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눅 13:31-35)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미래 학자들은 20년쯤 뒤에는 120세쯤 살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연세 드신 분들 악착같이 살아서 120세를 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120세 아니라 1200년을 산다 해도 자기가 왜 사는지를 모르면 그 인생은 사나 마나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왜 사는지를 아는데서 부터 사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물어 보세요 나는 왜 사는가? 왜 삽니까? 옆에 있는 분에게 물어 보세요 왜 삽니까?

이 물음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가지고 사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내 길을 가리라 말씀하신 예수님입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그 길을 가시던 주님이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것은 갈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본분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본분에 역행하고 있는 예루살렘. 세상욕망으로만 가득차있는 도시 예루살렘 주님은 그 도시를 보고 한탄한 것입니다. 가장 신앙적이어야 할 도시가 가장 세상 적이고. 가장 거룩해야 할 도시가 가장 타락해 있고 가장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할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주님이 한탄 하십니다.

목사는 목사의 갈 길이 있습니다. 장로는 장로의 갈 길이 있습니다. 성도는 성도의 갈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녀들이 갈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망하는 것입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죄로 가득한 도시는 도시가 망합니다. 죄로 가득한 가정은 가정이 망합니다. 죄로 가득한 인생은 자신이 망합니다.

자신이 갈 길을 잃으면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배가 길을 잃으면 좌초되어 가라앉습니다. 기차가 길을 잃으면 탈선 합니다. 모든 것이 길을 잃으면 부서지고 깨지고 망합니다. 길을 알아야 합니다.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망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흥하는 예루살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곧 그때에 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곧 그때에 바로위에 있는 말씀과 연결이 되지요. 2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각성과 각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라야 내 모친이요 내 형제요 내 자매니라.”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에게 한 사람이 묻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주님의 대답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들어가기를 힘써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말씀 합니다. 한 번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리 열어 달라고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밖에 있는 자들이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담은 단호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시고 심지어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셨습니다. 모두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보세요. 주님의 말씀의 타켓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지입니다.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모든 신앙의 본산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생에 예루살렘을 한번 올라가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삽니다. 자기들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로 자부하고 삽니다. 그곳에는 제사장들이 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여 삽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십니다.


무슨 일입니까? 종교는 있어도 신앙은 없습니다. 가르침은 있어도 행함이 없습니다. 형식은 있어도 진실은 없습니다. 제도는 있는데 믿음이 없습니다. 나무는 있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었습니다. 껍데기는 화려 한데 속은 썩었습니다.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진실함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잃어버리고 인간적인 온갖 욕심과 더러운 이를 탐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지자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돌로 쳤습니다. 하나님 품에 들어가길 거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두렵습니다. 오늘 나를 향한 주님의 음성은 무엇일까요. 목사는 이렇게 살아라. 장로는 이렇게 살아라. 성도는 이렇게 살아라.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지금 바로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진실한 것입니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열매가 있습니까? 우리는 겉만 번드름 하진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거룩함이 있습니까? 우리는 여우처럼 이를 탐하는 간교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과 같이 갈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는 부름이 영태야, 영태야 하는 주님의 안타까운 부름인 것 같아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오늘 성경에서는 암탉이 새끼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암탉이 새끼를 모음 같이 했다. 그렇게 너희를 불렀다. 그렇게 여러분과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주의음성을 듣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주님 품으로 들어가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암탉이 새끼를 모으는 모습을 보세요.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합니다. 먹을 것을 찾아 주고 맑은 물을 마시게 합니다. 그러면서 곁길로 나가려 하면 꼭꼭꼭 하지요. 예야 이리오렴,

암탉은 적이 오면 몸을 던져 막아 냅니다. 암탉이 거느리고 있는 곳에 강아지가 나타났습니다. 암탉이 날개를 펴고 달려가 한방에 날려 버립니다. 강아지뿐인가요 사람에게도 달려듭니다. 사람이 병아리를 만지려고 해보세요. 얼마나 요란을 떨고 달려드는지 몰라요. 그 뿐이 아니지요. 암탉은 자기새끼를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닭장에 모이를 주러가서 오지를 않습니다. 부인 권사님이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다 닭장에서 나오지 않는 장로님이 이상해서 부르러 갔습니다. 권사님이 부르는 소리를 들은 장로님이 닭장에서 나오지를 않고 오히려 여보 이리 와봐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권사님이 무슨 일인가 하고 닭장에 들어 가보니 장로님이 쭈그리고 앉아서 무엇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권사님이 가서보니 닭 한 마리가 죽어 있습니다. 여보! 죽은 닭을 뭘 그렇게 바라보고 있어요. 닭이 아까워서 쳐다보고 있는 줄 알고 어서 가서 밥 먹읍시다. 하니까 가만 있어봐 그리고 여기 와서 이것을 봐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앉아 죽은 닭을 쳐다보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 졌습니다. 죽은 닭 깃털 사이로 노란 주둥이가 쏙 나왔다 들어가고 쏙 나왔다들어 가는 거예요.

알고 보니 족제비가 병아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안고 보호하기위해 족제비한테 물려 죽을 때까지 도망치지 않고 버틴 거예요. 거기에 장로님이 감동을 받고 권사님도 감동을 받고 암탉을 묻어 주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했답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얼마든지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피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 121편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3절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 눈을 떼지 못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 하리로다.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몸을 던져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이 부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요. 그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오늘의 교회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부름으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된 바로 당신과 나입니다. 바로가야 됩니다.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종교인이 되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이 부르고 있습니다.

출처/김영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