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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강건케 하옵시며 (엡 3:14-21)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 3:14-21)
사람은 누구든지 기도하면서 삽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의 대상을 자신에게 두고 자신에게 독백처럼 기도합니다. 우리 선조 들은 산에 가서 산신령에게 또는 큰 바위에게도 기도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상을 세워 놓고 그 우상 앞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구조를 하나님과 교통 할 수 있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대화를 못하면 앞의 예처럼 변형된 여러 모습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것을 성경을 통해 거듭거듭 요청하고 계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줄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면서 구하고 기도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해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은 그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4-15) 모든 사람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내가 낱낱이 너를 안다' 는 뜻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시체를 향해 나사로야 하고 이름을 부르셨던 주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름을 주셨고 각 사람의 형편을 모두 아십니다. 또 그분은 누구십니까? 아버지입니다. 자식이 원하면 줄 수밖에 없는 아버지입니다. 예전에 줬는데 또 달라고 하면 주시는 아버지십니다. 이런 아버지 앞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에 얼마나 응답해 주십니까?
본문 2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엡 3:20)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이렇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말로 놀랍다는 뜻은 영어로 하면 amazing 입니다. 이 단어는 놀랍다는 말보다 더 큰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놀라움을 넘어선 충격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고, 벌린 입을 다물 수도 없을 만큼 큰 놀라움(amazing)으로 각각의 생애를 풍성케 하시는 그분, 그분 앞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시베리아의 추운 겨울날 밤, 어느 팔십이 넘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는 화롯불을 가운데 두고 아름다운 추억의 박물관에서 지난날의 기억들을 꺼내어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정다운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천사가 불시에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천사가 들어오니까 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몹시 놀랐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저는 당신들 모습이 정다워 보이고 말씀하시는 내용에 너무 감동이 되어 들어왔습니다. 당신들처럼 아름답게 많은 세월을 사신 분들을 축복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이 부부에게 세 가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분들이 밤이 깊도록 오래 얘기를 하면서 좀 출출하셨나 봅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할머니가 '소시지 한 개!'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사이가 좋던 할아버지는 성이 났습니다. '아니, 천사가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는데 기껏 소시지 한 개야?' 하며 머리끝까지 화가 난 할아버지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소시지 코에 붙어버려라!' 그랬습니다. 할머니의 코에 붙은 소시지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을 냈던 할아버지는 그래도 할머니를 몹시 사랑했던지 마지막 소원으로 '소시지 코에서 떨어져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시지 한 개를 잘 구워먹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를 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고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데 우리는 기도하며 소시지 한 개나 구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이 기도는 '내가 그동안 소시지 한 개만 구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나를 정확하게 아시고,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시는 그분 앞에 구하는 첫 번째 기도는 이것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6) 우리의 인생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겉으로 나타나는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속에 숨어 있는 인생입니다. 표현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숨은 인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인생에 대해서는 참 관심이 많습니다. 한 예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관광을 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러 오나 했더니, 두 가지 목적이 있어서 옵니다. 하나는 때밀이 관광입니다. 황금 연휴 때는 엄청난 숫자가 온답니다. 또 하나는 성형 수술 관광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일본에서 국내 여행비를 가지면 한국에서는 성형수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여행비로 얼굴 수술 해 가지고 들어간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겉모습을 꾸미려고 노력하고 애씁니다. 그래서 제가 나는 뭘 고칠까 생각하니 피부가 검은데 그렇다고 피부를 어떻게 고칠 수도 없고, 칼을 대봐야 그게 그것일 것 같아 평생 성형수술은 안 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겉모습을 가꾸기 위해 참 노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겉 인생도 가꾸고 있습니다. 겉 인생을 위해 출세가 필요하고 타이틀이 필요합니다. 겉 인생을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3-4) 사도는 단장하고 가꾸어나가야 할 인생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속에 숨은 사람이며, 신령한 것으로 인생을 단장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속 사람을 두고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2)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6) 우리의 쭈그러지고 낡아져 가는 인생이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겉모습이 변하는 건 어떻게 막을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속 사람입니다. 그것은 날로 새로워져 가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주름이 하나 더 늘었다고 찡그릴 것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늙지도 않고 날마다 새로워져 가는 속 사람이 있습니다.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새로워지는데 어떻게 새로워져 가겠습니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라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이루어져 가는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이러한 속 사람이 있습니다.
왜 속 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속 사람을 강건케 하셔서 이 세상에서 승리자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겉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환경이 더욱 좋아지고, 소유가 내 부족을 채워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고해의 인생입니다. 누구도 고통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 많으면 돈 때문에 고통받습니다. 저는 이건희씨를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정말입니다. 저처럼 아무데서나 짜장면도 못 먹고 납치 당할까봐 자식들이 벌벌 떨어야 합니다. 저는 대문을 열어놓고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 사람들도 저를 부러워하지 않겠지만 저도 그 사람들이 절대 부럽지 않습니다.
예쁘게 생긴 것도 형벌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쁜 사람은 머리가 좀 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시에 두 개를 다 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제가 연예인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보니까 사람들이 변덕이 무척 심했습니다. 울다가 웃다가.. 그래서 제가 목사님한테 그 교회는 왜 그리 변덕이 심하냐고 물으니 연기하는 사람들이 변덕쟁이가 되지 않으면 이 장면에서는 웃다가 저 장면에서는 우는 장면을 어떻게 순간적으로 연기하겠냐고 하셨습니다. 어쩌다가 너무 예쁘게 생겨서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생겨서 고생하는 사람도 또 있습니다. 아무튼 이 세상에서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믿는 고통입니다. 세상과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핍박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 14:2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하나님께서는 이 핍박과 고난의 세상에서 환경을 변화시키기보다 속 사람의 강건함으로 환경을 이기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얕은 물가에서만 수영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깊은 대양에서도 유유히 수영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속 사람의 강건함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우리의 마음속 왕좌에 모셔서 그분이 우리의 생애를 붙잡으실 때에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믿을 사람 모두에게 예수께서 거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 나의 구주로 마음의 왕좌에 앉아야 하고,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기적인 자아입니다. 내 욕심과 의지대로 살다가 예수를 영접하면 '왕 되신 주님이시여, 나를 다스리시옵소서. 당신은 내 주인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고 삽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주께서 내 주인 되시도록 나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분의 다스림 앞에 신뢰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때, 나는 비록 약하지만 내 속에 계신 주님은 나를 강한 인생으로 살게 만드십니다.
제가 참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제가 적극적으로 용납하고 사랑해보려고 해도 한계가 있어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이 사람 용서 못하겠습니다. 저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주님, 당신 사랑에 제가 따라가게 해 주시옵소서.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그 사랑에 제가 순종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랬더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었지만 주님은 하십니다. 내 속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왕 되신 주님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인생에게는 놀라운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그 인생은 사랑가운데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가는 생애입니다. 예수가 내 인생에 구주이신 인생으로 내 속 사람이 강건케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속 사람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삶의 보이지 않는 곳의 뿌리와 터가 굳어지리라고 했습니다. 한민족은 비겁한 민족입니다. 일본이 교과서를 왜곡한다지만, 우리도 우리 주변의 다른 민족에게 얼마나 무서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은 무시하는 민족입니다. 보이지 않는 기초를 무시했기 때문에 와우아파트, 삼풍백화점,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무시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생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를 봅니다. 안 보이는 그곳을 봅니다. 우리는 열매만 보려고 듭니다. 뿌리는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뿌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건물을 지을 때는 그 기초에 관심을 갖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외국에서 공사할 때는 기초를 잘 하면서, 막상 이 땅에서는 기초도 시공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아무렇게나 합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안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기분 나빠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약점에 대해서, 그 속에서 잘못된 것을 파헤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당은 야당일 때를 생각지 않고, 야당은 언젠가는 여당 할 것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신문기자는 마음대로 기사를 씁니다. 언론만 접하고 저는 영종도 공항이 개항하면 비행기가 하루에 몇 대는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언론도 시민단체도 모두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고 책임 없이 무슨 말이든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을, 속 사람을, 기초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만일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속 사람이 나무라면 그 사랑의 뿌리를 두르고, 우리의 속 사람이 지어가야 할 건물이라면 그 기초를 하나님의 사랑에 두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8) 감정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은 아침저녁으로 흔들리지만 지식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도 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확신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사랑을 점점 더 알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알아갈 때에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이 부어진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의 심령 속에서 충만하게 넘칩니다.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승리합니다.
한 자매님의 말씀입니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만 준다면 불에라도 들어가겠답니다. 사랑 받는다는 확신은 사랑을 죽음보다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누릴 수 있다면 충만한 사람, 훌륭한 사람입니다. 돈은 있다가 반드시 없어지고 건강도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 때에도 변함 없이 나를 충만케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은 너무나 감격스러운 밤이었습니다. 영광스러웠던 것은 그 예배에 엘렌 니콜스라는 자매님이 참석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입양아입니다. 이 아이는 시각장애자입니다. 어린 나이에 시각장애자인 아이를 시장에 놔두고 잠깐 어디 갔다온다던 엄마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보호소로 갔고 얼마 후 네 살 되던 해에 미국 볼티모어의 니콜스씨 가정에 입양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 니콜스씨도 참 재미있고 귀한 어른입니다. 그 부부는 두분 다 시각장애자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딸 하나를 입양하더니, 장애를 가진 아이들만 넷을 입양해서 부부가 키웠습니다. 그 가정에서 엘렌이 자란 것입니다.
그 부모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면서 곱고 귀하게 자랐습니다. 그 아이가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부모가 나를 버렸다는 것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특별히 미움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앙이 좋으신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자라 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탄이 내게 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 부모도 너를 버렸는데 하나님이 너 같은 걸 소중히 여기겠느냐!' 그 때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외치면 또 말을 바꿉니다. '너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도 그래도 눈뜨고 살잖아. 근데 왜 너만 이 고통스러운 장애를 가져야 하느냐' 그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승리합니다.' 여러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무디(Moody, Dwight Lyman)선생이 너무 피곤해서 어느 날 영국 웨일스 지방으로 무작정 쉬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의 한 사람이 무디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무디에게 간청을 해 설교를 듣다가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부흥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온 마을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데 무디 선생은 뭔가 골똘히 생각합니다. '선생님, 무얼 그리 생각합니까?'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합니까?'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둘 수가 없고, 기도 없이는 부흥이 있을 수 없는데 우리가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상합니다.' 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기도요? 기도 같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을에 17년 전에 척추 장애로 전신불수가 되신 성도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으니까 하루종일 누워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그분은 10년 전에 무디가 미국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 이렇게 작은 마을이지만 무디 선생을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이 마을에 꼭 부흥 운동을 일으켜 주시옵소서.'하며 십 년을 하루같이 기도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무디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무릎을 치고는 그곳으로 갔습니다. 17년 전 전신불수가 된 기도하는 사람의 방에 들어서자 은혜가 그 방안에 가득했습니다. 무디가 깜짝 놀라서 '형제여, 하나님의 웬 은혜가 이렇게 큽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요? 그러면 사탄이 와서 까불텐데요.' 영적으로는 거인들끼리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하는 분이 '아 그놈 자주 오지요'라고 하자 '와서 뭐라고 합니까?'라고 무디가 묻습니다.
'이 세상에 나쁜 놈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네가 장애로 몸 하나 까딱 못하는 불치의 병을 앓아야 하느냐? 하나님이 널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냐?'하며 꼬인답니다. 그랬다가도 또 얼른 말을 바꾼답니다. '하나님이 널 사랑하긴 하지만 네 기도는 안 들어준다. 네가 17년 동안 얼마나 기도 많이 했느냐? 기도 조금한 아무개는 집도 고쳐주고 아들도 낫게 했는데, 네가 17년 동안 기도했는데 고쳐주지 않는 걸 보면 하나님이 너를 향해 귀를 닫으신 게 아니냐?'하며 속입니다. 무디가 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사탄아. 네 말 참 그럴듯하다. 내가 생각해 보니까 그럴듯하다. 그런데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은 사랑이란 말이야.'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자식을 희생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않습니까?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냐고 외쳐대시는 주님을 희생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사랑. 우리는 이 사랑 속에서 내내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잡고 지배할 때에 내 속 사람은 강건해 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겉모습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 겉의 유익을 위해서는 얼마나 수고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속에 지으신 그 아름다운 내 속 사람을 위해서는 왜 기도하지 아니하십니까? 문제는 속 사람입니다. 쇼하는 겉모습이 아닌 하나님 앞 에 진실하게 서있는 내 모습입니다. 성령께서 내 속 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내 주인 되심을 확인시켜주시며 하나님의 그 넘치는 사랑을 내게 주심으로 오늘도 우리로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 있습니까? 겉에 나타나는 성공과 소유, 건강과 형통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속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6) 이 소중한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출처/홍정길 목사 설교 중에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 3:14-21)
사람은 누구든지 기도하면서 삽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의 대상을 자신에게 두고 자신에게 독백처럼 기도합니다. 우리 선조 들은 산에 가서 산신령에게 또는 큰 바위에게도 기도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상을 세워 놓고 그 우상 앞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구조를 하나님과 교통 할 수 있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대화를 못하면 앞의 예처럼 변형된 여러 모습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것을 성경을 통해 거듭거듭 요청하고 계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줄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면서 구하고 기도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해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은 그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4-15) 모든 사람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내가 낱낱이 너를 안다' 는 뜻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시체를 향해 나사로야 하고 이름을 부르셨던 주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름을 주셨고 각 사람의 형편을 모두 아십니다. 또 그분은 누구십니까? 아버지입니다. 자식이 원하면 줄 수밖에 없는 아버지입니다. 예전에 줬는데 또 달라고 하면 주시는 아버지십니다. 이런 아버지 앞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에 얼마나 응답해 주십니까?
본문 2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엡 3:20)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이렇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말로 놀랍다는 뜻은 영어로 하면 amazing 입니다. 이 단어는 놀랍다는 말보다 더 큰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놀라움을 넘어선 충격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고, 벌린 입을 다물 수도 없을 만큼 큰 놀라움(amazing)으로 각각의 생애를 풍성케 하시는 그분, 그분 앞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시베리아의 추운 겨울날 밤, 어느 팔십이 넘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는 화롯불을 가운데 두고 아름다운 추억의 박물관에서 지난날의 기억들을 꺼내어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정다운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천사가 불시에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천사가 들어오니까 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몹시 놀랐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저는 당신들 모습이 정다워 보이고 말씀하시는 내용에 너무 감동이 되어 들어왔습니다. 당신들처럼 아름답게 많은 세월을 사신 분들을 축복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이 부부에게 세 가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분들이 밤이 깊도록 오래 얘기를 하면서 좀 출출하셨나 봅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할머니가 '소시지 한 개!'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사이가 좋던 할아버지는 성이 났습니다. '아니, 천사가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는데 기껏 소시지 한 개야?' 하며 머리끝까지 화가 난 할아버지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소시지 코에 붙어버려라!' 그랬습니다. 할머니의 코에 붙은 소시지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을 냈던 할아버지는 그래도 할머니를 몹시 사랑했던지 마지막 소원으로 '소시지 코에서 떨어져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시지 한 개를 잘 구워먹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를 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고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데 우리는 기도하며 소시지 한 개나 구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이 기도는 '내가 그동안 소시지 한 개만 구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나를 정확하게 아시고,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시는 그분 앞에 구하는 첫 번째 기도는 이것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6) 우리의 인생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겉으로 나타나는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속에 숨어 있는 인생입니다. 표현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숨은 인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인생에 대해서는 참 관심이 많습니다. 한 예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관광을 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러 오나 했더니, 두 가지 목적이 있어서 옵니다. 하나는 때밀이 관광입니다. 황금 연휴 때는 엄청난 숫자가 온답니다. 또 하나는 성형 수술 관광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일본에서 국내 여행비를 가지면 한국에서는 성형수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여행비로 얼굴 수술 해 가지고 들어간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겉모습을 꾸미려고 노력하고 애씁니다. 그래서 제가 나는 뭘 고칠까 생각하니 피부가 검은데 그렇다고 피부를 어떻게 고칠 수도 없고, 칼을 대봐야 그게 그것일 것 같아 평생 성형수술은 안 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겉모습을 가꾸기 위해 참 노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겉 인생도 가꾸고 있습니다. 겉 인생을 위해 출세가 필요하고 타이틀이 필요합니다. 겉 인생을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3-4) 사도는 단장하고 가꾸어나가야 할 인생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속에 숨은 사람이며, 신령한 것으로 인생을 단장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속 사람을 두고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2)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6) 우리의 쭈그러지고 낡아져 가는 인생이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겉모습이 변하는 건 어떻게 막을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속 사람입니다. 그것은 날로 새로워져 가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주름이 하나 더 늘었다고 찡그릴 것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늙지도 않고 날마다 새로워져 가는 속 사람이 있습니다.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새로워지는데 어떻게 새로워져 가겠습니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라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이루어져 가는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이러한 속 사람이 있습니다.
왜 속 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속 사람을 강건케 하셔서 이 세상에서 승리자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겉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환경이 더욱 좋아지고, 소유가 내 부족을 채워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고해의 인생입니다. 누구도 고통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 많으면 돈 때문에 고통받습니다. 저는 이건희씨를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정말입니다. 저처럼 아무데서나 짜장면도 못 먹고 납치 당할까봐 자식들이 벌벌 떨어야 합니다. 저는 대문을 열어놓고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 사람들도 저를 부러워하지 않겠지만 저도 그 사람들이 절대 부럽지 않습니다.
예쁘게 생긴 것도 형벌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쁜 사람은 머리가 좀 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시에 두 개를 다 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제가 연예인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보니까 사람들이 변덕이 무척 심했습니다. 울다가 웃다가.. 그래서 제가 목사님한테 그 교회는 왜 그리 변덕이 심하냐고 물으니 연기하는 사람들이 변덕쟁이가 되지 않으면 이 장면에서는 웃다가 저 장면에서는 우는 장면을 어떻게 순간적으로 연기하겠냐고 하셨습니다. 어쩌다가 너무 예쁘게 생겨서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생겨서 고생하는 사람도 또 있습니다. 아무튼 이 세상에서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믿는 고통입니다. 세상과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핍박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 14:2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하나님께서는 이 핍박과 고난의 세상에서 환경을 변화시키기보다 속 사람의 강건함으로 환경을 이기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얕은 물가에서만 수영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깊은 대양에서도 유유히 수영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속 사람의 강건함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우리의 마음속 왕좌에 모셔서 그분이 우리의 생애를 붙잡으실 때에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믿을 사람 모두에게 예수께서 거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 나의 구주로 마음의 왕좌에 앉아야 하고,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기적인 자아입니다. 내 욕심과 의지대로 살다가 예수를 영접하면 '왕 되신 주님이시여, 나를 다스리시옵소서. 당신은 내 주인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고 삽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주께서 내 주인 되시도록 나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분의 다스림 앞에 신뢰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때, 나는 비록 약하지만 내 속에 계신 주님은 나를 강한 인생으로 살게 만드십니다.
제가 참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제가 적극적으로 용납하고 사랑해보려고 해도 한계가 있어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이 사람 용서 못하겠습니다. 저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주님, 당신 사랑에 제가 따라가게 해 주시옵소서.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그 사랑에 제가 순종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랬더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었지만 주님은 하십니다. 내 속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왕 되신 주님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인생에게는 놀라운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그 인생은 사랑가운데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가는 생애입니다. 예수가 내 인생에 구주이신 인생으로 내 속 사람이 강건케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속 사람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삶의 보이지 않는 곳의 뿌리와 터가 굳어지리라고 했습니다. 한민족은 비겁한 민족입니다. 일본이 교과서를 왜곡한다지만, 우리도 우리 주변의 다른 민족에게 얼마나 무서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은 무시하는 민족입니다. 보이지 않는 기초를 무시했기 때문에 와우아파트, 삼풍백화점,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무시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생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를 봅니다. 안 보이는 그곳을 봅니다. 우리는 열매만 보려고 듭니다. 뿌리는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뿌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건물을 지을 때는 그 기초에 관심을 갖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외국에서 공사할 때는 기초를 잘 하면서, 막상 이 땅에서는 기초도 시공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아무렇게나 합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안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기분 나빠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약점에 대해서, 그 속에서 잘못된 것을 파헤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당은 야당일 때를 생각지 않고, 야당은 언젠가는 여당 할 것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신문기자는 마음대로 기사를 씁니다. 언론만 접하고 저는 영종도 공항이 개항하면 비행기가 하루에 몇 대는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언론도 시민단체도 모두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고 책임 없이 무슨 말이든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을, 속 사람을, 기초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만일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속 사람이 나무라면 그 사랑의 뿌리를 두르고, 우리의 속 사람이 지어가야 할 건물이라면 그 기초를 하나님의 사랑에 두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8) 감정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은 아침저녁으로 흔들리지만 지식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도 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확신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사랑을 점점 더 알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알아갈 때에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이 부어진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의 심령 속에서 충만하게 넘칩니다.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승리합니다.
한 자매님의 말씀입니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만 준다면 불에라도 들어가겠답니다. 사랑 받는다는 확신은 사랑을 죽음보다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누릴 수 있다면 충만한 사람, 훌륭한 사람입니다. 돈은 있다가 반드시 없어지고 건강도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 때에도 변함 없이 나를 충만케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은 너무나 감격스러운 밤이었습니다. 영광스러웠던 것은 그 예배에 엘렌 니콜스라는 자매님이 참석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입양아입니다. 이 아이는 시각장애자입니다. 어린 나이에 시각장애자인 아이를 시장에 놔두고 잠깐 어디 갔다온다던 엄마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보호소로 갔고 얼마 후 네 살 되던 해에 미국 볼티모어의 니콜스씨 가정에 입양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 니콜스씨도 참 재미있고 귀한 어른입니다. 그 부부는 두분 다 시각장애자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딸 하나를 입양하더니, 장애를 가진 아이들만 넷을 입양해서 부부가 키웠습니다. 그 가정에서 엘렌이 자란 것입니다.
그 부모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면서 곱고 귀하게 자랐습니다. 그 아이가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부모가 나를 버렸다는 것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특별히 미움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앙이 좋으신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자라 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탄이 내게 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 부모도 너를 버렸는데 하나님이 너 같은 걸 소중히 여기겠느냐!' 그 때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외치면 또 말을 바꿉니다. '너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도 그래도 눈뜨고 살잖아. 근데 왜 너만 이 고통스러운 장애를 가져야 하느냐' 그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승리합니다.' 여러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무디(Moody, Dwight Lyman)선생이 너무 피곤해서 어느 날 영국 웨일스 지방으로 무작정 쉬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의 한 사람이 무디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무디에게 간청을 해 설교를 듣다가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부흥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온 마을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데 무디 선생은 뭔가 골똘히 생각합니다. '선생님, 무얼 그리 생각합니까?'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합니까?'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둘 수가 없고, 기도 없이는 부흥이 있을 수 없는데 우리가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상합니다.' 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기도요? 기도 같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을에 17년 전에 척추 장애로 전신불수가 되신 성도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으니까 하루종일 누워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그분은 10년 전에 무디가 미국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 이렇게 작은 마을이지만 무디 선생을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이 마을에 꼭 부흥 운동을 일으켜 주시옵소서.'하며 십 년을 하루같이 기도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무디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무릎을 치고는 그곳으로 갔습니다. 17년 전 전신불수가 된 기도하는 사람의 방에 들어서자 은혜가 그 방안에 가득했습니다. 무디가 깜짝 놀라서 '형제여, 하나님의 웬 은혜가 이렇게 큽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요? 그러면 사탄이 와서 까불텐데요.' 영적으로는 거인들끼리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하는 분이 '아 그놈 자주 오지요'라고 하자 '와서 뭐라고 합니까?'라고 무디가 묻습니다.
'이 세상에 나쁜 놈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네가 장애로 몸 하나 까딱 못하는 불치의 병을 앓아야 하느냐? 하나님이 널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냐?'하며 꼬인답니다. 그랬다가도 또 얼른 말을 바꾼답니다. '하나님이 널 사랑하긴 하지만 네 기도는 안 들어준다. 네가 17년 동안 얼마나 기도 많이 했느냐? 기도 조금한 아무개는 집도 고쳐주고 아들도 낫게 했는데, 네가 17년 동안 기도했는데 고쳐주지 않는 걸 보면 하나님이 너를 향해 귀를 닫으신 게 아니냐?'하며 속입니다. 무디가 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사탄아. 네 말 참 그럴듯하다. 내가 생각해 보니까 그럴듯하다. 그런데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은 사랑이란 말이야.'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자식을 희생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않습니까?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냐고 외쳐대시는 주님을 희생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사랑. 우리는 이 사랑 속에서 내내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잡고 지배할 때에 내 속 사람은 강건해 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겉모습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 겉의 유익을 위해서는 얼마나 수고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속에 지으신 그 아름다운 내 속 사람을 위해서는 왜 기도하지 아니하십니까? 문제는 속 사람입니다. 쇼하는 겉모습이 아닌 하나님 앞 에 진실하게 서있는 내 모습입니다. 성령께서 내 속 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내 주인 되심을 확인시켜주시며 하나님의 그 넘치는 사랑을 내게 주심으로 오늘도 우리로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 있습니까? 겉에 나타나는 성공과 소유, 건강과 형통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속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6) 이 소중한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출처/홍정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