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24
주님이 오실 때 생기는 4대 역사 (마태복음 21장 11-17절)
< 지금은 회개할 때입니다 >
며칠 전, 서울 북쪽에서 목회를 잘하시는 한 목사님이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대화하고 싶다고 1시간 이상 차를 달려 저희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의 교회 근처에 OOO교회라는 큰 교회 목사님은 성령의 역사와 치유를 강조하며 ‘이제 아말감이 금이빨로 바뀌었습니다. 서로 이빨을 살펴보세요.’라고 하며 목회를 합니다. 목사님은 그런 목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확한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그날 그런 얘기를 하며 “지금 교회가 어디로 가나?”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회와 국가가 바로 서려면 종교인이 특별히 존경받아야 합니다. 칭기즈칸이 대국을 이루고 그의 나라가 몇 세기에 걸쳐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정복한 지역의 종교인을 특별히 존중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존중해야 하고, 나쁜 요설로 혹세무민하는 종교인이 아니라면 종교 리더도 존중해야 합니다.
요새 보면 목회자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목회자와 관련되어 가장 크게 불거지는 문제는 돈 문제입니다. 대체적인 통계에 의하면 목회자 10명 중의 1명은 누리며 살고, 2명은 보통만큼 살고, 3명은 보통 이하로 살고, 4명은 극빈자로 삽니다. 결국 돈 문제는 극히 일부분의 목회자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물론 목회를 열심히 해서 교회가 성장하고 그 교회 목회자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조금 누리고 사는 것은 무조건 욕할 일은 아닙니다. 그때 성도들이 목회자를 사랑하고 존경해서 “목사님께 무엇을 해드리고 싶다! 목사님 형편에 보탬을 주고 싶다!”고 순수한 마음으로 목사님을 섬겨주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직 성장을 위해서 인도의 사하바바처럼 “모래를 금가루로 만들었다!”는 식으로 혹세무민하는 것이 문제이고, 교회 세습과 지나친 교회건축이 문제이고, 교회를 말씀보다는 경영과 마케팅의 원리로 확장시키면서 다른 교회를 돕지는 않고 오히려 해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새 어떤 대형 교회는 지교회를 세운다고 가는 곳마다 온통 물의와 난리를 일으켜 목회자들 사이에 ‘온 난리 교회’라는 별명까지 불었습니다. 한때 그 교회 목사님도 후배 목회자들의 배움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지만 인생의 결말을 그렇게 마무리해가는 모습을 보며 지금은 세속적인 야망에 속박이 된 참으로 불쌍하고 비참한 목회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는 종교가 같고 다른 것을 떠나서 기본적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분명히 잘못된 길로 가면서 “왜 교회를 욕해! 왜 교회를 대적해! 왜 목회자를 공격해!”라고 무조건 자기방어를 치는 것은 더 잘못입니다. 교회가 명백하게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회개해야 할 일이지 자기방어를 쳐야 할 일은 아닙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교회와 목회자의 회개가 절실한 때입니다.
< 주님께서 내 안에 오실 때 >
오늘은 종려주일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에 성전에 들어가서 생긴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실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실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날까요?
1. 축사(逐邪)의 역사
여기에서 ‘축사(逐邪)’란 ‘사악한 것을 축출한다’는 의미의 축사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오늘 본문의 장면은 유월절 기간 중에 벌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로, 그때에는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제사하러 성전까지 직접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월절만 되면 성전에서 파는 제물 가격이 4-10배까지 뛰어서 그때가 장사꾼들의 대목 날이었습니다.
또한 성전세는 유대 화폐로 지불했기에 외국에서 온 순례객들은 자기 나라 화폐를 유대 화폐로 바꿔야 했는데, 그때 환전상들이 환전해주면서 폭리를 취했습니다. 결국 칼만 들지 않았지 성전 장사꾼들은 순례객들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해 돈을 빼앗는 강도와 같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내고 상을 둘러엎으셨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있었던 장사꾼들의 폭리는 성전 건축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주전 966년에 처음 건축된 솔로몬 성전은 전 국가적인 사업으로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그 성전이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그 후 약 50년쯤 후에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성전은 이전의 솔로몬 성전과는 너무 비교가 될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그 스룹바벨 성전이 500년 동안 있다가 헤롯에 의해 거대하게 재건축되었습니다. 헤롯은 정통 유대인이 아닌 이두매인으로 로마 권력자에게 잘 보여 왕이 되었는데, 자기가 정통 유대인이 아니니까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스룹바벨 성전을 거대하게 재건축합니다. 그것이 바로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그 헤롯 성전은 예수님 당시까지 46년 이상 지어졌고(요 2:20), 오늘 본문이 나오는 시점에서도 일부분은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여전히 상당한 건축비가 필요했습니다. 그 건축비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결국 상당한 비용의 건축비가 순례객들의 돈을 폭리로 거의 강탈한 장사꾼들의 뇌물로 채워졌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장사꾼들을 내쫓은 것은 성전 건축을 빌미로 뇌물을 받아먹던 당시 제사장들을 내쫓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행위가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전 청소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성전 건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합니다. 물론 좋은 성전을 건축하려는 마음은 좋습니다. 그러나 무리하게 성전 건축을 시도하고 그 비용을 마련하려고 혹세무민하며 헌신을 강요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성전에서 쫓겨날 일입니다. 자발적 헌신은 헌신이지만 강요된 헌신은 강탈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선교사 훈련학교의 비전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나중에 선교센터가 필요할지 모르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 건가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센터를 주시면 감사하게 받고, 안 주시면 후배 목회자들에게 과제로 남겨두면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일까지만 할 것이고, 꼭 내가 무리해서 센터를 짓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건물만 지어놓으면 사람은 자연히 채워진다는 환상에서 깨어 무리한 건축을 피해야 합니다. 건축에 대한 믿음은 헛된 야망의 산물입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장사꾼들을 내쫓은 것은 결국 제사장들을 내쫓은 것이고, 그렇다면 천국에서 그 제사장들의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성전청소는 큰 교회를 건축하고도 천국에 못 가는 목회자가 있을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전혀 올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와 있고, 반대로 분명히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없다.” 면죄부를 팔았던 교황은 천국에 있을까요? 아무도 모르지만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분노와 주님의 조치를 보면 아마 천국에 있기 힘들 것입니다.
이 문제는 목회자도 속고 성도도 속기 쉬운 문제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저렇게 큰 교회를 건축한 분이 천국에 못 가나? 어떻게 저렇게 큰 교회 담임목사가 천국에 못 가나?” 그러나 ‘큰 교회 목사라는 것’이 천국 가는 보증수표는 아니고, 큰 교회 목사에게 천국의 영광도 큰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진실한 성도가 가는 곳이고, 천국의 큰 상급은 진실하게 헌신하고도 이 땅에서 영광을 적게 받은 사람의 것입니다.
이제 모든 진실한 성도는 외형적인 것에 대한 숭배와 추구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돈 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교회에 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돈에 대한 욕심은 진실한 신앙을 막는 최대 요소입니다. 물론 열심히 땀 흘려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선교와 구제에 힘써 돈을 관리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주님의 임재와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 회복(回復)의 역사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주님께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내자 성전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비로소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주님께서 오시면 어수선한 삶이 차분한 삶이 됩니다. 특히 기도하는 마음과 예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저도 가끔 예배를 드릴 때, 예배 분위기가 어수선하면 말씀을 전하기가 힘듭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예배를 위한 마음의 준비도 잘해야 합니다. 이제 최소한 예배 10분 전에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계속 훈련해보십시오. 예배 시간에 맞춰 정시에 도착하는 것보다 10분 전에 도착하는 것이 훨씬 쉽고 좋습니다.
조금 멀리서 오시는 분은 교통체증도 생각해서 30분 정도 일찍 출발하십시오. 그런 마음은 예배를 얼마나 중시하느냐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유명한 사람은 늦게 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교회에서는 일찍 오는 사람이 더 유명해지고 존경받습니다. 그처럼 예배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핸드폰도 끄고, 대화도 자제하고, 움직임도 줄이고, 여기저기 둘러보지도 않으면서 예배를 준비할 때 주님의 임재와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3. 치유(治癒)의 역사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이 성전에서 쫓겨나고 예배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때 소경과 저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문제(problem)만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해결책(solution)을 주셨습니다.
또한 문제를 해결해주실 때, 필요하면 기적적인 치유도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적적인 치유는 “모든 병은 기적적으로 치료된다.”는 진리의 기초가 아니라 “주님은 통전적인 치유를 주시는 분이다.”라는 진리의 암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해도 병의 기적적인 치료가 없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도 성령 충만으로 이미 치유는 일어난 것입니다.
미국에 토니 캠폴로(Tony Campolo)라는 목사님이 오레곤에 있을 때, 어느 날, 한 교인이 암이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캠폴로 목사님은 그의 치유를 위해 담대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에 목사님은 그분의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목사님이 저번에 제 남편의 암을 위해 기도해주셨지요?”
암이 나은 얘기인가 하고 잔뜩 기대했는데 그녀가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었어요.” 목사님은 그 여자가 따지려고 한 전화인 줄 알고 가만히 있자 그녀가 계속 말했습니다. “목사님!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때 제 남편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자녀와 손자들의 성장을 보지 못하고 58세에 죽을 생각을 하니 너무 억울하다고 가끔 하나님을 저주했어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주위 사람들도 함께 있는 것이 너무 괴로웠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해준 후에 제 남편에게 평화와 기쁨이 생겼어요. 목사님! 지난 3일 동안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우리는 노래했고, 웃었고, 성경을 읽었고, 기도했어요. 저는 목사님이 남편을 위해 기도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려고 전화했어요. 남편은 치료되지는 않았지만 치유되었어요(He was not cured, but he was healed).”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치료는 없을 수 있지만 치유는 반드시 있습니다. 물론 주님이 함께 하시면 육체적인 치료의 역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육신적인 치료가 없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임재하시고 성령 충만하게 될 때 우리 안에 감정적인 치유, 정서적인 치유, 영적인 치유가 있게 될 것이고, 때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면 온전한 치유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4. 찬송(讚頌)의 역사
본문 15-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3중으로 분노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장사꾼과 환전상을 성전에서 쫓아낸 것에 처음 분노했고, 둘째,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치유한 것을 보고 질투심으로 분노가 더 심해졌고, 셋째,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보고도 어른들은 제사장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아무도 찬양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순진하게 메시아에게 붙이는 호칭인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양하자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왜 아이들이 당신을 찬송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느냐? 그것은 신성모독인 줄 모르느냐?”고 따질 때 주님은 말씀을 인용해서 순수한 아이들의 찬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로부터 그런 찬송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과묵한 태도는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찬송하고 감사하는 일에서는 과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심지어는 고난과 문제조차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찬송할 때 기적적인 역사는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순수하고 진실하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그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고 온전한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밤에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목말라요. 물 한 잔만 갖다 주세요.” 아빠가 말했습니다. “그런 것 아빠한테 자꾸 부탁하지 말고 네가 스스로 해라!” 그러자 아이가 잠잠히 있다가 5분쯤 후에 다시 말했습니다. “아빠! 목말라요. 물 한 잔만 갖다 주세요.” 아빠가 소리를 높였습니다. “안 된다고 했지. 빨리 자라! 계속 그러면 한 대 맞아!”
그러자 조금 후에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빠! 한 대 때리러 오실 때 물 한 잔만 갖다 주시면 안 돼요?” 그 말을 듣고 아빠는 아이의 재치 있는 말에 웃으며 결국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저희 집에서도 둘째 딸 한나가 그런 재치 있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그 순수함에 넘어가서 결국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을 아주 기뻐하십니다. 그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의 소원을 온전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십시오 >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오시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무엇보다도 현대인의 가장 큰 적인 물질주의를 버리고, 선교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몇 년 전, 한 집사님이 몽골 선교를 위해 상당히 많은 헌금을 하셨습니다. 그 후 어느 날, 낯모르는 한 여자 집사님이 새벽기도에 매일 참석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몽골 선교를 위해 헌금한 바로 그 집사님이었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대화 후에 교회 밖으로 그분을 배웅하려고 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타고 온 차가 작은 경차였습니다. 그 차를 보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후에도 그분은 필요할 때마다 헌금해주셨습니다. 지난 12월에 교회에 큰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거룩한 큰손’이 되어주셨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이번에 새로 나온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5권 선물했습니다. 그냥 선물한 것인데 또 헌금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감사 메일을 보내자 이런 답장을 보내오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감동대로 헌금했는데 그것으로 우쭐해할까 봐 염려됩니다. 제가 이전에 사람 관계로 힘들었을 때 목사님의 설교로 많은 위로와 치유를 받았습니다. 올해가 시작되면서는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땅에서 저의 사명이 아직 있나요? 없으면 그만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틈틈이 옷장과 부엌과 약국 내부를 정리했습니다. 3월 들어서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절망감이 더 커졌습니다.
바로 그때 목사님의 책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읽으면서 성령의 은혜를 느끼고 용서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조용히 기도한 후에 그에게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놀라운 평안과 함께 그토록 어렵던 일이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목사님을 통해 성령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며 주님 기뻐하시는 길을 묵묵히 가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목사님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메일을 받고 답장 메일을 다시 드렸습니다. “집사님! 그렇게 힘들었는지도 모르고 집사님을 위해 많이 기도하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요. 앞으로 많이 기도할게요. 저의 책이 집사님에게 그런 힘이 되는 역사를 일으켰다고 하니까 너무 기뻐요. 이미 책을 펴낸 목적은 다 이룬 것 같아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으니까요. 집사님!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 잃지 마세요. 분명히 집사님을 위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과 섭리가 있음을 믿어요.”
그 답장 메일을 보내면서 몇 년 전에 작은 차를 보고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뻔했던 얘기를 했습니다. 그 헌신이 저만 감동시켰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그 헌신을 보고 분명히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순수한 헌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보고 계신 하나님도 감격하게 만듭니다. 헌신의 눈물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축복의 빗물로 변해 떨어질 것입니다.
가끔 저희는 집에서 가족끼리 장난기 있는 대화를 합니다. 어제는 점심시간에 장난삼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나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요. 우리 두 딸이 아무리 봐도 우리보다 외모가 나은데 그런 예쁜 두 딸을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아이들이 성품도 좋아서 남을 생각하고 베풀어주는 아이들이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
그때 둘째 딸 한나가 끼어들었습니다. “아빠! 저는 십일조가 1600원이면 꼭 2000원 해요. 잘했죠?” 첫째 딸 은혜도 말했습니다. “아빠! 저도 십일조가 2800원이면 3000원 해요. 4월 22일에 여승훈 선교사님을 위해 선교헌금을 할 때 그 동안 모아두었던 만 원짜리 지폐도 다 헌금할 거예요. 저도 잘하죠?”
제가 그 말을 듣고 아이들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세뱃돈을 비롯해서 평소에 군것질을 참고 사고 깊은 것을 사지 않고 절약해서 모은 돈을 한꺼번에 선교헌금으로 만 원짜리 이상은 다 헌금합니다. 강요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그렇게 합니다. 그런 아이들 성향을 보니까 커서도 열심히 선교헌금 한다고 하다가 티코 타고 월세를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쓰러운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교회로 올 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봐도 우리 아이들은 챙기며 사는 것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잘 챙기며 살지 못했지만 이제까지 부족함이 없이 행복하게 살게 하시고 필요한 것들을 신비하게 채워주신 하나님! 우리 두 딸이 나중에 커서도 저렇게 열심히 베풀고 선교하며 살게 하시고, 그렇게 베풀고 선교하며 살아도 헐벗지 않도록 베풀 수 있는 물질적 능력도 주소서!”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시편 37편 25절 말씀을 저에게 생각나게 해주셨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제가 의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의인의 자손은 걸식함이 없다.”는 말씀이 그때 엄청난 확신으로 제 마음에 꽂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야망도 있어야 하지만 그 야망에서 두 가지 동기만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꿈과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림으로 많이 약해져 있는 한국교회에 힘을 보태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