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전도서 11:1-2)

어떻게 하면 우리 한신 신학교가 신학교로서의 그 본분을 다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학교 교수로서 그리고 목회자 양성기관의 선생으로서의 우리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학생으로서의 그리고 목사 후보생으로서의 우리의 본분과 사명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좀 더 나은,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자기를 돌이켜 보고 자기 반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울을 통하지 않고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진이나 초상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자신을 확인합니다. 내가 행한 일을 통해서 또는 내가 써 놓은 작품을 보고서 나 자신을 확인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남의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얼굴만은 아닙니다. 성격이나 능력이나 사상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바르게 형성하여 가는 길은 결단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본질상 나의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라야 비로소 나를 알고 또 남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진리를 말하는 성현들은 다들, 네 자신을 먼저 알라라고 충고를 하셨고 그리고는 자신을 알되, 남과의 관계 안에서 즉 남을 통해서 자신을 알라라고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 7:12)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와 "너"는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곧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은 너무나 보편 타당한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르침을 "황금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장 기본되고 가장 기초되는 삶의 원리가 바로 이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인 랍비 힐렐이 "네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라. 이것이 율법의 전(全) 내용이며 이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주석일 뿐이다. 가서 이것을 배우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던 것은 이 계율이 모든 다른 계율을 모두 주석으로 돌릴 만큼 가장 근본되는 인생 계율이 된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동일한 관점은 예수님께서 구약 레위기 19장 18절을 읽으실 때, 즉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야훼니라"라고 하는 구약 말씀을 읽으실 때도, 이 게명을 가리켜서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도 하셨고(마 22:39-40), <이 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고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계명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고(롬 13:8), 사도 요한은 이 계명만 지키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요 13:35).

이러한 성서적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오늘 설교의 서두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대답은 매우 자명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한신 신학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신학이었습니다. 칼·바르트를 말하고 에밀 부르너를 말하며 폴·틸리히를 말하였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습니다. 폰·라트를 말하고 루돌프·불트만을 말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극심한 자기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교회 현장으로부터 들려 오는 많은 소리들은, "신학교가 교회를 선도하지 못하고 있다." "한신의 신학이 기장 교회의 신학을 책임지고 있지 못하다." "한신 출신의 목사 후보생들은 교회선교의 열정이 부족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며 교회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사명감이 약하다."라는 부정적인 평가의 소리들이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음을 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평가하게 만든 것일까요?

우리는 단지, "우리는 신학을 잘 가르치고 있는데 제자들이 현장에 나가서 잘못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책임을 제자들에게 떠 넘기기만 할 것입니까? 우리는 단지 "우리는 뛰어난 신학도로서 또한 훌륭한 신학을 갖추고 현장으로 나갔지만, 교회의 현장이 너무 무식하여 우리를 알아주지 않아서 교회 선교가 미약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라고만 우리는 말하는 것입니까? 현장 교회가 우리를 모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교회 현장을 모르는 것입니까?

여기서 나는 필연적으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 이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바로 율법이요 선지자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가 다 주석일 뿐이다>라는 가장 초보되는 주님의 이 가르침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마 7:1)

자기 눈속의 들보는 감추어 두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만 시비하여서는 공동체는 결단코 발전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니 자기 눈 속의 들보부터 빼라!(마 7:3-4)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념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감히, 능청스럽게도 우리는 "자기 얼굴은 자기가 볼 수 없다"라고 핑계하면서 남의 얼굴만 가지고 시비만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내어 주지는 않고 남의 것만 내것으로 가지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큰 잘못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용적이고 남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하기를 지나치게 인색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이고 밖이고 간에 인간 사회는 자기를 먼저 남에게 내어주어야 남도 나에게 무엇인가를 내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 파당만 사랑하면 공동체는 와해되고 발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철저히 공동체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면 먼저 남을 대접해야만 비로소 유지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주지는 않고 받기만 하려 했다면, 그리고 섬기려고 하지는 않고 지배하려고만 하였다면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너를 미워한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여야 한다."

라고 말하는 곳에서는 결코 공동체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창조질서의 철칙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한신의 비판신학은 결코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고 남의 인격을 헐뜯어서 남을 비판하는 것을 장려하는 신학은 물론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서는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남을 세워서 나를 세우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삶의 철칙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육신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서 누구든 십자가의 사랑을 감히 어용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적그리스도일 뿐인 것입니다.

구약 최대의 지혜교사인 전도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 11:1)

표준새변역의 번역, "돈이 있으면 [해상] 무역에 투자하여라. 여러 날 뒤에 너는 이윤을 남길 것이다" 라는 번역은 지나친 의역이므로 본문의 의미를 금전 투자로만 좁히는 약점이 있어서 오히려 개역성서에서 처럼 원문 그대로를 문자적으로 옮기는 것이 더 바람직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문은 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 운명을 흐르는 물 위에 내어 던지는 "자기 내어줌"의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 생각합니다.

"자기를 내어 던져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도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남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사랑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먼저 칭찬하고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남도 나를 칭찬해 주고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Take and Give가 아니라 Give and Take라는 것입니다.

먼저 심어야 하고 나중에 거두는 것입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 해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먼저 있어야 부활의 새 창조가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한신공동체의 발전의 향뱡은 분명합니다. 교회공동체 발전의 향뱡도 분명합니다. 먼저 자기를 내어 주십시오. 그러면 많은 이윤이 붙어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인간 세상이 비록 흐르는 물처럼 신의가 없다고 하여도 그래도 자신을 내어 던져 보십시오. 그러면 자기를 더 많은 이윤과 함께 도로 찾게 될 것입니다.

남에게 나를 내어주는 기쁨! 실로, 그것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기쁨! 그것도 또한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 기쁨의 진가는 그 어느 누구도 결코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자기반성은 무엇입니까? 신학하는 자들로서의 우리의 자기반성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믿음이냐 행위냐? 그리스도냐 율법이냐? 할례냐 무할례냐? 라는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의 교우들에게 말씀하실 때.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라고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만, 공동체라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는 일 없는 비판주의만으로는 결코 설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우리가 몰랐다면 분명 이것을 몰랐던 것임이 확실합니다.

대학의 비판주의는 "자기 비판"을 선행하는 비판주의입니다. 우선은 자기를 먼저 흐르는 물 위에 던져 버린 다음에 그 다음에 자기를 얻으려 해야 할 것입니다. 비판은 "사랑의 동기"가 있는!! 비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자멸할 것입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그래야 비로소 그것을 도로 찾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흐르는 물 위에 과감히 자신을 내어 던진 후, 여러 날 후에, 더욱 새로워진 자기를 도로 찾는 그것이 기독교적 지혜요, 기독교적 삶의 방식입니다. 그 반대는!! 적(敵) 그리스도적 삶입니다. 적어도, 신학을 한다는 우리 신학도들만은 그래야 합니다.

신학교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배우는 자도 그래야 하지만 가르치는 자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학문과 경건, 이 둘은 결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엄격히 둘로 분리시키는 자는 타 학문분야에는 혹 어울릴른지 몰라도 신학의 세계에서는 신학하는 일을 방해하는 최대의 "스칸달론"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좋은데, 좋은 크리스챤은 아니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자기 모순입니다.

우리 한신에 대한 모든 비판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야훼와 그리스도를 가르치면서도 야훼의 뜻과 그리스도의 뜻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고 또 그것을 용감히 가르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 "내" 식물을 물 위에 던져야 합니다.
먼저, 나를 나의 이웃에게 내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위로와 격려를 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 그것도, "여러 날 후"에!! 당장이 아니라!! "여러 날 뒤"에!!
나를 도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서적 삶이며
크리스찬적 삶이며, 목회자적 삶입니다.
  
우리를 우선 먼저 흐르는 물 위에 던집시다.
그리고 여러 날 뒤에!! 그것을 도로 찾읍시다.
  

출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