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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의 벼랑에서 (열왕기하 4:1~7)
우리 사회에 가장 일반적이고 큰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채무의 문제입니다. 빚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빚도 감당할 수 있는 빚은 괜찮지만 감당할 수 없는 빚이 많이 있습니다. 빚 때문에 파산을 하고, 빚 때문에 가정이 파탄되고, 빚 때문에 자살을 하고, 빚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적인 악이 저질러지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빚은 가난을 몰고 옵니다. 가난은 무서운 것입니다. 빚이 많으면 아주 비참해지고 빚진 자의 고통은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마음으로는 갚고 싶지만 도무지 여건이 되지 않아서 빚을 못 갚는 사람들도 있고 빚을 갚을 수 있는데도 갚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의 빚을 가지고 세금을 포탈하면서까지 고급 승용차를 타고 해외여행을 즐기고 심지어 집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전부 사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극빈의 상황
우리 주변에 들려오는 몇 가지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주 마음이 아픕니다. 카드빚 때문에 가족이 동반자살을 하는 일이 있고, 전기요금을 못낸 장애인 부부가정이 단전을 당하자 아이가 초불을 켜서 공부하다가 그만 잠이 들어 그 집이 전소되는 슬픔도 있었습니다. 또 한 여대생에 1,500만원의 빚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일이 있고, 학비가 계속 오르니까 융자를 받아서 공부는 했는데 졸업장을 받고 보니까 빚더미에 앉아 있게 되고, 취업도 제대로 안 되고 빚은 점점 늘어가고 고민에 빠진 한 젊은이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300백조 원에 해당하는 국가적인 빚을 내년에 져야 되고 국민1인당 580만원의 부채국가가 됩니다. 온갖 복지정책과 군사정책이 있지만 전부 빚을 내어서 살림을 살아야 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실직, 빈곤, 채무, 가정, 해직, 학업포기 등 가장 일반적인 부채문제를 안고 극단적인 벼랑에 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염두에 둘 뿐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성경적인 답을 구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한 과부의 고통스러운 채무의 벼랑 끝을 보게 됩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남편은 선지자의 생도, 즉 신학생입니다. 신학생으로 공부하다가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집에는 부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채주가 와서 두 아이를 종으로 잡아가게 되는 이런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고대 사회는 빚을 못 갚으면 가족이 노예로 팔려갑니다. 이제 이 집도 두 아이가 채주에게 노예로 잡혀가야 되는 긴박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우리가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채무의 벼랑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는가를 듣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근본적 지혜
성경은 빚 문제 뿐 아니라 물질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이지만, 우리가 땅위에 살면서 겪어야 되는 경제생활에 관한 축복의 원리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에 보면 믿음에 관한 성구가 215개입니다. 구원에 관한 성구가 218개입니다. 금전과 물질과 재정에 관한 성구는 2,086개입니다. 약 열배가 넘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그 대표적인 비유가 38개입니다. 그중에 16개가 다 물질비유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성경은 우리의 육신생활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는 그런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에 보면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듣지만 경제적인 염려와 유혹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결실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경제생활의 갈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들리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경제생활과 신앙문제는 직결되어 있습니다. 잠언 22장 7절에 보면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재주의 종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예배당을 지어서 많은 빚을 많이 지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빚을 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빚을 많이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못하고 발전이 더디고 새로운 갈등이 일어나는 등 부채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감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이 빚진 여인이 어떤 모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나아가서 부르짖습니다. “선지자의 생도 아내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집은 하나님을 잘 섬긴 집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긴 집도 빚을 집니다. “종은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아주 긴박한 상황을 보고합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와서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오늘날 교회의 목사나 지도자의 위상이 아닙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선지자를 찾아가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면 선지자를 찾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간 것은 곧 하나님께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구약시대는 선지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그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채무의 벼랑 끝에서 두 아들이 종으로 잡혀갈 그 위기, 그 벼랑 끝에서 그는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그냥 단순히 지나칠 사건이 아닙니다.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포인트가 여기 있습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간 것은 돈을 꾸러 간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는 돈이 있는 부자가 아닙니다. 그는 선지자입니다. 이 여자에게 필요한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돈을 빌려야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과 아무 관계없는 엘리사를 찾아간 것은 이 여인이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이 부채문제를 영적인 문제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운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부채문제 뿐 아니라 우리가 질병의 문제, 혹은 자녀들 문제, 혹은 사업상의 문제 등 온갖 고통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부딪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육신의 문제라고 해서 육신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옵니까? 우리가 어떤 고통을 당할 때 그 문제를 영적인 문제로 알고 하나님께로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기본자세입니다. 기본자세가 흐트러지면 그 다음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부채문제입니다. 가정이 파탄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문제지만 이것이 전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 배후에는 모두 사탄의 영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부요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말을 들었던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함으로서 에덴동산의 부요와 평강이 깨어지고, 에덴동산에 죽음이 오고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욥의 가정은 부요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욥의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을 하나님이 허용을 하자 욥의 가정은 일시에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땅위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육신의 모든 문제 배후에는 악령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영적인 문제로 대처하라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은 한 가지도 예외 없이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접근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와야 됩니다. 이 여인은 돈 문제지만 선지자에게 이 문제를 가지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엇을 할까요? 우리가 고통을 안고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께 나와서 무엇을 해야 됩니까? 무엇을 하다가 빚을 졌는가를 살펴야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다가 빚을 졌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정당하게 살았는가? 하나님께 드릴 것을 바로 드렸는가? 내가 빚지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정당하게 충성을 했는가? 하나님의 축복 안에 살 때 내가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충성을 했는가? 경제생활을 내가 얼마나 믿음으로 했는가를 하나님 앞에 살피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됩니다. 우리는 고통이 올 때 제일 먼저 정직하고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려면 하나님 앞에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가도 돈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도 권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기본적인 우리의 자세는 철저히 회개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왜 빚을 졌는가? 무엇하다가 빚을 졌는가를 철저히 살펴야 되고 하나님 앞에 돈 한 푼이라도 믿음으로 쓰지 못했던 흔적이 있으면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채의 벼랑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악령의 방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내가 천국열쇠를 네가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악령은 우리를 얽어맵니다. 악령은 우리를 부채에 시달리게 합니다. 가난에 얽매입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매입니다. 불신앙은 우리를 얽어매게 합니다. 우리가 땅에서 불신앙으로 살면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습니다. ‘푼다’는 개념은 ‘회개’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해야 마음이 풀립니다. 영혼이 풀립니다. 회개해야 자유가 임합니다. 회개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용서가 임합니다. 사죄의 기쁨이 임합니다. 거기에서 풀리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매여 있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풀어집니다. 풀어지는 거기에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소개합니다. 그중에서도 모세가 애굽을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일을 한 가지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을 나올 때 홍해를 건너는 그 기적을 행하기 전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애굽사람들의 저 물품을 가지고 나가도록 구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빈털터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사람들에게 가서 “모세가 말하라 하더라” 하고 물품을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출애굽기 12장 35절에서 3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은혜를 입게 하사 애굽사람의 물품을 가졌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홍해를 건너는 기적 이상의 기적입니다. 애굽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여서 빈털터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사람이 가지고 있는 금은보화, 모든 좋은 것을 애굽사람들한테 받아서 부요한 백성의 모습으로 애굽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입니다. 애굽사람의 마음을 풀어주었습니다. 애굽사람이 갖고 있던 물품을 자기들에게 종노릇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후하게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 금은패물을 바쳤는데 그것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광야에서 캐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벼랑을 만나고 있습니까? 채무의 벼랑에 서 있습니까? 고통의 벼랑 끝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하기 바랍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 엘리사를 찾아온 여인에게 일어났던 기적의 역사, 이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형태는 다르지만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문제를 신앙의 법칙으로 말씀합니다. 축복의 법칙으로 말씀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문제지만 믿음의 법칙으로 접근하십시오. 축복의 법칙으로 접근하십시오. 그 문제를 영적으로 풀어야 근본적으로 풀립니다. 근본적으로 푸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빚지지 않는 삶
어떤 사람이든지 빚을 지면 좋지 않습니다. ‘너는 빚지고 살 팔자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빚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목사는 빚지고 살면 안 됩니다. 저는 잠깐 빚을 져 봤지만 오랫동안 무거운 빚을 져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잠깐이라도 빚을 져보니까 정신력이 망가집니다. 목사는 빚을 지면 정신력을 잃어버립니다. 영력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 있게 전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빚을 지고 살면 안 됩니다.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목사를 빚지게 하면 안 됩니다. 천 배, 만 배로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요즘 저의 마음은 아주 무겁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미자립교회 목사님들이 채무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책적인 의논을 하는 중에 개척교회 목사님의 피맺힌 이야기를 듣다가 교회가 개척교회 보조를 할 때 목사님 개인통장으로 주로 송금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회이름으로 교회통장에 송금을 하자는 이런 정책이 발의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척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도저히 그것은 현실에 안 맞았습니다. 목사님들이 카드를 두, 세 개를 가지고 있는데 보조금이 매월 정기적으로 안 들어옵니다. 6개월 모아서 보내주는 교회도 있고, 3개월 모아서 보내주는 교회도 있고, 1년치를 모아서 보내주는 교회도 있기 때문에 정기적인 수입이 안 됩니다. 카드를 가지고 돈을 빼서 매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내가 아는 몇몇 목사님 가족도 큰일입니다. 사모님이 병이 낫습니다. 사모님이 교회에서 사례가 제때 안 나오니까 교인들 모르게 천한 일을 밤낮없이 하다가 몸에 병이 난 것입니다. 목사가 빚지면 그 교회가 효과적인 목회가 될 수 없고 하나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는 지금 그런 안타까운 교회들이 자꾸 생겨나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도 많은 부담을 느끼고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6년, 개척교회 목사로 4년, 선교사 훈련기간으로 2년, 이렇게 12년 동안 살면서 하루도 여유 있는 날이 없었습니다. 항상 모자랍니다. 담임목사가 되었는데도 계속 모자랍니다. 아무리 해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가 목사가 된 지 10년 쯤 지나니까 부흥회를 인도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1년에 한 30교회 정도 부흥회를 다녔습니다. 굉장히 많은 횟수입니다. 그것을 7~8년 동안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건축헌금을 세 번 했는데 조금 모아서 내 계획대로 쓸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매정하신 분입니다. 모두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담임목사는 건축헌금을 쉽게 못합니다. 힘에 지나도록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계획을 다 무너뜨리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은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다 했습니다. 유학도 하고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하는 등 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배로 채워주셨습니다.
드린 것으로 기적을 일으키심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문제를 영적으로 바로 접근하고 영적으로 바로 풀 때 하나님의 손길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다가와서 역사하는 것을 우리가 체험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이 여인이 지금 겪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채주가 이 여자의 아들을 종으로 데려 가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제 남편은 신실한 종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가정에 위기가 왔습니다. 엘리사가 이 여인에게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한 병 기름뿐입니다.” 이 한 병 기름은 마지막 재산입니다. 이것을 팔아 양식을 사서 한 번 식사할 마지막 재산입니다. 이 마지막 재산을 엘리사 앞에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대목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시되 우리 가운데 없는 것을 베푸는 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을 붙잡고 기적을 행하십니다. 여인이여 집에 무엇이 있느냐? “예, 한 병 기름뿐입니다.” “가지고 오라.”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제가 여러분 집에 심방을 가서 “성도님, 오늘 나한테 솔직하게 재산보고 하십시오. 땅이 몇 평입니까? 전답이 몇 평이고 임야가 몇 평이고 대지가 몇 평이요? 아파트가 몇 채입니까? 적금이 얼마입니까? 주식이 얼마요? 채권이 얼마요? 집에 돈 되는 물품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재산조사를 하면 여러분들이 발끈해서 목사배척운동을 할 것입니다. 저한테는 전혀 보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정직하게 보고하고 사십시오. 그리고 사명감을 가집시다. 가졌기 때문에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이 거기에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통해 역사합니다. 여러분이 돈 벌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하지 마세요. 이미 번 것을 가지고 오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일의 축복의 역사가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미래의 것으로 오늘 섬기는 게 아닙니다. 이미 가진 것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진 것을 드릴 때 역사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여인을 통해서 보이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이 여자의 한 병 기름은 선지자 앞에 내놓기에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솔직하게 내놓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재산 많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께 바치려고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직하게 내놓지 못했습니다. 반은 감추어 놓고 반만 내놓았습니다. 베드로가 “이 것뿐이냐?” 할 때 “예, 이 것뿐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게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면 하나님 앞에 정직한 행위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명을 바로 아는 사람은 그 사명을 수행하는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고백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그 다음 문제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태국국경에서 30㎞ 변방에 우리 교단 선교사님이 관계하는 고아원이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일반 주인들은 가난하게 살고 그 아이들을 보면 누더기를 걸치고 신발을 안 신은 애들도 있고 신어도 신발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고,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헌 옷, 헌 신발 등 우리나라의 구호품은 아주 인기가 좋습니다. 한국에서 구호품이 와서 그 고아원 아이들이 그렇게 지내니까 주민들이 자기 아이를 그 고아원에 보내려고 경쟁률이 그렇게 극심하다는 것입니다. 그 고아원을 한 장로님이 선교지 여행을 하다가 딱한 이야기를 듣고는 장로님이 헌신을 한 것입니다. 집을 짓고 땅을 사고 길을 내는데 약 4천만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장로님의 헌신으로 고아원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 캄보디아에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힘을 가지고 지금 주님 앞에 헌신할 때 거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순종으로 나아감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렇게 정직하게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회개할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으로 주 앞에 드릴 뿐 아니라 순종을 해야 합니다. 엘리사가 여인을 보고 두 가지 명령을 했습니다. “동네에 가서 빈 그릇을 빌려 오너라. 조금 빌리지 말고 많이 빌려 오너라.” 이것도 아주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선지자님, 빈 그릇을 뭐하게요? 담을 것도 없는데 무슨 빈 그릇을 빌립니까?”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순종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 순종할 대목에서 우리 상식을 앞세웁니다. 내 감정을 앞세웁니다. 내 기분을 앞세웁니다. 내 환경을 내세웁니다. “주님, 내가 지금 이런 꼴인데 어떻게 순종합니까?”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상식을 깨트려야 합니다.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담을 것도 없는 집에 무슨 그릇이 필요합니까? 순종할만한 상식적인 논리는 전혀 거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려오라고 할 때 이 여인은 동네에 가서 빈 그릇을 빌려왔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이 빈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순종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 한 병 기름을 가지고 어떻게 빈 그릇을 다 채운단 말입니까? 하고 거부할 수 있지만 이 여인은 아들과 함께 빈 그릇에 기름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의 순종의 역사를 통하여 일어납니다. 기적을 구하십니까? 회개하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불신앙을 다 풀어야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불신앙이 맺혀 있으면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풀려야 됩니다. 악령이 다 물러가야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의 이 걸음입니다. 엘리사는 먼저 말합니다.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로 네 아들과 함께 생활하라.” 여러분, 먼저 빚을 갚아야 됩니다. 은혜를 받았거든 빚을 먼저 갚아야 됩니다. 복을 받았으면 빚을 먼저 갚아야 합니다. 빚은 두 가지입니다. 사람 앞에 진 빚을 다 청산하십시오. 여러분이 혹여 푼돈이라도 남한테 아직 정리안한 것은 다 하십시오. 중요합니다. 나는 갚을 돈은 잊어버려도 받을 사람은 절대로 안 잊어버립니다. 그 안 잊어버리는 것을 풀어야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축복의 원리대로 여러분의 육신생활을 접근하기 바랍니다. 성경은 은혜의 원리, 믿음의 원리, 축복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역행하고는 우리가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사람 앞에 빚이 없다고 해서 방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명을 다해야 됩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지금 부채를 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하라”, 내 육신생활은 그 다음 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은혜 받고 나부터 챙기고, 축복받고 나부터 장식하고, 사람 앞에 할 의무, 하나님 앞에 할 의무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렇게 명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빚을 갚으라. 그리고 아들과 함께 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맺는 말
이 사건은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이나,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얻는 기적이나, 마리아가 남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예수님을 잉태한 기적이나 똑같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형태가 다르지만 한 분,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이 한 분,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서도 내게 해당되는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체험하기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우리 사회에 가장 일반적이고 큰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채무의 문제입니다. 빚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빚도 감당할 수 있는 빚은 괜찮지만 감당할 수 없는 빚이 많이 있습니다. 빚 때문에 파산을 하고, 빚 때문에 가정이 파탄되고, 빚 때문에 자살을 하고, 빚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적인 악이 저질러지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빚은 가난을 몰고 옵니다. 가난은 무서운 것입니다. 빚이 많으면 아주 비참해지고 빚진 자의 고통은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마음으로는 갚고 싶지만 도무지 여건이 되지 않아서 빚을 못 갚는 사람들도 있고 빚을 갚을 수 있는데도 갚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의 빚을 가지고 세금을 포탈하면서까지 고급 승용차를 타고 해외여행을 즐기고 심지어 집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전부 사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극빈의 상황
우리 주변에 들려오는 몇 가지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주 마음이 아픕니다. 카드빚 때문에 가족이 동반자살을 하는 일이 있고, 전기요금을 못낸 장애인 부부가정이 단전을 당하자 아이가 초불을 켜서 공부하다가 그만 잠이 들어 그 집이 전소되는 슬픔도 있었습니다. 또 한 여대생에 1,500만원의 빚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일이 있고, 학비가 계속 오르니까 융자를 받아서 공부는 했는데 졸업장을 받고 보니까 빚더미에 앉아 있게 되고, 취업도 제대로 안 되고 빚은 점점 늘어가고 고민에 빠진 한 젊은이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300백조 원에 해당하는 국가적인 빚을 내년에 져야 되고 국민1인당 580만원의 부채국가가 됩니다. 온갖 복지정책과 군사정책이 있지만 전부 빚을 내어서 살림을 살아야 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실직, 빈곤, 채무, 가정, 해직, 학업포기 등 가장 일반적인 부채문제를 안고 극단적인 벼랑에 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염두에 둘 뿐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성경적인 답을 구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한 과부의 고통스러운 채무의 벼랑 끝을 보게 됩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남편은 선지자의 생도, 즉 신학생입니다. 신학생으로 공부하다가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집에는 부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채주가 와서 두 아이를 종으로 잡아가게 되는 이런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고대 사회는 빚을 못 갚으면 가족이 노예로 팔려갑니다. 이제 이 집도 두 아이가 채주에게 노예로 잡혀가야 되는 긴박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우리가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채무의 벼랑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는가를 듣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근본적 지혜
성경은 빚 문제 뿐 아니라 물질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이지만, 우리가 땅위에 살면서 겪어야 되는 경제생활에 관한 축복의 원리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에 보면 믿음에 관한 성구가 215개입니다. 구원에 관한 성구가 218개입니다. 금전과 물질과 재정에 관한 성구는 2,086개입니다. 약 열배가 넘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그 대표적인 비유가 38개입니다. 그중에 16개가 다 물질비유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성경은 우리의 육신생활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는 그런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에 보면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듣지만 경제적인 염려와 유혹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결실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경제생활의 갈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들리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경제생활과 신앙문제는 직결되어 있습니다. 잠언 22장 7절에 보면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재주의 종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예배당을 지어서 많은 빚을 많이 지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빚을 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빚을 많이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못하고 발전이 더디고 새로운 갈등이 일어나는 등 부채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감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이 빚진 여인이 어떤 모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나아가서 부르짖습니다. “선지자의 생도 아내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집은 하나님을 잘 섬긴 집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긴 집도 빚을 집니다. “종은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아주 긴박한 상황을 보고합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와서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오늘날 교회의 목사나 지도자의 위상이 아닙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선지자를 찾아가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면 선지자를 찾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간 것은 곧 하나님께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구약시대는 선지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그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채무의 벼랑 끝에서 두 아들이 종으로 잡혀갈 그 위기, 그 벼랑 끝에서 그는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그냥 단순히 지나칠 사건이 아닙니다.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포인트가 여기 있습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간 것은 돈을 꾸러 간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는 돈이 있는 부자가 아닙니다. 그는 선지자입니다. 이 여자에게 필요한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돈을 빌려야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과 아무 관계없는 엘리사를 찾아간 것은 이 여인이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이 부채문제를 영적인 문제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운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부채문제 뿐 아니라 우리가 질병의 문제, 혹은 자녀들 문제, 혹은 사업상의 문제 등 온갖 고통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부딪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육신의 문제라고 해서 육신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옵니까? 우리가 어떤 고통을 당할 때 그 문제를 영적인 문제로 알고 하나님께로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기본자세입니다. 기본자세가 흐트러지면 그 다음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부채문제입니다. 가정이 파탄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문제지만 이것이 전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 배후에는 모두 사탄의 영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부요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말을 들었던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함으로서 에덴동산의 부요와 평강이 깨어지고, 에덴동산에 죽음이 오고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욥의 가정은 부요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욥의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을 하나님이 허용을 하자 욥의 가정은 일시에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땅위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육신의 모든 문제 배후에는 악령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영적인 문제로 대처하라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은 한 가지도 예외 없이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접근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와야 됩니다. 이 여인은 돈 문제지만 선지자에게 이 문제를 가지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엇을 할까요? 우리가 고통을 안고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께 나와서 무엇을 해야 됩니까? 무엇을 하다가 빚을 졌는가를 살펴야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다가 빚을 졌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정당하게 살았는가? 하나님께 드릴 것을 바로 드렸는가? 내가 빚지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정당하게 충성을 했는가? 하나님의 축복 안에 살 때 내가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충성을 했는가? 경제생활을 내가 얼마나 믿음으로 했는가를 하나님 앞에 살피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됩니다. 우리는 고통이 올 때 제일 먼저 정직하고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려면 하나님 앞에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가도 돈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도 권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기본적인 우리의 자세는 철저히 회개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왜 빚을 졌는가? 무엇하다가 빚을 졌는가를 철저히 살펴야 되고 하나님 앞에 돈 한 푼이라도 믿음으로 쓰지 못했던 흔적이 있으면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채의 벼랑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악령의 방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내가 천국열쇠를 네가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악령은 우리를 얽어맵니다. 악령은 우리를 부채에 시달리게 합니다. 가난에 얽매입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매입니다. 불신앙은 우리를 얽어매게 합니다. 우리가 땅에서 불신앙으로 살면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습니다. ‘푼다’는 개념은 ‘회개’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해야 마음이 풀립니다. 영혼이 풀립니다. 회개해야 자유가 임합니다. 회개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용서가 임합니다. 사죄의 기쁨이 임합니다. 거기에서 풀리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매여 있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풀어집니다. 풀어지는 거기에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소개합니다. 그중에서도 모세가 애굽을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일을 한 가지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을 나올 때 홍해를 건너는 그 기적을 행하기 전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애굽사람들의 저 물품을 가지고 나가도록 구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빈털터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사람들에게 가서 “모세가 말하라 하더라” 하고 물품을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출애굽기 12장 35절에서 3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은혜를 입게 하사 애굽사람의 물품을 가졌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홍해를 건너는 기적 이상의 기적입니다. 애굽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여서 빈털터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사람이 가지고 있는 금은보화, 모든 좋은 것을 애굽사람들한테 받아서 부요한 백성의 모습으로 애굽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입니다. 애굽사람의 마음을 풀어주었습니다. 애굽사람이 갖고 있던 물품을 자기들에게 종노릇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후하게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 금은패물을 바쳤는데 그것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광야에서 캐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벼랑을 만나고 있습니까? 채무의 벼랑에 서 있습니까? 고통의 벼랑 끝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하기 바랍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 엘리사를 찾아온 여인에게 일어났던 기적의 역사, 이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형태는 다르지만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문제를 신앙의 법칙으로 말씀합니다. 축복의 법칙으로 말씀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문제지만 믿음의 법칙으로 접근하십시오. 축복의 법칙으로 접근하십시오. 그 문제를 영적으로 풀어야 근본적으로 풀립니다. 근본적으로 푸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빚지지 않는 삶
어떤 사람이든지 빚을 지면 좋지 않습니다. ‘너는 빚지고 살 팔자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빚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목사는 빚지고 살면 안 됩니다. 저는 잠깐 빚을 져 봤지만 오랫동안 무거운 빚을 져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잠깐이라도 빚을 져보니까 정신력이 망가집니다. 목사는 빚을 지면 정신력을 잃어버립니다. 영력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 있게 전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빚을 지고 살면 안 됩니다.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목사를 빚지게 하면 안 됩니다. 천 배, 만 배로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요즘 저의 마음은 아주 무겁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미자립교회 목사님들이 채무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책적인 의논을 하는 중에 개척교회 목사님의 피맺힌 이야기를 듣다가 교회가 개척교회 보조를 할 때 목사님 개인통장으로 주로 송금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회이름으로 교회통장에 송금을 하자는 이런 정책이 발의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척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도저히 그것은 현실에 안 맞았습니다. 목사님들이 카드를 두, 세 개를 가지고 있는데 보조금이 매월 정기적으로 안 들어옵니다. 6개월 모아서 보내주는 교회도 있고, 3개월 모아서 보내주는 교회도 있고, 1년치를 모아서 보내주는 교회도 있기 때문에 정기적인 수입이 안 됩니다. 카드를 가지고 돈을 빼서 매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내가 아는 몇몇 목사님 가족도 큰일입니다. 사모님이 병이 낫습니다. 사모님이 교회에서 사례가 제때 안 나오니까 교인들 모르게 천한 일을 밤낮없이 하다가 몸에 병이 난 것입니다. 목사가 빚지면 그 교회가 효과적인 목회가 될 수 없고 하나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는 지금 그런 안타까운 교회들이 자꾸 생겨나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도 많은 부담을 느끼고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6년, 개척교회 목사로 4년, 선교사 훈련기간으로 2년, 이렇게 12년 동안 살면서 하루도 여유 있는 날이 없었습니다. 항상 모자랍니다. 담임목사가 되었는데도 계속 모자랍니다. 아무리 해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가 목사가 된 지 10년 쯤 지나니까 부흥회를 인도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1년에 한 30교회 정도 부흥회를 다녔습니다. 굉장히 많은 횟수입니다. 그것을 7~8년 동안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건축헌금을 세 번 했는데 조금 모아서 내 계획대로 쓸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매정하신 분입니다. 모두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담임목사는 건축헌금을 쉽게 못합니다. 힘에 지나도록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계획을 다 무너뜨리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은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다 했습니다. 유학도 하고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하는 등 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배로 채워주셨습니다.
드린 것으로 기적을 일으키심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문제를 영적으로 바로 접근하고 영적으로 바로 풀 때 하나님의 손길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다가와서 역사하는 것을 우리가 체험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이 여인이 지금 겪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채주가 이 여자의 아들을 종으로 데려 가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제 남편은 신실한 종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가정에 위기가 왔습니다. 엘리사가 이 여인에게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한 병 기름뿐입니다.” 이 한 병 기름은 마지막 재산입니다. 이것을 팔아 양식을 사서 한 번 식사할 마지막 재산입니다. 이 마지막 재산을 엘리사 앞에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대목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시되 우리 가운데 없는 것을 베푸는 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을 붙잡고 기적을 행하십니다. 여인이여 집에 무엇이 있느냐? “예, 한 병 기름뿐입니다.” “가지고 오라.”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제가 여러분 집에 심방을 가서 “성도님, 오늘 나한테 솔직하게 재산보고 하십시오. 땅이 몇 평입니까? 전답이 몇 평이고 임야가 몇 평이고 대지가 몇 평이요? 아파트가 몇 채입니까? 적금이 얼마입니까? 주식이 얼마요? 채권이 얼마요? 집에 돈 되는 물품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재산조사를 하면 여러분들이 발끈해서 목사배척운동을 할 것입니다. 저한테는 전혀 보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정직하게 보고하고 사십시오. 그리고 사명감을 가집시다. 가졌기 때문에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이 거기에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통해 역사합니다. 여러분이 돈 벌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하지 마세요. 이미 번 것을 가지고 오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일의 축복의 역사가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미래의 것으로 오늘 섬기는 게 아닙니다. 이미 가진 것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진 것을 드릴 때 역사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여인을 통해서 보이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이 여자의 한 병 기름은 선지자 앞에 내놓기에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솔직하게 내놓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재산 많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께 바치려고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직하게 내놓지 못했습니다. 반은 감추어 놓고 반만 내놓았습니다. 베드로가 “이 것뿐이냐?” 할 때 “예, 이 것뿐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게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면 하나님 앞에 정직한 행위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명을 바로 아는 사람은 그 사명을 수행하는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고백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그 다음 문제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태국국경에서 30㎞ 변방에 우리 교단 선교사님이 관계하는 고아원이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일반 주인들은 가난하게 살고 그 아이들을 보면 누더기를 걸치고 신발을 안 신은 애들도 있고 신어도 신발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고,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헌 옷, 헌 신발 등 우리나라의 구호품은 아주 인기가 좋습니다. 한국에서 구호품이 와서 그 고아원 아이들이 그렇게 지내니까 주민들이 자기 아이를 그 고아원에 보내려고 경쟁률이 그렇게 극심하다는 것입니다. 그 고아원을 한 장로님이 선교지 여행을 하다가 딱한 이야기를 듣고는 장로님이 헌신을 한 것입니다. 집을 짓고 땅을 사고 길을 내는데 약 4천만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장로님의 헌신으로 고아원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 캄보디아에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힘을 가지고 지금 주님 앞에 헌신할 때 거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순종으로 나아감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렇게 정직하게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회개할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으로 주 앞에 드릴 뿐 아니라 순종을 해야 합니다. 엘리사가 여인을 보고 두 가지 명령을 했습니다. “동네에 가서 빈 그릇을 빌려 오너라. 조금 빌리지 말고 많이 빌려 오너라.” 이것도 아주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선지자님, 빈 그릇을 뭐하게요? 담을 것도 없는데 무슨 빈 그릇을 빌립니까?”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순종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 순종할 대목에서 우리 상식을 앞세웁니다. 내 감정을 앞세웁니다. 내 기분을 앞세웁니다. 내 환경을 내세웁니다. “주님, 내가 지금 이런 꼴인데 어떻게 순종합니까?”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상식을 깨트려야 합니다.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담을 것도 없는 집에 무슨 그릇이 필요합니까? 순종할만한 상식적인 논리는 전혀 거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려오라고 할 때 이 여인은 동네에 가서 빈 그릇을 빌려왔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이 빈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순종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 한 병 기름을 가지고 어떻게 빈 그릇을 다 채운단 말입니까? 하고 거부할 수 있지만 이 여인은 아들과 함께 빈 그릇에 기름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의 순종의 역사를 통하여 일어납니다. 기적을 구하십니까? 회개하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불신앙을 다 풀어야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불신앙이 맺혀 있으면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풀려야 됩니다. 악령이 다 물러가야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의 이 걸음입니다. 엘리사는 먼저 말합니다.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로 네 아들과 함께 생활하라.” 여러분, 먼저 빚을 갚아야 됩니다. 은혜를 받았거든 빚을 먼저 갚아야 됩니다. 복을 받았으면 빚을 먼저 갚아야 합니다. 빚은 두 가지입니다. 사람 앞에 진 빚을 다 청산하십시오. 여러분이 혹여 푼돈이라도 남한테 아직 정리안한 것은 다 하십시오. 중요합니다. 나는 갚을 돈은 잊어버려도 받을 사람은 절대로 안 잊어버립니다. 그 안 잊어버리는 것을 풀어야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축복의 원리대로 여러분의 육신생활을 접근하기 바랍니다. 성경은 은혜의 원리, 믿음의 원리, 축복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역행하고는 우리가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사람 앞에 빚이 없다고 해서 방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명을 다해야 됩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지금 부채를 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하라”, 내 육신생활은 그 다음 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은혜 받고 나부터 챙기고, 축복받고 나부터 장식하고, 사람 앞에 할 의무, 하나님 앞에 할 의무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렇게 명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빚을 갚으라. 그리고 아들과 함께 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맺는 말
이 사건은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이나,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얻는 기적이나, 마리아가 남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예수님을 잉태한 기적이나 똑같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형태가 다르지만 한 분,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이 한 분,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서도 내게 해당되는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체험하기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