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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시편 103편 19절)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비유적 표현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몇 개를 들어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목자와 양의 관계, 그리고 왕과 백성과의 관계 등입니다.
이 비유적 표현들은 저마다 특별한 하나님 모습을 설명해 줍니다. 그 비유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특별한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목자와 양과의 관계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왕과 백성과의 관계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세 번째 하나님의 모습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본 시를 노래한 다윗은 자신이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열고 보니까 진정한 왕은 따로 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자신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자기 뿐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이스라엘이란 나라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온 천지 만물을 다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왕이 그 백성을 다스리듯이 우리를 그 백성 삼으시고 다스리십니다. 우리 뿐 아니라 이 천지만물을 다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이 사실 깨닫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모습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는 보편적인 다스림이요 다른 하나는 특수한 다스림입니다. 하나는 온 우주 만물에 대한 다스림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스림입니다.
첫째, 우주만물을 다스리심
시 95:3-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이 말씀은 우선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친히 창조하셨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주 만물이 다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나아가 그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섭리 가운데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 손안에 두시고 주관하시며 다스리십니다.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며 다스리십니다.
흔히들 역사를 수레바퀴로 비유합니다. 수레바퀴가 앞으로 나아가듯 역사도 시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수레바퀴가 궤적을 남기듯 역사는 시간 속에 기록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그리고 죽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개국되고, 번성하고, 쇠퇴하고 그리고 망합니다.
바로 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하나님께서 돌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방향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속도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십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터로 가고 있었습니다. 웬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휘두르며 수레에 덤벼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부에게 벌레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것은 사마귀라는 벌레이옵니다. 이 벌레는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을 모르는데, 제 힘은 생각하지도 않고 적을 가볍게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마귀가 수레를 가로막고 선 것처럼 분수도 모르고 무모하게 나서는 것을 당랑거철이라 부릅니다.
오늘도 철부지 사마귀처럼 당랑거철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키려는 사람, 되돌리려는 사람, 더 빠르게 속도를 내게 하려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수레바퀴를 친히 돌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을 따라 우리 인생의 수레바퀴가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속도로 우리 인생의 수레바퀴가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되돌리려 하거나 거역하려 하거나 천천히 가게 하려거나 더 빨리 가게 하려거나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막 4:26-27 이하에서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의 초점은 씨의 비밀스러운 성장에 있습니다. 씨를 뿌린 사람과 무관하게 씨는 싹이 나고 스스로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씨가 싹이 나고 자라 가는지 모르게 은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바로 지금도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심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막 1:15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시고자 하신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헬라어 “바실레이아 투 테우”(basileia tou theou)를 번역한 것입니다. “투 테우”(tou theou)는 “하나님의”라는 뜻이고, “바실레이아”(basileia)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바실레이아를 나라라고 번역할 때 뉘앙스 상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말에 “나라”라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의미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또는 성도들이 사후에 하나님과 함께 거할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헬라어의 바실레아아는 동사 “바실리우”(basileu)에서 아온 명사입니다. 바실리우라는 동사는 “다스린다”, “통치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실레아아는 공간적인 의미보다는 동사적 실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라고 번역한 바실레이아 투 테우라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곳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만물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피조세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실 수 있는 그런 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직후에는 이 우주만물은 곧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뒤에 인간의 불순종으로 더 이상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 나라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뒤 에덴동산이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더더욱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은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피조세계 전체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통하는 곳은 저 하늘 밖에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대로 버리실 수만은 없으셨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구원키로 하셨습니다. 먼저 저 하늘에 하나님 나라를 만드셔서 이 땅이 심판으로 멸망당한 뒤 구원 받은 성도들이 그곳에 영원토록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성도들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에 살도록 하시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오셔서 제일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리고 마 12:28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그런 자리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심령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예수를 주로 섬기는 경건한 가정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실현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국회 속기록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137만 여 쪽 국회 속기록 첫 장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초지종이 이렇습니다. 1948년 5월 31일 오전 10시 제헌국회가 개원되었습니다. 임시의장 이승만의원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오늘을 당해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의원이 기립한 뒤 목사인 이윤영 의원이 기도를 시작합니다.“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그렇습니다. 우리 국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꿈을 꾸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국회 모습은 그 꿈이 물거품이 된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더욱 든든히 서가게 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 안에, 우리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나라 안에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어 가게 해야 합니다. 이런 꿈을 꾸고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
하나님 나라가 더욱 굳건히 서 가게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 삶 속에 더욱 굳건히 세워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삼상하를 보면 다윗은 사울과는 대조적인 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인간의 왕이 다스리는 세상나라로 만들어버린 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비록 자신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신 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사울과 달리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 세우려고 애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상하에서 사울과 다윗이 그렇게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의 뜻을 구했지만 사울은 자기 뜻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삼하 2: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사울이 죽었습니다. 이제 상황이 자기가 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백성들도 다 압니다. 그리고 다윗이 외에 왕이 될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백성들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다윗은 늘 이런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달랐습니다. 자기 뜻대로 했습니다. 상황과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상황이 위급해 지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확고하게 서게 됩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면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계획하려 할 때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는 생활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을 보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창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뜻밖의 명령을 받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22:3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그것도 백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원치 않는 명령이고 따를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자기 뜻을 꺾었습니다.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있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내 뜻을 꺾는 것을 전제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사실 많은 성도들이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명령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그 명령이 빛이 나는 것일 때맘 귀를 기울입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려면 내 뜻을 내려놓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온 천지만물을 다스리십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런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는 일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내 뜻을 꺾으며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출처/박봉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