터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 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모태신앙이면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례를 받으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시작점은 바로 회심의 순간입니다. 이 회심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과 중생에 이르게 하는 매우 중요한 본질적인 시작점이며 그 회심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회개의 순간을 가장 중요한 기독교 입문의 절차로 보는 것이고, 이 회개의 시간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삶을 이해하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심과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일회적인 체험은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 입문의 시작임과 동시에 또 그 생활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는 생명력인 것입니다. 즉 계속되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은 건강해 질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더욱 왕성한 생명력을 갖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최근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신 때가 언제입니까? 그 시간이 오래면 오래일수록 그만큼 신앙의 건강에 있어서 적신호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회개해야 할 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늘 회개는 그 특성상 항상 심판과 연결되기 때문에 표현이 아주 긴박하고 또 잔인하리 만치 원색적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가장 중요하고 몹시 긴박한 생명과 연관 있는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3:10 의 말씀'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이나, 마7:19-20 의 말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도 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읽은 눅13:1-9 이 본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곧 우리 죄악의 결과를 물어 벌하실 것 같은 하나님의 진노가 당장이라도 보이는 듯한 본문이며 그 실감을 더하기 위해 예수님은 막연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당시에 일어났던 엄청난 참상들을 예로 듦으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확실하게 깨닫게 한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시점으로 되돌아 가 봅니다.

지금도 세계 모든 나라들이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은 물 부족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사람들은 물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고민을 한 흔적들이 문서나 고고학적 유물들로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을 다스렸던 사람은 빌라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빌라도는 사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악랄한 통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루살렘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폈으며, 그 중 예루살렘에 물을 대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을 다스리는 수리정책에 있어서만큼은 전임자들이 생각지 못했던 최상의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선 예루살렘 한 쪽 구석에 있던 실로암 이라고 하는 연못을 재정비해 더 깊이 파고 또 망대를 쌓아 그곳으로 물을 끌어들이려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어마어마한 공사에 들어가는 예산이었습니다. 이 국책사업과도 같은 대 공사의 재원을 어디에서 충당하느냐 하는 문제로 고민을 하다가, 빌라도는 그 수리사업의 예산을 성전의 돈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빌라도가 보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돈을 쌓아 놓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찰이 빚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그 예산문제로 인해 빌라도에 대한 반대감정이 일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실로암 공사에 대해서까지도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로암 공사도중 쌓았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에 더욱 화가 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의 돈을 빼앗아 하는 이 공사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확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비교적 그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북방의 갈릴리사람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급기야 빌라도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모의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정보는 빌라도에게 먼저 들어가데 됩니다. 그 정보를 입수한 빌라도는 그 시위를 막기 위해 군인들을 변장시켜 성전으로 들여보내 그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들의 피를 성전의 희생제물로 쓰이는 동물들의 피와 섞는 아주 잔인하고도 끔찍한 일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 본문의 전개는 이렇게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나가는 사회적 혼란의 사건의 와중에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비유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1) 하나는 공동체의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멸망을 염두해 두시고 한 말씀으로 여기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열매는 참된 회개를, 과원지기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의 말씀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보편적인 한 개인인 인간에게 주신 말씀으로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 때에 멸망하게 될 것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분 명 이 본문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고 그 회개의 이유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비유의 말씀을 읽으시며 어떤 해석을 하십니까? 벌을 면하기 위한 회개인가? 죽기 전에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하라는 것입니까? 본문을 잘 모십시오.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당시의 사건들을 통해 그 죽은 사람들이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본문은 우리에게 보다 더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음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심판을 면하기 위해, 어떻게 하든 화를 면하기 위해 미리미리 회개하자!”가 아닙니다.“벌을 면하기 위하여 회개하라!” 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30년이 남았건, 10년이 남았건, 1년이 남았건, 혹 1달 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시간들에게는 분명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위기를 좀 바꿔서 시를 한 편 소개해 드립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라는 시입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가라앉을 때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오’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들은 이 시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김동호 목사님께서는 이 시를 듣고는 가슴이 벅차 친구에게 편지를 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시가 싫습니다. 누가 이 시라고 읊으면 참으로 힘든 마음으로 듣곤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친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게 친구가 없는 이유는 저의 성격이 모가 났거나 성격상 문제가 있어 친구를 못 사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제 성격이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친구를 못 사귈 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게 친구가 없는 이유는 저는 친구는 양보다는 질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그런 친구가 하나 있어 행복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1995년 7월, 예수님이 죽던 나이 33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일본 동경신학대학에서 유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시작했던 그 친구는 과로로 인한 심장 마비로 세 살과 두 살 난 아이들 둘을 남기고는 죽고 말았습니다. 제가 일본에 선교사로 가 5년 간 일했던 이유도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친구의 장례식을 치르러 일본을 갔었고 일본에 갔다가 장례식을 치르고는 그만 그 교인들에게 붙잡히게 되어 일본에서의 목회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가장 친했던 친구의 장례식을 치르는 그 마음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 중에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면 이미 그런 경험을 한 분들이 꽤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33 젊은 나이의 그런 경험은 제게는 큰 충격이었고 그 사건은 제 삶의 자세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일본에서 5년 간 목회할 때도 죽음에 대한 독특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저와 저희 교회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 불법 체류자들을 위한 봉사를 교회 차원에서 했었습니다. 그들은 동경 주위에만도 약 5만명 정도 있는데, 이들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같은 동포이기에 그들이 당하게 되는 어려움, 특히 죽는 경우 저희 교회는 그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일을 했었습니다. 약 일주일에 한 건 정도 장례를 치르면서 저는 어처구니 없는 주검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지 못해 병을 키워 죽는 사람, 좋지 못한 작업환경에서 병을 얻어 죽는 사람, 술 먹고 싸우다 죽은 사람, 겨울에 길에서 노숙하다 얼어 죽은 사람, 술집에서 일하던 여인들의 의문의 죽음까지...... 정말 사연도 많고 이해하기도 힘든 그런 죽음을 경험 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장 친했던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과, 기가 찰만한 비참한 인생들의 죽음을 장례 치르면서 저는 인생에 대한 생각과 삶에 대한 생각, 그리고 생명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 삶에 대해서는 냉정하리 만치 무감각해 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 속에 언제 죽어도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를 먼저 보내면서 저는 제가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혹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목회를 계속하게 된다면 절대로 학력을 높이기 위해 공부하지 않겠다는 것과 교회를 크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런 것이 제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는 언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늘 했었습니다. 이것은 목사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저의 정직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죽음에 거는 기대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 그렇게 굳건하게 갖고 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저의 생각이 변하고 있습니다. 제 나이 이제 올해로 40이 되었습니다. 공자(孔子)의 말대로 어떤 유혹도 이겨내는 불혹(不惑)의 나이인데 저는 유혹을 더욱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나이 40이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옛 어른들과 선배들이 말씀 하셨는데, 정말 저도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그 중에 올 해 들면서 제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래 살고 싶다는 의미는 행복한 인생 더 오래 즐기고 싶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더 오래 이 땅의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경제적인 여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어 죽음이 아쉬운 것도 아닙니다. 제가 이 땅의 삶을 더 오래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지금 이대로 하나님 앞에 서면 저는 너무나도 부족해서 머리를 들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부끄러운 삶의 연속이라 책망만 받을 것 같아서 내 인생을 만회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의 지은 죄들, 열매 맺지 못한 게으름들,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낸 그 부끄러움들이 너무도 크게 보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기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지은 죄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만큼 만회의 시간도 많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죽어 하나님 앞에 서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부족했던 우리의 삶을, 부끄러웠던 우리의 과거를,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아 왔던 우리의 시간들을 만회해야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이 필요하기에 더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야 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남은 여생을 무엇을 하시며 사시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서시는 것이 자신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상급을 주실까? 그것이 궁금할 정도로 후회 없는 생을 살아 오셨습니까?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이 땅에서의 남은 시간을 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이 세상에서 당신은 얼마만큼 유용했는가? 입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받기만 하는 것으로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무화과나무는 흙에서 기운과 자양분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그 무화과 나무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나무가 회개해야 할 문제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저는 지난 설 연휴 때 의료선교차 인도의 남부지방을 다녀왔습니다. 인도의 남부지방을 가기 위해 우리는 인도의 제 4대도시인 첸나이를 통해 입국하였습니다. 인도의 첸나이는 우리 기독교적으로 볼 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도시입니다. 그것은 그 도시가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도마가 죽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팀은 의료봉사를 다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도마의 유적지를 돌아보았습니다. 도마가 숨어서 기도하던 동굴과 도마가 순교했던 언덕의 바위와 도마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싼토메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유적지를 돌아보며 저는 한 가지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 보이는 관 안에 정말 도마가 있을까? 정말 도마가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해 바위가 저렇게 패였을까?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은 왜 도마가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 같이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이해력이 떨어진 사람이었고 또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늘 질문하였던 (요14:1-5) 제자였고 부활을 믿지 못하여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던(요20)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도마가 왜 이국 만리 이곳 인도에까지 왔을까?

제가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죄책감으로 인해 괴로운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제일 먼 인도에까지 가서 교회를 7곳을 세우고 평생을 전도하다가 순교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일 말썽 많던 사람들이 제일 먼 곳을 간 것 같습니다. 바울의 로마 순교와 도마의 인도 순교, 이 두 사실은 분명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바로 만회를 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이대로 의심만 하다가, 이대로 반대만 하다가 주님 앞에 선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너무 비참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회를 위한 긴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선교사가 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모두 다 먼 곳을 가야만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앞으로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욕심대로 살 것입니까? 더 소유하기 위해 살 것입니까? 더 편하기 위해 살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싸울 시간이 없습니다. 한 시간 싸우면 두 시간을 만회해야 합니다. 이미 도끼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무슨 선택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 여러분 부디 오래 사십시오. 그리고 오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시간이 아닌, 그냥 무의미한 열매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끄러움을 만회할 수 있는 그런 열매를 맺기 위한 시간을 달라고 하십시오.

우리의 남은 여생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남들은 이미 죽었는데, 나는 살아 있으니 축복을 얻은 겁니까? 은혜를 입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남은 여생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부끄러운 인생의 만회를 위한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 번 더 참으시는 인내 때문에 덤으로 살게 된 시간들입니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입니까? 깊이 깊이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아 이제 곧 하나님 앞에 설 때 고개를 들고 기쁨으로 당당하게 주님을 대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우리의 남은 날을 계수 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큰 지혜를 주셔서
내게 남은 시간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욕심의 행동들을 줄이게 하시고
이제 곧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럽고 부족한 우리의 인생을 만회할 수 있도록
주를 위한 삶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김동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