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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와 헌신의 축복 (골로새서 3장 20절)
< 부모님의 사랑 >
대학에 다니는 한 딸이 용돈이 부족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딸이 그 시간에 조금 더 공부를 하기를 원했지만 딸은 아빠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대형 마트에서 힘들게 일하고, 새벽 한시쯤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빠가 깨시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는데 갑자기 아빠 머리맡에 퇴직금이라고 적힌 봉투가 보였습니다.
슬쩍 그 안을 살펴보고 그녀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빠가 왜 갑자기 공장을 그만 뒀는지 그 이유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아빠가 퇴직금을 타서 자신의 등록금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처럼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 마음은 늘 앞서는데,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 마음은 항상 뒤처집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살림’을 잘하기 위해서 매일 죽어야 했습니다. 모든 ‘살림’은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죽지 않고 살리는 길은 없습니다. 성도의 제일 과제는 잘 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살림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남편이 살고 아내가 삽니다.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에 가장 근접한 사랑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보혜사 성령님처럼 항상 자녀와 마음을 함께 합니다. 특히 옛날 어머니들의 일생은 식모의 일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두 가난하던 시절,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먹여 살리려고 눈물과 땀과 피를 쏟으며 사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신기하게 어디선가 먹을 것을 구해 오셨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철모르게 밥을 다 먹고 어머니가 드시려는 누룽지까지 뺏어 먹었지만 어머니는 배고픔을 참고 아이들만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눈물로 자녀들은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어머니, 모든 부모님은 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자식을 키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갚을 차례입니다.
<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할까요? >
어떻게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를 잘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께 효도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지만 이 시간에는 3가지만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으시더라.” 예수님도 부모님께 순종하고 받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셨다면 우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유대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집에 다 계실 수 없어서 집마다 어머니를 두셨다.” 부모님은 하나님의 대리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의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부모님께 불평하지 말고 부모님께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부모님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남 탓하는 인생처럼 무책임하고 불행한 인생은 없습니다. 물론 부모님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얼마든지 훌륭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똑같은 알코올 중독자 아빠 밑에서 자란 형제 중에 한 명은 금주 운동을 하는 의사가 되고, 다른 한 명은 부모처럼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쁜 환경에서 자라서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나쁜 환경에서 자라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 탓, 환경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자녀들은 원망합니다. “부모님이 제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왜 그런 원망이 나옵니까? 받을 생각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받을 생각은 그만 하고, 이미 받은 것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부모님께 드릴 생각만 해야 합니다.
원망은 원망을 낳습니다. 남편을 원망해 보십시오. 남편도 남편대로 할 말이 있습니다. 아내를 원망해 보십시오. 아내도 아내대로 할 말이 있습니다. 친구를 원망해보십시오. 친구도 친구대로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말은 이런 말입니다. “여보! 미안해. 얘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참 미안하구나! 집사님! 제가 잘못했어요. 부모님! 죄송해요.” 원망은 원망을 불러오지만 감사는 감사를 불러옵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오직 감사만 하고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를 잘 죽여야 하지만 특별히 부모님 앞에서는 더욱 잘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부모님께 순종할 때 두 가지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1)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20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 구절에서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부모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5장 4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부모님께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1장 20-21절 말씀을 보면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면 잡아다가 장로들에게 데려가서 부모가 “내 아들은 순종치 않고 방탕하며 산다”고 외치면 “성읍 모든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잠언 30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이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얼마나 큰 죄로 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녀는 때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삭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을 때 이삭은 20세 전후의 청년이었고, 아브라함은 120세 전후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아들아! 하나님이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단다.” 그때 이삭은 “아버지! 노망 드셨어요?”라고 힘으로 아버지를 제압하지 않고 “예. 알겠습니다.”하고 순순히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누웠습니다. 그처럼 부모님 말씀에는 죽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 법도가 무너지는 가장 큰 이유는 효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 가서도 잘 충성하지 못합니다. 옛날 초대교회에서는 효와 신앙을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비판보다는 순종을 앞세웠습니다. 그처럼 때로 부모의 말과 행동에 때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도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이어서 말합니다.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이 구절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의미는 효도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효도할 때 주님의 뜻 안에서 효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다르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축복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직결됩니다.
가끔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주고 “얘야! 아빠 과자 좀 줄래!”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과자를 안 주려고 하면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지만 그때 기쁘게 과자를 내주면 더욱 많은 것을 주고 싶어집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지금 더 주기를 원하는 자를 찾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쁘게 우리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2.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가 혼란하게 되고 가정이 깨지는 가장 큰 이유는 탐심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부모님 재산을 더 갖느냐, 덜 갖느냐는 문제로 형제간에 원수처럼 지내고,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재판도 하는 경우를 봅니다.
어느 날, 한 재벌급 성도가 임종이 가까워서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중에 옆방에서 우당탕탕 싸우는 소리가 났습니다. 목사님이 사연을 묻자 임종을 앞둔 분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지금 자식들이 유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제 자식들보다 며느리가 더 문제입니다. 이러다간 살인이라도 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헛살았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우리는 탐심을 버리고 유산의 ‘유’자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산을 조금이라도 노리는 자식은 불효자식입니다. 물론 유산이 주어지면 받아도 되지만 유산을 노리는 태도는 나쁜 태도입니다. 부모님을 안 모시려면 아예 유산을 꿈꾸지도 말아야 하고, 부모님을 모시더라도 유산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변호사에게 공증해서 유산 물려줄 사람을 미리 정합니다. 자녀들에게 50%, 교육기관에 30%, 교회에 20% 식으로 유산을 배분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자식이 있는데도 한 푼도 물려주지 않고 자기와 함께 오래 살았던 개에게 전 유산을 물려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말은 자식이 개만도 못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은 딸이 출가하면서 키우던 개를 달라고 해서 주었는데 결혼 후, 딸은 거의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문을 긁어서 나가보니 옛날 키우던 개였습니다. 그 개를 보고 그분이 “니가 딸보다 낫구나!”고 하며 그 개를 데리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처럼 개도 주인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데, 자녀가 부모님의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부모님이 뼈 빠지게 번 것 가지고 서로 가지려고 부모 앞에서 싸운다면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부모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부모님께 잘해드리는 도둑 심보도 없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했습니다.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은 모르는 척 하지만 아비가 돈 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자식들은 효자가 된다.”
그처럼 돈도 있어야 효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아버지는 자식 이름으로 만든 통장을 여러 개 만들어서 자식들한테 보여주고는 효도를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다음에 자녀들이 통장을 받아보니까 통장에는 2만원씩만 들어있었고, 자녀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유서와 함께 전 재산을 교육기관에 기부하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더 이상 무엇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철저히 드릴 생각만 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받은 것만 해도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돈 때문에 부모님 마음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어떤 분이 ‘만원의 행복’이란 수필을 썼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양복에서 비상금으로 아껴둔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주며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너무 핼쑥해 보여 안쓰러운데, 내일 몰래 혼자 뷔페에 가서 소고기 실컷 먹고 와요!” 그 돈을 받고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여보! 나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다음 날, 아내는 남편에게서 받은 만원을 앞치마에서 꺼내 노인정에 가시는 시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님! 제대로 용돈 한 번 못 드려서 죄송해요. 작지만 이 돈으로 신세진 분들과 식사 한번 하세요.” 그 돈을 받고 시아버지는 어렵게 살림을 하는 며느리를 대견해하며 노인정에 가서 실컷 자랑했습니다. “여보게! 우리 며느리가 오늘 용돈 빵빵하게 줬어.” 그리고 식사는 하지 않고 장롱에 넣어두었습니다.
얼마 후 설 날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세배를 받고 얼마 전에 받은 만원을 세뱃돈으로 주었습니다. 그 돈을 받은 손녀는 기분이 좋아서 엄마를 불렀습니다. “엄마, 책가방 얼마예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왜? 우리 지연이 학교 가고 싶어?” 그때 지연이가 엄마에게 세뱃돈으로 받은 만원을 내밀었습니다. “엄마! 이 돈 맡길 테니까 내년에 학교 갈 때 예쁜 책가방 하나 사줘요!”
엄마는 그 돈을 받고 남편 생각을 했습니다. 남편이 내색은 하지 않지만 요즘 너무 힘든지 밤에 안 하던 잠꼬대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일어나 남편 양복 속주머니에 딸 지연이가 맡긴 만원을 넣고 쪽지를 썼습니다. “여보! 맛있는 것 사 드세요.” 결국 남편이 준 만 원은 모든 식구에게 사랑을 전달한 채 다시 남편에게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가정입니까? 그처럼 우리는 받기보다는 드리는 삶을 통해 우리 가정과 교회를 행복하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3.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몇 년 전, 6남매를 고등교육까지 시킨 한 할머니가 아들딸이 서로 안 모시려고 해서 자녀 집을 며칠씩 떠돌다 지쳐서 정릉골짜기에서 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아마 그 자식들 꿈에 수시로 어머니가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돌아가신 어머니가 귀신이 되어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식 스스로가 죄책감으로 그런 악몽에 시달릴 것입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편히 모시지 못하면 본인이 편히 살 수 없습니다.
가끔 보면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잘 안 모시다가 돌아가신 다음에 제사 드린다고 야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늙고 힘없는 부모는 줄 것이 없지만 죽어서 귀신이 된 부모는 복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부모님조차 이기주의의 도구로 삼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잘하려고 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잘해드려야 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더 이상 “아버님! 어머님!”하고 부를 사람이 없는 것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미국에서는 휴가철에 개나 고양이를 맡겨두는 동물호텔이 있습니다. 그런데 휴가에서 돌아와서 개나 고양이는 얼른 찾아가면서도 양로원의 계신 부모는 찾아보지 않는 자식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 자식은 결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문으로 ‘친할 친(親)’자는 ‘나무 목(木)’ 자 위에 ‘설 립(立)’ 자가 있고, 그 옆에 ‘볼 견(見)’ 자가 합성된 글자입니다. 즉 ‘나무 위에 서서 보는 것’이란 뜻으로, 장에 갔던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더 잘 보려고 동구 밖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는 애틋한 모정을 표현한 것이 ‘친할 친’자입니다.
그때 아들이 어머니를 만나 어머니를 지게 위에 업어드립니다. 그래서 ‘늙을 로(老)’ 자 밑에 ‘아들 자(子)’ 자가 합성된 자, 즉 아들이 늙으신 부모님을 업어드리는 뜻을 가진 글자가 바로 ‘효도할 효(孝)’자입니다. 그처럼 옛날에는 지게로 부모님 세상 구경을 시켜드리는 것을 최고의 효도로 생각했는데 오늘날은 자가용으로 시켜드릴 수 있으니까 얼마나 효도가 편해졌습니까? 자녀들은 자가용으로 노부모님의 외출과 여행을 많이 시켜드려야 합니다.
만약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신 경우에는 이제 사랑의 폭을 넓혀서 다른 어르신들을 잘 섬겨드려야 합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모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것이 큰 의미의 효도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늙은이(어르신)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즉 연세 드신 분들을 자기 부모에게 하듯 공경하라고 합니다.
우리 분당 샛별교회 교인들은 어르신들을 최대한 높여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효자가 장수하고 축복받는다고 말합니다. 그처럼 효자가 많은 교회도 복을 받습니다. 저는 이곳으로 이사 올 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잘 모실 수 있는 어르신들을 많이 보내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르신들을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교회가 복 받는 교회가 되려면 어르신들을 잘 모셔야 합니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 >
마지막으로 우리가 효도를 잘하려면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효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효는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부모님이 거동하시기 힘들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옛말에 3년 지병에 불효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병이 계속되면 부모님 스스로 절망에 빠져서 부정적인 되고, 가족들도 지치게 됩니다.
그런 상황은 사람이 해결하기 힘들고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개인이나 가정도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축복이 임하면 새롭게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을 믿음의 가정으로 만들고, 주일성수를 철저히 지키며 말씀이 있는 곳으로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최선의 효도입니다.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2대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환경의 변화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가정관리를 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은 대개 가정에서 당하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선물 중의 선물이고, 가장 위대한 정신위생센터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신과 의사도 대학에 몇 번 떨어져 실망한 자녀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하지만 부모의 위로 한 마디는 자녀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남편이 사업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집에 들어왔을 때, 그때 아내가 해 주는 위로의 한 마디에는 엄청난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처럼 가정은 건강과 행복과 기쁨의 저수지이고, 가장 소중한 것이지만 반면에 가정에서 여러 가지 오해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가정의 위기는 자신의 위기입니다. 가정에서 부패한 인격이 부패한 사회를 만들고, 가정에서 파괴된 인격이 공동체를 파괴하고 와해시킵니다. 소년 범죄자의 87% 이상이 파괴된 가정에서 나옵니다. 반면에 가정의 축복은 개인의 축복과 직결됩니다.
요새 교회 경영이란 말이 나돕니다. 옛날에는 목회자에게 은혜의 말씀만 있어도 그 말씀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큰 교회를 찾고, 자체 건물과 주차장이 있는 교회를 찾습니다. 그처럼 목회자의 말씀만으로 교회를 부흥시키기 어렵게 되니까 교회 관리, 교회 경영, 교회성장이란 새로운 학문들과 각종 프로그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서 경영과 관리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관계의 회복입니다. 바로 거기에 치유도 있고 축복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가정과 교회에서 우리 식구와 교우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해주는 일을 잘해야 하고, 특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던 부모님께 최선을 다해서 효도해야 합니다.
어느 겨울날, 한 여인이 아파트 길에 나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한 이웃이 사연을 묻자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이웃이 “왜 밖에서 기다립니까?”고 묻자 그 여인이 말했습니다. “옛날에 어머니가 생각이 나서요. 그때 어머니는 제가 늦게 돌아올 때면 늘 문밖에 서서 초조히 기다리시다가 제 손목을 잡아주셨어요.” 50이 넘어서야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이 철들기란 그처럼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누구보다 철든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만 잘 지고 받을 생각보다 줄 생각을 많이 하면 됩니다. 우리가 진정 복된 인생이 되려면 하나님과 부모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주님을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기쁘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다 함께 복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어린이 예배 때 아이들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잘 들었는지 요새 가정예배에서 아이들을 한 명씩 기도할 때 한나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조개 펜던트 갖게 해 주세요.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 한참 기도한 후에 끝날 때쯤에는 이렇게 마무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시지 않아도 항상 감사할게요.” 부모가 들어도 예쁜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쁘게 들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쁜 신앙들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제목을 들어주시지 않아도 죽도록 감사하겠다고 각오하고, 더 나아가 드리고 베풀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광고를 한 대로 이준 목사님이 이제 목사님 자녀들 두 명 중에 신장의 거부반응이 적게 나오는 자녀 한 명이 신장을 기증하기로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 수술비만 마련하면 됩니다. 그 일에 여러분들의 작은 힘과 정성을 보태 드리기를 바랍니다. 이제 3주 후인 6월 11일에 감독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설교하러 오십니다. 그때까지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후원금을 감독 목사님 편으로 이준 목사님에게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우리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이런 일에는 누구보다 적극 나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기본 철학을 ‘받는 데’에 두지 말고 ‘주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님께도 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해드릴까 하는 생각으로 우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더 주십니다. 그리고 주시지 않아도 이미 영혼에 기쁨과 보람과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평안과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내가 효도하면 자녀들도 내게 효도를 합니다. 반면에 불효자의 자녀는 반드시 불효자가 됩니다. 또한 불효하는 가정에는 절대 진정한 축복이 없습니다. 우리는 효도하는 만큼 축복받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또한 모든 어르신을 잘 모심으로 더욱 복 받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 부모님의 사랑 >
대학에 다니는 한 딸이 용돈이 부족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딸이 그 시간에 조금 더 공부를 하기를 원했지만 딸은 아빠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대형 마트에서 힘들게 일하고, 새벽 한시쯤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빠가 깨시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는데 갑자기 아빠 머리맡에 퇴직금이라고 적힌 봉투가 보였습니다.
슬쩍 그 안을 살펴보고 그녀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빠가 왜 갑자기 공장을 그만 뒀는지 그 이유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아빠가 퇴직금을 타서 자신의 등록금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처럼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 마음은 늘 앞서는데,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 마음은 항상 뒤처집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살림’을 잘하기 위해서 매일 죽어야 했습니다. 모든 ‘살림’은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죽지 않고 살리는 길은 없습니다. 성도의 제일 과제는 잘 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살림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남편이 살고 아내가 삽니다.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에 가장 근접한 사랑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보혜사 성령님처럼 항상 자녀와 마음을 함께 합니다. 특히 옛날 어머니들의 일생은 식모의 일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두 가난하던 시절,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먹여 살리려고 눈물과 땀과 피를 쏟으며 사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신기하게 어디선가 먹을 것을 구해 오셨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철모르게 밥을 다 먹고 어머니가 드시려는 누룽지까지 뺏어 먹었지만 어머니는 배고픔을 참고 아이들만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눈물로 자녀들은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어머니, 모든 부모님은 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자식을 키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갚을 차례입니다.
<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할까요? >
어떻게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를 잘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께 효도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지만 이 시간에는 3가지만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으시더라.” 예수님도 부모님께 순종하고 받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셨다면 우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유대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집에 다 계실 수 없어서 집마다 어머니를 두셨다.” 부모님은 하나님의 대리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의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부모님께 불평하지 말고 부모님께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부모님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남 탓하는 인생처럼 무책임하고 불행한 인생은 없습니다. 물론 부모님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얼마든지 훌륭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똑같은 알코올 중독자 아빠 밑에서 자란 형제 중에 한 명은 금주 운동을 하는 의사가 되고, 다른 한 명은 부모처럼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쁜 환경에서 자라서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나쁜 환경에서 자라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 탓, 환경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자녀들은 원망합니다. “부모님이 제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왜 그런 원망이 나옵니까? 받을 생각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받을 생각은 그만 하고, 이미 받은 것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부모님께 드릴 생각만 해야 합니다.
원망은 원망을 낳습니다. 남편을 원망해 보십시오. 남편도 남편대로 할 말이 있습니다. 아내를 원망해 보십시오. 아내도 아내대로 할 말이 있습니다. 친구를 원망해보십시오. 친구도 친구대로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말은 이런 말입니다. “여보! 미안해. 얘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참 미안하구나! 집사님! 제가 잘못했어요. 부모님! 죄송해요.” 원망은 원망을 불러오지만 감사는 감사를 불러옵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오직 감사만 하고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를 잘 죽여야 하지만 특별히 부모님 앞에서는 더욱 잘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부모님께 순종할 때 두 가지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1)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20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 구절에서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부모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5장 4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부모님께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1장 20-21절 말씀을 보면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면 잡아다가 장로들에게 데려가서 부모가 “내 아들은 순종치 않고 방탕하며 산다”고 외치면 “성읍 모든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잠언 30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이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얼마나 큰 죄로 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녀는 때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삭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을 때 이삭은 20세 전후의 청년이었고, 아브라함은 120세 전후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아들아! 하나님이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단다.” 그때 이삭은 “아버지! 노망 드셨어요?”라고 힘으로 아버지를 제압하지 않고 “예. 알겠습니다.”하고 순순히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누웠습니다. 그처럼 부모님 말씀에는 죽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 법도가 무너지는 가장 큰 이유는 효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 가서도 잘 충성하지 못합니다. 옛날 초대교회에서는 효와 신앙을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비판보다는 순종을 앞세웠습니다. 그처럼 때로 부모의 말과 행동에 때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도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이어서 말합니다.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이 구절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의미는 효도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효도할 때 주님의 뜻 안에서 효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다르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축복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직결됩니다.
가끔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주고 “얘야! 아빠 과자 좀 줄래!”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과자를 안 주려고 하면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지만 그때 기쁘게 과자를 내주면 더욱 많은 것을 주고 싶어집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지금 더 주기를 원하는 자를 찾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쁘게 우리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2.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가 혼란하게 되고 가정이 깨지는 가장 큰 이유는 탐심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부모님 재산을 더 갖느냐, 덜 갖느냐는 문제로 형제간에 원수처럼 지내고,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재판도 하는 경우를 봅니다.
어느 날, 한 재벌급 성도가 임종이 가까워서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중에 옆방에서 우당탕탕 싸우는 소리가 났습니다. 목사님이 사연을 묻자 임종을 앞둔 분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지금 자식들이 유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제 자식들보다 며느리가 더 문제입니다. 이러다간 살인이라도 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헛살았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우리는 탐심을 버리고 유산의 ‘유’자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산을 조금이라도 노리는 자식은 불효자식입니다. 물론 유산이 주어지면 받아도 되지만 유산을 노리는 태도는 나쁜 태도입니다. 부모님을 안 모시려면 아예 유산을 꿈꾸지도 말아야 하고, 부모님을 모시더라도 유산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변호사에게 공증해서 유산 물려줄 사람을 미리 정합니다. 자녀들에게 50%, 교육기관에 30%, 교회에 20% 식으로 유산을 배분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자식이 있는데도 한 푼도 물려주지 않고 자기와 함께 오래 살았던 개에게 전 유산을 물려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말은 자식이 개만도 못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은 딸이 출가하면서 키우던 개를 달라고 해서 주었는데 결혼 후, 딸은 거의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문을 긁어서 나가보니 옛날 키우던 개였습니다. 그 개를 보고 그분이 “니가 딸보다 낫구나!”고 하며 그 개를 데리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처럼 개도 주인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데, 자녀가 부모님의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부모님이 뼈 빠지게 번 것 가지고 서로 가지려고 부모 앞에서 싸운다면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부모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부모님께 잘해드리는 도둑 심보도 없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했습니다.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은 모르는 척 하지만 아비가 돈 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자식들은 효자가 된다.”
그처럼 돈도 있어야 효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아버지는 자식 이름으로 만든 통장을 여러 개 만들어서 자식들한테 보여주고는 효도를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다음에 자녀들이 통장을 받아보니까 통장에는 2만원씩만 들어있었고, 자녀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유서와 함께 전 재산을 교육기관에 기부하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더 이상 무엇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철저히 드릴 생각만 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받은 것만 해도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돈 때문에 부모님 마음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어떤 분이 ‘만원의 행복’이란 수필을 썼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양복에서 비상금으로 아껴둔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주며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너무 핼쑥해 보여 안쓰러운데, 내일 몰래 혼자 뷔페에 가서 소고기 실컷 먹고 와요!” 그 돈을 받고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여보! 나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다음 날, 아내는 남편에게서 받은 만원을 앞치마에서 꺼내 노인정에 가시는 시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님! 제대로 용돈 한 번 못 드려서 죄송해요. 작지만 이 돈으로 신세진 분들과 식사 한번 하세요.” 그 돈을 받고 시아버지는 어렵게 살림을 하는 며느리를 대견해하며 노인정에 가서 실컷 자랑했습니다. “여보게! 우리 며느리가 오늘 용돈 빵빵하게 줬어.” 그리고 식사는 하지 않고 장롱에 넣어두었습니다.
얼마 후 설 날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세배를 받고 얼마 전에 받은 만원을 세뱃돈으로 주었습니다. 그 돈을 받은 손녀는 기분이 좋아서 엄마를 불렀습니다. “엄마, 책가방 얼마예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왜? 우리 지연이 학교 가고 싶어?” 그때 지연이가 엄마에게 세뱃돈으로 받은 만원을 내밀었습니다. “엄마! 이 돈 맡길 테니까 내년에 학교 갈 때 예쁜 책가방 하나 사줘요!”
엄마는 그 돈을 받고 남편 생각을 했습니다. 남편이 내색은 하지 않지만 요즘 너무 힘든지 밤에 안 하던 잠꼬대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일어나 남편 양복 속주머니에 딸 지연이가 맡긴 만원을 넣고 쪽지를 썼습니다. “여보! 맛있는 것 사 드세요.” 결국 남편이 준 만 원은 모든 식구에게 사랑을 전달한 채 다시 남편에게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가정입니까? 그처럼 우리는 받기보다는 드리는 삶을 통해 우리 가정과 교회를 행복하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3.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몇 년 전, 6남매를 고등교육까지 시킨 한 할머니가 아들딸이 서로 안 모시려고 해서 자녀 집을 며칠씩 떠돌다 지쳐서 정릉골짜기에서 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아마 그 자식들 꿈에 수시로 어머니가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돌아가신 어머니가 귀신이 되어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식 스스로가 죄책감으로 그런 악몽에 시달릴 것입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편히 모시지 못하면 본인이 편히 살 수 없습니다.
가끔 보면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잘 안 모시다가 돌아가신 다음에 제사 드린다고 야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늙고 힘없는 부모는 줄 것이 없지만 죽어서 귀신이 된 부모는 복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부모님조차 이기주의의 도구로 삼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잘하려고 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잘해드려야 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더 이상 “아버님! 어머님!”하고 부를 사람이 없는 것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미국에서는 휴가철에 개나 고양이를 맡겨두는 동물호텔이 있습니다. 그런데 휴가에서 돌아와서 개나 고양이는 얼른 찾아가면서도 양로원의 계신 부모는 찾아보지 않는 자식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 자식은 결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문으로 ‘친할 친(親)’자는 ‘나무 목(木)’ 자 위에 ‘설 립(立)’ 자가 있고, 그 옆에 ‘볼 견(見)’ 자가 합성된 글자입니다. 즉 ‘나무 위에 서서 보는 것’이란 뜻으로, 장에 갔던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더 잘 보려고 동구 밖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는 애틋한 모정을 표현한 것이 ‘친할 친’자입니다.
그때 아들이 어머니를 만나 어머니를 지게 위에 업어드립니다. 그래서 ‘늙을 로(老)’ 자 밑에 ‘아들 자(子)’ 자가 합성된 자, 즉 아들이 늙으신 부모님을 업어드리는 뜻을 가진 글자가 바로 ‘효도할 효(孝)’자입니다. 그처럼 옛날에는 지게로 부모님 세상 구경을 시켜드리는 것을 최고의 효도로 생각했는데 오늘날은 자가용으로 시켜드릴 수 있으니까 얼마나 효도가 편해졌습니까? 자녀들은 자가용으로 노부모님의 외출과 여행을 많이 시켜드려야 합니다.
만약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신 경우에는 이제 사랑의 폭을 넓혀서 다른 어르신들을 잘 섬겨드려야 합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모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것이 큰 의미의 효도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늙은이(어르신)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즉 연세 드신 분들을 자기 부모에게 하듯 공경하라고 합니다.
우리 분당 샛별교회 교인들은 어르신들을 최대한 높여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효자가 장수하고 축복받는다고 말합니다. 그처럼 효자가 많은 교회도 복을 받습니다. 저는 이곳으로 이사 올 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잘 모실 수 있는 어르신들을 많이 보내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르신들을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교회가 복 받는 교회가 되려면 어르신들을 잘 모셔야 합니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 >
마지막으로 우리가 효도를 잘하려면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효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효는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부모님이 거동하시기 힘들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옛말에 3년 지병에 불효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병이 계속되면 부모님 스스로 절망에 빠져서 부정적인 되고, 가족들도 지치게 됩니다.
그런 상황은 사람이 해결하기 힘들고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개인이나 가정도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축복이 임하면 새롭게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을 믿음의 가정으로 만들고, 주일성수를 철저히 지키며 말씀이 있는 곳으로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최선의 효도입니다.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2대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환경의 변화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가정관리를 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은 대개 가정에서 당하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선물 중의 선물이고, 가장 위대한 정신위생센터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신과 의사도 대학에 몇 번 떨어져 실망한 자녀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하지만 부모의 위로 한 마디는 자녀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남편이 사업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집에 들어왔을 때, 그때 아내가 해 주는 위로의 한 마디에는 엄청난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처럼 가정은 건강과 행복과 기쁨의 저수지이고, 가장 소중한 것이지만 반면에 가정에서 여러 가지 오해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가정의 위기는 자신의 위기입니다. 가정에서 부패한 인격이 부패한 사회를 만들고, 가정에서 파괴된 인격이 공동체를 파괴하고 와해시킵니다. 소년 범죄자의 87% 이상이 파괴된 가정에서 나옵니다. 반면에 가정의 축복은 개인의 축복과 직결됩니다.
요새 교회 경영이란 말이 나돕니다. 옛날에는 목회자에게 은혜의 말씀만 있어도 그 말씀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큰 교회를 찾고, 자체 건물과 주차장이 있는 교회를 찾습니다. 그처럼 목회자의 말씀만으로 교회를 부흥시키기 어렵게 되니까 교회 관리, 교회 경영, 교회성장이란 새로운 학문들과 각종 프로그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서 경영과 관리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관계의 회복입니다. 바로 거기에 치유도 있고 축복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가정과 교회에서 우리 식구와 교우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해주는 일을 잘해야 하고, 특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던 부모님께 최선을 다해서 효도해야 합니다.
어느 겨울날, 한 여인이 아파트 길에 나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한 이웃이 사연을 묻자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이웃이 “왜 밖에서 기다립니까?”고 묻자 그 여인이 말했습니다. “옛날에 어머니가 생각이 나서요. 그때 어머니는 제가 늦게 돌아올 때면 늘 문밖에 서서 초조히 기다리시다가 제 손목을 잡아주셨어요.” 50이 넘어서야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이 철들기란 그처럼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누구보다 철든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만 잘 지고 받을 생각보다 줄 생각을 많이 하면 됩니다. 우리가 진정 복된 인생이 되려면 하나님과 부모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주님을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기쁘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다 함께 복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어린이 예배 때 아이들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잘 들었는지 요새 가정예배에서 아이들을 한 명씩 기도할 때 한나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조개 펜던트 갖게 해 주세요.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 한참 기도한 후에 끝날 때쯤에는 이렇게 마무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시지 않아도 항상 감사할게요.” 부모가 들어도 예쁜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쁘게 들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쁜 신앙들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제목을 들어주시지 않아도 죽도록 감사하겠다고 각오하고, 더 나아가 드리고 베풀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광고를 한 대로 이준 목사님이 이제 목사님 자녀들 두 명 중에 신장의 거부반응이 적게 나오는 자녀 한 명이 신장을 기증하기로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 수술비만 마련하면 됩니다. 그 일에 여러분들의 작은 힘과 정성을 보태 드리기를 바랍니다. 이제 3주 후인 6월 11일에 감독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설교하러 오십니다. 그때까지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후원금을 감독 목사님 편으로 이준 목사님에게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우리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이런 일에는 누구보다 적극 나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기본 철학을 ‘받는 데’에 두지 말고 ‘주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님께도 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해드릴까 하는 생각으로 우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더 주십니다. 그리고 주시지 않아도 이미 영혼에 기쁨과 보람과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평안과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내가 효도하면 자녀들도 내게 효도를 합니다. 반면에 불효자의 자녀는 반드시 불효자가 됩니다. 또한 불효하는 가정에는 절대 진정한 축복이 없습니다. 우리는 효도하는 만큼 축복받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또한 모든 어르신을 잘 모심으로 더욱 복 받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