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누가복음 24:25-27)


인간이 성서를 향하여 던질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종교적 물음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죽음"에 관한 물음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은 왜 죽는 것인가? 사람은 왜 "죽음의 찌르는 가시"를 경험해야만 하는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이 죽음에서부터는 감히 다시 살아 되돌아 온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다시 사는 길"을 우리에게 말해 왔습니다. 즉 "죽음을 이기는 길"을 말해 왔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길"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고, "다시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매우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그러니까 1987년 2월 23일 밤에, "아이언 쉘톤"이라고 이름하는 카나다 토론토 대학의 한 천문학자가 발견했었던, 소위, "수퍼노바"라고 불리우는 한 "별"의 죽음에 관한 보도는, 우리에게, "별도 죽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이 보도에 의하면, 저 "수퍼노바"라는 "별"이 죽을 때는, 놀라웁게도, 약 1억 개 정도의 태양들이 한꺼번에 빛을 내는 것 만큼의 그런 거대한 빛을 갑자기 발산하면서 팽창한 후에!! 그런 다음에, 얼음처럼 식어져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대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도 그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는 섭씨 6000도라는 그 겉 표면온도보다는 20배는 더 뜨거운 섭씨 12만도 정도의 열을 갑자기 발산하면서 거대한 자기 폭발의 고통을 겪은 다음!! 그 다음, 급격한 템포로 얼음처럼 냉각되어 버릴 것이라고 예언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천문학자들의 예언이 이 분야의 문외한인 제게 더욱 신비하게 느껴진 것은 별의 죽음에 관한 문제와 함께 <새로운 별의 탄생>에 관한 보도였읍니다. 즉 별들은 그와 같은 <자기 폭발>의 고통과 함께 죽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 별들은, 전혀 잡히는 것이 없는 것 같은 저 텅 빈 우주공간 안에서도, 놀라웁게도, 그러한 <자기폭발>의 고통을 매개로 하여 끊임없이 새롭게 다시 생겨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신비한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천문학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제게 있어서도 너무나 신비하게 느껴진 점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즉 별이 죽는 그 마지막 순간에 분출한 그 거대한 "자기 폭발"은, 소위, "우주광선"(cosmic rays)이라고 알려진 에네르기 입자들을 거대하게 생산해 내는데, 바로 그 입자들이, 즉 별이 죽음의 고통을 겪으면서 토해 낸 입자들이 돌연변이적인 새로운 생명탄생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그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별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은, 전적으로, 별이 죽을 때 일으키는 그 "자기폭발"과 그 "자기아픔"을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거대한 별의 죽음, 영원한 얼음 덩어리로 냉각되거나 영원한 무저굉의 블랙홀로 줄어들거나 해버리는 저 거대한 별의 죽음은, 놀라웁게도, 단지!! 오직 단지!! 또 다른 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생명창조 에너지를 죽을 힘을 다하여 방출해내는 하나의 또다른 새 생명 창조 운동에 불과한 것이라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만일 그것이 정녕 그런 것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신비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천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신비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저 두 행인, 저 익명의 두 제자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도 바로 이런 종류의 문제였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조차도!! 부활을 창조해 내기 위하여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했다는 것, 그게 도대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그러한 고난과 그러한 죽음을 통해서라야만!!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 조차도 부활의 영광을 창조하기 위하여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그런 고난을 받아야만 했었다는 것, 그것은, 진실로 그것은, 적어도 그것만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전능하신 하나님 조차도!! 인간 생명의 구원과 새로운 인간 창조를 위하여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자기 폭발과 자기 해체의 "아픔"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셨다는 그것은, 적어도 그것만은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또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역사적 사실 앞에 선 예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최대의 종교적 고민이요 고뇌였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부활에 관한 교리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또 부활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야만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섭리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 적어도 그것만은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이러한 문제를 부등켜 안고 심히 고뇌하며 침울한 얼굴로 엠마오를 향하여 길을 걷고 있던 이 두 제자에게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가까이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참으로 미련하기도 하구나.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전체가 말한 그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도 또한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그와 같은 죽음을 죽어야" 비로소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이 사실을 그렇게도 믿기 어려우냐?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가르침과 예언자들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성서전체가 가르치고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이 바로 이것, 즉,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는> 결단코 부활의 영광이 창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제기해 온 모든 물음에 대한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답변은 단지!! 오직 단지,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은 <영광과 새 생명>을 창조해 내기 위한 한 필연적인 전제조건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말로서만 설명되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깨우침은 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서도 그 참 뜻이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채 가리워져 있는 하나의 신비였습니다. 영광과 새 생명의 창조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을 그 대가로 치룬 다음에라야 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차도 엠마오 도상의 저 침울한 얼굴의 두 제자에게 그토록 진지하게 설명해 주셨듯이,

그리스도도 또한!! 마땅히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라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전체가! 줄기차게 증언해 온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통하는 희생적 고난이 없이는! 자기 변화의 구원과 부활의 영광은 결단코 오지 않는다는 것이 모세와 예언자의 가르침을 포함한 성서 전체가 증언하는 복음적 증언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약 7년전의 일이었습니다. 그해 11월 1일(1990. 11. 1), 우연히도 제 아내가 가슴에 꽤 큰 혹덩어리가 만져진다고 하여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암"인지 아닌지는 수술을 동반한 조직검사를 해 보아야만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진단이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기록상의 진단은 breast mass였지만, 그러나, 병원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암"임에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으로 문명오는 분들이 병원 당국에서 얻어들은 사전지식을 근거로 한 위로들은, 대부분, "유방암은 조기 발견하여 치료만 잘하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으므로 너무 걱정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담대하게 가져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와 제 아내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예, 암환자 또는 그 보호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병실에서 대기하면서 수술을 기다린 시간은 꼭 일주일이었습니다. 이 일주일 동안은 저나, 제 아내는 "암"이 아닐! 가능성은 없다!!는 매우 비관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히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분명, 제 아내는 죽음에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기초적 제반검사가 다 끝났을 때, 병원의 양해를 얻어서, 수술을 받기 전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한번 더 보고 오겠다는 심정으로 병원 당국에 외출을 신청하여, 이례적으로, 잠시 집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수술도중 자기가 어떻게 잘못되는 경우, 남편이 뭐 그렇게 아이들 뒤를 잘 챙겨주랴 해서는, 아이들의 겨울 내의(內衣)들을 새로 사가지고 와서는 방마다 겨울 점검을 다 해 놓은 다음, 마치 유언이라도 하듯이, 울먹이듯, 몇가지 당부들을 남편인 내게 하였습니다. 수술을 받다가 자기가 어떻게 잘못 되더라도 우리 아이들에게만은 옛날보다 더 잘 대해 달라는 둥, 혹 새 장가를 가더라도 아이는 더 이상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둥, 분위기가 가히 초상집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매우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실로 다시 되돌아와서는 비로소 조직검사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에의 위협과 불안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입니다. 제가 감히 아내를 위해서, 그것도 아내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이번 경우처럼 그렇게 간절하고 절실하게 그리고 애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해 본 적이 목사이면서도 비록 유감스럽지만 예전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로 저의 심혼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진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후회없이 마음껏 한 번 사랑해 보지 못했던 지난 날이 그렇게도 죄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요사이는 시대가 많이 달라져서 생각들도 많이 달라지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마누라 자랑하는 놈은 바보다" 해서 마누라 자랑은 남자의 금기사항처럼 되어 있었고 또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남자는 거의 예외없이 "공처가"라는 딱지가 붙는 불문율이 있어서 아내에 대한 걱정은 속으로나 하는 것이지 겉으로는 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전통처럼 된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게 닥친 상황과 같은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그 경우가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저는 그저 무작정! 하나님께 매어 달려서 아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고 또 이유여하를 불문에 붙이고 무조건 <암이 아니게!!> 해달라고 한사코 떼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세브란스 병원 기도실로 뛰어 올라가서 울면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제가 지금까지 목사로서 잘못한 것이 무엇 무엇이 있는지를 제 일생을 통해서 한 번 철저히 점검도 해 보았고 또 아내에게 섭섭하게 한 일들이 무엇 무엇 있는지도 알알히 되새겨보면서, "회개"라고 할까 하는 그런 것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아내를 주셔서 함께 살게 하신 그 이유를 성서적으로나 기독교 신앙적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또 제게 있어서 도대체 "아내"라는 사람의 진정한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등등을 한 번 깊이 반성해 보았습니다.
한국적 관습으로는 좀 못난 사내 같지만, 어쨓든, 이 기막힌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정말 한 번 되게 혼쭐이 난 후, 그제서야 저는 "아내사랑"이라는 것은 하나의 <신의 명령>이라는 것이었구나 하는 것,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절대적인 <신의 명령>이었구나 하는 것, 그것이 곧 율법의 핵심과 연결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일종, "대오각성"이라는 것을 한 번 한 셈입니다.
마침내, 수술결과가 나왔습니다. 병원 당국으로서는 이런 일이 자신들의 경우로서는 두번째 겪는 예외의 case라고 하였습니다만,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인지, 예상 밖의 통보, "암이 아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수술 후 이틀만에 거뜬하게 기쁨과 감격을 안고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만, 퇴원한 지 며칠 안되어서 저는 어느 여성신학회 모임에서 성서연구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이상에서 말한 것 같은 그런 대오각성하는 회개의 신앙고백을 여성들만이 모인 그 자리에서도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거기서 어느 여성신학자 한 분이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우 격조높은 말로 내어뱉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매우 인상깊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즉 그분은 매우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모든 남편들은 저렇게 한 번 되게 혼쭐이 나야 합니다.
그래야, <아내사랑>이 다름 아닌 바로 <신의 명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놀라웁게도, 하나님의 인류 구원 섭리는 늘상 이런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리의 참 의미는 언제나 고통을 통한 대오각성이 없이는 진정으로 깨달을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 그것의 참 의미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겪은 그 고난의 경험과 그 부르짖음의 경험이 없이는!! 결단코! 바르게 깨달을 수 없었다는 것이 성서의 줄기찬 증언입니다. 뿐만은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는 축복도 또한 광야의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전혀 불가능하였다는 것이 또한 성서의 줄기찬 주장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지닌 그 의미도 바로 이러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친히 말씀하신 대로, 즉 "그리스도가 마땅히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영광에 들어가게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말씀으로 엠마오 도상의 저 믿음없는 두 제자를 나무라시며 가르치셨듯이,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사건이란 절대적으로 십자가의 희생적 고난과 사랑의 행위 없이는!! 결단코 창조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정녕 기쁜 소식이요, 정녕 즐거운 소식인 것은 그 부활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희생적 고난의 그 위대한 속량적 은총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이, 그 부활이 기쁜 소식이요 즐거운 소식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 스승이라고 할 만한 저 사도바울 선생도 또한 분명히 이 진리를 대오각성하였고 바로 그것 때문에!!, 그는 기독교 복음을 세계 속에 심는 최대의 선교자와 최대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의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1장 4절 이하에서 이렇게 그의 확신을 쓰고 있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내시고 또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시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 위애 내다] 바치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를 부활의 영광에로 이르게 하신 이 구원의 증언만이 참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과 다른 어떤 복음이 거기에 따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 이것과 다른 복음이 거기에 따로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분의 믿음을 교란시키려는 사람들로서,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삐뚤어지게 하려고 그러는 것 뿐입니다. 나, 바울을 포함한 우리 자신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할 지라도, 만일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복음 이외의 다른 것을 전한다면 그가 누구이든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 1:4, 7-8)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도 부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이요 허구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고난의 대속적 희생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새로워질 수가 없는 것이며 거듭나는 창조를 이룩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소멸시키고 그 죄를 십자가 위에 못박는 근원적 회개와 철저한 자기부정이 없이는 부활의 재창조와 구원의 은총이란 우리에게 결단코!!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옛날의 낡은 자기를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하여 스스로 썩어지지 않으면!! 그 어떤 밀알도 결코 열매를 맺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 장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단순한 종교도 아닙니다. 이것은 교리도 또한 아닙니다. 이것은!! 진실로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문제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복음의 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거역하며 살아온 이 낡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철저한 회개의 "아픔"을 통하여야만 우리는 비로소 부활과 구원의 영광에 능히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이 진리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증언만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 대한 복종만이!! 우리를 능히 부활의 영광에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