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요한복음 12:1~8)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나사로가 누구입니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그를 예수님이 다시 살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 자리에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준 이야기가 바로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오늘 향유 냄새가 그 집에 가득하더라고 요한 복음 기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그녀의 행동을 크게 칭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 26:13)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아마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 가족들이 잔치를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잔치에 예수님을 오시도록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던 같습니다. 앞의 기록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절, 5절 그리고 36절 말씀에 거듭 그 사랑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람을 보내어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요한이 또한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왔던 유대인들도 말합니다.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바로 그 나사로의 가족들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마련한 잔치였습니다. 본문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요 12:2 상반절) 바로 그 자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모여 즐겁게 잔치하는 자리였습니다.

   여기에 매우 귀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잔치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 베다니에서 있었던 예수님을 위한 그 잔치가 오늘 우리의 잔치로까지 계속 이어져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도 주님이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살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도 항상 축제와 같이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낙심할 만한 일이 왜 없겠습니까? 심하면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기쁘게 노래하며 즐겁게 잔치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 나사로의 집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잔치하는 즐거움이 가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느닷없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더욱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결혼을 위하여 혼수로 향유를 준비하는데 마리아는 그 향유를 예수님에게 아낌없이 부어 드렸던 것입니다. 그 값이 무려 삼백 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근로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하니 근로자들의 일 년 연봉에 해당되는 매우 값비싼 물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들은 머리털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더욱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도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고전 11:1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가장 영광스런 자기 머리털을 가지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그래서 종들이 씻겨 주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 주는 그 모습이야말로 마음과 정성을 다 바치는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그 아름다운 헌신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 뿌리는 바로 은혜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크고 놀라운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마리아의 삶에 감사가 넘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비로소 헌신도, 봉사도, 사랑도 열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 때문에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예수님을 통하여 새 생명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토록 큰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생명으로,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을 가장 큰 기쁨으로 바꿔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바로 그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을 때 주님의 은혜로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새롭게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쳐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옆에서 마리아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뭐라고 비난했습니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 그는 누구보다 오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에게서 누구보다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은혜를 은혜로 받아 들이지 못했습니다. 그가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그 까닭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요한복음 13장 27절 말씀에도 그 원인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무슨 말입니까? 가룟 유다의 마음은 딴 생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은혜가 머물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비난하는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의 평가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평가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마리아가 한 그 일에 대하여 놀라운 의미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역사에 있어서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준비하는 기회를 붙잡았다는 말입니다. 비록 마리아 자신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지라도...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하나님의 아들의 장례를 위하여 그 몸에 값비싼 향유를 발라 드리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어디 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혼할 여인의 혼수보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이 훨씬 더 귀하고 중하지 않겠습니까?

   가끔 평소에 먹지 못하던 귀한 음식이 생길 경우가 있습니다. 즉시 먹으면 괜찮은데 다른 식구들과 함께 먹기 위하여 보관할 경우 종종 문제가 생깁니다. 귀한 음식이라고 계속해서 먹지 않고 놔 둘 경우 때로는 썩어서 아주 먹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절약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지만 세상을 떠난 후 비닐 장판 밑에서 많은 돈이 타버린 채 발견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것일수록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가장 의미있는 일에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871년, 영국의 탐험가 스탠리가 아프리카에서 30여 년 동안 선교사로 헌신한 리빙스턴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이제 그만 헌신의 삶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갑시다.” 리빙스턴은 그 제안을 조용히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는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보잘것없는 보답입니다. 차라리 이것은 특권이며 영광스러운 내일을 기대하는 희망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도 무덤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산 소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참으로 크고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에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까? 우리의 일터에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까? 우리의 교회에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크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으면 주님께 감사하며 그 주님을 위하여 잔치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날마다 맛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값비싼 향유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는 아니 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쳐 주님을 섬기며 그 주님의 뜻을 받들어 어두운 이 세상을 생명의 빛으로 밝혀가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