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수양관 지킴이(?)인 산성이와 수양이가 집을 나간지 보름이 넘었는데 돌아오지 않아 내 맘이 편치 않았다.

지난 여름 교회 행사를 위해 수양관엘 갔더니 두 녀석 모두 목줄에 매여 있기에 수양이를 풀어 자유롭게 해 주었는데 며칠 후 산성이의 목줄이 끊어지며 두 녀석 모두 자유의 몸이 되어 수양관을 뛰어 다니기에 노는 그 모습이 좋아서 그냥 놔 두었었다.

나는 원래 무엇에 묶여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전에 13년간 집에서 기르던 영철(?)이도 목걸이 조차 채우지 않고 키웠었다.

자유롭게 살길 원하는 내 마음속 깊은 바램 때문에 수양관에 기르던 개들도 닭들도 모두 자유롭게 뛰어 다니며 살기 바랬으나 야성있는 개들이 닭을 물어 죽이는 바람에 닭장을 지어 가둬 기르지만 사실 나는 모두 풀어 놓아 기르고 싶다.

지난 추석 명절에 외롭게(?) 지내실 것 같은 세 분의 권사님도 뵐 겸 해서 아내와 함께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평창 수양관엘 밤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밤 12시가 넘어 도착했는데도 우리 부부를 기다리는 권사님들과 또 명절을 수양관에서 보내기 위해 먼저 출발한 성도들이 자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내 차소리를 알고 오랜만에 와도 나를 기억하는 수양이란 녀석이 짖어대며 반갑게 맞이 할텐데 이 녀석들이 귀가하지 않아 사람 소리만 두런두런 들릴 뿐이지 밤 하늘을 가르는 우렁찬 짖음이 없어 적막하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 차를 몰고 속사마을을 한 바퀴 돌며 몇 년 전에도 한달 만에 찾았듯이 혹시나~하는 맘으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올까 귀 기울였으나 허사였다.

동네 막국수 집 사장에게 사정 얘기를 하곤 마을에 개 찾는 방송을 부탁하였으나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다. 이번에 정말 잃어 버린 것 같다.

나는 짐승이나 사람이나 한번 정을 붙이면 끝-까지 함께 살고 싶어 한다. 그것도 자유롭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려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높이 세우든지 아니면 목줄을 매어야 하는데 이건 또 자유를 억압하는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고, 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오늘따라 사 65:25의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하신대로 천국이 더욱 그리워 진다.

오! 주여

천국에서만이 진정한 자유가 있겠군요.

(주후 이천십일년 구월 셋쨋 주)