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만 자랑하자(사순절 기간)   (갈6:1-14)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십자가에 대한 개념이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헬라인 그리고 로마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호의적으로 받아 드리고 있지만 당시의 십자가는 죄인에게 가해지는 최고형의 상징이었기에 십자가는 죽음과 수치와 고통을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헬라 사람들은 부끄러운 십자가 보다 지혜나 부귀를 자랑했고,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거치는 돌과 같았으며 미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십자가를 자랑으로 생각하여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 십자가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울이 깨달은 놀라운 진리에 아직도 접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며,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전하려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를 변절시키고 있는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학문도 아니며, 내가 가진 부귀도 아니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랑거리는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멸시 천대를 받으면서 돌아가신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왜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까?

⑴, 십자가 속에 놀라운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이란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신 사랑을 말합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아들의 애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죽음의 자리에 놓아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여실히 증명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버러지 같은 나를 위해서, 죄인의 괴수 같은 나를 구원하시려고 외아들까지 죽이시면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이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치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이 십자가에 있으니 십자가를 자랑치 않을 수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면서 피땀을 흘리시던 주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 앞으로 당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쓰리고 아픈 것임을 아시면 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시면서 골고다로 향해 가신 주님은 진정 우리를 사랑하신 표현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십자가를 전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롬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 구원을 얻었고, 그 사랑 때문에 영생을 얻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자랑하기를 주저한다면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인가? 하고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사랑에 젖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⑵,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 고 했으며,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 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로다" 하였습니다. 능력이란 폭약과 같은 위력을 말합니다. 이 폭약은 때로는 파괴력으로 쓰이고, 때로는 건설하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능력에 의해 죄인 된 우리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

이 능력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며, 멸망할 영혼이 살아나게 하며,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바꿔지게 합니다. 이 능력은 지옥 갈 영혼을 하나님 나라로 가도록 바꿔 놓으시며, 자기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이 십자가 밑에 나아가서 은혜를 받고 이웃을 위해서 살도록 바꿔 놓습니다. 이 능력은 지금까지는 악을 따라 살던 사람을 선한 일꾼으로 바꿔 놓고,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바꿔 놓으며, 싸움 잘하던 사
람을 화평한 사람으로 바꿔 놓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다양하게 우리에게 변화를 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이니 우리가 어찌 자랑치 않겠습니까?

무엇이 핍박자 사울을 사도 바울로 만들었으며 무엇이 베드로를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히게 했으며, 무엇이 보아네스(우뢰의 아들)를 사랑의 사도로 만들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와 같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밑에 나올 때만 영생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십자가 밑에 나아 와 죄를 용서받고 의인의 반열에 서 있다면 여러분은 담대하게 그 십자가를 자랑하십시오  

⑶,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다시 났기 때문입니다.  
2천년 전에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믿는 사람도 이미 그와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으며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자신의 육적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했습니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누구든지 육체의 일을 자랑하지도 못하며, 자랑할 수도 없는 것임을 가리키는 내용입니다. 때를 따라 인간의 부패한 것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완전히 죽어 장사지낸 사람들에게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로 얻은 향기가 되살아 나는 것입니다. 이 향기가 아름다운 찬송으로 때로는 감사의 노래로 표현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그 이름을 증거 하는 그 입술의 열매라고 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한 시대에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보다 교회당을 자랑하고, 아니면 어떤 인간을 자랑하고, 아니면 어떤 업적을 자랑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교회는 부패했으며 새로운 개혁이 싹트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일 천만 성도가 있다고 자랑을 하는데 이 일 천만 성도가 진실로 십자가를 사랑하고 있으며 진실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며 찬양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만일 교회 몇몇 소수 성직자들의 안식처가 되고 자기들이 누리는 보금자리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육적인 축복을 얻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지금 부패해지고 있는 과정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느껴진다면 이제 우리 일어나서 새로운 개혁 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6: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 했습니다.


출처/이석권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